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해년(1443/4) 겨울에 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셨다. 간략하게 예를 들어 보이셨는데, 이름을 훈민정음이라 하셨다. 상형하되 고전을 모방하였다(癸亥冬,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 略揭例義以示之, 名曰訓民正音, 象形而字倣古篆). ㅡ 훈민정음 해례본, 정인지.
세상에는 이른바 가림토 문자설이라는 것이 참으로 꾸준히 돌아다니고 있다. 인터넷의 블로그, 카페, 웹문서 등 곳곳에 가림토 문자설을 정설처럼 올려놓고 방문자에게 이 내용을 퍼뜨려 달라는 것이다. 이런 가림토 신봉자의 사이트는 참 많으나 나는 아직 넷에서 가림토 설의 허구를 비판하는 글을 하나도 보지 못했다. 내가 게을러서일까.
그래서 국문학과 언어학에 전혀 문외한이면서 갖추어지지 못한 논리로 우선 나부터 감히 가림토 설을 비판해 보겠다. 환단고기에 대해서는 기회닿는 대로 비판하려 한다. 더 좋은 글들이 나오기를 기대한다.
이미 까마득히 오래 전에 우리민족은 우수한 표음문자를 발명하여 사용했으며 세종은 단지 그 가림토 문자를 줏어모아 이름만 훈민정음으로 고쳐 리바이벌해서 내놓은 것이라는 주장이 가림토 문자설이다.
이 주장이 얼마나 근거있는 이야기인지 보아야겠다.
환단고기라는 책을 아마 들어 보셨을 것이다. 가림토 문자설은 이 책에서 시작된다. 지금부터 무려 4185년 전인 고조선의 가륵 단군 때 뜬금없이 가림토정음이란 것을 발명하였다하고 그 글의 자체 38자가 실려 있다. 그러고는 그만이다. 더이상은 그 글자가 어떻게 되었다는 것인지 이후로는 일체의 언급이 없이 넘어가버리는 것이다. 이 기록을 가지고 지금 환단고기를 신봉하는 사람들이 4천여 년 전에 이미 우리민족은 우리의 독자적인 표음문자를 가졌다는 것이 환단고기를 통해 증명되었으니 국사교과서와 국어교과서를 수정하라고 끊임없이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단군세기 제3세단군 가륵 2년(BC2181-고고학의 편년상 신석기시대 말기/청동기시대 초기로 분류) 삼랑(중국식 관명임) 을보륵에게 명하여 나랏정음(正音) 38자를 만들게 하여 이를 "가림토" 라고 하였다 하여 그 자모 38자가 실려있는데 얼핏 보아도 소리글자- 표음문자가 분명한 이 소위 가림토정음 중 28자는 그 자체와 모양이 그로부터 무려 3524년 후인 근세조선 세종 25년(AD1443)에 창제한 훈민정음 28자와 완전히 같고 나머지 10자는 거기에 약간의 변형을 가한 것으로 보이는데 만약 그렇다면 훈민정음은 세종이 가림토를 참고하여 옛글자를 응용 표절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된다.
가림토가 실제로 존재한 문자라면 어떻게 해서 3500년 동안이나 깜쪽같이 숨어있다가 문득 세종의 눈에 띄어 훈민정음이 될 수 있었는지 모를 일이다. 가림토의 창제가 사실이었다면 가륵단군 이후 가림토는 세종이전에 단 한 번도 그 모습을 세상에 드러낸 일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태백일사 삼한관경본기 번한세가 하에는 그로부터 1255년 뒤인 이벌천왕 2년에 왕문(王文)이라는 중국인이 느닷없이 이두법을 지어 바치니 천왕이 기꺼하여 삼한에 시행하게 하였다는 것이다. 이미 가림토가 있는데 왜 새삼스레 한자를 가지고 구차하게 글을 삼는다는 것인가? 그럼 그 동안에 가림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된다. 글쎄, 천 년이 넘으면 한 문자체제가 사라질 수도 있겠다. 그럼 이 시대에 이미 가림토가 까맣게 잊혀져서 중국인이 우리를 위하여 이두법을 만들어 주는 형편이 되었다면 그로부터(이벌천왕 2년으로부터) 1269년 뒤에 세종은 어디에서 가림토를 얻었다는 말인가.
가림토 설을 옹호하는 이들은 세종실록 계해년(1443년) 4월의 "옛 전자를 본땄다(倣古篆)"라는 세 글자에 집착, 세종이 가림토 자체(字體)를 모방하여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주장을 굽히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여기서 말한 '고전'이란 뭘 말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고전이란 '옛 전자'인데 훈민정음의 글자모양은 과연 옛 전서체(진나라 때의 소전 小篆)와 흡사하다. '방고전' 3자는 '옛 전서의 모양을 본땄다'라는 뜻이지 어떻게 해석하여도 '옛 가림토를 본땄다'가 아니다. 가림토가 어떻게 해서 '옛전서'가 될 수 있는가?
만약 훈민정음이 정말 가림토를 모방했다면 '방고전'이 아니라 '효고서(效古書)' 또는 모고문(模古文)으로 쓴다는 것은 한문을 조금이라도 배운 사람이면 딴 말 하지 않는다.
훈민정음에 가장 극렬히 반대했다는 최만리의 세종26년(1444) 상소에 이런 글이 있다.
「언문은 모두 옛 글자를 근본으로 하여 새 글자가 아니라 하셨는데 글자의 모양은 비록 옛 전자를 모방했다하나 발음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달라서 실로 옛것을 근거했다고 볼 수 없으므로......諺文皆本古字也則字形雖倣古之篆文 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
최만리는 이 상소에서 분명히 「글자의 모양이 ‘옛 전자’를 모방했다 字形雖倣古之篆文」 하고 또 「발음이나 글자의 조합이 <옛것과 달라서 실로 옛것에 근거했다고 볼 수 없다> 用音合字盡反於古實無所據」라고 하여 새 글자가 가림토를 본딴 것이 아님을 분명히 했으며 그 해 2월 20일 임금께서 최만리등이 올린 상소문을 읽어보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들이 말하기를 발음하는 것이나 글자 조합한 것이 진실로 옛것 같지가 않다고 했는데 설총의 이두 역시 옛것과 다른 소리가 아니냐? 汝等云用音合字盡反於古薛聰吏讀亦非異音乎」했으니 이것은 임금과 신하가 함께 이 새로운 글자가 옛글자를 그대로 베낀 것이 아님을 명백히 한 것이다.
실록 세종25년(1443) 「시월 초 임금께서 친히 말글 이십팔 자를 만드셨다 十月上親製言文二十八字」라 하여 손수 만드셨다(親製)를 분명히 밝혔고(세자인 뒤의 문종과 딸인 정혜공주의 도움을 받았다고 한다) 정인지의 훈민정음 해례본 서문에서「우리 전하께서 정음 28자를 창제하셨다 我殿下創制正音二十八字」라고 하여 세종이「처음 만드셨다(創制)」했고 또 세종어제世宗御製라 하여 세종이 직접 만들었음을 분명히 밝혔다.
(딴 이야기인데...묘호는 임금이 죽고나서 붙이는 것인데 이미 여기에 세종이라는 묘호가 있으니 해례본은 세종 당년, 즉 알려져 있듯이 1446년에 나온 것이 아니다. 여기에 대해 말하는 사람이 왜 아무도 없는지 모를 일이다.)
이들은 늘상 평양 법수교 비문이나 만주 선춘령 이북의 바위에 새겨진 문양, 남해의 낭하리 암각화 등이 이 가림토로 쓴 글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 문양들은 얼핏 보기에도 가림토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으며 가림토 신봉자들은 남해 낭하리의 암각화를 자신있게 읽기를 "서불(徐市또는 서복徐福)이 지나간 곳"이라고 씌어있는 것이라고 주장하나 어떻게 보더라도 그 무늬는 가림토와는 비슷하지도 않으며 그렇게 주장하는 이들도 근거를 대어 설명하지 못하는 형편이다. 단지 '그렇게 쓰였다'고 주장할 뿐이다.
이 낭하리의 암벽무늬는 옛날 진시황의 동남동녀 천 명을 데리고 불로초를 찾으러 떠난 서불이 들렀다가 자신의 흔적을 남긴 것이라는 해석은 예전부터 있어왔다. 그 해석은 진나라 시대의 한자로 '서불과처(徐市過處)' 네 글자라는 것이 예전의 해석이었다. 그런데 지금 가림토로 읽는 사람들은 그게 한자가 아니라 가림토로 새긴 글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한자 네 글자가 아니라 뭔진 모르는데 '서불이 지나간 곳'이라는 뜻은 확실하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불'이라는 이름을 한자가 아닌, 풀어서 쓴 글이어서 읽기가 어렵다고...중국인 서불이 당시엔 아무도 안 살았을 남해를 지나 가면서 굳이 자기 이름을 우리말로 풀어서 그것도 가림토로 새겼다니...
그런데 사실은 이 암벽무늬는 한자도 아니고, 적어도 어떤 '문자'는 아니다. 그 탁본을 보면 보기에 따라서 네 사람과 두 짐승이 어울려 있는 '그림'이다. 다시 말하면 각자(刻字)가 아니라 각화(刻畵)인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태백일사 소도경 본훈을 인용해서 환웅 대성존(桓雄大聖尊)이 신지(神誌) 혁덕에게 명하여 만든 녹도문(鹿圖文)이라고 주장한다.
가림토 신도들이 '가림토 문자가 틀림없다'고 주장하는 평양 법수교 비문은 더 황당하다. 법수교 비문이란 선조16년(1583년)에 발굴된 것인데 발굴된 뒤 곧 분실하여 지금 전해지지도 않고 그 비문의 탁본도 없다. 그것을 가지고 '가림토 문자로 새긴 비'라는 것이다. 그 비문에 대해 당시 사람이 쓰기를 「새겨진 문자가 범자도 아니고 한글도 아니어서 사람이 능히 해독할 수 없다(雕刻文字 非梵 非諺 人莫能曉)」라 하였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오래된 비석을 놓고 그 비석에 새겨진 것 중에 가림토의 ㄱ이랑 ㅅ이랑 닮은 획이 보이므로 이 비가 가림토 문자로 쓰인 비이며 이로써 가림토의 존재가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데 순 한자로 된 문서에도 찾아보면 가림토와 닮은 획이 얼마든지 많이 보인다. 심지어 영어나 유럽의 루운 문자로 쓰인 비에도 가림토나 한글과 같은 획이 많이 있다. 비단 가림토 뿐이겠는가? 일본의 히라가나나 가다가나를 거기 대입시켜도 꼭같이 생긴 부분이 한둘이 아니다. 그럼 일본인이 그옛날 만주 선춘령에 진출하고 북유럽에 깃발을 꽂은 증거라고 주장한다면 웃어줄까, 어떻게 해야 할까?
가림토 신도들에게 묻겠는데 무엇이 증거라는 것인가? 만약 그 비가 정말 가림토로 쓰인 것이라면 단 한 글자라도 읽어야 하지 않는가? 그런데 자신들이 ㄱ이랑 닮았다, ㅂ과 꼭같다고 하는 바로 그 글자를 못읽는 것이다. 그리고 수백 자의 글자 중에 '가림토와 닮았다'라고 지적하는 것은 예닐곱 글자 뿐인데 그것도 글자의 전부가 아니라 글자를 이루는 획의 일부가 닮았다는 것이다.
그 소위 만주 선춘령에서 탁본해 왔다는 비석의 글을 단 한 글자를 읽지 못하면서 언필칭 "가림토의 증거다"라는 것이다. 이것은 학문이 아니다.
가림토가 발명되었다는 BC22세기는 서쪽 메소포타미아에서는 수메르문명의 전성기였다.
이 시기 수메르인은 자신들의 일을 문자로 남겼는데 그 문자는 지금 완전히 해독되는 쐐기문자로서 그 모양과 표기법이 가림토와는 완전히 다르다. 이 수메르의 쐐기문자는 지금 가장 오래된 소리글자라는 것이 정설이며 지금 수메르의 쐐기문자가 새겨진 점토판은 커다란 도서관을 가득 채울만큼 많이 남아 있어 단 한 글자 부스러기도 남지 않은 같은 시기의 가림토와 대조를 이룬다.
환단고기의 삼성기 하를 보면 이 수메르가 수밀이(須密爾)로서 단군조선 이전의 환국신시 때부터 환국의 식민지였다고 적혀 있다. 그러한데 어째서 수메르의 쐐기글은 조선의 가림토와 조금도 닮은 점이 없으며 쓰는 법이 훈민정음과는 비슷하지도 않은지 모를 일이다.
가림토의 발명이 사실이라면 왜 이 글자는 그 이후 쓰인 예가 단 하나도 없으며 이 글자가 새겨진 금석문이나 문서는 씻은듯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수메르의 쐐기글이 지금 세계각국의 도서관과 박물관에 넘쳐나는데 비해 그토록 찬란한 문명을 꽃피우고 세계사를 주도했다는 위대한 나라의 우수한 문자가 어째서 흔적도 남지 않았을까. 법수교의 비문, 선춘령의 비문은 가림토가 아니다. 가림토의 일이 쓰여 있는 단군세기 조차도 왜 가림토로 쓰지않고 한문으로 쓴 것일지.
이미 가림토가 발명되었는데 왜 이후의 일들을 전부 한문으로 기록했다는 것이냐?
환단고기 변한세가에는 괴이한 노래가 두 수 실려있는데 임승국은 이것이 '향가'라고 한다. 좋다, 향가라고 치고 이것은 왜 가림토로 씌어 있지 않는가?
쓰기쉬운 글자가 사라지고 까다로운 글자가 득세한다는 것은 넌센스다. 쓰기편한 글자를 만들어만 놓고 쓰지않고 그대로 없애버렸다는 것을 「따지지 말고 환단고기에 그렇게 기록되었으니 글자 그대로 믿으라」는 것이 과연 어느 정도 학문이랄지 모를 일이다. 더욱 가림토의 시대는 훈민정음의 불행한 시대와는 달리 사대주의의 대상이 아예 없었으며 언필칭 조선이 세계최대 선진국이었다는 것이다. 왜 사라졌는지 추측이나마 할 수 있는가?
훈민정음은 만들어진 이후 숱한 멸시와 박해를 견디면서도 꿋꿋이 살아남아 4백년 뒤 드디어 한자를 추방하고 글자살이의 주인이 되어있는 것이 지금의 모습인데도 불구하고.
환단고기 이외에서는 어떠한 유물 유적 기록 구전에서도 가림토의 존재를 증명해주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고고학적으로도 이와 유사한 흔적이 발견된 적은 조금도 없으며 오직 환단고기에만 존재하는 기록임을 보아 지금으로부터 4200년이나 전에 이와같은 과학적인 문자를 당대에 명령 한 마디로 발명했다고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환단고기와 성격이 비슷한 규원사화에도 가림토의 일은 언급되어있지 않다.
그러함에도 환단고기를 믿고 가림토설을 믿는 이들은 꾸준히, 끊임없이 한글학회 홈페이지 등에 등장하여 훈민정음의 가림토 복제설을 끝도 없이 되풀이 주장하고 있으니 참으로 모를 일이다. 주장의 근거는 단지 "환단고기에 그렇게 기록되었다. 그러니 사실이다"라는 것 뿐이니 이토록 지겨운 일도 없다.
도무지 합리적인 대화가 되지 않는 것이다. 마치 기독교도와 이야기하는 것과 같아서 "거기에 적혀 있는데? 그래도 안믿어?" 이것 외에는 어떤 커뮤니케이션도 불가능한 것이 환단고기의 신도들이다.
일본의 이른바 신대문자(神代文字) 중에서 특히 아히루(阿比留) 문자란 것은 천조대신이 이 세상을 다스리던 아득한 옛날 찬미의 신이 대신을 찬양하기 위해 사슴의 어깨뼈를 구운 뒤 뼈 속에 생긴 금의 모양을 보고 만든 글자라고 한다. 자음 9개와 모음 5개(가림토는 자음 27자 모음 11자다)를 이리저리 연결해 모두 47 형태소로 되어있는 이 글자들은 서기369년 백제의 왕인이 한자를 왜에 전할 때까지 왜에서 쓰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한자가 쓰임에 따라 사용되지 않고 사라졌다는 것이다.
이 문자는 가림토보다 더욱 훈민정음을 닮았는데 일본의 일부 국수주의자들은 이것이 훈민정음의 원형이라고 주장한다. 세종이 신대문자를 베껴서 훈민정음을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글의 원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 둘이나 되는 셈이 되니 한글의 복이라 할지 화라 할지.
가림토와 신대문자는 기묘하게 닮았으면서 사실은 닮지 않았다. 무슨 말이냐 하면, 가림토와 훈민정음은 놀랍게 닮았고 신대문자와 훈민정음도 참 많이 닮았다. 그런데 가림토와 신대문자는 닮지 않은 것이다. 즉 훈민정음을 원형으로 하여 각기 다른 사람이 다르게 변형한 것이다. 그러니 두 문자는 훈민정음과는 닮았으나 이미 조합의 방법이 다른 등 그들끼리는 따로 노는 결과로 된 것이다.
한글의 가림토 원형설을 수용한다면 한글의 신대문자(특히 아히루문자) 원형설이 수용되지 않을 까닭이 없는 것이다. 오히려 아히루문자는 1980년 이후에야 비로소 알려진 가림토보다 그 연원이 더욱 오래되고 쓰인 흔적이 일본의 여기저기에 확실히 남아있는 문자이니 만약 훈민정음의 가림토 원형설을 받아 들인다면 아히루 원형설에 대해서는 뭐라고 배척하려는 것인가? 「가림토는 기분좋지만 아히루는 왜놈 꺼라 기분나쁘다 그러니 아히루설은 받아 들일 수 없다」이게 가능하다고 생각되는지? 학문에서 그런 감정적 국수주의가?
일본의 국수주의 단체가 왜 가림토설을 은근슬쩍 지원하고 있는지 곰곰히 생각해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가림토설을 지지하는 것이 왜,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도.
여기에 대해 가림토 신봉자들은 이렇게 설명한다.「이것이야 말로 가림토의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단군조선에서 만든 가림토는 당시 조선의 관경이던 왜 땅에 흘러 들어가 쓰였던 것이다」
분명히 아히루 문자가 새겨진 비석들은 연대가 길어야 2백 년이다. 그리고 그 글이 보관된 신사들은 오래된 것도 4백년을 넘지 못한다. 신대문자는 일본의 국학자 히라다 아쯔다네(平田篤胤: 1776-1843 아쯔다네는 아쯔시윤으로도 발음)의 작품이란 것은 다 알려진 사실이다. 일본서기, 고사기, 고엽집, 신찬성씨록 등 일본의 고문서 어디에도 흔적이 없고 일인 학자들도 머리를 흔드는 신대문자가 이미 일본서기의 시대 이전에 존재했다고 주장해 주는 것은 일본의 고문화를 빛내주는 일일 뿐이다.
신대문자에 대한 일본학계의 입장은 명확하다. '신대문자는 위조다'라는 것이다. 궁금하신 분은 위키피디아(http://ja.wikipedia.org/wiki/平田篤胤 와 http://ja.wikipedia.org/wiki/神代文字_ )에서 검색해 보시기를 권한다. 위키피디아에는
▲「이것들(신대문자)은 실제로는 고대 문자에는 없고 모두 근세 이후에 만들어진 위작으로 되어 있다」
▲「에도 시기 이후 신대문자 존재설이 더욱 더 활발하게 되어, 결국 신대문자의 실물이 등장하기에 이르렀다」
▲「에도시대 이후, 신대문자로서 소개된 문자는 실로 수십 종류에 이른다」
▲「대대로 조정의 제사를 맡았던 고대 씨족인 사이베(斎部)씨의 장로 사이베 코세(斎部広成)는 '古語拾遺'(808년)에서 "예로부터 문자가 없어 귀/천/노/소를 막론하고 서로 입으로 전하여 앞의 말이 잊혀지지 않게 하였다 蓋聞 上古之世 未有文字 貴賤老少 口口相傳 前言往行 存而不忘" 이라고 기록하여 한자 도래 이전의 우리나라(일본)에는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고 명백하게 쓰고 있다」
▲「기록된 나라시대의 문헌의 표기를 연구한 결과 특수 가나 사용법이 발견되었다. 이것에 의해 나라시대에는 탁음절을 포함해 88음절 존재했던 것이 분명하지만 신대문자의 대부분은 자모수가 헤이안 시대에 만들어진 이로하 노래(いろは歌)나 오십음도(五十音圖)와 같다. 이것은 신대문자가 헤이안 시대 이후에 창작된 것인 것을 나타내고 있다」
▲「신대문자는 한국의 한글과 비슷한데 신대문자가 한국의 한글보다 먼저 만들어졌다는 증거가 아무데도 없다」
▲「이상의 논거에 의해 신대문자는 신빙성이 부족하고 후세의 위작이다는 것이 학계의 정설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일본)에 일찌기 고도의 문명이 존재해 독자적인 문자를 사용하고 있었다면 원래 한자를 수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게다가 신대문자가 있었다고 주장하는 고사 고전 안에는 근대 이후의 용어·개념·회화·자체 등을 볼 수 있어 위서의 혐의가 농후하다」고 일본인 학자 자신이 쓰고 있다. 종합해 보면 신대문자는 일본의 전국시대에 비밀문서를 전하기 위해 일반인이 잘 모르는 조선 등의 문자를 변형해 만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신대문자에는 위에 「수십 종류」라고 했듯이 아히루 문자 말고도 아비루쿠사(アビルクサ) 문자, 이즈모(出雲) 문자, 호쯔마(ホツマ) 문자 등 문자가 20여 종류나 더 있는데 모두 그 정체가 아리송하다. 그 중에서 아히루 문자가 훈민정음ㅡ가림토를 닮았다는 것이다.
신대문자 중의 하나인 쓰꾸시(筑紫) 문자
신대문자설을 믿는 일본인들은 신대문자 중의 다른 문자들은 아히루 문자의 초서체라고 주장하지만 그 모양들은 전혀 비슷하지도 않은, 완전히 체계 자체가 다른 낙서들이다. 그리고 위키피디아에는 신대문자 항목은 있으나 아히루를 비롯한 다른 문자의 항목은 아예 없다. 즉 이른바 신대문자 설은 일본에서도 지지를 받지 못하는 위설인 것이다. 이런데도 굳이 신대문자(더 정확히는 아히루 문자)를 일본의 고대에 사용했던 문자로 보고 이것이 가림토의 흔적이므로 가림토는 실재했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떻든 가림토를 믿고싶어 하는 마음은 알겠으나 견강부회가 지나치다.
(신대문자 존재설의 영향을 받아 명치19년(1886) 「토쿄 인류학잡지」10호에 류큐 옛자(琉球古字), 명치20년(1887) 「토쿄 인류학잡지」18호, 22호에서 坪井正五郎(쓰보이 쇼 고로)에 의한 아이누(アイヌ)문자 등이 있었다고 하는 설도 나왔다. 그러구러 신대문자 설에 따르면 일본은 아주 고대부터 지방별로 문자를 가졌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문자를 쓰는 민족이 사라지지 않았는데 문자가 소멸해버린 예는 많지 않다.)
아히루의 읽는 법에도 납득할 수 없는 것이 많다. 예를 들어 아히루 문자에도 있는 'ㅓ'의 소리는 우리말에서는 발음기호[ә]로 나는데 비해 아히루는 [e]로 읽는다. [e]를 소리내기 위해서는 'ㅔ'가 있으니 굳이 'ㅓ'를 [e]로 소리낼 이유가 없는 것이다.
가림토가 수천년 전 일본에 들어가 쓰였다면 읽는 법 또한 따라 들어간다는 것은 상식이다. 읽을 수 없는 글자는 곧 사라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글자를 읽지 못하면서 글자가 수천년이나 살았다는 것은 언어도단이 아닌가. 그런데 일본인의 발음체제는 ㅓ뿐 아니라 아예 가림토(그리고 가림토를 복사했다고 주장하는 훈민정음도)를 읽지 못한다. 가림토가 일본에 전파되었다고? 일본에서 수천 년간 이 문자를 썼다고? 그런데 가림토를 발음하지 못한다고?
그리고 아히루에 불편을 느낀 일본인은 한자의 획을 따거나 변형해서 히라카나와 가다카나를 만들었다는 것이다. 수천년 써 온 더 합리적인 글자를 버리고.
가림토와 신대문자의 공통점은 이 알기 쉬운 글이 어렵고 까다로운 글인 한자와의 다툼에서 패배하여 영영 사라졌다는 점이다. 이것이 믿기시는가?
인도의 구자라트 지방에서 쓰는 문자가 가림토의 증거라는 주장도 있다. 거리의 모든 간판이 가림토로 되어 있으며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그걸 읽을 수 있다고 흥분하는 것이다.
이것이 구자라트 문자의 모습이다. 가림토 설을 주장하시는 분은 읽어보시기 바란다. 어떻게 읽는가?
이 글자를 보자. 구자라트 문자의 한 글자이다. 이것은 우리나라 말의 <래>자와 비슷하게 보인다. 그러나 이 글자의 독음은 <ㅓ>다. 이것은 구자라트 문자의 모음 한글자이다.
그럼 옆의 이 글자는 무엇일까? 이것은 마치 한글의 <티읕>처럼 보인다. 하지만 이것은 영문 E자다. 영어는 페니키아 문자를 바탕으로 변형되어 온 것이고 모양은 ㅌ과 꼭 닮았으나 음가와 용법은 완전히 다르다. 구자라트 문자의 진실이란 이런 것이다.
환단고기에는 어디에도 가림토로 글을 적었다는 흔적조차 없다. 다만 후대에 훈민정음을 바탕으로 하여 변조한 38자만 있을 뿐이다.
당 현종 때 발해의 사신이 당에 왔는데 발해사신이 가져온 발해 글을 읽는 사람이 아무도 없자 사방에서 수소문 끝에 이백(시성 이태백)을 불러와서 해석하게 해서 망신을 면했다 한다. 이때 이백은 자기 외는 발해문자를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음을 기화로 번역료를 톡톡히 우렸다는데(이태백전서 옥진총담) 여기서 보듯이 발해는 독자적인 자신의 문자가 있었다.
삼국사기 신라 헌강왕 조에는 여진문자에 대한 이야기도 있다. 하여튼 뭔가 문자는 있었다. 그러나 가림토는 아니다.
한자의 발명자는 우리민족이라 한다. 한자는 중국의 은나라 때 발명되었는데 은이 조선족의 나라라는 것은 다 아는 이야기다. 즉 우리민족은 표음문자의 최고봉인 한글과 표의문자의 최고봉인 한자를 모두 발명해 낸, 문자사적으로 좀은 어이없는 민족이다. 그러나 이러한 자부는 여기서 그쳐야 한다.
내가 식민사관 못지않게 미워하는 것이 자만사관이다. 어느 쪽이건 다 왜곡사관이라 우리가 기어코 버려야 한다. 왜곡되지 않은 거울이라야만 자신의 진면목이 보이는 법이다.
이러한 문자에 대한 이야기는 여러 기록이 서로 보충하면서 증명한다. 그런데 가림토는 정말이지 환단고기에 스치듯이 적힌 그것 뿐이다. 도대체 뭘 믿으라는 건가? 임승국 조차도 자신의 "한단고기"에서 가림토에 대한 것은 슬쩍 넘어갔다.
아무나 책을 지어놓고 이것이 바른 역사서니 의심말고 무조건 믿으라 해서도 안되지만 거기 자기 마음에 드는 부분이 있다하여 즉시 경전으로 모시고 비판에 대해서는 욕설로 대해서도 안되는 것이다. 감정을 버리시고 냉정히 논리적으로 생각해 보기 바란다. 과연 세종은 가림토를 베꼈을까? 우리가 지금 쓰는 이 글은 정말 4천 년이 넘는 오랜 문자인가? 꼭 그래야만, 4천 년이 넘은 글자라야만 우리글에 자부심이 생기는지? 5백년이란 너무 짧아서 한글의 빛이 바랜다고 생각되시는지? 글은 그 역사가 오래 되어야만 가치가 있는 것인지?
덧붙이자면, 지금까지 관행대로 가림토라고 읽기는 했으나 사실 加臨土는 가림토가 아닌 가임토로 읽어야 하는 글자다. 이것을 가지고 '가림'은 사물을 가리고 분별한다는 뜻이라는 등 말을 만들어내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