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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마 5:6)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지금은 그 어느 시대보다도 모든 것이 넉넉한 풍부한 시대를 살아가고 있습니다만, 예전에는 먹을 것이 없어, 배고픈 그런 시절이 있었습니다. 배고픔은 견디기 힘든 일입니다.
“수염이 석자라도 먹어야 산다”, “금강산도 식후경”, “사흘 굶으면, 남의 집 담을 넘지 않을 사람이 없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어떻게 보면, 주리고 목마름은 인간의 가장 기본적인 욕구요, 갈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마다 다양한 목마름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권력과 명예에 목말라 있고, 어떤 사람은 물질과 성공에 목말라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식과 지혜에 목말라 있고, 어떤 사람은 게임과 쾌락에 목말라 있고, 어떤 사람은 운동과 건강에 목말라 있습니다.
그리스 · 로마 신화 중에 탄타루스 왕 이야기가 있습니다.
탄타루스 왕은 먹으면 늙지도 않고, 죽지도 않는다고 하는 제우스 신의 음식을 훔쳐 먹었습니다. 그 죄로, 한 가지 형벌을 받았는데, 평생 배고프고, 목말라야 하는 고통이었습니다. 물이 마시고 싶어서, 눈앞에 있는 물잔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면, 그 잔이 뒤로 물러나고, 너무나 배가 고파서, 나무에 열린 과실을 따 먹으려고, 손을 내밀면 그 나무가 하늘로 올라가 버렸습니다. 이렇게 뻔히 보이는데도, 마시고 싶고, 먹고 싶은 것을 하나도 입에 넣지 못하는 그런 고통을 탄타루스는 평생토록 겪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이 탄타루스의 신화에서 “탠터라이징”(tantalizing)이라는 말이 유래했습니다. 그 뜻은 “보이기만 하여 감질나게 하는, 애간장 태우는, 애타는”이란 뜻입니다.
정말, 눈에 뻔히 보이는데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하니, 얼마나 애간장이 타고 감질나겠습니까? 배는 고프고, 목이 마르는데도, 눈앞에 보이는 것을 먹지도 못하고, 마시지도 못한다면, 얼마나 고통스럽겠습니까? 사람이 배고프고, 목마른 것은 정말 고통스러운 것입니다. 이 신화는 “세상 사람들이 그토록 열심히 추구하는 것들이, 사실은 다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사실 이 세상 욕구는 다 그런 것입니다. 세상의 욕구는 얻었다 하더라도, 갈증은 더 심해지는 것입니다. 손에 넣을만 하면 다 빠져나가 버립니다. 조금 얻었다 싶었는데, 실제로는 얻은 것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마치 바닷물은 마신 사람이 바닷물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 기갈이 더욱더 심해지는 것처럼, 사람들이 세상의 욕구를 채우려고 하면 할수록, 그 기갈이 더 심하여지더라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우리에게, 정말 배고파해야 하고, 목말라해야 할 것이 따로 있다고 가르쳐 주십니다. 돈이나 쾌락이나 명예나 권력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라, 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십니다.
사도 요한은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안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부터 온 것이라”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여,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거하느니라”(요일 2:15-17)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 같은 그런 것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에게는 의에 대한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목자로 모시고, 하나님 백성답게 살아가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주일마다, 팔복에 대하여, 살펴보고 있는데, 오늘은 네 번째 복인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먹어도 배고프고, 마셔도 목마른, 그런 것에 매달리지 말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사람이 되어라. 이것이 행복이다”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6절 말씀입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배부를 것임이요”
“주리고 목마르다”라는 말은, 당장 먹거나 마시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아주 다급한 상태를 말합니다.
마틴 로이드 존스는 “사람이 조금만 배고프면, 돼지 우리를 찾지만, 정말 배고프면, 아버지를 찾는다.”라고 말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을 떠나서, 재산을 다 탕진하고,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먹다가, 쥐엄 열매로도 배를 채울 수가 없어서, 정말 배가 고플 때, 아버지를 생각했습니다. 탕자는 아버지 집이 그리웠습니다. 아버지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러자, 아버지가 그에게 새 옷을 입히고, 금가락지를 끼워주고, 살진 송아지를 잡아서, 잔치를 베풀며, 배불리 먹게 해주었습니다. 탕자는 살았습니다.
하나님은 “너희는 나를 찾으라 그리하면 살리라”(암 5: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살기 위해서, 우리는 하나님 아버지를 찾아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여러분! 무엇에 대한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할까요? 세상 사람들은 경제적인 부와 좋은 직장, 사업의 성공과 권력의 쟁취에 주리고 목말라 합니다.
하나님을 믿는 우리에게는 어떤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할까요?
예수님은 우리에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여기서 “의”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한 마디로, “옳다. 정의롭다”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돔과 고모라의 죄악에 대하여, 아브라함에게, “내가 만일 소돔 성읍 가운데에서 의인 오십 명을 찾으면 그들을 위하여 온 지역을 용서하리라”라고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의 거듭된 중보기도로, “내가 십 명으로 말미암아 멸하지 아니하리라”(창 18:26,32)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레미야 5:1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너희는 예루살렘 거리로 빨리 다니며 그 넓은 거리에서 찾아보고 알라 너희가 만일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자를 한 사람이라도 찾으면 내가 이 성읍을 용서하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록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라고 말했습니다.
아브라함 때에나, 예레미야 선지자 때에나, 사도 바울 때에나,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사람, 다시 말해, 의로운 사람이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아모스 5:7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정의를 쓴 쑥으로 바꾸며 공의를 땅에 던지는 자들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당시, 사람들은 정의와 공의를 행하지 않았습니다. 자기 마음대로 살았습니다. 불의와 불공평, 불공정함이 일반화되어 있었습니다. 정의가 땅에 떨어지고, 공의를 상실해 버렸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바리새인들은 자기들의 의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불의로 충만한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지금은 어떻습니까? 세상 지식과 과학 문명이 무한대로 발달한 지금, 세상은 어떻게 변했습니까? 많은 재물을 가진 사람이나 가지지 못한 사람이나, 높은 권력 위에 앉아 있는 사람이나, 그렇지 못한 사람이나, 누구나 인정하는 정의롭고 공평한 사회가 되었습니까?
세상 돌아가는 것을 보면, 정치, 경제,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의”를 찾아보기가 어렵습니다. 뉴스를 보면, 불의하고 불법한 일들이 드러난 사건으로 가득합니다. 사회 구석구석에, 아직도, 불법과 불의와 탈법과 불공정과 불공평함이 가득한 세상인 것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그러할지라도,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하나님의 사람들은 세상 사람들과는 구별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무리 불의가 판을 친다고 해도,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정의를 행하며, 진리를 구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착하고 선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세상 모든 사람들과 더불어 화목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나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주변을 돌아볼 줄 알아야 합니다.
지난 주일에, 우리는 팔복 가운데, 세 번째 복인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라는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온유한 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사람이요, 착하고 선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거기에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더 나아가, 의에 주리고 목마른 삶을 살아야 합니다.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은 하나님을 바라고 사모하는 것을 말합니다. 죄를 버리고, 오직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의롭게 살려고, 힘쓰고 애쓰는 것을 말합니다. 나 중심이 아니라,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하는데, 왜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까?
창세기 15:6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 여호와께서 이를 그의 의로 여기시고”라고, 그 해답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그의 믿음을 의로 여겨 주셨다”라고, 아브라함이 믿음의 조상이 된 이유를 분명하게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우상의 도시인 갈대아 우르를 떠났기 때문입니까? 그가 할례를 행하였기 때문입니까? 아니면, 아브라함이 그의 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쳤기 때문입니까? 그런 이유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의롭다”라고 하신 이유는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믿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착하고 선하게, 옳고 의로운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지만, 그 일 때문에, 우리가 의롭다고 인정받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이 세상에는 우리보다 더 선하고, 더 의롭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음을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어떤 위치에 있든지간에, 반드시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된다 할지라도, 흔들림없이, 처음부터 마지막 날까지, 오직 하나님만을 믿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떠나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을 갈망해야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주리고 목말라 해야 합니다.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야 합니다.
욥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을 찾는데, 굶주리고 목말라했습니다.
“내가 어찌하면 하나님을 발견하고 그의 처소에 나아가랴. 그가 왼쪽에서 일하시나 내가 만날 수 없고 그가 오른쪽으로 돌이키시나 뵈올 수 없구나”(욥 23:3,9)
욥에게 닥친 환난, 그를 괴롭히는 고통, 그를 압박하는 친구들 속에서, “내 가죽이 벗김을 당한 뒤에도 내가 육체 밖에서 하나님을 보리라 내가 그를 보리니 내 눈으로 그를 보기를 낯선 사람처럼 하지 않을 것이라 내 마음이 초조하구나”(욥 19:26-27)라고 고백하며, 하나님을 찾았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을 찾는데 주리고 목말라했던 욥은 마침내,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시 42:5)
하나님을 찾고, 하나님을 만났을 때, 욥의 문제는 해결되었습니다. 욥은 살았습니다.
여러분! 정말 의에 주리고 목말라 있는지,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민수기 23:10절을 보면, 거짓 선지자 발람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바라보며, “나는 의인의 죽음을 죽기 원하며 나의 종말이 그와 같기를 바라노라”라고 말했습니다.
발람은 의에 주리고 목마른 것처럼 말했습니다. 그러나, 발람은 의인처럼 죽기를 원하면서도, 의인처럼 살지 않았습니다. 말과 행동이 전혀 다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악한 자 편에 서서, 이스라엘을 잘못된 길로 이끌었습니다.
우리가 정말 의에 굶주려 있다면, 의를 위한 시간을 내야 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을 알아가고,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고, 순종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기 위해 시간을 구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 더욱 깨어서 기도에 힘쓰고, 말씀 묵상과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노력해야 합니다.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했는데, 무슨 복을 받을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들이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배부를 것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배부르다”라고 하는 것은 “가득 채운다. 꼴을 먹이다. 실컷 먹이다. 음식을 풍부하게 공급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음식을 많이 먹어서. 완전히 포만감을 느끼는 상태를 말합니다.
지난 화요일, 여수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저녁에 회를 먹었습니다. 한 상 가득 회가 차려져 나오는데, 먹고 나면, 빈 그릇을 가져가고, 다시 내오는데, 그렇게 먹다 보니까. 마지막으로 나온 전복죽은 한 입 떠 먹는 것도 힘들 정도였습니다.
어떤 산해진미를 가져다준다고 해도, 더 이상 먹고 싶지도 않고, 먹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 버렸는데, 바로 이런 상태를 “배부르다”라고 표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여기서, “배부르다”를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의 복을 풍성하게 받았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으로는 만족함이 없고, 배부르지가 않습니다. 욕심에는 끝이 없습니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합니다. 그렇다가, 있던 것까지도 사라지고 맙니다. 없던 것도 있어지고, 있던 것도 없어지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오늘은 이쪽에 붙어있다가, 내일은 저쪽으로 옮겨가는 것이 세상일입니다. 오늘 만족하다가도, 내일 불평이 쏟아지고, 지금 불평하다가도, 금방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 것도 다반사입니다. 세상 것으로는 주리고 목마름이 완전히 해결되지 않습니다. 때로는 더 주리고 목말라질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의 떡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생명의 떡을 먹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수가 성의 야곱의 우물에서 만난 사마리아 여인에게, “이 물을 마시는 자마다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내가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요 4:13-14)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 사마리아 여인은 “주여 그런 물을 내게 주사 목마르지도 않고 또 여기 물 길으러 오지도 않게 하옵소서”라고 대답했습니다.
예수님은 생명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생명수를 마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떡과 생명수를 마실 때, 우리는 배고프지도, 목마르지도 않게 됩니다.
예수님께서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야 합니다. 그리할 때, 영적인 배고픔과 목마름이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우리의 유일한 소망은 “의”이신 하나님을 주리고 목말라 하는 것입니다.
다윗은 평생 의에 주리고 목말라 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니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살아 계시는 하나님을 갈망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얼굴을 뵈올까”(시 63:1,42:1-2)라고 고백했습니다.
그렇게 의에 주리고 목말랐던 다윗은, “젊은 사자는 궁핍하여 주릴지라도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좋은 것에 부족함이 없으리로다”(시 34:10)라고 고백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내 잔이 넘치나이다”(시 23:1,5)라고 고백했습니다.
부족함이 없는 삶, 잔이 넘치는 삶을 살고 싶지 않습니까? 의로우신 하나님을 찾고 찾을 때, 그 하나님을 나의 왕, 나의 주님으로, 나의 목자로 고백하고, 믿고 따를 때, 부족함이 없는 삶, 넘치는 삶, 모든 것이 더하여지는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다윗처럼 주리고 목마름이 있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이러한 갈급함이 주님 만나는 날까지, 계속 이어져야 합니다.
이사야 55:1-2절을 보면, 하나님께서, “오호라 너희 모든 목마른 자들아 물로 나아오라 돈 없는 자도 오라 너희는 와서 사 먹되 돈 없이, 값 없이 와서 포도주와 젖을 사라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항상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의에 주리고 목말라함으로, 하나님을 찾고 찾음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어, 배고프지 않은, 풍성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에게 크신 은총을 베풀어 주옵소서.
세상 것으로는 만족함이 없습니다. 언제나 주리고 목마릅니다.
주님이 우리 안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주리고 목마름을 채워주옵소서.
부족함이 없는 삶, 넘치는 삶, 배부른 삶을 살아가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