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눅19:1-10. 이 사람도!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회복하는 성서주일. 12. 8.
오늘은 대강절 기간 속에 성서 주일로 예배를 드립니다. 여러분, 교회력이 정하여 질 때에 왜 대강절 속에 성서 주일을 지키도록 했을까요? 여러 의미가 있겠지만 예수님을 기다리는 그런 간절함과 예수님의 구원과 축복의 내용을 더 깊고 심도 있는 깨닫기 위함입니다. 왜요? 하나님의 예언의 성취를 보면서 더욱 말씀대로 살아야 될 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가 매일 아침에 1장씩 말씀을 묵상하시잖아요. 말씀을 생각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내려고 힘쓰잖아요. 그런데 성서 주일은 깊은 의도가 있습니다. 1517년 10월 31일 마르틴 루터가 로마 가톨릭과 맞서서 오직 말씀으로, 오직 믿음으로, 오직 은혜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외치면서 개혁을 시작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생명의 위험을 무릅쓰고 하나님 앞에서 두려운 마음과 믿음으로 시작을 했습니다. 사실 루터는 종교개혁을 하려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부딪치기 싫어했지만 바르지 못한 것을 또한 싫어했습니다. 마음이 유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해석에서 그 뜻을 따르기를 고집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바꿈과 개혁으로 몰아가면서 믿음의 새로운 결과를 낳게 되었는데, 그 결과가 종교개혁입니다. 여러분, 왜 성서 주일이고, 왜 성경 말씀을 지켜야 합니까? 그리스도의 세계관의 회복을 위해서 그렇습니다. 여러분, 지금 세대를 가리켜서 무엇이라 합니까? 사람의 의가 하나님의 의를 대신하는 시대입니다. 공의는 사라지고 인간의 술수와 어두움의 조종이 있습니다. 사랑하기보다는 배제하는 인간의 악함이 어느 선을 넘었습니다. 가난하고 유약한 사람과 고아와 홀로 사는 여인을 불쌍히 여기는 것이 거룩의 한 부분인데 힘과 능력이 우선이고 가진 권력을 마구 휘두르고 횡포를 합니다.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는 용기와 말씀대로 살아야 하는데 슬쩍 넘어갑니다. 관여와 개입을 싫어합니다. 고민은 하지만 편안하고 쉽게 가는 길을 모색합니다. 양심이 채찍질을 하는데도 NO를 하면서 섞여 가고 YES를 하면서 아니라고 말을 못합니다. 왜냐하면 보여 지는 현실과 관계에서 고난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상황의 해석을 위해서도 말씀이 필요하고 적용이 필요합니다.
1. 그러면 대강절이 무엇입니까? 대강절은 ~으로부터 오다. ~으로부터 도착하다는 뜻을 가진 라틴어 advenire에서 유래했습니다. 대강절은 예수님의 탄생을 준비하면서 재림하실 주님을 기다리는 절기입니다. 성탄절 4주전부터 시작하여 성탄절 전야까지 계속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이스라엘을 선택하시고 예언자와 왕과 제사장을 통하여 메시야의 도래를 준비하셨고, 세례요한을 통하여 메시야의 길을 준비하셨으며 마침내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심으로 구원의 길이 열리게 되었음과 그 사랑의 계획하심과 마지막 날에 다시 재림할 것을 기억하고 실천하면서 예수님을 기대하는 절기가 대강절입니다. 그러면 먼저 당시에 누가 메시야를 기다렸을까요? 이스라엘의 모든 백성과 종교지도자들 입니다. 특히 소외계층입니다. 아픔과 고통을 겪는 사람들이 사모했지만 이미 하나님께서 이 땅에 보내신 예수님을 몰랐습니다. 마11:2-3에서 세례요한이 감옥에서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어 기다리고 오실 분이 당신입니까 아니면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 때에 예수님께서 5절. 맹인이 보게 되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 예수님은 이사야의 예언을 성취하고 있음을 요한에게 분명하게 알리셨습니다. 기대는 하지만 예수님이 메시야인 것을 몰랐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에 사는 시므온이란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야가 오셔서 지치고 힘들게 살아가는 백성들을 위로해 주기를 소망했는데 눅2: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시므온은 메시야의 위로해 기다렸던 사람입니다. 여러분, 성경이 무엇입니까? 기다림에 대한 말씀이고 우리의 신앙 역시 기다림입니다. 구약은 구세주인 메시아를 기다리는 내용이고. 신약은 죄인들을 구원하시고 하늘로 승천하신 예수님께서 재림주로 다시 오실 메시야를 기다리는 것입니다. 히12;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기대하고 소망하고, 천군 천사와 함께 오실 예수님을 기다리는 것이 그리스도의 세계관의 회복입니다. 요20;30-31.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요21;24-25. 이 일들을 증언하고 이 일들을 기록한 제자가 이 사람이라 우리는 그의 증언이 참된 줄 아노라.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과 뜻하신 목적과 실행을 말씀 속에 담았습니다. 다시 오실 예수님에 대하여 요한 계시록으로 남겼습니다. 그래서 대강절 속에 성서 주일을 두었고 세계관을 다시 인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말씀이 가리키는 예수님은 무엇을 원하실까요? 개혁입니다. 바꾸고 말씀대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부활의 생명으로 치유되고 회복되고 주시는 은혜를 누리는 것입니다. 주신 능력과 권세로 나의 남은 생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이어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개혁을 해야 하고 바뀌어야 하고 말씀대로 살아내야 합니다. 더 큰 일을 감당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대강절 속에 성서주일을 교회력으로 지켜야 하는 참된 의미를 삶과 환경과 여건과 관계 속에서 드러내시는 그래서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회복하시는 모든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말씀을 잘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그 말씀을 받들어 섬겼던 사람들은 누구일까요? 수많은 인물들이 있습니다만 오늘 본문은 삭개오를 말씀하는데 한 단락이고 10절 밖에 안 되는 짧은 문장인데 이 속에 삭개오에 대한 모든 것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누구인가? 문제는 무엇인가? 어떻게 장벽을 넘어서는가? 왜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시는가? 사람들의 비난의 이유는 무엇인가? 그러니까? 삭개오, 자신에게 있는 구원의 문제 앞에서 삶의 갈등하는 문제를 예수님께서 이미 보시고 아셨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결론으로 삭개오를 가리켜서 이사람 또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다. 왜 삭개오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자긍심과 함께 정체성을 말씀하실까요? 삭개오에게 있는 세계관을 예수님의 세계관으로 바꾸었습니다. 그러면 아브라함이 갖는 의미가 무엇입니까? 아브라함은 선민의 조상이자 믿음의 조상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이 아브라함의 후손이며 그들은 세상가운데 제사장의 나라로 특권을 누렸습니다.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이 아브라함의 자손입니다. 갈3:29. 너희가 그리스도의 것이면 곧 아브라함의 씨이고, 자손이요. 약속대로 유업을 이을 자니라. 저와 여러분은 누구의 자손입니까? 예수님을 믿으십니까? 그렇다면 아브라함의 씨이며 자손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의 자손은 아브라함의 복을 받고 동서남북의 놀라운 복을 받습니다. 복의 근원과 이름이 창대케 되고 모든 민족 가운데 의뜸이 되었습니다. 그러면 왜 이렇게 삭개오를 가리켜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합니까? 자신의 특성과 갈등하고 있는 장벽을 뛰어 넘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 앞에서 모든 문제를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믿음으로 받아드렸기 때문이고 그 말씀대로 결단했기 때문입니다. 소문을 소문대로 믿었습니다. 흘려버린 것이 아니라 소문을 그대로 믿었습니다. 여러분, 성공하고 문제를 푸는 사람의 특징이 무엇입니까? 소문대로 믿고 그 소문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비전을 비전으로 보는 것이고 구세주로 보는 것입니다. 바라는 것들의 실상을 적용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세계관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적용을 했습니까? 2가지입니다. 먼저 여리고 성 밖에서 앞을 못 보는 바디매오를 고쳐주신 예수님이 여리고성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성문 밖에서 구걸하던 바디메오가 고침을 받았다는 소문이 여리고 성내에 순식간에 퍼졌습니다. 여리고의 세리 장인 삭개오 역시 이 소문을 들었습니다. 수많은 회복과 기적을 일으키신 예수님에 대하여 강한 호기심을 있었는데 여리고에서 기적을 일으켰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지나가시는 길목으로 나가서 예수님을 직접 보고자 했으나 운집한 사람들로 인해서 가까이 갈 수도 없고, 볼 수 없게 되자, 뽕나무, 돌 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사모함 때문입니다. 결국 주님을 만날 수 있었고, 주님이 주시는 구원의 은혜를 경험할 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 사모하는 심령이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사모하는 심령이 그리스도의 세계관을 수용합니다. 또 하나의 이유는 가버나움의 세리 마태라는 인물이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다는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 세관에 앉은 마태를 불러 제자로 삼으셨고, 그의 집에 가셔서 마태의 동료 세리들과도 함께 식사를 하셨다는 소문은 삭개오에게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왜냐하면 삭개오가 세리 장으로 있었기 때문입니다. 같은 입장이고 동변상련입니다. 더 높은 세리의 장입니다.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은 세리들을 죄인 중의 죄인으로 취급을 하며, 일체 교제를 하지 않았습니다. 인사말도 나누지 않았고, 집에 들어가 함께 식사도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예루살렘의 종교지도자들과는 달리 세리들을 배척하지 않았고 그들과 함께 교제를 나누고 식탁을 함께 하며, 제자로 삼고 그 들에게 위대한 꿈을 갖게 했습니다. 이 소문이 삭개오에게 신선한 충격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진심으로 만나고 싶었고 소문에 대하여 관심을 가졌습니다. 여러분, 사모하는 심령이 어떻게 생깁니까? 예수님에 대한 소문을 사실적 바탕위에 받아들이고 그 소문을 일으켰던 예수님에 대하여 관심이 있어야 그 것이 사모하는 마음으로 연결이 되는데 삭개오는 예수님에 대하여 더 깊이 알고 싶었습니다. 메시야로 생각했습니다. 소문이 관심으로, 관심이 예수님을 볼 수 있는 위치로 데려다 놓았습니다. 그러면 삭개오가 어떻게 하는가요?
2-1. 무엇이 예수님의 말씀을 받아드리면서 바르게 해석을 하고 그 말씀대로 살아내는가요? 핸디캡과 부족함이 있지만 예수님을 간절히 사모했던 그의 행동입니다. 무엇이든지 즐거워하며, 영접하면 즉시 이행하는 사람입니다. 낙천적입니다. 멀리서나마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만으로 만족했습니다. 자신을 보아달라고 소리쳤던 바디매오처럼 예수님을 향하여 외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삭개오를 향하여 다가오셨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너의 집에 머물겠다는 이 말씀으로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영접했습니다. 항상 이행하는 사람입니다. 여러분, 이 자리에 오기까지 쉽지 않습니다. 로마의 백성도 어려운데 삭개오는 세리장입니다. 대리 통치하는 로마의 입장에서 고용이 되었지만 관심을 갖고, 도와주는 사람에게 항상 영접을 하고 동행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삭개오는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았습니다. 단지 하룻밤 숙박하고자 하신다는 말씀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세리 마태에게 일어난 은혜가 자신에게도 일어났음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매우 기뻐하며 주님을 자신의 집으로 영접하여 극진이 섬겼습니다. 여러분, 우리는 어떻습니까? 모든 일에 부정적이지 않습니까? 도움이 되어주고 길을 열어 주는 사람에 대하여 호의적이십니까? 삭개오는 믿음의 고백을 하지 않았습니다. 죄를 고백하지도 않았고, 회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다가와 무조건적으로 구원의 선물을 주셨습니다. 10절에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스스로 나오도록 기다리시지 않고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왜요? 죄인들은 스스로 나아올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죄인들을 직접 찾아가셨고, 잃어버린 영혼들을 찾아 한 사람, 한 사람을 구원하셨습니다. 구원받을 행위와 조건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로 구원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것만으로 문제가 해결될 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때가 더욱 많습니다. 이 특성위에 뛰어 넘어야 할 장벽이 있습니다. 삭개오는 유대인입니다. 그럼에도 여러 종류의 내적 장벽이 있었습니다. 무엇입니까? 신체적 장벽입니다. 이는 스스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삭개오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순결하다, 구별되었다는 뜻입니다. 세상과 구별되고 그리스도와 연합되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그렇게 살지 못했습니다. 삶과 신체적인 장벽이 있습니다. 타고난 DNA입니다. 3,4절에 삭개오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앞으로 달려가 보기 위하여 뽕나무에 올라가니 이는 예수께서 그리로 지나가시게 됨 이러라. 키가 작아서 여러 사람들에게 둘러 싸여 있는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작은 것이 항상 불만인데 이것은 그가 지니고 있는 한계입니다. 여러분, 사람이 마음을 먹으면 언제든지 예수님을 만나게 되는 것이 아닙니다. 머리를 써서 나무 위에 올라 간 것 때문에 예수님을 만난 것도 아닙니다. 조건과 지식과 기술이 대단한 것 같지만 이것으로 예수님과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약점과 장벽이 있지만 포기하지 않고 뽕나무에 올라가는 열정과 지붕을 뚫는 열정으로 주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또 넘어야 할 많은 사람들, 인의 장벽입니다. 소문을 그대로 믿고, 관심 때문에 삶의 지경에서 나왔습니다. 무리가 너무나 많았습니다. 인의 장벽, 외적 장벽입니다. 여러분, 내가 나의 길을 가면서 마음대로 되지 않을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내가 가지고 있는 실력보다도 더 능력이 있는 인의 장벽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 때에 여러분은 어떻게 하십니까? 사람들이 너무 많아 예수님을 바라볼 수 없었지만, 환경에 굴하지 않고 외적 장벽을 극복합니다. 인의 장막 앞에 포기하지 않고 나무 위로 올라가 예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사모함과 포기하지 않는 믿음 때문에 은혜와 구원의 감격을 회복하셨다면, 인의 장벽을 뛰어 넘을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또 세리 장, 부자라는 장벽입니다. 삭개오는 손가락질 받는 사람입니다. 세리장이라는 표현은 그가 어떤 사람으로 평가를 받고, 부자라는 표현 역시 이에 함축하는 표현입니다. 로마의 식민지 아래에서 세관장이라는 권력과 함께 많은 재물까지 소유하고 있는 당대의 실력자입니다. 그런데 이 사건은 오늘 본문 앞에 나오는 부자 청년과 좋은 대조를 보여줌과 동시에 18장 24-27절 말씀의 좋은 사례의 제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관원이 재물이 많음으로 인하여 근심하고 돌아간 직후에 다음과 같이 눅18;24-27절에 예수께서 그를 보시고 이르시되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 하시니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세리장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에 일 년치 세금을 먼저 상납하고 징수권을 갖는 큰 부자만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삭개오의 장벽입니다. 다른 사람으로부터 평가를 받는 것 뿐 만 아니라, 자신을 열 수 없는 장벽입니다. 여러분, 다른 사람의 이목도 중요하지만 자신의 많은 것 때문에 얼마나 마음이 닫힙니까? 다른 사람에 대한 관심도 없고, 자기위주이며 이기적이며 우월감이 있습니다. 자존심과 체면과 위신과 품위에서 벗어나기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는 세리장과 부자라는 장벽을 거뜬히 뛰어 넘고, 목적과 비전과 소망 앞에 겸손했습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모셨습니다. 면전에서 비판하고 평가하는 장벽을 뛰어 넘었습니다. 5절 내가 오늘 너의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는 예수님을 영접했습니다. 그런데 이 일은 복음적인 의미를 담고 있는 매우 중요한 사건입니다. 예수님을 집으로 초대하면 그를 향한 비난과 온갖 모욕과 악성댓글에 시달려야 합니다. 7절, 뭇사람이 보고 수군거려 이르되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사람들이 삭개오와 함께 예수님을 싸잡아서 면전에서 비판을 합니다. 같은 유대인이고 같은 민족인데 앞에서 비판을 하고 죄인이라고 합니다. 어떻게 대응을 해야 하나요? 언제까지 마음에 두시겠습니까? 해를 입힌 사람은 용서가 되지 않습니다만 면전에서 비판하고 평가하더라도 뛰어 넘어야 세계관을 열수가 있습니다.
물질의 장애물을 뛰어 넘었습니다. 물질 때문에 갈등이 있었고 불안한 요소를 지녔습니다. 이유는 그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는 세리의 직업을 가진 사람을 매우 증오했습니다. 동족에게 세금을 받아 로마정부에 바치는 반민족적인 행위로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하여 8절에 거둔 세금 중 일부를 착복하고 일부만 바치는 것이 관행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구원을 받습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무조건적인 사랑과 은혜로 구원을 받았습니다. 아무 조건 없이 그를 받아주신 주님의 은혜에 감격하여 죄를 고백했고 회개했습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었습니다. 8절, 만일 누구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4배로 갚겠나이다. 4배로 보상한다고 합니다. 사실 이것은 예수님께서 부자관원에게 요구하셨던 내용입니다. 그러나 재물에 대한 욕심에 집착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거부하고 돌아갔습니다. 삭개오는 재물에 대한 욕심을 버리고 나누었습니다. 9절,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니라. 원래 이스라엘 사회법은 다른 사람의 것을 토색하면 거기에 20%만 더하면 됩니다. 그런데 4배를 말합니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양은 4배로 소는 5배로 배상합니다. 물질이면 다 된다고 하는 사람이었는데 4배로 갚아주고, 소유 절반을 가나한 사람을 위하여 내어 놓았습니다.
2-2. 변화 된 모습과 다짐과 실천적 행동입니다. 여리고는 팔레스틴에서 매우 오래된 도시로 요단강 하류의 평야를 끼고 있어서 옛날부터 땅이 기름지고 산업이 융성한 곳입니다. 요단강을 사이에 둔 국경도시이고 동서간의 교통 요충지로써 중동 지방을 무역하는 대상들의 관문이었기 때문에 당연히 세관을 설치했습니다. 무역을 통한 관세와 생산되는 각종 토산물의 세금입니다. 그런데 삭개오가 여리고의 세관의 세리장이라는 관직을 이용하여 막대한 부를 축적을 했습니다. 그런데 사람의 이목을 게의치 않고, 체면과 위신과 품위를 상관하지 않고 예수님을 보고자 행동을 했습니다. 여러분, 기회가 아무리 많이 주어지면 무엇 합니까? 실천적 행동이 없어서 그 기회를 기회로 만들지 못 하면 아무 것도 아니잖아요!! 예수님을 보려면 세관에서 나와야 하고, 보려면 뽕나무에 올라가야 되잖아요. 세관에 앉아서는 일이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실천적 행동이 있어야 결정한 것의 시작이 됩니다. 삶의 지경에서 나왔고 많은 사람들의 행열 가운데로 뛰어들었고, 뽕나무에 올라갔습니다. 보든지 아니 보든지, 조롱을 하든지 아니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문제 앞에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행동을 했습니다. 몸부림을 쳤습니다. 여러분, 본토와 친척과 아비 집을 떠나는 것이 쉬울까요? 터전에서 이탈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것 또한 고통입니다. 왜요? 이목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어렵지만 그래서 사람은 할 수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가능하고 하실 수가 있습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로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너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믿음과 함께 그리스도의 세계관과 정체성의 회복으로 아브라함의 복을 받아 누리시는 여러분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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