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성군(達城君) 서거정(徐居正)이 졸(卒)하였다. 철조(輟朝)ㆍ조제(弔祭)ㆍ예장(禮葬)을 관례대로 하였다. 서거정의 자(字)는 서강중(徐剛中)이며, 경상도 대구(大丘) 사람인데, 문충공(文忠公) 권근(權近)의 외손이다.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나이 여섯 살에 비로소 글을 읽고 글귀를 지었는데, 사람들이 신동(神童)이라고 하였다. 정통(正統)무오년에 생원시(生員試)ㆍ진사시(進士試) 두 시험에 합격하고, 갑자년에 문과(文科) 3등으로 급제하여 사재 직장(司宰直長)에 제수되었다가 얼마 안되어 뽑혀서 집현전 박사(集賢殿博士)에 보임(補任)되고 부수찬(副修撰)과 지제교(知製敎) 겸 세자 우정자(世子右正字)에 올랐으며, 여러 번 옮겨서 부교리(副校理)에 이르렀다. 을해년에 집현전 응교(集賢殿應敎)와 지제교(知製敎) 겸 예문관 응교(藝文館應敎)와 세자 우필선(世子右弼善)에 제수되었다가, 병자년에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로 옮겼다. 덕종(悳宗)이 동궁(東宮)에 있을 때 세조(世祖)가 좌우에게 이르기를,
“보필(輔弼)하는 사람은 마땅히 학문이 순정(醇正)하고 재행(才行)이 함께 넉넉한 자를 골라서 삼아야 할 것이다.”
하고는, 드디어 서거정을 좌필선(左弼善)으로 삼았다. 서거정이 일찍이 조맹부(趙孟頫)의 적벽부(赤璧賦) 글자를 모아서 칠언 절구(七言絶句) 16수(首)를 지었는데, 매우 청려(淸麗)하여, 세조가 보고는 감탄하기를,
“보통 사람이 아니다.”
하였다. 정축년에 중시(重試)에 장원하여 특별히 통정 대부(通政大夫) 사간원 우사간(司諫院右司諫) 지제교(知製敎)에 제수되었다. 이때에 세조가 사방을 순수(巡狩)하고자 하므로, 서거정이 논간(論諫)하기를 격절(激切)히 하니, 물론(物論)이 아름답게 여겼다. 세조가 여러 신하와 더불어 후원에서 활쏘기를 하니, 서거정이 간하기를,
“신하와 더불어 짝지어 활을 쏘면 사체(事體)를 잃을까 두렵습니다. 또 정전(正殿)이 있어 신하들을 접견할 수 있는데, 하필이면 활쏘는 것으로 인하여 착한 말을 듣고 하정(下情)을 통하도록 해야 하겠습니까?”
하였다. 세조가 예조 판서(禮曹判書) 이승손(李承孫)을 돌아보면서 말하기를,
“서거정의 말이 매우 오활(迀闊)하여 사체를 알지 못하니, 내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이승손이 말하기를,
“서거정의 말이 지나치기는 하나, 옛말에 ‘임금이 밝으면 신하가 곧다.’고 하였으니, 이제 전하께서 성명(聖明)하시기 때문에 서거정이 그 말을 한 것입니다. 신은 그윽이 하례드립니다.”
하였으므로, 세조(世祖)가 기꺼이 받아들였다. 무인년에 정시(廷試)에서 우등하여 통정 대부(通政大夫) 공조 참의(工曹參議)로 옮겼다. 하루는 세조가 조용히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녹명서(祿命書)》도 유자(儒者)가 궁리(窮理)하는 일이니, 경이 가령(假令)을 지어서 올리라.”
하니, 이때에 《오행총괄(五行總括)》을 지었다. 경진년에 이조 참의(吏曹參議)로 옮기고 사은사(師恩使)로 부경(赴京)하여 통주관(通州館)에서 안남국(安南國) 사신 양곡(梁鵠)을 만났는데, 그는 제과 장원(制科壯元) 출신이었다. 서거정이 근체시(近體詩) 한 율(律)로 먼저 지어 주자 양곡이 화답하였는데, 서거정이 곧 연달아 10편(篇)을 지어 수응(酬應)하므로, 양곡이 탄복하기를,
“참으로 천하의 기재(奇才)다.”
하였고, 요동(遼東) 사람 구제(丘霽)가 서거정의 초고(草稿)를 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의 문장은 중원(中原)에서 구하더라도 많이 얻을 수 없다.”
하였다. 신사년에 가선 대부(可善大夫) 형조 참판(刑曹參判)에 오르고, 계미년에는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이 되었으며, 을유년에는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겸임하였다. 병술년에 발영시(拔英試)에 합격하여 예조 참판(禮曹參判)에 제수되고 곧 등준시(登俊試)에 3등으로 합격하여 특별히 자헌 대부(資憲大夫) 행 동지중추부사(行同知中樞府事)에 가자(加資)되고, 《경국대전(經國大典)》 찬수(撰修)에 참여하였다. 정해년에 형조 판서(刑曹判書)와 예문관 제학(藝文館提學)을 지냈고 이어 예문관 대제학(藝文館大提學)과 지성균관사(知成均館事)를 겸임하였는데, 대개 문형(文衡)을 맡은 것으로서 국가의 전책(典冊)과 사명(詞命)이 모두 그 손에서 나왔다. 겨울에 공조 판서(工曹判書)로 옮기고, 무자년에 세조가 영릉(英陵)을 옮길 뜻을 두었는데 조정 신하가 마땅히 옮겨야 한다고 말하는 이가 많았으나 세조가 어렵게 여겨서 서거정을 불러 물으니, 대답하기를,
“근세에 산수 화복(山水禍福)을 논하는 말이 대저 방위(方位)와 산수의 미악(美惡)으로써 자손의 화복을 삼고 있습니다. 신의 생각으로는, 《홍범(洪範)》 한 책은 성인(聖人)이 도(道)를 전한 글인데, 우(雨)ㆍ양(暘)ㆍ욱ㆍ(燠)ㆍ한(寒)ㆍ풍(風)은 숙(肅)ㆍ예(睿)ㆍ철(哲)ㆍ모(謀)ㆍ성(聖)의 반응(反應)으로 삼았는데, 이는 단지 그 이치가 이와 같다는 것을 논한 것 뿐입니다. 만약 하나하나 배합(配合)하는 데 대해서는 신은 그 가함을 알지 못하겠습니다. 하물며 산수설(山水說)은 후한(後漢) 제유(諸儒)에서 비롯하였는데, 신은 믿을 수 없다고 여깁니다. 또 세상에서 천장(遷葬)하는 것은 복을 얻기를 희망하는 것인데 왕자(王者)로서 다시 무엇을 바라겠습니까? 그러나 이는 큰 일이므로 성상의 마음의 영단(英斷)에 있을 뿐이며, 신이 감히 억측으로 의논할 바가 아닙니다.”
하자, 세조가 말하기를,
“경의 말이 옳다. 내가 다시 능(陵)을 옮길 뜻을 두지 않겠다.”
하였다. 가을에 세자 좌부빈객(世子左副賓客)을 맡았고 겨울에는 한성부 윤(漢城府尹)으로 옮겼다가 호조 판서(戶曹判書)로 옮겼다. 경인년에 의정부 우참찬(議政府右參贊)에 제수(祭授)되었다. 금상(今上)이 즉위한 3년 신묘년에는 순성 명량 좌리 공신(純誠明亮佐里功臣)의 호(號)가 내려지고 달성군(達城君)에 봉해졌다. 겨울에 평안도 관찰사(平安道觀察使)에 제수되자 신숙주(申叔舟) 등이, ‘문형(文衡)을 맡은 자는 외방에 내어 보낼 수 없다.’고 아뢰니, 그대로 따랐다. 임진년에 사헌부 대사헌(司憲府大司憲)에 옮겼다. 고사(故事)에 무릇 대간(臺諫)에서 일을 아뢰는 자는 승지(承旨)를 통하여 중관(中官)에게 말을 전해서 임금에게 전달되었으므로, 그 사이에 말이 혹시 누설되고 잘못되는 근심이 있었는데, 서거정이 차자(箚子)를 쓰기를 청하여, 무릇 말하는 바를 모두 서계(書啓)할 수 있게 되어서 하정(下情)이 모두 상달되었으므로, 모두들 편리하다고 하였다. 을미년에 의정부 좌참찬(議政府左參贊)이 되고, 병신년에 낭중(郞中) 기순(祈順)과 행인(行人) 장근(張瑾)이 사신으로 오자, 서거정이 원접사(遠接使)가 되었는데, 기순은 사림(詞林)의 대수(大手)로서 압록강에서 서울까지 도로와 산천의 경치를 문득 시로 표현해 읊으니, 서거정이 즉석에서 그 운(韻)에 따라 화답하되 붓을 휘두르기를 물흐르는 듯이 하며, 어려운 운을 만나서도 10여 편(篇)을 화답하는데 갈수록 더 기묘해지니, 두 사신이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었다. 기순이 태평관부(太平館賦)를 짓자 서거정이 차운(次韻)하여 화답하니, 기순이 감탄하기를,
“부(賦)는 예전에 차운하는 이가 아직 있지 아니하였으니, 이것도 사람이 하기 어려운 것이다. 공과 같은 재주는 중조(中朝)에 찾아도 두세 사람에 불과할 뿐이다.”
하였다. 우찬성(右贊成)에 올랐는데 정유년에 어떤 일로써 체직(遞職)되었다가 곧 달성군에 봉해졌다. 무술년에 홍문관 대제학(弘文館大提學)을 겸대(兼帶)하였다. 임금이 시학(視學)하고 여러 선비가 문난(問難)하는데 서거정이 아뢰기를,
“옛 제왕(帝王)의 정치는 모두 마음에 근본을 두었습니다. 요(堯)ㆍ순(舜)ㆍ우(禹)의 정일 집중(精一執中)과 상탕(商湯)ㆍ주무왕(周武王)의 건중 건극(建中建極)은 모두 이 마음입니다. 이러므로 채침(蔡沈)의 《서경(書經)》 서(序)에 이르기를, ‘이제(二帝)와 삼왕(三王)은 이 마음을 잃지 않고 나라를 보전하였고, 하(夏)나라 걸왕(桀王)과 상(商)나라 주왕(紂王)은 이 마음을 잃고서 나라가 망하였다.’고 하였으니, 원하건대 전하께서 처음부터 끝까지 이 마음을 한결 같이 하소서.”
하니, 임금이 기꺼이 받아들이고 얼마 안되어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으로 제수하였다. 기해년에 이조 판서(吏曹判書)로 옮겨서, 송조(宋朝)의 거자 탈마(擧子脫麻)의 고사(故事)에 의하여 문과(文科)의 관시(館試)ㆍ한성시(漢城試)ㆍ향시(鄕試)에 일곱 번 합격한 자는 서용(敍用)하는 법을 세우기를 건의(建議)하고, 또 명경과(明經科)를 설치하기를 헌의(獻議)하였다. 신축년에 병조 판서로 옮기고, 계묘년(癸卯年)에는 의정부 좌찬성(議政府左贊成)에 제수(除授)하였다. 무신년에 한림 시강(翰林侍講) 동월(董越)과 공과 우급사중(工科右給事中) 왕창(王敞)이 사신으로 와서 서거정을 보고 존경하는 예(禮)로 대우하고 매양 논담(論談)하는 데에 반드시 손을 모아 잡고 일어나 섰으며, 망원정(望遠亭)에서 유관(遊觀)할 때에 두 사신이 서거정에게 이르기를,
“공은 사문(斯文)의 노선생(老先生)이신데 오늘 공을 수고롭게 하였습니다.”
하였다. 황제가 명하여 최부를 돌려보내게 하였는 데, 중국의 문인들로 최부를 본 자는 필히 서거정의 안부를 물었다. 이에 이르러 졸하니, 나이가 69세이다.
시호(諡號)는 문충(文忠)인데, 널리 듣고 많이 본 것을 문(文)이라 하고, 임금을 섬기는 데에 절의를 다한 것을 충(忠)이라 한다. 적처(嫡妻)에는 아들이 없고 서자(庶子) 서복경(徐福慶)이 있다. 서거정은 온량 간정(溫良簡正)하고 모든 글을 널리 보았고 겸하여 풍수(風水)와 성명(星命)의 학설에도 통하였으며, 석씨(釋氏)의 글을 좋아하지 아니하였다. 문장(文章)을 함에 있어서는 고인(古人)의 과구(科臼)에 빠지지 아니하고 스스로 일가(一家)를 이루어서, 《사가집(四佳集)》 30권이 세상에 행한다. 《동국통감(東國通鑑)》ㆍ《여지승람(輿地勝覽)》ㆍ《역대연표(歷代年表)》ㆍ《동인시화(東人詩話)》ㆍ《태평한화(太平閑話)》ㆍ《필원잡기(筆苑雜記)》ㆍ《동인시문(東人詩文)》은 모두 그가 찬집(撰集)한 것이다. 정자를 중원(中園)에 짓고는 못을 파고 연(蓮)을 심어서 ‘정정정(亭亭亭)’이라고 이름하고, 좌우에 도서(圖書)를 쌓아 놓고 담박(淡泊)한 생활을 하였다. 서거정은 한때 사문(斯文)의 종장(宗匠)이 되었고, 문장을 함에 있어 시(詩)를 더욱 잘하여 저술에 뜻을 독실히 하여 늙을 때까지 게으르지 아니하였다. 혹시 이를 비난하는 자가 있으면, 서거정이 말하기를,
“나의 고황(膏肓)인지라 고칠 수 없다.”
하였다. 조정에서는 가장 선진(先進)인데, 명망이 자기보다 뒤에 있는 자가 종종 정승의 자리에 뛰어 오르면, 서거정이 치우친 마음이 없지 아니하였다. 서거정에게 명하여 후생(後生)들과 더불어 같이 시문(詩文)을 지어 올리게 한 것이 한두 번이 아닌데, 서거정이 불평해 말하기를,
“내가 비록 자격이 없을지라도 사문(斯文)의 맹주(盟主)로 있은 지 30여 년인데, 입에 젖내나는 소생(小生)과 더불어 재주를 겨루기를 마음으로 달게 여기겠는가? 조정이 여기에 체통을 잃었다.”
하였다. 서거정은 그릇이 좁아서 사람을 용납하는 양(量)이 없고, 또 일찍이 후생을 장려해 기른 것이 없으니, 세상에서 이로써 작게 여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