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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천 해인사의 문화재 - 경상남도 지정 문화재)
1.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목조비로자나삼존불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8호
지 정 일 1972.02.12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신라 애장왕 때 창건된 경남 합천 해인사의 대적광전에 있는 불상이다. 대적광전은 팔만대장경을 지니고 있는 법보사찰 해인사의 중심법당이다. 불상은 원래 금당사에 있었던 것이며 고종 1년(1897)에 현재 위치로 옮겨서 모시고 있다.
본존불은 머리에 작은 소라 모양의 머리칼을 붙여 놓았으며 이마 위에는 반달 모양이 표현되어 있다. 옷은 양 어깨에 걸쳐 입고 있으며, 넓게 파인 가슴에는 옷자락을 집어넣고 있고 양 다리에는 물결 모양의 옷주름이 표현되어 있다.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다.
본존의 왼쪽에는 지혜를 상징하는 문수보살이, 오른쪽에는 실천을 통한 자비를 상징하는 보현보살이 위치하고 있다.
자세가 장중하고 온화한 가운데서도 위엄이 갖추어진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 보인다.
2.합천 해인사 삼층석탑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4호
지 정 일 1985.11.14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통일신라시대
해인사의 대적광전 아래 서 있는 석탑으로, 넓은 뜰 한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어 일명 ‘정중탑’이라고도 불린다.
탑은 3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리고 머리장식을 갖춘 모습이다. 원래 기단은 2층이었으나 1926년 수리시에 기단을 넓히고 한 층을 더 얹음으로써 통일신라 탑의 전형인 2층 기단의 모습을 깨뜨렸다. 위층 기단의 모서리와 가운데, 탑신부의 각 층 몸돌 모서리에는 기둥 모양을 새겨 놓았다. 지붕돌은 밑면에 5단씩의 받침을 두었고, 네 귀퉁이가 약간 위로 들려 있다. 또한 각 지붕돌에는 네 귀퉁이마다 바람에 흔들리는 작은 종이 매달려 있는데 이것은 후대에 와서 설치한 것이다. 꼭대기에는 노반(머리장식받침), 보륜(수레바퀴모양 장식), 보주(구슬모양 장식) 등이 차례로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1926년 6월 탑의 수리할 때 위층 기단에서 아홉 개의 작은 불상이 발견되었는데 이 불상들은 수리후 다시 석탑 안에 넣어두었다. 탑은 원래 2층 기단이었다는 점과 5단의 지붕돌받침 등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형식을 충실히 따르고 있으나, 기단의 가운데기둥 조각을 하나만 두는 등 각 조각수법으로 보아 통일신라 후기의 것으로 추측된다.
3.합천 해인사 석등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5호
지 정 일 1985.11.14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통일신라시대
해인사 대적광전 아래쪽의 3층 석탑 앞에 자리하고 있는 석등으로, 불교의식을 행할 때 불을 밝혀두는 기구이다.
등불을 밝혀두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아래에 3단의 받침을 두었고, 위로는 지붕돌과 머리장식을 얹었다. 높직한 4각 바닥돌은 한 면에 2개씩의 안상을 새겼다. 그 위의 아래받침돌은 6㎝가량 층을 둔 다음 8잎의 연꽃무늬를 두었다. 가운데기둥은 후대에 와서 새로 만든 것으로 옛 모습을 찾을 수 없음이 안타깝다. 윗받침돌은 아래와 대칭되는 모습의 연꽃무늬를 새겼다. 8각 화사석은 4면에 4천왕상을 도드라지게 새기고, 나머지 4면에 창을 뚫었다. 지붕돌도 역시 8각으로, 경사면이 움푹하여 처마도 곡선처리 되었다. 꼭대기에는 몇개의 보주(작은 공모양 장식)가 올려져 머리장식을 하고 있다.
바닥돌을 제외한 각 부분이 8각을 이루고 있는 전형적인 양식으로, 통일신라시대의 작품이다.
4.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56호
지 정 일 1985.11.14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 있는 해인사는 통일신라 애장왕 3년(802)에 지어졌다. 중심 법당인 대적광전은 2층 건물로 비로전이라 불리다가, 조선 성종 19년(1488)에 다시 지으면서 대적광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그 뒤 여러 차례의 화재가 있어 옛 모습을 찾아 볼 수 없고 지금의 건물은 순조 17년(1817)에 다시 지은 것을 1971년 대폭 수리한 것이다.
앞면 5칸·옆면 4칸 규모로 지붕 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집이다. 내부에는 중앙의 비로자나불을 중심으로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모시고 있다.
5.합천 해인사 경학원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29호
지 정 일 1997.01.30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해인사는 우리나라 3대 사찰 중 하나로 통일신라 애장왕(재위 800∼809) 때 순응과 이정이 세웠다고 전하며 팔만대장경판을 보관하고 있다.
해인사 경학원은 원래 경홍전이라고도 불렀는데 왕과 태자의 만수무강을 비는 건물이다. 고종 29년(1892) 민형식의 뜻에 따라 범운화상이 지었고 경홍전이라 불렀다. 그 뒤 1946년 주지스님인 환경이 이름을 경학원으로 바꾸고 해행당에 모시고 있던 역대 고승들의 영정을 이곳에 모셨다.
지금은 해인승가대학의 도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6.합천 해인사 홍제암 삼화상 진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59호
지 정 일 2000.08.31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54 (치인리 21)
시 대 조선시대
홍제암 표충사에 모셔져 있는 청허당 서산대사를 비롯한 세 분의 선사 영정이다. 세 분의 선사는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나라를 구한 승병장으로서 큰 공을 세웠다. 홍제암은 해인사 일주문에서 서쪽으로 약 200m 남짓 떨어진 곳에 있는 암자인데, 특히 사명대사가 입적한 곳으로 유명하다.
사명대사가 입적한 이곳에 그의 스승인 서산대사의 영정을 중심으로 왼쪽에 기허당대선사영정이 있고, 오른쪽에 사명당대선사의 영정이 배치되어 있는데 모두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서산대사와 사명당의 영정은 녹색 장삼에 홍색가사를 입고 있는데, 안정감있는 자세와 당당한 풍채 및 위엄있는 얼굴에서 승병장으로서 면모를 느낄 수 있다. 기허당의 영정은 짙은 갈색 배경에 붉은 색의 등받이에 녹색의 장삼만을 입고 있는데 상체를 앞으로 내밀고 오른쪽 다리는 세우고 있는 특이한 모습이다.
임진왜란 때 많은 활약을 한 삼화상의 영정은 전체적으로 18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도식적이고 장식적인 면을 배제하고 인물 각각의 개성을 잘 나타내 주고 있으며, 뛰어난 색감으로 화면의 품격을 높여 주고 있다.
7.합천 해인사 대적광전 중건 상량문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99호
지 정 일 2003.09.18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 1808 (치인리 산21-1)
시 대 조선시대
추사 김정희(1786∼1856)가 조선 순조 18년(1818)에 쓴 해인사 대적광전 상량문으로 『완당집』에 실려 있다. 당시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1766∼1840)은 경상도 관찰사로서 해인사 중건에 관여하였다. 이때 김정희가 해인사 중창을 위한 권선문과 대적광전 상량문을 지었다고 한다.
이 상량문에는 『법화경』 화성유품의 8방16불의 명호와 『아미타경』의 8방 불의 명호를 육위사(상량문 끝에 붙이는 노래)로 적고 있는데. 이는 화재를 진압하는 하나의 비방이었다고 한다.
이 상량문은 1971년 대적광전 보수 때 발견되었으며, 그 원본은 꺼내어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보관하고 이를 그대로 쓴 모본과 보수기를 그 자리에 넣었다. 감색 비단에 금니로 쓰여진 해서체의 글씨로 추사 초년의 대표작이다. 비단의 크기는 세로 95㎝, 가로 483㎝이다. 글자 크기는 세로 4.1㎝, 가로 3.5㎝로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고 중간 중간 금니자가 탈락된 부분이 있다. 전체의 글은 총 67줄로 한 줄에 20자이다.
8.합천 해인사 동제 소종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00호
지 정 일 2003.09.18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 1808 (치인리 산21-1)
시 대 고려시대
청동의 재료로 주조한 고려시대 작품으로 총 높이는 30.2㎝, 구경은 21.8㎝이다.
용뉴와 입상화문대, 상대, 유곽, 당좌, 하대를 갖추고 있다. 용뉴의 용은 종속으로 들어가는 독특한 모습이며 음통은 죽절형으로 끝부분은 화문이 표현되어 있다. 상대에는 연화문이 있고 상대 아래에 4개의 유곽이 있는데 유곽대는 운문이며 그 안에 9개의 유두가 있다. 당좌는 유곽 사이에 모두 4개가 표현되어 있다. 종신의 일부가 깨져나갔고 그 옆으로 균열이 있다.
하대의 당좌 사이에는 점각으로 ‘해인사 상소이암’이라는 명문이 있다. 현재 해인사 성보박물관에 소장 전시 중에 있다.
9.합천 해인사 희랑대 목조지장보살좌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5호
지 정 일 2009.08.0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53 (치인리 4)
시 대 조선시대
불상 좌대는 15개의 못으로 돌아가며 고정해 당시 좌대의 고정기법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좌대 밑면에는 주서로 제작연대 및 원래의 봉안사찰, 시주자, 제작자 등을 기록해 두었는데 시주자나 화원의 이름 중 일부가 박락되어 있다.
높이 30cm의 소형 목조상이며, 방형의 얼굴에 민머리를 한 지장보살상이다. 신체에 비해 머리가 큰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을 따르고 있으며,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비례를 보이지만 어깨가 다소 빈약하고 무릎이 높은 편이며, 상의 규모에 비해 두 손이 크게 조성되었다. 얼굴은 이마가 넓은 방형이며, 콧대로부터 얼굴의 옆선까지 길게 그은 눈, 삼각형의 오똑한 콧날, 앞으로 돌출된 입이 특징이며, 미소가 없는 인상은 다소 침울해 보인다. 수인은 아미타인으로 오른손은 가슴 앞으로 들어 엄지와 중지를 맞대었으며, 왼손은 무릎에 대어 같은 손가락을 결하였다. 오른쪽 어깨에는 편삼을 걸치고 그 위에 양어깨 특히 오른쪽 어깨를 살짝 걸쳐 내리는 변형통식의 대의를 입었으며, 편삼 옷자락은 배 밑에서 대의 밖으로 내어 전체적으로 ‘W’자처럼 보이는 조선후기 불상의 일반적인 특징을 따르고 있다.
뒷면은 왼쪽 어깨로 흘러내린 대의 자락을 단순하게 처리하였으며, 편평하고 밋밋한 가슴 밑으로 수평의 승각기와 발목아래의 군의자락은 대칭을 이루며 양측으로 정리되었다. 좌대 아래에 적힌 명문을 통해 1677년(강희16년)에 불영산 쌍계사의 법당에 있는 삼존불상을 중수하면서 더불어 지장보살상 일구를 새로 조성하여 인동의 가섭암에 이안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불상을 조성한 화원은 글씨의 일부가 지워져 정확하지 않으나 ‘自珪’라는 인물인 것으로 추정된다. 자규는 1655년부터 1677년까지의 활동이 확인되었으며, 경남과 경북을 중심으로 활동한 화승으로 알려져 있다. 민머리의 지장보살상은 신체의 비례, 방형의 얼굴, 변형통견식의 착의법등 17세기에 유행했던 보편적인 특징을 보이고 있다. 전체적으로 단순하면서도 정리된 옷주름이 특징적이며 옆으로 유난히 긴 눈과 앞으로 살짝 튀어 나온 입은 독특하다.
조성화원으로 추정되는 자규는 경상남·북도 지방에서 활동한 인물로 보조화승의 활동과 중수화원으로 전할 뿐 수화원으로 불상을 조성한 사례가 밝혀진 바 없었기에, 해인사 희랑대 불상이 그의 작품이라고 한다면 그의 작풍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로써 중요한 불상이다.
10.합천 해인사 삼화상 진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6호
지 정 일 2009.08.0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 1808 (치인리 산21-1)
시 대 조선시대
해인사 삼화상 진영의 전체적인 구도는 가로로 긴 화면에 중앙에 좌안칠분면의 조사와 그 좌우에 각각 좌안칠분면과 우안칠분면으로 묘사된 세 분의 조사를 한 화면에 그려놓고 있다. 중앙의 조사상은 왼쪽 무릎을 세운 후 그 위에 왼손을 얹혀두고 오른손은 측면으로 내려 갈고리 모양의 지물을 쥐고 앉아 있다.
이 조사상은 좌우의 조사상과는 달리 약간 더 붉은 안면색에 흰 수염을 지니고 있는데 특히 가슴 부위에 구멍이 뚫린 모습을 표현하고 있어 해인사 수장되어 있는 보물 999호인 목조희랑조사상을 모델로 하여 그려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조각상에서의 홀쭉하게 긴 얼굴과 작은 눈매가 이 진영에서도 나름대로 표현되어져 있기도 하다. 그리고 화면 좌우측에 석장을 쥐고 앉아 있는 조사상들은 눈매 및 지물과 의습처리에서 미세한 차이를 보일 뿐 동일한 초를 대칭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즉, 향우측 조사상은 향좌측 조사상보다 약간 처진 눈매에 얼굴 주름이 더 많고 오른손에 염주를 쥐고 있어 좌측에 순응조사를, 우측에 이정조사를 그린 것으로 추정되나 명확하지는 않다.
각 조사상의 사이와 화면 아래쪽 좌우에는 공양물을 들고 있는 천동과 천녀 네 명이 묘사되어 있는데, 이들 천동과 천녀 역시 대칭적으로 표현되어 화면에 변화감을 주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점은 배경으로 처리된 암반이나 산언덕 및 폭포와 소나무의 표현에서도 드러나고 있어 전체적으로 화격을 떨어뜨리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얼굴에는 음영을 약하게 표현하고 있으며 육신의 윤곽선은 갈색으로, 의문선 등은 담묵선으로 처리하고 있는데 이들 필선들은 곧고 바른 철선을 사용하고 있다. 적색과 녹색을 위주로 채색되어 있는 이 삼화상진영에서 화면 가운데에 묘사된 희랑조사는 연보라색의 장삼에 적색 가사의 전답 끝부분인 쇠끝에 백색바탕에 화문을 그려놓은 것이 이채롭다. 나머지 두 조사상은 녹색 장삼에 적색 가사는 끝단을 흑색으로 처리하고 옷의 안감을 삼청색으로 칠한 후 양청으로 바림을 하고 있다.
암반과 산언덕 등은 옅은 바탕색으로 칠해져 화면이 밝으며 소나무는 담채의 줄기 표현과는 달리 녹색 바탕에 백색선으로 묘사된 솔잎 표현이 너무 도식적으로 처리되어 있어 이 시기에 제작된 탱화들과 양식적인 맥을 같이 하고 있다. 이처럼 세 분의 조사를 한 화면에 배치한 것은 나한도에서 간혹 간취되는 형식이며, 각 조사상의 표현에서는 진영도 형식을 따르고 있고, 천동과 천녀 및 소나무와 계곡 등의 심산유곡의 묘사에서는 산신탱의 형식 또한 보여주고 있다.
향우측 조사상의 아래면 가장자리와 연결된 곳에 마련된 적색바탕 화기란에는 광서 18년(1892) 해인사에서 조성하여 해행당에 봉안하였고, 금어로는 우송상수이며 출초는 두명비구가 하였다는 화기를 묵서로 적어두고 있다. 채색이나 구도적인 면에서 19세기 말의 전형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특히 해인사 창건과 중흥에 관련된 3인물을 한 화면속에 담은 금어 상수의 독특한 개성이 잘 드러나 있는 조사도이다.
11.합천 해인사 국일암 벽암선사 진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87호
지 정 일 2009.08.0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치인리 46)
시 대 조선시대
국일암 소장의 벽암존자진영은 전형적인 18세기 후반 초상화의 양식적 특징을 잘 보여주고는 있으며 화면 중앙에 오른쪽을 향하여 의자에 앉아 있는 벽암존자상을 단독 배치한 진영으로 대각선 구도를 보여 정적인 화면에 운동감을 부여하고 있다.
근엄한 듯 자상한 얼굴에 오른 손은 무릎 위로 내려 검지손가락을 들어 변화를 주고 있으며, 왼손은 의자 팔걸이에 기댄 채 왼 어깨에 걸친불자를 잡고 있다. 내의 깃과 소맷자락 및 흰색 동정과 대조를 이루어 깔끔한 느낌을 주는 다갈색 섞인 녹색장삼은 전반에 걸쳐 녹색 돋을 선을 사용하여 옷주름과 문양이 표현되어 있으며, 왼 어깨에 매듭을 지어 걸친 선홍색의 가사에는 금색 문양이 화려하다.
의자 등받이의 홍색 바탕에는 구름무늬와 함께 고리형태의 둥근 무늬와 마름모 무늬를 장식하였으며, 테두리로는 화려한 꽃무늬를 둘러 경직되고 무거워진 분위기에 변화를 주고 있다. 의자는 우향하여 사선을 이루며 앉아 있는 인물의 자세와 달리 앞․뒤 다리 길이의 차이를 두지 않고 원근법에 다소 어긋나게 모두 똑같은 수평선상에 둠으로써 표현의 미숙함이 엿보인다.
그림의 배경은 의좌상 진영도에서 일반적으로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화문석 바닥과 벽을 두어 공간을 구성하였으며, 우측(향좌) 상단에는'사국일도대선사벽암존자지진상'이라는 제명이 쓰여져 있다.
12.합천 해인사 용성선사 승탑 및 탑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492호
지 정 일 2009.12.03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44-19 (치인리 18)
시 대 일제강점기
합천 해인사 용탑선원의 입구 쪽에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승탑과 탑비가 나란히 있으며, 먼지로 인해 표면이 약간 변색되어 있지만 전반적인 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용성선사(1864∼1940)는 16세에 해인사에서 출가하여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중의 한 사람으로 독립선언서에 서명했다. 이로 인해 3년간 감옥생활을 하였으며, 이후로도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불경을 국문으로 번역하는 활동을 했다.
용성선사 승탑은 외형이 탑에 가깝다. 이중 기단 위에 탑신을 3개 얹은 방형 평면의 3층탑 형태로, 상하 기단에는 우주와 각 면에 각각 1주씩의 탱주가 모각되어 있다. 아래층 기단 위에는 위층 기단 받침이 몰딩되어 있고, 위층 기단 위에는 탑신 받침이 있다. 탑신과 옥개는 각각 한 개의 돌로 이루어져 있다. 옥개는 낙수면이 두껍고 추녀는 수평을 이루며 층급받침은 5단이다. 상륜부는 노반(머리장식 받침)과 복발(탑의 노반 위에, 바리때를 엎어놓은 것처럼 만든 부분)을 두었다.
탑비는 이중으로 마련된 지대석 위에 귀부, 비신, 이수를 올려놓았다. 귀부는 웅크린 채 네 다리에 힘을 주는 형상을 하고 있으며 윗면에는 귀갑무늬가 새겨져 있고 하단에 당초문대를 돌렸다. 귀부 가운데 마련되어 있는 방형비좌는 가장자리가 중엽 연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이수는 반룡 2마리가 마주 보고 있으며 비신에는 용성선사의 생몰년과 업적 등이 적혀 있는데, 비신의 우측면에는 “용운근 찬 오세창 전”이라 되어 있어 한용운이 비문을 짓고, 비신의 두전을 오세창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용성선사 승탑은 고려시대의 강원도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 사리탑(1388년) 2기 외에는 없는 희소한 형식의 불탑형 승탑이다. 비슷한 높이의 이중기단이나 3층의 탑신 형식 등은 해인사에 경내의 길상탑을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일제강점기 때 세워진 것이지만 조선시대의 전통을 잘 계승하는 조각 형태와 수법을 갖추고 있다. 용성선사와 함께 삼일독립운동 민족대표 33인 대표자들 중에 포함되었던 한용운 선생이 비문을 짓고, 오세창 선생이 탑비의 두전을 하였다는 점은 용성선사가 근대 역사에 얼마나 큰 족적을 남기고 있었는지 짐작하게 한다. 독립투사 3인이 이루어낸 역사적인 산물로써의 의미가 크다.
13.합천 해인사 국일암 구품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3호
지 정 일 2011.07.2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치인리 46)
시 대 조선시대
합천 해앤사 국일암 구품도는 1885년(광서 11년)에 수화사 수룡당 기전이 제작한 불화이다.
구품도는 염불하여 극락에 왕생하기를 바라는 조선후기 신앙상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작품이라 할 수 있다. 구품도는 관경십육관변상도의 모티프를 이어 받은 것이기는 하지만, 구품 연못이 확대되는 독특한 도상이 확고하게 자리잡게 되면서 구품도라는 주제로 불화의 한 분야를 형성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하고자 한다.
14.합천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24호
지 정 일 2012.07.19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치인리 46)
시 대 조선시대
우리나라의 신중도는 크게 네 가지 정도로 구분한다. 첫째는 예적금강을 중심으로 좌측에 제석천, 우측에 대범천, 그 아래에 동진보살(위태천)을 그리는 경우이다. 둘째는 제석천, 대범천, 동진보살(위태천)의 3위를 중심으로 한 신중도이다. 셋째는 제석천과 대범천만을 중심으로 그린 신중도이다. 넷째는 동진보살(위태천)을 위주로 한 신중도이다.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제석천, 대범천, 동진보살(위태천)을 중심으로 그린 탱화이다. 대체로 이러한 구도의 신중도는 제석천과 대범천을 상단에 배치하고 동진보살(위태천)을 하단 중앙에 배치하는 형식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제석천과 대범천, 동진보살(위태천)이 모두 상단에 배치되어 있어 다른 신중도와는 구도에 있어 차이가 있다.
대체로 19세기에 접어들면서 신중도는 동진보살(위태천)의 비중이 제석천과 범천에 비해 높아지면서 동진보살(위태천)을 화면의 중심에 배치하는 것이 대부분인데,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제석천과 대범천에 비해 도상의 크기도 작고 약간 뒤쪽으로 물러서 있는 구도를 보이고 있어 동진보살(위태천)의 비중이 오히려 작다는 느낌을 준다.
제석천과 대범천은 두광과 신광을 모두 표현하였는데, 모두 녹색으로 채색하였지만 제석천의 신광은 자색으로 채색하여 구별하였다. 대부분의 신중도에서는 제석천과 대범천의 자세가 같은데 비해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제석천은 서 있지만 대범천은 앉아 있는 모습으로 두 상의 자세에 차이가 있다.
해인사 국일암 신중도는 19세기 말의 일반적인 신중도의 구도와 달리 화면 구도가 비교적 단순하고 도상의 자세도 차이가 있으며, 18세기 신중도처럼 동진보살(위태천)보다 제석천과 대범천의 비중이 더 큰 구도를 보이고 있어 조선 후기 신중도 가운데 매우 독특한 작품으로 주목되고있다.
15.합천 해인사 원당암 고승 진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52호
지 정 일 2014.03.20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41-22 (치인리 30)
시 대 조선시대
합천 해인사 원당암 소장 고승진영은 해인사에 주석했던 선사 11분을 영정으로 조성하여 주법당인 보광전에 봉안한 작품들이다.
진영들은 18세기에서 19세기까지 제작된 작품으로 파악되며, 그중 취운당 진영의 경우 1853년이라는 기년명과 함께 우희라는 화승의 화풍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작품이기도 하다.
따라서 조선후기 및 해인사에서 제작된 경상도 고승진영의 양식적 특징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제 552-1호 : 영허당 진영, 1폭
제 552-2호 : 화월당 진영, 1폭
제 552-3호 : 취운당 진영, 1폭
제 552-4호 : 용봉당 진영, 1폭
제 552-5호 : 침월당 진영, 1폭
제 552-6호 : 능운당 진영, 1폭
제 552-7호 : 성파당 진영, 1폭
제 552-8호 : 서파당 진영, 1폭
제 552-9호 : 예봉당 진영, 1폭
제 552-10호 : 연월당 위패형 진영, 1폭
제 552-11호 : 연곡당 위패형 진영, 1폭
16.합천 해인사 영산회괘불도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4호
지 정 일 2015.01.15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해인사 괘불탱은 삼베 바탕에 밑그림을 그린 후 채색을 한 것으로 전체 크기는 가로 470 ㎝, 세로 820 ㎝이다.
화면 하단에 있는 화기에 의하면 광서 18년(1892) 신도 을미생 박문환과 그의 부인 고씨 및 그들의 아들·딸이 살아생전에는 오래 살고 복을 누리며, 죽은 후에는 정토에 왕생하고자 재물을 내어 금어 서암전기· 우송상수를 비롯하여 출초 및 편수로서 사미승 두명· 정건· 문성· 대홍· 태일·일원· 영원· 창운· 성호· 성희· 상오· 만수 등이 함께 참여하여 그렸다고 한다. 본존의 얼굴과 목, 가슴, 손가락 부위에 오염으로 인한 얼굴이 있으나 전체적인 존상의 도상 파악에는 무리가 없다.
화면의 구도는 중앙에 위치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하여 그 좌우에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이 서 있으며, 화면의 위에는 마하가섭과 아난을, 화면 아래 양쪽에는 각각 2위의 사천왕을 그렸다. 채색은 적색과 녹색, 군청색, 백색, 황색 등이 사용되었으나 전체적으로는 적색과 녹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다.
주존인 석가여래를 비롯하여 존상들의 상호는 매우 섬세하고 치밀하게 표현하여 세련미를 갖추고 있다. 본존 왼편의 문수보살과 오른편의 보현보살은 양 손으로 연화를 잡고 본존의 앞쪽에 서 있는 모습인데, 양 보살의 어깨에서 팔까지는 굵은 먹선으로 윤곽을 그어 본존의 앞쪽에 서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표현하여 시각적으로 존상들 사이의 공간감과 입체감을 느낄 수 있도록 하였다
17.합천 해인사 백련암 목조여래좌상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01호
지 정 일 2017.01.05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해인사 백련암 목조여래좌상은 1761년 상정이 제작한 것으로 전형적인 조선후기 불상의 특징이 잘 반영된 불상이다.
상정은 18세기 중후반 전라도에서 주로 활동한 장인으로 불상은 물론 개금에도 참여한 18세기를 대표하는 조각승이다.
백련암 불상은 균형잡힌 신체비례와 부드러운 옷주름, 예술성이 뛰어난 독특한 대좌 형식 등에서 조각승 상정의 조형적 특징이 잘 남아 있는 대표적인 불상이며조선후기 불교조각의 양식적 변천과 조각승 연구에 귀중한 자료이다.
18.합천 해인사 백련암 풍계집 목판
종 목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602호
지 정 일 2017.01.05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명찰의 본관과 속성은 밀양 박씨로 자는 취월, 호는 풍계이다. 부친 박승효와 모친 김씨 사이에서 1640년 6월 초3일에 태어났으며, 11세에 강원도 청평사 양신암으로 출가하여 환적당 의천대사에게서 머리를 깎고, 13세에 스승을 따라 금강산에 들어가 편양의 적사인 풍담당 의심대사 문하에서 10여 년간 경론을 익혔다. 의심대사가 입적한 후에는 법형인 상봉당 정원대사, 청봉당 수영대사 등에게서 배웠다. 이후 치악산, 소백산, 희양산 등을 주유하며 유완록 1권을 남겼다. 1704년에 가야산 백련암에 들어갔으며, 1708년 6월에 문인들을 불러모아 임종을 알리고 다음날 임종게를 읊은 후 합장하고 좌정한 상태로 입적하였다 보제등계대사행장에 따르면 1708년에 명찰이 입적한 후 법제 연수 ․ 홍해, 손제 인식 ․ 인원, 문제 일섬 ․도형 ․ 도암 등과 행장을 쓴 문일이 유고 7편을 모았는데, 재력이 부족하여 3편만 판각하고 후일을 기약하였다. 정확한 판간연대는 알 수 없지만 문일의 부탁으로 농암거사가 서문을 쓴 연도가 1711년(숙종 37)인 것으로 볼 때 1711년 전후로 판각된 것으로 추정된다.
'풍계집' 책판은 조선후기인 18세기 초반에 판각된 것으로 책판의 상태가 매우 양호하다. '풍계집'의 저자는 명찰로 그는 사대부 및 여러 인사와 교유하며 시문을 수창하고 전국의 산수를 거닐며 시문을 짓기도 하였다. 명찰이 입적 후 그의 제자인 문일이 스승의 유고를 모아 18세기 초반에 판각을 하게 되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풍계집'의 책판은 해인사 백련암 소장 책판이 유일하다. 다만 하권 5-6장의 책판이 일실되어 없는데, 풍계집 간행본이 계명대, 국회도서관, 동국대, 영남대, 중앙대, 규장각, 한국학중앙연구원에 소장되어 전하고 있다 본 책판을 통해 조선후기 승려의 시문집 간행과정에 있어서 주변의 사찰에서 시주가 이루어져 간행된 사례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되고, 또한 조선후기 승려와 사대부 등의 교유양상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자료로써의 가치가 중요하다.
19.해인사 봉황문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54호
지 정 일 1985.11.14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22 (치인리 10)
시 대 조선시대
해인사는 가야산 서남쪽 기슭에 있는 절이다. 의상의 화엄 10찰 중 하나이고, 팔만대장경판이 보관되어 있는 법보 사찰로, 신라 애장왕 때 순응과 이정이 세웠다.
해인사의 두번째 문이며 천왕문, 금강문이라고 불리는 봉황문은 지은 시기를 알 수 없으나 여러 차례 고쳐 지은 기록이 있다. 지금 있는 건물은 순조 21년(1821)에 고쳐 세운 것이다.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로, 옆면 지붕선이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이다. 또한, 지붕처마를 받치기 위한 공포가 새날개모양인 익공양식으로 내부에는 사천왕 탱화가 모셔져 있다.
20.합천 해인사 존상도 (전 세조대왕 진영)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31호
지 정 일 2003.09.18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가야산로 1808 (치인리 산21-1)
시 대 조선시대
전세조대왕진영은 1458년 중추원 윤사로와 승정원 도승지 조석문 등이 세조 임금의 영정을 조성하여 해인사 금구전에 봉안한 것인데, 현상으로 봐 후에 이모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 진영은 조선전기에 해인사가 불교계에서 중요한 위상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입증하는 자료이다.
머리 위쪽에는 보통 불교 전각 안에 설치되는 천개를 표현하였고 곤룡포를 입고 양손으로 홀을 잡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 화려하고 위엄이 있다. 대왕 주위에 두 명의 시중이 부채를 잡고 그 아래에 동자가 손잡이가 긴 부채를 들고 있다. 또한 대왕 뒤에는 국화꽃을 묘사한 5폭 병풍을 표현하였다.
영정은 비단, 종이에 채색을 한 것으로 제작연대는 천순 2년, 즉 조선 세조 4년(1458)이다. 전체 크기는 세로 136㎝, 가로 86㎝이며, 화면 크기는 세로 110.2㎝, 가로 71.8㎝이고, 바탕은 연녹색으로 상·하단에 비단을 덧대었다.
21.합천 해인사 고불암 동조보살좌상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06호
지 정 일 2010.10.07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치인5길 194 (치인리 329-5)
시 대 고려시대
고려후기에 청동으로 조성된 불교조각상으로,경남지역에서 조사된것은 이번이 처음의 사례이다.
보관이 결실된 상태이지만 고려후기의 자비로운 미소를 띤 상호라든가 화려한 영락장식 등을 살펴볼 수 있는 귀중한 유물이며 보살좌상의 크기는 전고 74㎝,두고 21㎝, 미폭 28㎝,구폭 20㎝,슬폭 53㎝,슬고 13㎝있다.
22.합천 해인사 국일암 지장시왕도
종 목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548호
지 정 일 2012.07.26
소 재 지 경상남도 합천군 가야면 해인사길 118-68 (치인리 46)
시 대 조선시대
지장시왕도는 지장보살도와 시왕도가 결합한 불화로서 화면 중앙에 지장삼존인 지장보살과 도명존자, 무독귀왕이 있고 좌우에 시왕과 권속인 판관, 사자, 옥졸, 시녀 등이 그려져 있다. 이러한 형식은 조선 전기부터 19세기 전반까지 지속되었다.
19세기 후반이 되면서 지장보살 밑에 선악동자가 등장하기도 한다. 주로 선악동자가 등장하는 지장시왕도는 경기도와 경상북도에서 집중적으로 유행하였는데, 권선징악의 윤리를 강조하는 사회적인 분위기를 반영한 결과였다. 그런데 해인사 국일암 지장시왕도는 유행하던 지역과 큰 관련이 없는 해인사에서 제작되었지만 선악동자를 등장시킨 것으로 보아 화승들의 인맥 관계나 구도와 기법의 전수 등을 연구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이 그림은 조선 후기부터 많이 사용되어 불화의 품위를 떨어뜨리는 요인의 하나가 되었던 밝은 청색 안료를 본존 지장보살의 광배나 군의, 화면 위쪽의 하늘 등 중요한 부분에 채색함으로써 은은한 화면을 연출해내지는 못했다.
해인사 국일암 지장시왕도는 화기를 통하여 1904년(광무 8년)에 가야산 해인사 약수암에 봉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작품으로 세밀하고 화려한 느낌은 없으나 안정된 구도가 돋보이는 불화로서 지장시왕도의 도상 연구와 화승 연구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