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새벽 할로윈 축제에 참가했던 젊은이들 146명이 좁은 골목에서 나오다가 쓰러져 죽었다는 보도를 보면서 믿어지지 않았는데 미국도 유럽도 아닌 대한민국 서울 이태원에서 일어난 일이었습니다. 노 마스크 축제에 10만명이 참가해서 족보도 없는 남의 나라 축제에 즐기기 위해서 참석했다가 구조신호를 이벤트로 생각했다는 참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래도 민족 정신은 갖고 취할 것, 버릴 것은 분별할 줄 아는 젊은이들이 되어주기를 간절히 당부합니다. 소중한 자녀를 잃은 가족들에게 주님의 위로를, 부상중인 사람들 가운데 더 이상의 희생자가 없기를 기도합니다.
상황과 상관없는 감사
사람은 감정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때로는 감정으로 인해 의지와 인격이 흔들리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우리가 어떤 사람을 감정적인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 사람이 감정 콘트롤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가끔 운동선수들이 그런 행동을 합니다. 순간 욱하는 거죠. 테니스 라켓을 코트 바닥에 내리쳐서 라켓을 부수는 선수, 헛 스윙을 하고 야구 방망이를 부러뜨리는 과격한 행동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선수들이 감정이 가라 앉고 나면 잘했다고 생각할까요? 후회할까요? 대부분 후회할 것입니다. 감정을 쏟아놓는 것은 지나고 나면 후회하는 일이 됩니다.
범사에 감사하라는 말씀에서 가장 어려운 장애물은 감정 컨트롤입니다. 좋은 일이 아닌데, 기뻐할 일이 아닌데, 엄청 힘든 일인데 그래도 감사하라고? 우리 안에서 질문이 생겨납니다. 모든 상황 속에서 감사한다고, 어떻게 그것이 가능하지?
감정을 갖고 사는 인간에게 불가능한 요구를 성경이 하는구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사실 모든 일이 다 감사할 수 있는 일은 아닙니다. 부지런히 늦지 않으려고 지하철역으로 뛰어 들어갔는데 아뿔사 기차가 방금 떠나고 전광판에는 15분후 도착이라고 써 있습니다. 감사할 수 있을까요? 별 것 아닌 줄 알았는데 심각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의사가 “암이네요...그것도 많이 진행이 됐는데요.”이런 말을 듣고도 감사할 수 있을까요? 인생이 꼬이고 문제는 계속 생기는데 답은 보이지 않을 때도 감사하라고 하시니 참 난감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감사가 상황에 의해 좌우된다면 범사에 감사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상황은 날씨가 바뀌듯이 매일 달라지고, 우리가 원하지 않는 상황이 닥칠 수 있습니다. 맑은 날을 원하는게 비가 잔뜩올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진리는 어떨까요? 네 변하지 않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해는 동쪽에서 뜹니다. 진리는 상황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상황을 감사의 조건으로 삼으면 감사는 자주 원망과 불평과 탄식이 될 것입니다. 그래서 기쁘고 즐거운 일에는 감사하겠지만, 힘든 일, 고통스러운 일은 절대로 감사할 수 없을 것입니다. 감사를 이야기할 때마다 욥의 이야기를 합니다. 갑자기 닥친 재난은 너무나 끔찍했습니다. 자녀 열을 다 잃었고, 재산도 잃었고, 하인들도 떠나고, 아내도 떠났으며 몸에는 병이 찾아왔습니다. 물론 욥은 감사의 고백을 드린 것은 아닙니다. 자기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주신 분도 하나님이시고, 가져가신 분도 하나님이시니 내가 입술로 범죄하지 않겠다.”는 고백이었습니다. 감정을 훌륭하게 절제한 태도입니다. 욥의 고백은 진리를 선포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이심을 선포했기 때문입니다. 진리위에 감사의 조건을 두게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를 고백할 수 있는 믿음의 용기를 갖게 될 것입니다.
오늘 성경 본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첫 번째 편지입니다. 이 편지 가운데 바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권면합니다. 이 권면이 바울에게 쉬운 일은 결코 아니었습니다. 바울에게도 감사할 일보다는 감사할 수 없는 일들이 훨씬 더 많았습니다. 바울을 환영하는 사람들보다 미워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그를 사도로 존경하는 사람보다 자격이 없다고 비난하는 사람이 더 많았습니다. 비울은 그 어떤 사도보다 열심히 하나님을 전하고 예수님처럼 살았지만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들에게 바울은 호감이 가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범사에 감사하자고 말합니다.
그는 우리의 감사가 상황에 좌우되서는 안된다고 선포합니다. 우리는 눈 앞에 펼쳐진 홍해 바다의 물결만 바라보지 말고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것입니다.
코리텐 붐의 저서 「주님은 나의 피난처」는 그녀가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의 포로수용소에서 겪은 일을 수기로 기록해놓은 책입니다. 그녀는 추위, 고문, 굶주림, 갈증, 헐벗음 등 그야말로 인간이 육체적으로 당할 수 있는 고통은 거의 다 겪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모두 견딜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것은 놀랍게도 ‘벼룩’이었습니다. 그녀는 수용소 안에서 숨어서 성경공부를 했습니다. 하지만 다른 말씀은 다 이해할 수 있고, 다 행할 수 있어도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 이하의 말씀을 공부할 때는 도무지 그 말씀대로 할 수가 없었습니다. “어떻게 하나님은 항상 기뻐하라고 하시지? 이렇게 벼룩이 나를 괴롭히는데….” 그런데 어느 날 그녀는 한 환자를 데리고 의무실로 가는 도중 우연히 독일병사들이 서로 나누는 말을 듣고 그것도 감사해야 할 이유를 알게 되었습니다. “저 감방 안에는 벼룩이 많으니 밖에서 슬슬 지키도록 하자.” 그녀는 이 말을 듣고 그 동안의 원망과 불평이 다 사라졌습니다. “벼룩을 보내주신 주님, 정말 감사합니다. 저희에게 이 감방 안에서라도 자유를 주시기 위해 벼룩을 보내셨군요. 이제 성경을 숨어서 보지 않아도 됩니다. 감사합니다.” 우리에겐 그저 감사할 수 있는 정도가 아니라 마땅히 감사해야 할 것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습니다. 벼룩을 보내주신 하나님께 감사했던 코리텐 붐처럼 자신이 감사 할 수 없었던 모든 일들을 다시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원망과 불평할 상황의 반대편에는 우리가 미처 깨닫지 못한 유익함이 있다는 사실을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항상 나쁜 일만, 억울한 일만 일어나는 것 같은 우리에게 그 반대편에 하나님이 주시는 유익에 눈을 뜨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소원합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감사해야 합니다.
삭개오는 은혜밖에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도 유대인이었지만 그의 이웃들은 그가 로마를 위해 민족을 배반한 더러운 세리라고 욕을 했습니다. 그가 아무리 정직하게 일을 해도 그가 세금을 더 받아 자기 배를 불린다고 의심했습니다. 바리새인들은 세리를 더러운 벌레 보듯이 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인데도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인정받지 못했던 것입니다.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에 장벽이 있었던 것처럼, 유대인들은 자기들 사이에도 그 직업에 따라서, 사회적인 신분에 따라서 장벽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 장벽은 하나님이 만드신 장벽이 아니었습니다. 율법을 알고 지키면 거룩한 사람, 율법을 모르면 더러운 사람 취급을 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인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엡2:11-13절 “그러므로 생각하라 너희는 그 때에 육체로는 이방인이요 손으로 육체에 행한 할례를 받은 무리라 칭하는 자들로부터 할례를 받지 않은 무리라 칭함을 받는 자들이라. 그 때에 너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이스라엘 나라 밖의 사람이라 약속의 언약들에 대하여는 외인이요 세상에서 소망이 없고 하나님도 없는 자이더니,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그때에 우리는 그리스도 밖에 있었고, 약속의 언약과 상관없는 사람이고, 세상에서 소망도 없고, 하나님도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이 우리의 실체였습니다. 불쌍하기 그지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변화된 것입니다. 언약의 사람이 되고, 소망의 사람이 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입니다.
“엔 크리스토”이 단어는 신비입니다. 어머니의 자궁은 생명을 품습니다. 그 품음이 없이 이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없습니다. 자궁에 생명을 품는 순간부터 어머니는 온갖 불편함과 낯선 생소함등에 적응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그 생명으로 인해 영향을 받습니다. 먹는 것, 마시는 것, 눕는 것, 서는 것, 자는 것, 활동하는 모든 순간에 자신안에 그 생명을 품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참고 견디는 모성으로 인해서 한 생명이 세상에 옵니다. 그 생명의 신비를 우리가 다 알수 없습니다. 엔크리스토, 그리스도안에서 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자궁입니다. 십자가가 그 생명을 품는 어머니의 자궁입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사람들의 비난에도 개의치 않고 예수님은 더러운 세리의 집에 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가 더러운 죄인의 집에 들어갔다.”고 수군거렸습니다. 식탁의 교제는 친구가 되었다는 의미였기에 바리새인들에게는 충격적인 사건이었습니다. 예수안에 식개오를 품기 위해서 주님은 그의 집에 가셨고 그와 식탁을 함께 하며 기꺼이 더러운 세리의 친구가 되셨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선포하셨습니다. 눅19:7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삭개오가 주님안에 들어와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의 언약과 세상의 소망과 하나님의 자녀됨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리스도안에 우리를 품어주지 않았더라면 지금의 우리는 없습니다. <내 눈에는 희망만 보였다, 강영우)
“보통 우리는 세상을 바꾼 사람들은 엄청난 일을 해낸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에디슨’처럼 세상을 놀라게 한 발명가,‘링컨’처럼 노예제도를 폐지한 정치인, ‘빌리 그레이엄’같은 위대한 복음사역자,‘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처럼 신 기술로 삶의 방식을 바꾼 일들을 생각합니다. 하지만 세상은 그런 위대한 사람들에 의해서만 바뀌는 것은 아닙니다. 사람에 대한 믿음과 온정의 손길과 따뜻한 격려가 사람들을 바꾸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헬렌 켈러’,‘루스벨트’ 대통령, 슈퍼맨 ‘크리스토퍼 리브’를 기억합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저‘강영우’를 기억해줍니다. 그러나 ‘헬렌 켈러’의 장애를 축복으로 이끈 것은‘설리번’선생이었습니다.‘크리스토퍼 리브’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죽기를 원했을 때, 그의 옆에는 그의 존재가치를 확인시켜 준 아내가 있었습니다. “여전히 나를 사랑하느냐?”고 묻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내가 사랑한 것은 당신의 멀쩡한 다리가 아니다.”라고 말한 그의 아내가 있었습니다. 지금의 저 ‘강영우’가 있었던 것 또한, ‘늘 나보다 한 발짝 앞서 걸으며 저를 인도한’아내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보이지 않는 사랑의 헌신과 수고가 위대한 역사를 만들어가는 능력입니다.
지금의 우리가 있기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있었음을 기억하고 여기까지 우리의 인도자 되신 예수님이 끝날까지 우리의 인도자가 되심을 믿고 감사합시다.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뜻을 찾습니다. 그리고 그 뜻대로 살아가기를 힘쓰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삶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마6:33절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But seek first his kingdom and his righteousness, and all these things will be given to you as well.”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을 살 때 우리 삶을 책임져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의 말씀을 알고 있지만 믿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내 일과 내뜻을 이루기 위해서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할머니가 여행을 하는 중에 숲속 오솔길을 걸어가던 중 두 갈래의 길이 나왔습니다. 할머니는 하나님께 기도하고 주이 뜻대로 인도해달라고 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께서 저의 길을 인도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제가 지팡이를 쓰러뜨렸을 때 왼쪽으로 쓰러지면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쓰러지면 오른쪽으로 가겠습니다" 지팡이를 쓰러뜨리자, 지팡이가 오른쪽으로 쓰러졌습니다. 그러자 할머니는 다시 지팡이를 쓰러뜨렸습니다. 여러번 그렇게 한후에 드디어 지팡이가 왼쪽으로 쓰러지자 할머니는 말했습니다. “하나님이 왼쪽 길로 인도해주시는군요.”라며 자기가 걸어가고 싶었던 왼쪽으로 걸어갔습니다. 우리는 할머니가 잘못됐다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많은 경우 우리도 그렇게 행동하고 살아갑니다. 내가 정하는 하나님의 뜻이 과연 하나님의 뜻일까요? 아니라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뜻은 무엇입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그 뜻에 순종해서 살아가야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10월 우리의 감사할 이유들을 설교를 통해서 들었습니다. 간절함과 믿음을 통해서 감사를 회복해야 한다고 권면했습니다. 우리에게 남은 것을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기도할 수 있음이, 예배 드릴 수 있음이, 구원해주심을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사람을 존중하고, 필요한 곳에 은혜를 배달하며 고난중에 감사하자고 했습니다.
올해를 마무리 하면서 우리의 삶에 넘처나는 감사가 있기를 당부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일어난 모든 일(범사)에 감사하는 하나님의 뜻대로 순종하는 예신 가족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