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과 죄책』이라는 이 책은 일본인으로 정신과 의사인 ‘노다 마사아키(野田正彰)’가 일본의 군국주의 시대 전범들과 한국·중국·베트남 등에 사는 전쟁 피해자들을 만나서 면담하고 쓴 「전범들을 분석한 심층 보고서」라고 한다. 저자는 1944년생으로 나보다는 전배(前輩)지만, 전쟁에는 참여하지 않았다. 전쟁에 참여한 많은 일본인 선배들, 피해자들을 만나 그들의 이야기를 들었고, 일본이 전쟁범죄를 저지르고도 반성하지 않는 것에 대해서도 부끄럽게 여긴다. 우리나라와 중국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언론인, 피해자 가족들도 만났다. 작년인 2023년에는 세월호 9주기 강연회에 참석해 유가족과 시민들을 대상으로 ‘내 아이를 대신해서 산다- 사고가 없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라는 제목으로 강연도 했다. 일본인은 양심을 지켜야 한다고 하면서….
그는 홋카이도대학 의학부를 졸업한 후, 나가하마 적십자병원 정신과, 고베 외국어대학, 간사이 카꾸인대학 교수를 역임했고, 전쟁·재해 등을 경험한 사람들을 통해서 정신의학을 기반으로 한 비교문화, 문화인류학, 사회학을 접목한 활동을 하고 있으며, 여러 전문 서적을 내기도 했다.
우리는 흔히 일본은 전범 국가이면서 독일처럼 반성하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지난 연초에 딸애와 히로시마에 갔을 때 나는 “그들이 자신들의 피해를 침소봉대하면서 반성은 하나도 하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정말로 그런 것일까? 아니면 인간이란 원래부터 그렇게 돼 먹은 것일까? 입장이 바뀌면 어떨까? 우리가 그랬다면 우리는 어떨까? 그런 생각을 해보았다.
인터넷 교보서점에는 책 ‘서평’을 길게 싣고 있고, 전문가들 다수가 이 책을 추천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여성학자 정희진은 “이 책은 남성성이 실체가 아니라, 규범임을 증명한다. 여성에 대한 폭력, 군사력 등 공사公私 영역에 걸쳐 세계 최고의 무장 국가인 한국사회의 필독서”라고 했고, 우석균 보건의료단체연합 운영위원장은 “전범들의 정신분석에서 출발해 일본 사회 정신분석에까지 나아간다. 충격적인 동시에 감동적이고, 희망의 울림이 있는 역작”이라고 격찬했다. 또 『전쟁과 사회』, 『대한민국은 왜?』등 저서를 통해서 한국 현대사를 조명해온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과거 저자와 만나 대담할 때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에 관해 이야기했던 기억을 떠올리며 “어쩌면 죄책 없는 일본보다 죄책 없는 한국이 훨씬 더 중병에 걸려 있는지도 모른다”라고 뼈아픈 소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여기까지가 이 책을 소개한 내용이라면, 이제부터 ‘본론’으로 들어가 본다. 1920년대 일본은 식민지 한국이 반발하는 등으로 골머리를 앓았다. “일본인은 우수한 민족이다. 중국을 지배해 동아시아의 맹주가 될 것이다.”라는 교육을 받고 자란, 이 책 저자이자 선배이기도 한 현역 의사인 ‘유아사’는 1929년 도교시립1중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학교 옆에 있는 야스쿠니 신사를 지날 때마다 경례를 했다. 야스쿠니는 전쟁에 나갔다가 죽은 사람들을 모신 곳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 무렵은 공산주의자들이 일으킨 만주사변(1931년), 상하이 사변, 5·15사건(1932년)등이 일어나 유아사는 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그는 평범한 중학생이었다.
유아사는 1916년 개업의의 아들로 태어났고, 도쿄 교바시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고학으로 의사가 된 사람이었고, 유아사는 9남매 중 셋째였는데 소학교 1학년 때, 간토지진이 일어나 집이 불타 없어지고,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아버지는 가건물에서 진료를 계속했지만, 그는 할머니와 치바(千葉)로 보내졌다. 2년 후 도쿄로 돌아와 중학교에 입학했고, 성적이 우수해 1934년 도쿄지케이가이 의대에 합격했다. 그는 성실히 공부해서 의사가 되는 꿈을 키웠다. 그는 ‘내가 살고 있는 시대나 국가에 대해서는 전혀 자각이 없었다.’그가 대학 4학년 때인 1937년 북경에서 일본인과 중국인이 충돌한 루커우차오 사건이 발생하고, 이어서 난징대학살이 벌어졌다.
1941년 의대를 졸업한 유아사는 고마고메 병원 내과의가 되어 전염병동에서 근무했다. 조만간 전쟁터에 가면 전염병 지식이 도움이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해 6월 징병검사 담당관이 군의관이 될 것을 권했다. 10월 현역 군의관을 지원했고, 보병 28연대에 입대했다. 2개월간의 일반 병과 훈련을 마친 그는 동기 23명과 중위로 군의관이 되었다. 그는 인간에게는 황족과 사족(士族)같은 상위 클레스가 있다고 생각했으며, 입대하자마자 장교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경험만을 중시한 의학교육 속에서 자라나 비판 정신 같은 것은 완전히 잃은 청년 시절이었다.
1941년 12월 일본은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 전쟁에 돌입했다. 이듬해 1월 유아사는 중국 산시성(陝西省) 타이위안(太原) 루안(潞安) 육군병원에 부임했다. 타이위안은 1937년 10월 중일전쟁으로 일본에 함락되었으나, 곧바로 들어온 팔로군(공산군 전신)으로 인해 고전하고 있었다. 육군병원에는 원장과 8명의 군의관이 근무했다. 부임한 지 40일 정도가 지난 3월 중순 병원장 니시무라 게이지 중좌가 장교식당에서 점심을 먹은 후에 “오후 1시부터 수술 연습을 한다. 전부 해부실로 모이도록….”유아사는 “드디어 올 것이 왔구나.”라고 생각했다.
10평 정도의 휑뎅그렁한 해부실에는 군의관뿐 아니라, 사단 군의관들이 모두 모여 있었고, 왼쪽 구석에 두 사람의 농민이 손이 뒤로 묶인 채 서 있었다. 체격이 좋은 한 명은 잠자코 서 있었지만, 몸집이 작은 한 명은 나이가 들어 보였는데, 신음하면서 떨고 있었다. 간호사가 절단용 칼, 뼈를 자르는 톱, 메스 등을 수술대 옆 탁자에 놓을 때마다 찰칵찰칵 소리가 났다. 유아사는 옆에 있던 히라노 중위에게 물었다.
“도대체 저 사람들 죽일 죄를 짓긴 지은 건가요?”
“팔로군은 죽이게 돼 있어.”
“아, 그렇군요.”
유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니시무라 병원장이 “자, 시작할까?”하고 신호를 보냈다. 위생병이 체격 좋은 남자를 총끝으로 찌르자 그는 유유히 걸어서 수술대 위에 누웠다. 그러나 다른 한 명, 궁상맞은 남자는 비명을 지르면서 앞으로 나오지 않았다. 위생병이 끌어내려고 하면할수록 필사적으로 뒷걸음질을 쳤다.
그 자리에서 유아사 중위가 생각할 수 있는 인간관계란 동료 의사와의 상호관계뿐, 죽임을 당하는 중국인과는 인간으로서의 관계는 없었다.
이미 여든이 넘은 노의사 우아사는 여기까지 애기하고 눈물을 보였다.
“나 자신이 한심해서….”
뒷걸음질을 치던 남자는 뒤에서 밀치자 중심을 잃었는지 그대로 밀려 나갔다. 위생병이 수술대로 억지로 끌어다 내팽개친 후에도 그는 여전히 신음하며 벌벌 떨고 있었다. 간호사가 남자에게 다가가 중국어로 말했다.
“자는 거예요. 마취할 거니까 아프지 않아요.”
남자는 모국어를 듣고 나서 공포에서 벗어났는지 간호사가 이끄는 대로 누웠다. “저런 거짓말을 하다니…”유아사는 기가 막혔다. 마취 한 후에 남자는 두 번 다시 깨어나지 못했다.
1943년 가을에 제1군 군의부장인 이시이 시로(石井四郞) 소장(관동군 731부대 창립자)의 감사가 있었는데, 유아사는 페스트 균이 묻은 벼룩을 소독하고 구제하는 모의연습에 참가했다. 이시이는 중국인을 대상으로 한 동상 인체실험 강의도 했다. 1945년 3월, 유아사가 산시성 남부 주둔 부대에 부임했을 때는 조선인 여성 위안부의 성병검사 업무를 맡기도 했다. 유아사는 1945년 8월 15일 산시성 타이위안에서 종전을 맞았다. 부임한 지 3년 만이었다. 종전이 되었으면 일본인들은 당연히 돌아가야 맞지만, 일본인 중 2,700명은 국민당 군의 징용에 응해 타이위안에 남았고, 약 3,000명의 기술자와 가족들은 현지 잔류를 택했다. 유아사는 군의관으로 출근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러나 국민당 군이 팔로군에게 패하자, 1947년 가을에서 이듬해 봄 사이에 대부분 일본인들은 본국으로 귀국했다. 유아사는 ‘지더라도 의사니까 어떻게 되겠지’라고 생각했고, 1947년 말 결혼도 했다. 두 명의 자녀가 태어났다. 1949년 4월 타이위안은 결국 팔로군에게 함락됐다. 유아사는 성립(省立)병원에서 근무하라는 지시를 받고 진료를 계속했고, 중국인 의사들에게 강의도 하면서 나날을 보냈다. 그러나 1951년 1월 포로수용소로 갑자기 보내졌다. 그는 생체해부를 했으니 자신도 생체해부를 당할지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했다. 1952년 말 한국전쟁이 고착 상태에 빠진 가운데, 유아사 일행 수십 명은 타이위안 감옥으로 이송됐다. 타이위안 감옥은 군의관들과 생체해부를 하던 곳이었다. 처음 3개월 동안은 감방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아니 내보내지 않았다. 그는 6월에 폐결핵으로 쓰러졌다. 폐결핵에 걸린 동료와 한 방에 있었기 때문에 감염된 것이었다. ‘귀국하고 싶다. 아이들과 함께 살고 싶다.’는 일념으로 병마와 싸웠다. 1956년 6월, 그는 기소유예 처분을 받고 석방됐다. 중국 당국은 그가 저지른 행위와 상관의 명령을 구분하여, 그가 한 행위에 대해 책임을 물었는데, 기소유예 처분을 내린 것이다. 이어서 귀국했다.
1958년 도쿄 스기나미 의대 내과에서 재연수를 받고, 니시진료소에서 근무하면서 지금에 이른 그는 일본의 평화운동에도 적극 참여하고 있다. 중국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를 밝힌 『지울 수 없는 기억』을 출판하기도 했는데, 이 책은 일본에서 꾸준히 읽히고 있으나, 책에 대한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그는 자신이 과거에 저지른 행위를 자신의 문제로 의식해 왔다. ‘시켜서 한 일이나 모두가 다 하니까 어쩔 수 없었다.’고 변명하는 한, 결국은 자신의 인생도 없었던 것이 되고 만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한 개인으로서 자신의 삶을 살다 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집단에 고정된, 단순히 집단 속의 한 사람으로 살다 가는 것을 되돌아보는 것이 유아사가 보는 패전 후의 나날이다.
유아사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전해 들은 저자는 말한다.
“나는 북중국에서 군의관들이 실시했던 수술 연습에 대해 처음 알게 됐다. 내 아버지도 군의관으로 참전했지만,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쟁은 어리석다’라고만 할뿐…. 아버지는 권위적인 남성으로서 자만에 찬 일생을 살았다. 내가 의대에 다닐 때도, 중국에서 귀환한 의사들도 아무 것도 말해 주지 않았다. 어느 교수가 “우리는 중국에서 나쁜 일도 했지만, 좋은 일도 했습니다.”라고 언뜻 내뱉은 말밖에 생각나지 않는다.”
아마도 일본이 아닌 다른 나라도, 다른 인간도, 마찬가지겠지만? 일본의 의사들은 전시에 어떤 짓을 했는지 잊은 채, 금빛 찬란한 의학과 의료에 매진해왔다. 유아사를 일본의학의 증인으로 보려고 하지 않았던 의사들은 지금도 전시부터 계속되고 있는 빈곤한 정신으로 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이런 의사들이 제공하는 의료를 선진 의료라고 믿어 의심치 않을 것이다.
이상 【1장】‘의사와 전쟁’부분을 요약한 것이다. 모두 17장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을 다 읽고 요약한다는 것은 쉽지 않겠다 싶다. 필요하면 손자들에게 요점을 추려서 들려주기도 해야지 하는 생각을 하면 더욱 그렇다.
【2장】길 아닌 길 - 이하는 너무 긴(50쪽) 것 같아서 따로 붙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