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이란 내가 아니다’1
영처자( 이덕수의 별호)가 대청마루를 꾸며 놓고 선귤당(蟬橘堂)이라 이름하였다. 그의 벗 중에 비웃는 사람이 있어 이렇게 말했다.
“자네는 어찌 분답스럽게도 호가 그리 많은가. 옛적에 열경(매월당 김시습의 자)이 부처 앞에서 참회하여 불도를 닦아 크게 깨닫겠다고 맹세를 하면서 속명을 버리고 법호를 따르기를 원했더니 큰스님이 손바닥을 치며 웃고는 열경에게 이렇게 일렀다구나.
‘한심하도다. 너의 어리석음이여. 너는 아직 여전히 이름을 좋아하는구나. 종이란 몸이 마른 나무 같기에 목비구(木比丘)라 부느리라. 산 높고 물 깊은 여기에서 이름을 해서 어디에 쓰려나!’
네가 너의 몸뚱어리를 돌아보거라. 이름이 어느 곳에 있느냐! 네가 몸뚱어리를 가지고 있기에 그림자가 있다만 이름이란 본디 그림자조차 없는 것이어늘 장차 무엇을 버리고자 하느냐. 너는 네 이마를 쓰다듬어 보아라. 머리카락이 있었기 때문에 빗으로 빗었지만 머리카락을 이미 깎아버린 터에 빗을 머리는 어디에 있느냐?
내가 장차 속명을 버리겠다 한다지만 이름은 옥이나 비단이 아니고 밭이나 집터가 아니며, 금이나 구슬이 돈도 아니고 음식이나 곡식도 아니다. 식기도 아니고 솥도 아니며, 두멍도 아니고 가마솥도 아니다. 광주리, 소쿠리, 나무술잔, 보시기, 병, 물동이 및 제기 따위의 물건도 아니다. 차고 다니는 주머니 칼이나 향주머니처럼 풀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단 관복이나 학을 수놓은 흉배나 서띠, 병부, 인장처럼 벗어버릴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양쪽 가에 원앙을 소놓은 베개와 형형색색 헝겊으로 띠를 늘인 비단장처럼 남에게 팔아넘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떼가 끼는 것도 아니고, 먼지가 앉는 것도 아니어서 물로 씻을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비단 조각이나 목구멍에 걸린 것이 아니엉성 물까마귀 깃으로 끌어내어 토하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부스럼이나 헌 데에 딱지가 앉은 것도 아니어서 손톱으로 긁어 없앨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이것은 너의 이름이지만 너의 몸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남의 입에 달린 것이다. 남의 입에 따라서 불려지니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다. 영광스러울 수도 있고 욕될 수도 있다. 귀할 수도 있고 천할 수도 있다. 함부로 기쁨과 미움이 생기게 된다. 기뻐하고 미워하기 때문에 이름을 가지고 유혹하기도 하고 이름을 가지고 기뻐하게도 하고 이름을 가지고 겁나게도 할 수 있다. 또 이름을 가지고 공포에 떨게도 할 수 있다. 제 몸에 붙어 있는 이빨과 입술이려난 씹고 뱉는 것은 남에게 달려 있어 어느 때에 내 몸뚱어리에 돌아올는지 모르겠다.
비유하자면 저 바람소리 같은 것이다. 소리는 본디 헛것이건만 나무에 부닺혀서 소리를 내어도 도리어 나무가 흔들리게 된다. 너는 일어나서 나무를 보아라. 나무가 고요할 때 바람은 어느 곳에 있었던가? 알지 못 하는가? 네 몸에 본디 이런 것이 없었건만 이런 일들이 있게 되자 이러한 이름을 가지게 되었으며, 그 이름이 도리어 자네 몸을 얽어메고 동여메어 가두어 놓고 파수를 보게 되었다. 마치 저 종을 칠 때 타종을 그쳤어도 그 메아리가 전달됨과 같다.
사람의 몸뚱어리는 비록 백번 죽더라도 그 이름은 언제나 그대로 남아있다. 이름은 빈 것이기 때문에 변하지도 않고 닳아 없어지지도 않는다. 마치 매미에 허물이 있고 귤에 껍질이 있는 것과 같다. 매미의 소리를 찾고 귤의 향기를 추구하는 것은 허물과 껍질에서 할 것이 아니요, 허물과 껍질 그 자체는 텅 빈 것임을 알지 못한다.
내가 처음 태어났을 때 포대기 속에서 응애응애 울었어도 이런 이름은 없었다. 네 부모가 너를 사랑하여 귀여워 하고 길하고 상서로운 글자를 골라 이름을 지어주고 정작 부를 때는 오래 살라고 일부러 더럽고 천한 이름을 지어 불렀으니 모든 게 너를 축복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때 너의 부모에게 의지하여 사느라고 내 몸을 제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네가 크게 성장한 뒤에서야 네 몸이 있게 되었고, 이미 나라고 하는 자신을 세우고 나서는 이름이 없을 수 없게 되었다. 저 ㅇ름이 네게 와서 드디어 뗄 수 없는 짝이 되었다. 두 몸이 잘 만나서 남녀 한쌍씩 이루고 보니 쌍쌍으로 맞는 것이 마치 <주역>의 팔괘와 같았다.
몸은 한 몽뚱어리이지만 불려지는 이름은 너절하게 많아져서 그만 무거워서 다닐 수가 없게 되었다. 비록 이름 난 산수에 놀러 가고 싶어도 홀몸이 아닌 까닭에 가지도 못하고 가족들에 대한 슬픔, 가엾음, 근심이 생긴다. 좋은 친구, 벗님이 술을 가지고 서로 맞이하여 호사질을 즐기려고 부채를 들고 대문을 나서다가도 다시 방으로 들어와서는 가족을 생각하며 훌쩍 떠나지 못한다.
무릇 네 몸이 네 것이 되고부터는 얽메이고 붙들리는 것은 결국 여러 몸이 한 몸에 겹친 때문이다. 네 이름 역시 그렇게 겹치게 된다. 어려서는 유명(乳名)이 있고, 자라서는 관명(冠名)이 있고, 덕(德)을 나타내어서 자(字)를 짓고 거처하는 방에는 당호(堂號)가 있다. 만약 어진 덕을 가졌다면 선생이라 호칭을 덧붙이고, 살아서는 높은 벼슬이름으로 불리고, 죽은 뒤에는 아름다움 시호(諡號)로 일컬어 진다. 이름이 이렇게 많아지니 자연히 무거워 질 수 밖에 없다. 모르겠거니와 네 몸뚱어리가 장차 그 이름들을 이겨낼른지.”
“이 이야기는 대각무경(大覺無經)dp 나오는 말일세. 생가컨대 열경은 은둔자인데도 이름이 아주 많아서 다섯 살 때부터 호를 가졌기 때문에 큰스님이 이렇게 주의를 준 것이네.
무릇 갓난아이는 이름이 없어서 영아라 일킫고, 약혼하지 않은 여자를 처녀라 말하네. 자네가 영처(寧處)라 한 것은 은둔한 선비로서 이름을 가지려 하지 않은 뜻이겠지. 그런데 지금 갑자기 선귤이라고 별호를 지었으니 자네도 앞으로 그 이름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네.. 왜냐고? 무릇 영아는 지극히 약하고, 처녀는 지극히 보드럽네. 사람들은 자네의 약함과 보드러움을 보고는 오히려 영처라고 부를 것이네. 게다가 메미는 소리를 내고, 귤은 향기가 있으니 사람들이 모여들어 자네의 이제부터 장터처럼 붐빌 것이네.“
영처자가 대답했다.
“무릇 큰스님의 말과 같을진데 매미는 허물을 벗어 그 각질이 말랐고 귤은 오래되어 겁질이 빈 껍질이 되었으니 무슨 소리와 빛이며 냄새와 맛이 있겠는가? 이미 좋아할 만한 소리와 빛, 냄새와 맛이 없어졌다면 사람들은 나를 껍질과 껍데기 밖에서 찾으려 하지 않겠소이까?”
-蟬橘堂記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