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더웠던 하루
올해엔 유별나게도 더운것 같다
계속해서 35도를 넘나드는 폭염속에서 지루한 하루의 더위를 피해보려고 물한병 배낭에 넣고 삼성산을 올라간다
날씨때문일가 줄을 잇던 등산인들이 오늘따라 조금은 한산하여 세월아 네월아 천천히 올라가다 깔딱고개를 올라
그늘아래 바위에 걸터앉아 저멀리 바라보이는 답답한 아파트를 내려다 본다
저 성냥갑같은 속에서도 많은사람들이 더위와 싸우고 있으리라 어쩌면 나는 피서를 잘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이런때 바람이라도 불어주면 좋으련만 무심한 바람은 나의 바램에는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스마트폰을 꺼내 그동안 모아놓은 작품을 하나하나 천천히 보고 있노라니 바람 한점이 슬며시 이마에 스친다
에잇 낮잠이나 푹 자야겠다
이곳 석수동에는 삼성산의 허리를 타고 내려온 줄기와 접하고 있어 주말이면 많은이들이 찾아온다
완만한 등산로 중간중간에는 소나무숲이 장관을 이루고 가을이면 알밤과 도토리가 머리위로 떨어진다
파란하늘을 마주하며 나무그늘아래 바위에 누어 하늘에 떠있는 뭉게구름을 바라보느라니 시원한 바람이 이마에 스치고 슬며시 잠이 찾아온다
어제밤 꿈에 찾아왔던 어릴적 소녀의 모습이 구름위로 아련히 떠오른다
풍족하지 못한 홀어머니 아래서 자라 언제나 꾀제제한 검정무명 치마를 입은 소녀는 여전히 명랑하였다
아래윗집에서 살다보니 눈만뜨면 만나게 되였고 으례히 산과들로 돌아다니며 놀던 소꿉친구였다
열대야의 무더위속에서 뒤척이며 잠을 제대로 못이루던 어제밤에 슬며시 찾아온 것이다
-안녕하세요 - 전혀 모르는 중년의 여인이 상냥한 미소를 띄며 인사를 한다
-녜 더운데 잠시 쉬었다 가세요 - 가볍게 화장한 곱상한 얼굴이다 인상도 아주 밝고 명랑해 보인다
어디서 많이 본듯한데 아마도 우리 동네 아줌마가 아닐가
때마침 솔솔 바람이 시원하게 불어오자 여인이 심심한지 말동무 하자며 옆으로 다가 와서 자리를 잡는다
- 아줌마 굉장히 미인이신데 어디서 많이 본것 같은데 혹시 석수동에 사시나요 -
-아니예요 인천서 왔어요 -
안양에 고등학교 동창 친구가 있어 같이 등산에 하기로 하고 왔는데 친구가 갑자기 사정이 생겨 그냥 집으로 돌아 가려다 여기까지 온김에 그냥 갈수 없어 산구경이나 하고 가겠다며 올라오는 길인데 사람들이 없고 너무 조용하니 조금은 무서운 생각이 들어 내려갈가 하든 참이라고 한다
진달래빛 등산복을 산듯하게 차려입고 짙은녹색 테안경에 목에는 가벼운 붉은색 마후라를 둘렀다
처음으로 신은것 같은 산듯한 등산화나 등에서 내려놓는 배낭역시 무척이나 고급스러워 보이고 금방 미장원에서 나온듯 바람에 날리는 귀밑머리 역시 영화배우를 뺨치게하고도 남음이 있다
동그란 눈에 양볼에 드러나는보조개나 복숭아빛 두뺨위로 흐르는 땀방울이 또한 한껏 매력을 발산한다
때마침 시원한 바람이 불어 여인의 가슴을 스처 지나간다
아 ! 바로 그여인이다
옛날 내가 고등학교시절 동산교회에서 만났던 여고생이던 손소영이다
이름만큼이나 때롱때롱하던 손소영이는 예쁘다는 말밖에 더이상의 표현이 없던 여자였다
이세상 어느여자가 소영이보다 더 예쁠가
처음에는 새침하던 그녀가 교회일을 같이 하면서 조금씩 마음의 문을 열드니 어느날 우연찮게 마음을 활짝 열고 나를 받아들였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잠시간이나마 연인이라는 이름으로 즐거움을 선물하셨다
어두운 밤에는 같이 별을세고 시원한 냇가에가서 같이 물장구를 치며 산골의 이슬내리는 밤에 모닥불 피워놓고 밀집방석위에서 흐르는 유성을 보았다
뒷동산에서 들려오는 늑대가 우는 소리에 놀라 애기처럼 가슴으로 파고들며 보채던 손소영 !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숨겨 놓있던 속마음을 열어보이며 남의 눈을 피하여 가며 데이트를 즐겼다
산으로 들로 강으로 유원지로 둘만의 오붓한 시간을 가지며 황홀한 미래의 꿈을 가꾸어 나갔다
악마는 아마도 우리의 사랑을 시기하였던지 소영이의 아버지가 사기를 당하여 잘나가던 회사가 막대한 부도로 인하여 헤어나지 못하고 가족이 뿔뿔히 흩어지는 힘든 굴레를 씌워 우리를 갈라놓았다
사랑한다고 인연이 아니고 만난다고 해서 모두가 또한 인연이 아니다
굴레에서 벗어 나오지 못한 소영이는 고추잠자리가 푸른하늘을 나르는 어느날 결국은 나에게서 떠나가서 돌아오지 못했다
세상물정 모르는 철없던 시절의 이야기처럼 그렇게 유야무야 하고 너는 너대로 나는 나대로 다른길을 걸었다
악마는 쾌재를 부르며 또다른 연인을 찾아 갈라놓으려는 음모를 꾸미고 있을지 모른다
- 그렇게 좋아하는 애인과 혜여지면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어요 -
- 글쎄요 운명이라고 할가요 사는게 무엇이고 먹고사는게 무었인지 살려고 발버둥치다보니 억지로 잊고 살았죠-
시원하게 불어오든 바람이 우리의 대화를 시샘이라도 하는듯 무더운 바람으로 방향을 바꾼다
악마는 여기까지 따라와서 우리의 대화조차 시샘하는 것일가
- 더우네요- 여인은 배낭에서 부채를 꺼내어 나를 향해 바람을 날린다
-아니 나에게도 부채가 있어요- 배낭속에서 부채를 꺼내 맞부채질을 한다
-어머나 예쁜 부채에 멋있는글- 여인은 바싹 다가와 부채를 당기어 큰소리로 읽는다
향긋한 그녀의 분내음이 콧가로 스며든다
듣고도 못들은척
보고도 못본척
세상사 모든탐욕
알고도 모르는척
삼성은 나를보고
하늘을 보라한다
-어마 부채가 예뻐요 시인이신가 봐요 그리고 서예도 하시나봐요 ? -
- 글쎄요 그냥 써본거죠 대단한것은 못되지만 마음에 드신다면 선물로 드릴가요? -
- 너무 너무 고맙고 감사하죠 - 둘이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땀을 부채로 날리며 석수역으로 내려왔다
이따금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여인이 귀밑머리가 흩날릴때마다 향긋한 내음이 콧가에 스친다
이따금 올라오는 등산객들이 어울리지 않는 우리들을 흘낏흘낏 바라본다
동화속의 천사같은 여인에 비해 이미 퇴색될대로 퇴색된 나를 처다보는 눈들이 어색스럽다는 표정이다
더운데 시원한 콩국수를 사주겠다며 중국집으로 나의 팔을 잡고 끈다
이무더운 여름날 실내로 들어가니 천국이 따로없다
온몸이 금새 날라갈듯 가벼운것이 무릉도원이라도 들어간듯 시원하고 아늑한 기분이 든다
마주앉은 여인을 보느라니 그옛날 소영이가 찾아와 마주앉은 착각이든다
그리도 예뻣는데 !
잠시면 또다시 찜통같은 거리로 나와서 더위와 싸우는 오늘의 만남이 조그만 기억으로 오래 남으리라
이게 바로 일장춘몽이 아닐가 언젠가 읽었던 소설의 한토막이 떠오른다
옛날 유명한 고승과 젊은이가 길을 걷고 있었다
- 저 건너집에가서 물좀 얻어오게 - 고승은 젊은이에게 물 심부름을 시켰다
젊은이는 대문앞에서 물한그릇만 달라고 했다
마침 그집에는 아무도 없고 아라따운 아가씨 혼자서 집을 지키고 있었다
젊은이는 아가씨를 보자 한눈에 반하여 혼인을 했고 그여인과 사이에 아이를 셋이나 낳으며 12년을 지냈다
그후 장인이 죽으며 커다란 농장과 가축 그리고 머슴들 까지 물려받았다
하루하루 그렇게 즐겁고 단란한 세월이 지나고 있었다
어느 무더운 여름날 폭풍과 장마로 인하여 너른 농장과 많은 가축들이 다 떠내려가고 아내와 아이들마저 거센물결에 휩쓸리고 있었다
젊은이는 오른손으로 아내의 팔을 잡고 왼손으로는 두아이를 껴안고 막내는 목에 올려놓고 물을 건너는데 그만 막내를 놓치어 잡으려는 순간 아내도 두아이도 모두 놓지여 떠내려가고 혼자서 허둥대며 헤엄치는순간 저건너 뚝에 서있는 고승이 보였다
- 무얼 하느냐 물을 얻으러 간지 벌써 30분이나 넘었구나 -
젊은이는 정신차리고 보니 그사이 물을 얻으러 갔다가 남의집 대문앞 따뜻한 곳에서 쪼그리고 앉아 졸다가 잠이들었던 것이다 순간 꿈속에서 오랜 세월을 멋지게 살다가 돌아왔다
인간의 세계는 순간이요 찰라가 아닐가
천년도 잠간이요 백년도 하루라더니
여름날 하루해를 이리도 지루하게 사는가 보다
또 머지않아 이더위가 지나면 춥다고 웅크리면서 또 호들갑떠는게 인간사 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