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204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제5주일)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
사40:21-31; 고전9:16-23; 막1:29-39
지난 한 주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합니다. 저는 지난주일 들었던 교우들의 가슴 아픈 이야기가 저의 개인적인 아픔들과 뒤엉켜 마음에 남아 있었습니다. 일상생활을 하다가도 우리의 아픔과 상처가 떠오르면, 가슴이 먹먹해졌습니다. 이 상황에서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제 자신의 무력함을 보면서, 제게 너무나 친숙한 무기력을 이불 삼아 뒤집어쓰고 그 속으로 다시 들어가려는 저를 보았습니다.
다행히도, 강아지와 함께 하는 아침 산책이 예전의 습대로 하려는 저를 알아차리도록 안내해주었습니다. 본능에 따라 어디로 갈지 방향을 정하고, 선택한 길을 가면서 냄새를 맡고, 배설을 하는 강아지를 따라다니다 보면, 무의식 속에 잠겨있던 저 자신도 의식적으로 깨어납니다. 익숙한 예전의 방식대로, 부정적인 생각에 딱 달라붙어서 땅 속으로 꺼져 들어가려는 저를 있는 그대로 볼 수 있었습니다. 산책은 무의식적으로 있는 저를 멈추고 있는 그대로의 현신을 바라볼 수 있는 틈을 벌려줍니다. 그리고 이 벌어진 틈 사이에서는 치유와 변형이 일어나기 마련입니다.
딱딱하게 얼어붙어 있는 땅을 밟고 있다 보면, 내 몸이 경직되어 있고 닫혀 있음을 알게 됩니다. 아침 햇살을 받으며 걷다보면, 딱딱함의 깊이 안에 있는 단단함을 만나게 되고, 닫히고 움츠러들어있던 몸이 자연스럽게 열리는 것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몸이 열리면, 하늘과 땅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명력과 에너지를 저항 없이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됩니다. 이 생명력과 에너지는 우리의 존재 안에 이미 있는 진정한 힘(power)이 흘러나오도록 우리의 몸을 안내합니다. 존재 안에서 나오는 힘이 온 몸을 타고 흐르면서, 우리의 의식을 깨우고 현존하게 합니다.
반면에, 나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부정적인 생각, 감정, 정서들에 휩싸여있을 때는 위력(force)이 나를 지배합니다. 위력은 힘의 근원이 외부에 있다는 생각에서 비롯되기 때문에 무력함과 취약함으로, 방어적이고 소유욕을 드러내는 쪽으로 우리를 몰아갑니다. 위력의 지배를 받을 때, 우리의 의식은 수치심, 죄책감, 증오와 무감정, 슬픔, 두려움, 욕망, 분노, 자부심을 경험합니다. 위력은 항상 그 자체의 이기적 목적을 위하여 진실을 왜곡합니다. 위력은 자기의심에서 기인하기 때문에 항상 자기를 과시하도록 만듭니다. 그러므로 자신이 현재 어떤 상태인지를 알아차리는 것은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으로 어떻게 존재할지는 우리의 태도와 선택에 달려 있습니다. 위력의 에너지 장에 머물 것인지, 존재 안에서 흘러나오는 힘을 받아들일 것인지 우리는 스스로 선택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어떤 선택을 했는지 알 수 있는 표지가 바로 우리의 몸입니다. 마음과 몸의 연결은 직접적이어서, 몸의 반응은 꼬리를 무는 생각과 그 생각에 결부된 감정에 반응하면서 시시각각 변합니다. 우리의 몸에 어떤 에너지가 흐르고 있는지, 몸이 경직되어 있는지 열려있는지를 살피면서, 위력과 힘의 차이를 구별하려는 의식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사실, 모든 스트레스는 그 사람의 내적 태도로부터 기인합니다. 스트레스를 활성화하는 것은 인생사나 외부 환경이 아닌, 그 일에 대한 자신의 반응입니다. 즉, 어떤 일을 기회로 경험할지, 스트레스로 경험할지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있습니다. 태도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바꿔놓습니다. 어떤 태도를 취하여 어떤 에너지 장에 연결되어 있느냐에 따라 빈민가의 궁핍함은 타락의 구실이 되기도 하고, 그걸 딛고 일어설 수 있는 영감의 원천이 되기도 합니다.
오늘 이사야서 말씀은 태도가 사람이 경험하는 세계를 변화시킨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사야서 40장의 역사적 상황은 참담했습니다. 예루살렘은 폐허가 되었고, 유다는 여전히 정치적, 군사적으로 무능했습니다. 부정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상황에서 이사야는 부정적인 현실 너머의 것을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절망하는 백성들을 향해 그는 하나님을 창조주로 묘사합니다. 비참한 현실 속에서 이사야는 희망을 이야기합니다. 위력이 지배하는 세상 속에서 존재로부터 나오는 힘의 능력을 이사야는 전합니다. 그 힘은 마치 중력을 거스르며 하늘을 향해 솟아오르는 독수리와 같습니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 사람은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이 올라갈 것이요, 뛰어도 지치지 않으며, 걸어도 피곤하지 않을 것이다.”(사40:31)
이 말씀은 우리에게 일어나는 온갖 일들이 우리 안에서 위력으로 경험되지 않도록 존재로부터 나오는 힘을 선택하는 태도를 보여줍니다.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도 수치심, 죄책감, 증오, 슬픔, 두려움, 욕망, 분노에 묶여있지 않고, 용기, 자발성, 수용, 이성, 사랑, 기쁨, 평화, 깨달음을 향해 도약하는 힘을 독수리가 날아오르는 모습으로 형상화하여 묘사하고 있습니다. 오직 주님을 소망으로 삼는다는 것은 우리를 바닥으로 끌어내리는 위력을 거스르면서 존재를 향해 도약하는 힘을 택하는 태도입니다.
위력이 아닌 존재에서 나오는 힘을 선택하는 삶의 태도는 우리를 지치게 하거나, 피곤하게 하지 않습니다. 존재로부터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힘은 우리를 생생하게 깨어있도록 하며, 애쓰지 않아도 온전하게 존재하도록 우리를 부드럽게 안내합니다. 진정한 힘은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는 마음을 하나로 모아 일치시킵니다. 이 힘은 우리에게 순간적인 만족감이 아닌 존재의 깊은 곳으로부터 나오는 기쁨을 가져다줍니다. 여기에 마음을 두고 삶의 의미를 찾는 이들은 존재에서 나오는 힘을 받아들이도록 지혜를 모으고, 내적 수행을 지속적으로 이어갑니다.
내면의 힘이 외부로 발현되어 사람들에게 큰 힘의 통로가 되어준 역사적 인물들이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3년 동안의 가르침은 이후 세대에 서구 사회의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인간과 예수의 만남은 지난 2천년 서구 역사의 중심에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 자체의 심원한 힘은 세월이 지나도 변함없이 한결같습니다. 오늘 마가복음 본문은 세상의 흐름을 바꾼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전하고 있습니다. 지난주 본문 바로 다음에 이어지는 말씀인데, 모두 하루 사이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예수님은 가버나움의 회당에 들어가셔서 말씀을 가르치시고, 악한 귀신을 쫓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베드로의 집으로 가셔서 열병에 걸린 장모를 치유하셨습니다. 안식일에 대한 율법 규정 때문에 비로소 해가 진 뒤에야 아픈 사람들과 귀신들린 사람들이 예수께 몰려들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존재에서 나오는 힘과 권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소문을 듣고 더 많이 몰려들었고, 아주 이른 새벽에 예수님은 그곳을 빠져나와 홀로 기도하셨습니다.
결국 자리를 비운 예수님을 제자들이 찾아 나섰습니다. 예수님을 만난 그들은 다시 그리로 가자고 했지만, 예수님은 거절하셨습니다. 한곳에 머물며 세력을 키우고 싶은 그들의 뜻을 예수님은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가까운 여러 고을로 가자. 거기에서도 내가 말씀을 선포해야 하겠다. 나는 이 일을 하러 왔다.”(막1:38b) 존재에서 흘러나오는 진정한 힘과 자유, 권위를 가르쳐주시기 위해 예수님은 억압받고 소외된 이들을 찾아서 온 갈릴리와 여러 회당을 직접 다니셨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모두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살아있는 모든 것 안에 담겨있는 신성함과 아름다움을 회복할 수 있는 힘과 권위가 외부가 아닌 바로 자기 자신 안에 있음을 예수님은 몸소 가르쳐주셨습니다. 억눌려 있는 사람들이 생명의 에너지와 정렬되어 생생하게 살아있음을 경험할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가르침이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대로 존재에서 나오는 심원한 힘과 권위를 받아들일지 말지는 우리의 선택에 달려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수치심, 죄책감, 증오, 슬픔, 두려움, 욕망, 분노, 자부심 같이 낮은 끌개장에서 일어나는 일들이 너무나 익숙합니다. 의지를 갖고 깨어있기 위해 영적 수련을 지속적으로 하지 않는다면, 우리에게 익숙한 낮은 끌개장의 중력에서 벗어나 높은 에너지 장의 영향력이 미치는 곳으로 도약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생각과 딱 달라붙어 있는 자기의 내면에 작은 틈을 벌리기 위한 영적 수련이 우리에게는 필요합니다. 영적 수련 외에도, 내면에 틈을 벌릴 수 있는 자기에게 맞는 다양한 방법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태도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를 바꿔놓습니다. 어떤 일을 기회로 경험할지, 스트레스로 경험할지는 우리의 태도에 달려 있습니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주님을 소망하고, 주님 안에 머물며, 주님께서 주시는 존재의 힘을 받아들이는 선택을 할 수 있길 바랍니다. 이런 태도와 선택을 하는 것이 처음에는 많은 저항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일단 날아오른다면, 우리를 끌어내리는 위력으로부터 보다 더 자유로워질 것입니다. 독수리가 날개를 치며 솟아오르듯이 올라가 더 높이, 더 넓게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고 사랑하게 될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미 우리들에게 살아있는 표징이 되어주셨습니다.
2024년 새해도 벌써 한 달이 지났습니다. 새해에 받았던 말씀이 나의 기도가 되도록 묵상하고 내가 받은 성령의 열매와 은사의 의미를 다시금 되새기면서, 이번 달도 새롭게, 기쁘게, 가볍게, 새해를 맞이하듯, 새날을 맞이하듯, 새 마음으로 살아가시길 바랍니다. 우리의 태도가 우리가 경험하고 만나는 세계를 변화시킵니다.
다함께 기도드리겠습니다.
자비로우신 하나님, 우리가 오직 주님께 희망을 두어 존재로부터 나오는 힘으로 살아가게 해주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