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답다 못해 처연하기까지 한 그녀의 모습을 볼 때마다, 좀 상투적인 말이지만, 역사의 격랑 속에서 싸우고 스러져 간 진보적인 여인의 가혹한 운명을 생각하게 된다. 그녀의 일생을 그린 영화를 제대로 만들 수 있다면 세계의 명화로 길이 남을 것이 분명한데, 아직은 때가 아닌 것 같다. (손석춘 선생이 장편소설 <코레예바의 눈물>(2016)에서 주세죽의 일생을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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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세죽(朱世竹, 1901.6.2~1953?)은 일제시대 중국 상하이와 소련에서 활약한 사회주의혁명가 겸 독립운동가지만, 활동 이력보다 박헌영(1900~1956)의 아내로 더 유명하다. 사실 그것도, 1932년 박헌영이 일본 경찰에 체포돼 연락이 끊긴 뒤 동지였던 김단야(당시 기혼)와 재혼한 일로 자주 환기되곤 했다. 당시 그 사건은 변절 못지 않게 충격적인 ‘스캔들’이었고, 시선은 여성 혁명가에게 더 모질었다.
함경남도 함흥에서 태어나 중등 시절 3ㆍ1운동에 가담했다가 옥살이를 하고, 1921년 상하이로 건너가 피아노를 전공하던 20세의 주세죽은 현지 조선 혁명가들에게 흠모의 대상이었다. 주세죽은 가족 동의 없이 1921년 박헌영과 결혼했다. 고려공산청년회 상하이지부 비서 박헌영은 당시에도 ‘위대한 청년 영도자’라 불리던 거물이었다.
주세죽은 ‘청년회’ 일 외에 허정숙ㆍ박원희 등과 함께 1924년 사회주의 여성단체인 조선여성동우회를 창립했고, 조선여성해방동맹을 결성했고, 1927년 항일 여성운동단체 근우회(槿友會)를 조직했다. 그들에겐 조국 해방 못지 않게, 계급 해방과 여성 해방이 중요했다. 그의 일대기를 소설로 쓴 손석춘의 ‘코레예바의 눈물’에는 주세죽이 또 한 명의 걸출한 혁명가 허정숙과 함께 국경을 넘나들며 ‘일본 경찰이 여자라고 경계를 허술히 하는 것도 성차별’이라고 농담하는 에피소드가 실려 있다. 그는 조선민중대회 준비위원, 고려공산청년회 중앙후보위원을 거쳐 조선공산당에 입당했고, 26년 6ㆍ10만세운동 직후 체포돼 옥살이를 했다.
주세죽과 김단야의 결혼은 당연히 축하받지 못했다. 박헌영ㆍ임원근과 함께 ‘상하이 트로이카’라 불리던 김단야였지만 주세죽의 마음을 얻기 위해 박헌영의 생존 사실을 숨겼다는 설이 있고, 둘 사이가 훨씬 전부터 심상치 않았다는 설도 있다. 확인된 바 없는 그런 소문들이 둘에겐 치명적이었다. 신뢰는 혁명가의 생명이고 여성에겐 절개가 신뢰의 생명이었다.
희생과 헌신으로 나라를 지켰던 항일독립운동가는 300여만 명. 그러나 2019년 기준 독립유공자 포상을 받은 독립운동가는 1만 5825명, 이들 중 여성독립운동가는 3%인 472명에 불과하다.
주세죽 朱世竹 (1899~1950)
운동계열 : 국내 항일 | 훈격(서훈년도) : 애족장(2007)
함경남도 함흥 출신인 주세죽 선생은 1919년 3.1운동 당시 함흥에서 만세시위에 참여해 1개월간 함흥경찰서에 수감된 바 있었다. 이후 1924년 5월 서울에서 ‘조선여성동우회’ 집행위원에 선임되고, 이듬해 1월 ‘경성여자청년동맹’ 결성을 주도하는 등 여성운동을 이끌었다.
1925년 4월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집행위원회 후보 위원에 선출되며 사회주의 운동의 핵심에 있던 조화벽 선생. 일제는 이런 그를 ‘여자 사회주의자 중 가장 맹렬한 자’로 평가하며 ‘요시찰 인물’로 감시하고 있었다.
1925년 11월 ‘제1차 조선공산당 검거사건’으로 남편 박헌영과 함께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으나, 12월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1926년 6월 다시 체포되었지만 재차 증거 불충분으로 8월에 석방되었고, 1927년 5월 근우회 임시집행부에서 활동하던 선생은 병보석으로 출감한 박헌영과 1928년 8월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당시 주세죽 선생은 ‘코레예바’라는 러시아식 이름을 사용했다. 1932년부터 1933년까지 중국 상하이에서 조선공산당 재건 운동에 참여하던 중, 남편이 다시 일본 영사관 경찰에 체포, 사망했다고 생각한 선생은 모스크바로 돌아갔다. 러시아에서도 주세죽 선생은 ‘사회적 위험분자’로 낙인찍혀 1938년 5월 체포되어 카자흐스탄으로 유배되는 등 박해를 받았다.
주세죽 선생의 일생은 손석춘 작가의 ‘코레예바의 눈물’과 조선희 작가의 ‘세 여자 이야기’ 등을 통해 알려졌다. 특히 코레예바의 눈물은 손 작가가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로 여행을 갔다가 발견한 주세죽 선생의 자필 기록을 토대로 쓴 소설이다.
그는 1929년 시베리아 횡단열차 안에서 박헌영과 가진 딸(비비안나, 무용가)을 낳았고, 1937년 ‘일본 밀정’이란 누명으로 소련 경찰에 체포됐다. 김단야는 처형되고 그는 카자흐스탄에 유배됐다. 주세죽은 해방 후에도 귀국을 허락받지 못하다가 유배지의 한 공장에서 직공으로 일하다 숨졌다. 2007년 한국 정부는 그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수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