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 피난민의 애환
2024 통일문학 심포지엄 작품집145P 민문자 : 한국현대시인협회
1950년 6.25 전쟁은 우리 민족의 가장 큰 비극이었다. 당시 나는 일곱 살 어린아이로 고향인 청주에서 농사를 짓는 부모 밑에서
북으로부터 밀려 내려오는 인민군의 만행과 피난민의 애환을 보고 자랐다. 정전협정 이후에도 낯선 피난민들은
우리 동네로 들어와 외딴 산 중턱에 기어들어 가고 나오는, 움막집을 짓고 정착하기도 하였다.
내 또래 아이가 동생을 업고 깡통을 들고 와서 밥을 달라고 구걸하기도 했다. 피난민 집 아이들은 이름 대신
“야, 피난민!” 아무 잘못이 없음에도 피난민이란 이유 하나만으로 따돌림을 당하고 공연히 욕을 먹기도 하였다.
그 모습들은 나와는 상관이 없는 그저 피난민은 ‘불쌍한 사람’으로만 깊이 인식되어 있었다.
그런데 나는 성인이 되어 그 불쌍한 피난민이라고 놀림을 당하던 아이 같은, 나보다 세 살 더 먹은 피난민 남자와 결혼하였다.
남편은 철원지방의 유수한 재력가의 후손이었다.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김일성이 주도하는 공산 세력으로 3.8 이북에는
소련군이 일찍부터 진주하여 주민들을 괴롭히는 일이 잦았다. 그래서 일찍부터 신문물에 눈떠 있던 시댁 집안 모두가
6.25 전쟁이 일어나기 훨씬 전인, 1946년에 3.8선 이남으로 내려와 우선 동두천에 자리를 잡고 살았다.
40대 초반의 부모님에게는 아들 삼 형제가 있었다. 6.25 전쟁 당시 첫째는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내무부 건설국에 다니고
둘째는 용산중학교 1학년, 막내인 남편은 초등학교 4학년이었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전쟁이 일어나고 물밀듯이 공산군이 남침하자 시댁 식구들은 동두천에서 가까운 안흥리로 들어가 우선 피난살이를 하였다.
유엔군의 도움으로 우리 국군이 수복하고 북진할 때 남편의 큰형님은 바로 대한민국 군에 입대, 전선에 투입된 후 행방불명되고
아버님은 퇴각하는 괴뢰군 총에 사살당하셨다. 1951년 1.4 후퇴 당시, 마흔한 살 어머님은 황망 중에도
어린 두 아들만이라도 살리려고 피난길에 나섰다. 남으로 남으로 내려가는 군중과 함께 때로는
달리는 기차 지붕에도 매달리기도 하면서 정착한 곳이 경북 금릉군 아포면 국사리였다.
아무도 아는 이 없는 낯선 땅 사십 대 초반의 젊은 아낙이 어린 두 아들을 데리고 얼마나 가슴 저리고 황망했을까?
당시 그 지역 유지이신 면장 어르신이 이 피난민들에게 방 한 칸을 마련해주셔서 그곳에서 살았다.
초등학교에 들어가 공부하려고 해도 아이들이 하도 놀려대고 따돌림을 당해서 그럴 수가 없었다.
2년간은 학교에 가지 못하고 부잣집 소 꼴을 베어다 주고 심부름하며 밥을 얻어먹기도 하였다.
그러다 2년이 지나니 훌쩍 자란 탓인지 학교에 들어가 반장 노릇도 하고 친구들과도 잘 어울릴 수 있었다.
중학교 때는 반장이라고 몇몇 친구는 자신의 도시락 반을 남겨주기도 했단다. 어머님은 생활용품을 광주리에 이고 다니며
행상으로 가계를 이으시고 형님은 경찰지서 사환 노릇을 하면서 어렵게 중학교를 마쳤다. 거기서 중학교를 마치고
김천농업고등학교에 합격했을 때, 서울에서 교감 선생님으로 계시는 백부님의 연락을 받고 온 식구가 상경하였다.
그 후 이것저것 일하면서 서울에서 고학으로 고등학교 대학교를 졸업하고 건설회사에 취직하였다.
세월은 빨리 흘러 ‘피난민’이라고 무시당하던 열 살 아이가 어엿한 중견 건설회사 경리과장이 되었다.
서른 살 노총각으로 결혼도 하였다. 나름 행복한 결혼생활에 세월은 흘러 삼 남매와 손주도 넷이나 두었다.
아련히 제2 고향이 된 국사봉 아래 동네인 국사리가 그립기만 하다. 남편은 자주 이렇게 뇌까린다.
“나 배고플 때 밥 먹여준 곳, 고마운 곳이지!”
그 어릴 때 친구들이 동창회를 한다고 해마다 소식을 전해 온다. 건강했을 때는 한달음에 달려갔었지.
이제 오랜 세월 동안 신장 투석환자로 팔순 노인이 되어 보행도 불편하니 마음만 뜨겁다. 어쩌나?
어렵게 바쁜 아들에게 귀 띔을 해 보았다. “이번 주 금요일에 국민학교 동창회에 가고 싶구나!”
“예, 제가 모시고 다녀오겠습니다.” 어쩌면 이번 방문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염려하는 마음을 안다.
어제오늘 남편의 기분 좋아 보이는 모습을 바라보는 나의 기분도 참 좋다.
요즈음 국내외 정세 정보는 전쟁의 위험이 늘 상존해 있다는 점을 시사하고 있다. 전쟁의 피해는 이렇게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가정과 나라 전체를 불행의 도가니로 몰아넣는다. 아직도 두 동강 난 한반도가 통일되고 진정한 평화는 언제 오려나 걱정이 많다.
지난날 고성통일전망대에서 바라본 북녘땅, 그리고 해마다 남편 조상님들이 잠들어 계신 비무장지대 안의 야월산 선영을 찾아가자면
늘 안타까운 마음이다. 철원 대마리 남방한계선 초소에서 밤낮으로 근무하는 젊은 군인들에게 주민등록증을 맡기고
벌초나 성묘하려고 간다. 9월에 열렸던 2024 한국현대시인협회 심포지엄과 같은 지식과 깨우침으로 통일을 위한
우리 모든 국민이 애국심을 더욱 단단히 하면 좋겠다. (원고지 13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