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원장 기자의 페이스북 포스팅 글
내 주변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친절하다. 그렇게 익숙한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친절함’ 또는 ‘배려’같은 보이지 않는 규율로 얽힌 관계를 만든다. 그 관계가 모여 하나의 성이 되면 그 성에 들어오지 못한 사람들이 생겨난다. 성 밖에 있는 사람들은 왠지 거칠고 무례해 보인다. 사실 나는 사귀어보지 않았으니 그들 한명 한명의 특질을 모른다. 하지만 쉽게 뭉뚱그려 그들을 하나의 ‘무엇’으로 정의한 뒤 멀리하고 비판하고 때론 무시한다. 그것이 ‘혐오’다.
성 밖에 있는 ‘그들’도 다 자신이 엮여 있는 저마다의 성에 살고 있다. 그들에게 나는 그냥 ‘타자’다. ‘타자’는 만나본적이 없는 남이다. 생각을 맞춰볼 기회가 없으니 타자의 생각은 이상하게 이해가 잘 안된다. 이 생각을 함께 성에 살고 있는 친구들끼리 이야기하고 나눠가진다. 사유는 없어지고 연대감이 자란다. 비틀린 연대감은 그렇게 우리가 된다. 반지성은 이렇게 조직화된다. 방콕에서 돌아왔더니 회사 앞에 ‘민노총 수하 KBS기자들은 김정은에게 월급받아라’라는 현수막에 붙어있었다.
성문이 굳게 닫히면 이 생각은 더 굳어진다. 가족들 모임에서조차 쫓겨난 어느 목사님이 소설을 쓰는 조카와 광주에 대해서 논의할 기회는 없다. 그는 노벨문학상을 받은 조카의 글을 폄훼하는 글을 (그것도 조카에게 직접 보내지 못하고) 공개적으로 올렸다. 가족의 갈등은 형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배척하면서 시작됐고, ’518은 김대중 때문이다‘라는 논거가 펼쳐진다. 그렇게 노벨문학상을 탄 조카의 소설은 ‘대한민국이 정의롭지 못해 살만한 나라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이 됐다. (소설 ‘토지’를 보면 어머니는 불공을 드리다 강간을 당하고 아들은 성병으로 불구가 되고 주인공 최서희는 노비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 사회주의자다...이분들은 박경리를 어찌할 것인가)
이런 이들에게 왜 언론이 마이크를 넘겨줄까. 늘 짜증을 내다가 해법은 결국 성을 허무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왜 툭하면 최서원씨의 딸이 우리사회에 던지는 정치적 메시지를 우리 언론이 왜 받아쓰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런데 내가 우연히 산행길에서 그를 만나 깊은 대화를 나눴다면.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그 친구 만나봤더니 사람이 괜찮던데’.
‘트럼프가 개혁하겠다는 대상과 개혁을 원하는 사람들과 그 개혁을 위해 투표장에 나온 사람들이 모두 같은 사람이다’라는 글을 읽었다. 우리가 분노할 대상은 성 밖에 사람들이 아니다. 그 성을 계속 높이 올리는 사람들이다.
원글출처 : 김원장 - 내 주변사람들은 대부분 나에게 친절하다. 그렇게 익숙한 사람들끼리 관계를 맺고 ‘친절함’ 또는 ‘배려’같은... | Facebook
첫댓글 김원장 기자님의 페이스북 글인데 수많은 언론들의 자극적 기사들의 행간의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는 좋은 글이라 생각되어 공유합니다. 우리가 진짜로 분노해야 할 대상은 사람들 사이를 갈라놓고 싸우게 만드는 자들입니다. 과연 그들은 누구일지 생각해 보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