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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불교학자-시간은 없고, 공부는 남았고 / 정병조
나의 삶 나의 불교
불교학도가 되기까지
정병조
나는 대대로 기독교를 신봉하던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청소년 때까지 예수 믿는 일은 나의 일상이었다. 주일학교를 거쳐 매주 수요일 밤, 일요일 낮에는 교회를 다녔고, 집에서도 온 가족이 토요일 날 모여 가족예배를 보았다. 고역이라면 한 달에 한 번쯤 돌아오는 나의 기도시간인데 어른들 앞에서 찬양과 참회를 섞어서 점잖은 표현을 하는 일이 힘들고 싫었다. 불교와는 철저히 차단되었고, 고2 때 불국사로 수학여행을 갔던 것이 불교와의 첫 만남이었다. 나는 온 세상 사람들이 다 예수 믿는 줄 알고 성장하였다.
대학 입학 때도 별생각 없이 고려대에 진학하였다. 아버지가 하도 이과(理科) 진학을 집착하였기 때문인데, 문과에 가면 밥벌이가 힘들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막상 입학하고 보니 학교생활이 너무 지겨웠다. 실험시간에는 포르말린 냄새가 코를 찌르는 대합조개 해부를 해야 했고, 알아듣지 못할 어려운 용어들을 들으면서 기계 조작을 해야만 했다. 도저히 이 생활을 계속할 수 없었지만 뾰족한 방법이 없었다. 기껏 생각해 낸 것이 학군단(ROTC)에 가는 길이었다. 2학년 마칠 무렵 응시하였는데 낙방하였다. 참담한 심정으로 청진동에서 술 마시는 일로 소일하였다.
어느 눈 오는 초겨울이었는데, 당시 서울대 문리대에 다니던 친구가 좋은 철학 강의를 들어보자고 했다. 철학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고작해야 머리 길게 기르고 심각한 표정으로 괴상하지만 고상한 말을 하는 학문 정도로 이해하고 있었다. 호기심이 나서 친구를 따라나섰다.
당시 동숭동에 서울대가 있었는데, 어느 늙은 교수가 강의를 진행하였다. 난생처음 듣는 철학 강의였는데 생소하지만 흥미로웠다. 동서고금을 넘나드는 해박한 지식에 매료되었고 청중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 세련된 매너도 좋았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그가 철학과의 박종홍 교수였다. 그분의 마지막 당부는 뒷자리에 앉아 있던 나에게 충격으로 다가왔다.
자신은 서양철학을 전공하는 사람인데 꼭 해보고 싶은 일이 한국철학을 세계적인 학문으로 정착시키는 것이라고 하였다. 한국인이 자신의 역사, 문화, 철학을 모른다면 한국인의 자격이 없지 않으냐고 반문하였다. 한국철학을 정립하려면 불교와 유교를 공부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신라, 고려, 조선을 거치는 2천 년 역사는 바로 이 두 종교의 공로라고도 했다. 그런데 막상 공부를 시작하다 보니까 한문 위주의 문헌들과 난해한 이론 때문에 늙은 자기에게는 오직 부담뿐이라고 했다. 눈도 잘 안 보이고 이해력도 떨어져서 별 진척이 없다는 것이다. 이 자리에 있는 젊은이들은 부디 내 말을 명심해서 한국의 철학에 정진하라는 당부였다. 분필을 칠판에 던지면서 표연히 강의실을 떠나는 그 모습은 오랫동안 내 가슴에 잔영(殘影)으로 남아 있었다.
그 길로 나는 동국대학교로 발길을 옮겼다. 그때의 내 생각은 우선 동국대에서 불교 공부를 하고, 석사과정은 성균관대로 가고 싶었다. 박사과정은 도교 공부를 위해서 산속에서 지내면 유 · 불 · 도 삼교를 어느 정도 통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였다. 스무 살 청년의 그때 결심으로부터 벌써 55년의 세월이 지났다. 지금 나는 불교학 교수로서 일생을 보냈지만, 유 · 불 · 도 통달은커녕 불교 한 분야의 연구를 위해서도 내 한평생이 짧다는 것을 절감하고 있다.
동국대학교 창구에 있던 직원은 내 말을 다 듣고 나더니 2학년 편입을 제안하였다. 지금 당신이 전공하려는 불교학과는 차이가 있기 때문에 2학년 학점은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차라리 1학년으로 입학하겠다고 하였다. 별것은 아니지만 편입이라는 딱지를 달고 싶지 않았다. 터벅터벅 걷다 보니 을지로3가까지 왔다. 입시까지는 두 달이 남았을 뿐인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영어와 국어는 그럭저럭 치르겠지만 수학과 제2외국어는 난감하였다. 학원에 찾아 들어가서 두 달 동안 두 과목을 완성시켜 달라고 떼를 썼다. 그렇게 번갯불 입시공부를 해서 인도철학과에 겨우 합격하였다.
이제 문제는 부모님과 집안 어른들을 설득하는 일이었다. 모든 분의 반응은 내가 비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더구나 불교라는 헛된 공부를 하는 한, 의절을 하는 일이 있어도 집안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강경한 통보였다.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명언은 내 경우에도 어김없이 적용된다. 아버지는 내게 한 가지만 약속해달라고 하였다. 불교 공부를 하더라도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는 다짐을 하라고 하였다. 나는 즉석에서 그러겠다고 하였다. 나 또한 불교를 믿는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의 스승 이기영, 서경수
동국대학에서 들었던 불교 강의는 퍽 흥미로웠다. 획일적이고 권위적인 사고방식에 젖었던 나에게 불교가 가진 자유분방함, 인간의 의미를 관조하는 사상성 등은 큰 공감을 주었다.
이기영(李箕永) 교수의 강의는 특히 나를 매료하였는데, 당시의 동국대 교수들이 일반적으로 보여주었던 한문 중심, 문헌학 위주의 학문 태도와는 확연히 다른 연구방법이었다. 그는 한문 위주의 경학(經學)보다 인도고전어를 비롯한 원전 위주의 공부를 강조하였다. 또 불교학 자체의 공부에 매달리다 보면 근시안적 안목에 빠질 수밖에 없다고 하였다. 따라서 불교 공부를 교학적 측면보다도 역사, 문화, 고고학, 신화학 등의 주변 학문과의 연계 속에서 종합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키워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나는 그분을 통해서 불교학 연구의 방법을 깨우쳤다. 유럽식 문헌학, 비교종교적 관점 등을 서서히 익혀 나갔다.
이 교수는 언어에도 상당한 조예가 있었는데 불교 고전어인 산스끄리뜨어, 빨리어는 물론이고 한문, 영어, 불어 등에 능통하였다. 식민시대를 경험한 세대였기 때문에 일본어도 능수능란하였다. 그러다 보니 자료 인용이나 논문의 비블리오그라피(Bibliography) 작성 등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을 정도였다. 그분이 프랑스 유학을 마치고 동국대에 정착하면서 한국의 불교학계는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불교의 근원적 이해, 불교가 가진 위대성에 대한 재발견, 그리고 복잡한 여러 불교 종파의 교리를 일승적(一乘的)으로 회향하는 일 등이 바로 그의 현대 한국불교를 향한 화두였다.
이와 같은 전형(典型)을 원효(元曉, 617~686)라는 프리즘에서 찾은 점 또한 괄목할 만한 사상적 기여였다. 물론 한국불교를 원효 한 분으로서만 보려고 했던 한계점도 지적받을 수는 있다. 그러나 그분을 통해 한국의 불교 교학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것만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로, 오로지 불연(不然, 이기영 거사의 법명)거사의 공로였다고 볼 수 있다.
서경수(徐景洙) 교수 또한 독특한 이력을 가진 불교학자였다. 서울대 종교학과를 나와서 동국대 대학원에서 불교학을 연찬하였다. 불교신문사 주필을 역임하였고 인도 네루대학에서 3년을 머물면서 한(韓) · 인(印) 문화교류에도 큰 업적을 남겼다. 그분의 불교 연구는 언제나 물음표로부터 시작하였다. 그분이 제일 싫어했던 학문적 태도가 있다. ‘왜 그 교설이 옳으냐?’라고 물었을 때, 그것은 불교 경전에 담겨 있기 때문이라는 한심한 답변을 내놓는 것이었다. 그런 태도를 경멸하며, 그는 ‘왜 그 불교의 진리가 옳은가’ 하는 점을 오늘의 언어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또 서 교수는 논문의 질(質)을 굉장히 중요시하였다. 한문투성이, 영어 남발 등의 기술 태도는 결국 자신의 부족함을 지우려는 가식(假飾)일 뿐이라고 보았다. 또 논문도 ‘아름다워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아무리 고매한 이론을 담았을지라도 일반인들에게 이해될 수 없다면 무용지물일 수 있다고 경고하였다.
그분은 많은 논설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늘 간결하고 핵심을 찌르는 탁월한 능력을 갖췄었다. 긴 수염과 번쩍이는 대머리가 트레이드마크였던 그는 한국불교의 이단아였다. 늘 종단의 비합리성을 비판하였고, 고리타분한 문헌학에 매몰된 불교 연구 태도를 경원시하였다. 그래서 그분은 극명하게 엇갈리는 평가를 동시에 받았다. 매몰차고 냉정하다는 부정적 평가와 함께 선구적 안목을 지닌 신(新)지식인이라는 긍정적 평가이다. 홍익대 총장을 지낸 이항녕 교수는 늘 사석에서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이기영은 원효의 화신이고 서경수는 달마대사의 후신(後身)이다.” 아마 이와 같은 반골적 기질 때문에 법정 스님과 지극한 도반 관계를 유지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이 두 분을 통해서 내 불교학의 뼈대를 이루었다. 언젠가 방지하 스님이 내게 이런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이기영, 서경수 두 분과 함께 담소를 나누었는데, 그때 화제는 불교 연구 인력이 너무 부족하다는 한탄이었다고 한다. 특히 젊은이들이 불교 공부를 기피하기 때문에 한국불교가 큰 위기에 직면했다고도 하였다. 그때 이기영 교수가 “그래도 정병조 하나는 건졌잖아.” 하니까 서경수 교수가 “그 사람은 우리 둘의 합작이야.”라고 말씀하면서 두 분이 박장대소했다는 말이었다. 이 일화가 동국대 내에서 퍼지면서 내 동료들은 나를 이부지자(二父之子)라고 놀렸다.
불교를 믿게 된 계기
대학 4학년이 될 때까지 나는 열심히 불교 공부는 했지만, 불교를 믿는 입장은 아니었다. 법당에서 삼배하고 스님들과 합장 인사를 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의 공감은 부족했던 모양이다. 졸업을 얼마 남기지 않고 졸업여행을 떠나게 되었다. 익산을 중심으로 해서 미륵사지, 정림사터, 왕궁리 등을 답사하였는데 당시 지도교수는 황수영(黃壽永), 서경수 두 분이었다.
나는 그때 왕궁리 석불 앞에서 섬뜩한 경험을 했다. 그곳의 석불은 많이 훼손된 상태에서 초라한 전각에 모셔져 있었다. 목은 참수당해서 없어져 버렸고 몸통에는 쇠 지렛대로 북북 긁힌 상처가 선명하게 보였다. 나는 어떤 몹쓸 사람들이 이런 만행을 저질렀을까를 상상해봤다. 아무리 자신이 믿는 종교가 소중하더라도 그것이 다른 종교를 파괴하는 일과 동일시될 수는 없지 않을까? 나는 그 부처님 앞에서 한동안 멍하니 합장한 채 서 있었다. 그때 마음속으로 굳은 결심을 하게 되었다. 비록 하찮은 목숨이지만 앞으로는 불교를 지키고 불법(佛法)을 펴는 일을 내 필생의 업(業)으로 삼아야겠다는 다짐이었다. 불교 공부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던 석사, 박사과정 때도 나는 이 결심을 기회 있을 때마다 되뇌고 다짐하였다. 그 이후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나는 부처님 시봉하는 일에 내 젊음과 능력을 바치면서 살아왔다.
나는 1980년대 이후부터 여러 종교의 모임에 늘 불교 측 대변인으로 참석하였다. 그때의 멤버들은 가톨릭의 노길명 교수, 개신교의 김경재 교수, 유교의 최근덕 교수, 종교학의 윤이흠 교수 등이었다. 우리는 종교 간의 대화모임을 활성화하기 위해서 월별로 주제를 정하였다. 이를테면 ‘구원과 해탈’ ‘극락과 천당’ ‘윤회’ 등으로 각자의 종교 입장에서 정의를 내리고 실천하는 방안을 모색하였다. 각자의 종교를 고집하는 호교적(護敎的) 자세에서 벗어나 상대를 이해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다음 해에는 교리를 떠나서 우리 사회의 공동선을 계발하는 쪽으로 향했다. ‘범죄감소를 위한 종교적 역할’ ‘매장문화의 개선’ ‘복지확대의 방안’ 등이었다. 우리가 이 모임을 통해서 이룩한 일들은 많았지만 가장 내세울 만한 점은 화장(火葬) 제도의 정착이었다. 특히 가톨릭이나 개신교 등에서는 교리적인 배치 등의 문제가 있었음에도 이 사업에 동참해주었다. 지금도 나는 이웃종교들의 결심과 실천을 고맙게 여기고 있다.
불교를 믿게 된 또 하나의 계기는 동국대학교에서 교수 임용을 앞둔 시점이었다. 불교대학에서는 도저히 티오(TO)가 나오지 않던 중에 철학 전공을 모집한다는 공고가 신문에 났다. 곧 서류를 갖추어서 제출했는데 학교에서 통보가 왔다. 모월 모시에 전공논문과 영어시험을 치른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정재각(鄭在覺) 총장 재직 때였는데 착잡한 마음으로 시험장에 나갔다. 첫째 시간은 논문, 제출 문제는 각자가 전공하는 분야에서 그 전공학문의 문제점을 논술하라는 내용이었다. 두 번째는 영어시험인데 어느 특정한 연구과제를 선정하고 그 과제를 미국의 연구재단에 제출하는 내용을 영어로 작성하라는 것이었다. 열심히 쓰기는 했는데 도무지 자신이 없었다. 당시 철학 전공에는 한 명을 뽑는데 8명이 응모하였다. 더구나 그중 2명은 현직 대학교수였다.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 길로 2박 3일간의 기도여행을 떠나, 강화도 정수사(淨水寺)로 갔다. 방부 들이고 큰방에 짐을 풀자마자 기도정진을 시작하였다. 내 평생에 그토록 간절했던 심정은 다시없었을 법하다. 그래도 행여나 하며 온갖 생각에 번민을 거듭하던 중, 학교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싶어 담당자에게 캐물었다. 교수 2명을 포함해서 3명이 두 번째 영어시험에 결시(缺試)해서 영점 처리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 불가사의한 일 이후에 나는 더욱 열심히 불교를 믿게 되었다.
불교학, 올바른 믿음의 첩경
대승불교의 핵심적 가르침 중에 문(聞) · 사(思) · 수(修)라는 언급이 있다. 많이 듣고 생각하고 수행해야 한다는 뜻이다. ‘들을 문(聞)’이라는 글자는 다문(多聞), 즉 많은 가르침을 섭렵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심지어는 한 번 들은 내용도 또다시 들으면 도움이 된다고 했다. 왜냐하면 같은 법문일지라도 두 번째는 내가 달라져 있기 때문이다.
젊었을 때 《로미오와 줄리엣》이라는 소설을 좋아했던 때가 있었다. 애틋하게 사랑한 젊은이들의 처지와 가문의 관행 때문에 반대하는 양가의 부모를 보면서 기성세대의 위선을 비웃기도 했다. 무엇보다 우선해야 할 것은 젊은이들의 사랑뿐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또 다른 생각을 한다. 왜 젊은이들은 저렇게 조급할까? 어른들에게는 지켜야 할 체면도 있고, 그 장래를 염려하는 또 다른 시각도 있다. 사랑이 이들의 인생을 보장해주는 명약은 아니다. 조금만 기다리면 결혼시킬 텐데, 그것을 못 견뎌서 부모 가슴에 대못을 박고, 저희끼리는 자결한다. 너무 안타깝다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아마 그래서 셰익스피어의 소설을 고전이라고 하는지도 모르겠다. 오래되기도 했지만, 세대에 따라 느끼는 감정의 곡선을 절묘하게 묘사했기 때문에 위대한 저술일 수 있다. 따라서 많이 들어야 불교학의 지평이 넓어질 수 있다.
다음의 ‘생각 사(思)’ 자는 그 많은 지식을 내 것으로 삼는 공부 방법이다. 아무리 많이 배워도 가슴속에 새기지 않으면 무용지물이다. 불교 경전마다 그 후반 부분에 이 경을 수지독송(受持讀頌)하는 공덕에 대한 찬탄이 어김없이 나온다. 처음에는 단순한 수사라고 생각했다. 이 경전을 수지(받아 지니고) · 독송(입으로 외우다)한다면 경전에 대한 홍보가 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그러나 반복적으로 설파되는 이 구절은 또 다른 의미가 숨겨져 있지 않을까를 고민해 보았다. 수지는 단순히 받아 지닌다는 뜻이 아니다. 가슴속에 지닌다, 새긴다는 의미이다. 부처님의 가르침을 귀로 듣고 마는 것이 아니라 내 폐부 속에 아로새긴다는 뜻이다. 독송도 마찬가지이다. 서산 대사의 지적처럼 독송은 외운다는 뜻이 아니다. 염불(念佛)은 입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생각하고 다짐하는 수행일 때라야 내 것이 될 수 있다. 따라서 두 번째의 ‘사(思)’는 이제 내가 관념적으로 알고 있는 불교를 나의 일부로 삼는 공부이다.
세 번째의 ‘수(修)’는 닦는다, 실천한다는 뜻이다. 흔히 세상의 종교들은 자신의 진리를 믿고, 그 믿음을 통해 구원(불교에서의 해탈)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불교에서는 이와 같은 믿음을 부정한다. 잘못 믿으면 맹신(盲信)이 되고, 지나치게 믿으면 광신(狂信)이 된다. 불교는 믿으라는 종교가 아니라 먼저 머리로 이해한 다음, 그 이치를 바탕으로 실천해야 한다는 가르침이다. 따라서 불교는 알고 믿어라, 믿으면 실천하라는 가르침이다.
불교학은 바로 이 불교 이해의 열쇠이다. 부처님은 누구인가. 불교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인도 · 중국 · 한국의 불교적 위인들은 누구일까. 현실 속에서 불교는 어떠한 능력을 가질 수 있는가. 이 모든 것을 오늘의 언어와 시각에서 재조명할 줄 알아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불교는 언제나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지금의 우리가 겪는 숱한 우환 · 고통 · 슬픔 등을 불교적 관점에서 이해하고 실천해야 한다. 그때 비로소 2천5백 년 전의 불교 가르침은 오늘의 우리에게 새롭게 다가설 수 있다.
현대의 한국불교 모습은 적잖은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가장 심각한 점은 종단의 불화이다. 그래도 현재는 많이 개선되었지만, 여전히 물밑으로는 불화의 조짐과 기미가 남아 있다. 또 불교 교단에 출가자가 감소하는 문제, 사찰 경영의 상업화 현상, 스님들의 세속화에 따른 여러 부작용 등 많은 문제가 잠재해 있다. 그 결과 최근에는 불교 인구가 부동의 1위에서 2위로 내려앉은 점은 단순한 현상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한국불교의 미래를 긍정적으로 보려고 기대하고 있다. 그 이유는 불교학의 전통이 굳건하고, 스님들의 수행 이력이 여전히 존중되고 있기 때문이다. 교학적 뒷받침 없는 종교는 사상누각을 면치 못한다. 비록 왕성한 활약을 벌이고 있는 듯이 보이지만 그 허장성세는 곧 무너지게 마련이다. 불교가 비틀거리면서도 쓰러지지 않고, 불교가 여전히 한국의 영향력 있는 종교로 남아 있는 이유는 재가 신자들의 지성화가 큰 몫을 차지하고 있다. 따라서 대학은 물론이고, 적어도 본사 단위로는 반드시 초 · 중 · 고교의 교육기관을 육성 발전시켜야 한다고 생각한다.
석주(昔珠) 스님과의 인연
내가 석주 스님을 처음 뵌 것은 1968년 여름이었다. 도반이 그 어른의 상좌여서 자연스럽게 찾아뵐 수 있었다. 공부에 목말라하던 때여서 글공부 좀 해보려고 마음을 먹었었는데, 첫인상이 너무 단정하고 청정해서 믿음이 갔다. 삼청동 칠보사에서 주석하실 때였는데, 우선 눈에 들어오는 것이 대웅전 현판의 ‘큰법당’이라는 글자였고, 법당 외벽의 주련(柱聯)도 모두 한글로 번역되어 걸려 있었다. 신선한 충격이었고, 불교나 사찰도 변할 수 있구나 하는 가능성을 보았다. 그 이후 자주 찾아가서 불교 이야기, 정화 당시의 일화들을 듣곤 하였다.
결혼한 날, 염치없게도 수계의식을 집행해 주십사고 말씀드렸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저녁, 우리 내외는 칠보사 큰법당에서 평생 잊을 수 없는 수계의식을 치렀다. 너울거리는 촛불 밑에서 낭랑하게 법문하시던 큰스님의 모습이 지금도 아련하다. 스님은 나에게 법해(法海), 집사람에게 향연화(香蓮華)라는 법명을 주셨다. 이름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다른 이름을 법호로 써도 무방하다는 자상한 말씀도 함께……. 나는 법해라는 이름이 좋다. 다만 너무 흔하다는 단점이 있어서 도반들이 지어준 석연(石然)이라는 이름과 함께 쓰고 있다.
스님의 도움으로 선 서화전을 연 적도 두 번이나 있고 각종 언론과의 인터뷰 때도 늘 내가 스님의 파트너였다. 한국불교연구원에서 일할 때였는데, 스님이 전화를 하셔서 내일 좀 들르라고 말씀하셨다. 자주 전화하는 분이 아니어서 은근히 걱정되었다. 다음날 스님은 아무 말씀 없이 두툼한 봉투를 내밀었다.
“아니, 웬 돈입니까?”
스님은 〈불교신문〉에서 보았는데 정 교수가 연구원 법당에 부처님 모신다는 모연문을 실었기에 보았노라고 말씀하였다. 그 당시의 5백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니었다. 내가 머뭇거리며 돈을 받지 못하자 다시 말씀하셨다.
“중이 해야 할 일을 정 교수가 하는데, 이 정도의 도움도 못 주겠는가?”
그 길로 목아 박찬수를 찾아갔다. 자초지종을 말하고 부처님을 모시겠다고 하면서 돈은 이것밖에 없으니 남으면 갖고 모자라면 보태라고 말했다. 금박(金箔)을 한 목불좌상이었는데, 상호가 석주 스님을 연상시켰다. 단정하면서 품위 있는 그 부처님을 대할 때마다 큰스님의 원력이 그리워진다.
만년에 석주 스님은 승려들의 노후복지에 지대한 관심을 가졌다. 그 터를 보려고 여러 곳을 다녔는데, 나는 해운대와 온양 두 곳을 스님을 모시고 동행했다. 나중에 온양에 터를 잡으시고 그곳에 양로원 형태의 절을 지었다. 나는 해마다 정초에 그곳을 찾아 세배하곤 하였는데, 얼핏 보아 스님들보다 연로한 속인들이 더 많아 보였다. 공양 때는 식판 위에 음식을 담아 먹곤 했는데, 언젠가 반찬 중에 멸치가 보였다. 스님이 얼른 내 표정을 보더니 “노인들이 많아서 절대적인 칼슘 부족을 좀 개선하려고 했으니까 너무 허물 삼지 마시게.” 하곤 웃으셨다.
그날 별안간 “정 교수, 금년에 몇 살이지?” 하면서 나이를 물었다. “예, 금년에 환갑입니다.” 내 딴에는 나도 어리지 않다는 표현이었는데 스님의 답변은 기상천외였다. “그래, 참 좋은 나이구나.” 그때는 무슨 뜻인지 잘 몰랐는데, 요즘은 내가 환갑 지났다는 사람들에게 지긋이 말한다. “참 좋은 나이군요.”
불교학자의 길
나는 1980년부터 32년 동안 동국대학교 불교학 교수로 재직하였다. 2011년 금강대 총장으로 부임하고 4년 임기를 채울 때까지 36년을 교직에 있었던 셈이다. 불교 공부를 썩 잘하지는 못했지만, 외길 인생을 걸었다는 점만은 뿌듯하다.
나의 불교 공부는 나이와 시대에 따라 많은 변화가 있었다. 불교학의 초기, 즉 1970년대에는 나의 관심이 인도철학에 쏠려 있었다. 물론 나의 인도철학에 대한 접근은 불교의 원류로서 이해하려는 목적이었다. 사실 세계의 거의 모든 불교학자는 나와 비슷한 목표로 인도철학 · 인도불교에 접근하고 있다. 나의 초기 저술인 《인도철학사상사》(1978)도 같은 맥락이었다.
1980년대 이후 나의 관심은 ‘불교 현대화’에 매달리고 있었다. 1974년 법정 스님, 서경수 교수 등의 노력으로 출간된 《우리말 불교성전》은 불교 현대화의 초석이 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사실 그동안의 불교학은 문헌학(엄밀하게는 훈고학이지만), 한국불교 등에 치중하고 있었다. 불교학 연구 인력이라야 동국대 중심의 몇몇 연구자가 전부였으니까 수적으로나 질적(質的)으로도 매우 열악한 상황이었다. 물밀 듯한 외래 사조의 범람, 서양 종교의 공격적 선교 활동, 우후죽순처럼 한국사회를 뒤덮고 있는 기독교적 가치관 등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았던 불교학자들에게 불교 현대화의 기치는 폭발적인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그에 부응하여 도심포교도 활성화되었고, 아파트단지 안에도 ‘절 만(卍)’ 자가 심심찮게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불교 현대화의 방향을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하였다. 첫째는 이념적 현대화이다. 즉 불교사상을 현대적 시각에서 재조명하고, 현대의 여러 양상을 불교적 입장에서 정리 대응해야 하는 일이다. 두 번째로는 행정적인 현대화이다. 사찰 운영이 주지와 삼직(三職)에 의해 주먹구구식으로 진행되는 것은 시대착오적인 발상이다. 조계종을 중심으로 볼 때 과연 총무원 중심제냐 본산 중심제냐 하는 문제도 정리해야 한다. 또 과연 종회라는 기능이 꼭 있어야 할까 하는 의문도 제기하였다.
나는 이 문제에 대하여 본산 중심제로 전환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그럴 경우 지금의 25교구제는 새롭게 짜여야 한다. 우선 우리나라 전체 인구의 4분의 1이 모여 사는 서울에 본사가 없다는 것은 불합리하다. 강남과 강북에 각각 한 군데씩 두 곳의 본사 · 비구니 본사를 선학과 교학으로 나누어 역시 2개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 현재 말사인 전통사찰들을 본사로 승격시켜야 한다. 부석사, 보경사, 무량사 등이 그 대상이 될 수 있다. 아울러 해외 포교를 주관하는 해외교구 본사도 지정해야 한다. 현재의 총무원은 본사의 연락사무소 혹은 횡적인 연관기능을 수행하면 된다. 불행하게도 나의 주장은 여전히 허공을 맴도는 메아리로 남아 있다.
1990년 이후 나의 불교학적 관심은 인도불교에서 한국불교로 쏠렸다. 《한국 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1995) 《실천불교》(2002) 등은 그 당시 나의 불교학적 응집이었다. 이 당시에 나는 한문 문헌의 중요성도 재발견하게 되었다. 막연히 한문 문헌을 훈고학에 그친다고 생각했던 나의 시각을 서서히 교정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관심은 결국 한국불교의 세계화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한국불교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찾으려는 노력은 자칫 국수적(國粹的) 경향에 빠질 수 있다. 그 점을 늘 염두에 두면서 한국불교를 세계화할 수 있도록 노력하였다. 그때 가장 절실한 과제는 영문 서적 출간이었다. 《한국불교사(History of Korean Buddhism)》(2007) 《성사 원효(Master Wonhyo)》(2011) 등은 그 첫걸음마였다. 나는 건강이 허락하는 한 이 영문 도서 출판에 힘을 쏟아부으려고 작정하고 있다.
현재의 나는 응용불교(應用佛敎, Applied Buddhism)에 흠뻑 빠져 있다. 아직 명확하게 학술적 근거를 갖는 용어는 아니지만, 그에 담긴 뜻은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 《불교윤리학 입문(An Introdu-ction to Buddhist Ethics)》(Peter Harvey, Cambridge Univ. 2010)》 같은 저술은 응용불교학의 방향을 제시한 수작(秀作)이다. 나는 불교사상의 재조명이 이 시대의 화두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불교는 결코 과거의 유물이 아니다. 이 시대의 고뇌와 갈등을 해소할 수 있는 중요한 단서이다. 불교학자들은 그와 같은 관점에서 불교를 재해석하고 오늘의 현실에 투영(投影)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남기는 말
나는 불교학자로서 적지 않은 저술과 논문을 발표하였다. 저술이 19권(그 가운데 5권은 공저), 번역서가 8권, 영문 저술 2권 등 모두 29권이다. 논문은 80여 편을 썼다. 양적으로는 많은 분량이지만 딱히 베스트셀러가 된 책도 없고, 학계의 지대한 관심을 끌어보지도 못했다. 학자로서 나는 낙제점은 면했지만 우수한 편도 못되었다. 그러나 지나친 겸손은 오히려 잘못[過恭非禮]이라고 했던가. 부끄럽지만 내가 내세울 수 있는 점도 있기는 하다.
첫째는 불교 현대화의 길목에서 나름대로 역할을 했다고 자부한다. 1980년대 이후 재가 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불교 교양대학이 선풍적인 인기를 이끌었다. 나는 강좌의 핵심강사로서 내가 필요한 곳에는 불원천리하고 찾아다녔다. 이러한 강의는 한국불교의 지성화, 대중화, 생활화에 상당한 기여를 하였다고 보고 있다. 두 번째는 세계화의 노력이다. 앞서 말한 대로 2권의 영문 서적 출간과 숱한 불교학 세미나에서 발표 등으로 세계화의 꿈이 이제 백지는 면한 상태가 되었다. 그 당시까지만 해도 영어로 발표하고 질의 응답할 수 있는 불교학자는 많지 않았다. 내 영어 실력 덕분에 그 벅찬 일들을 수행할 수 있었다. 세 번째로는 재가불교의 활성화 노력이다. 나는 한국불교연구원을 15년간 운영하면서 지성불교와 생활불교를 이루려는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재가자도 수행해야 한다는 아이디어로 연수원을 짓고 정기적으로 그곳에서 정진하면서 재가불교의 방향을 설정하였다. 여기서 유의할 점은 나는 일부의 주장처럼 독립적인 재가교단을 만드는 일은 반대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승가(僧伽)는 사부대중으로 운영되어 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적절한 역할분담이 출가 · 재가에게 이루어져야 하는 것이지, 출가 · 재가집단으로 나뉘는 것은 결코 바람직스럽지 않다는 입장이다.
나에게 남겨진 생명의 불꽃이 얼마나 지속될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리 멀지 않았다는 점은 확실하다. 이제 나는 학문적 회향을 이루어야 한다. 현직에서 은퇴하고 나니까 아쉬운 점도 있지만 홀가분함을 만끽한다는 장점도 있다. 나는 죽기 전에 꼭 2권의 책을 더 쓰고 싶다.
첫째는 내 마음의 스승 의상(義湘, 625~702)에 대한 평전이다. 원효와 더불어 한국의 지성을 대표할 만한 분이지만 원효의 그늘에 가린 듯한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록 저술은 거의 없지만, 깊이 있고 폭넓은 화엄의 바다를 가장 압축적으로 표현한 위대한 학승(學僧)이다. 또한 수행자로서 품위를 저버리지 않고 청빈과 검약으로 수행자의 삶을 온몸으로 보여준 수행승이었다.
나는 그분의 평전을 구상하면서 중국과 일본을 여러 차례 답사하였다. 그분이 공부하였던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와 발길이 머물렀던 정업사(淨業寺)는 물론이고, 서안 일대의 한국 고승과 연관 있는 곳들도 거의 답사하였다. 그러나 막상 집필하려다 보니 여전히 부족한 점들이 있어서 다시 방문할 계획을 하고 있다. 국내에서도 화엄십찰을 비롯해서 그분이 창건주로 되어있는 모든 곳을 다시 한번 훑어보아야 한다. 일본의 경우는 교토의 고산사(高山寺)를 중심으로 의상 관계 자료들을 모으는 중이다. 미노부산대학(身延山大学)의 장서각(藏書閣)도 다시 열람해야 할 듯하다. 벌써 몇 년째 다짐만 하면서 실행에 옮기지 못한 것은 이 속절없는 게으름 때문이다.
두 번째는 불교사의 쟁점을 정리하는 작업이다. 부처님 당시에 있었던 데바닷다(Devadatta)의 반역에 대한 재조명, 부파불교 당시의 교리적 쟁점, 중국으로 불교가 전래된 다음 벌어졌던 유 · 불의 갈등, 선종 이후에 야기된 돈오 · 점수의 대립도 중요한 내용이다. 한국불교의 경우에도 쟁점을 되짚어보면 많은 문제점이 드러난다. 선문구산은 신라 말엽에 도입되었지만 종파로서 기능을 갖지 못했다. 고려 말엽의 이른바 중국 유학승 삼인방인 태고보우 · 나옹혜근 · 백운경한 이후에 조계종이라는 종파가 확립된다. 과연 한국의 선종을 중국적 법맥에만 의존하는 것이 타당한 일일까? 서산 대사의 구국승병 활동도 비판이 가능한 대목이다. 과연 불살생계를 지켜야 하는 수행승들이 목탁 대신 창검을 들고 전쟁터에 나서는 일이 정당화될 수 있는가, 또 그에 대한 비판은 전혀 없었을까? 선명하게 드러나지는 않지만 서산의 반대 입장에는 부휴(浮休) 선사가 있었다.
나는 현재 인도, 중국, 한국으로 나누어서 주제별로 도합 50여 쟁점을 정해 놓았고 지금도 그 기초자료를 모으는 중이다. 불교사의 쟁점을 정리하는 일은 살아 있는 불교의 목소리를 점검한다는 점에서 소중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비록 내가 다 완벽하게 정리할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그 기틀은 만들어놓고 가야겠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것이 평생 불교를 공부한 내가 부처님 시은(施恩)에 보답하는 자그마한 일이라고 생각하였다. ■
정병조
1947년 경북 영주 출생. 동국대학교 인도철학과, 동 대학원 졸업(철학박사). 서울대학교, 영남대학교 강사를 거쳐 동국대학교 교수, 동국대학교 부총장, 인도 네루(Nehru)대학교 네루국제대학원 교수, 금강대학교 총장 등 역임. 저서로 《인도철학사상사》 《불교철학의 어제와 오늘》 《불교문화사론》 등 다수. 현재 동국대학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