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를 위해 교육자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마다할 수 없는 시점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해학의 민족답다. 대통령 부인의 명품가방 수수 사건에 대해 국민권익위원회(이하 권익위)가 ‘위반 사항 없음’으로 종결 처리했다. 그 후 권익위 홈페이지에 지금도 올라오고 있는 수백 개의 관련 질의응답 중 하나를 소개한다.
(질의) “이번 영부인 김건희 여사의 명품백 관련 안건 심의에 노고가 크셨던 위원장님을 힘들지만 조용히 내조하셨을 위원장님 부인 또는 가족에게 자그마한 선물을 드리고 싶은데 괜찮나요? 권익위에서 보증하셨으니 괜찮겠지요?”
(응답) “문의하신 내용만으로는 청탁금지법상 선물 가능 여부를 답변드리기 어려우며, 해당 금품 등 제공이 해당 공직자 등의 직무와 관련 있는지 여부, 법 제8조 제3항 각호의 예외 사유에 해당하는지에 대한 사실관계가 고려되어야 함을 알려드립니다.”
당연히 ‘No’라고 답해야 할 사항을 중언부언한다. 논리적 일관성을 유지하여 대통령 부인의 부패를 덮으려고 했던 것일까. 의도(?)와 달리 공분만 키웠다. 공공기관으로서 국민적 망신도 망신이지만, 대한민국 청렴 행정을 총괄하는 곳에서 이렇게 운신하면 앞으로 누가 이를 따르겠는가.
하필 그다음 날이었다. 절친한 중학교 도덕선생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당일 수업 진도가 마침 국민권익위원회였다고 했다. 대단원명은 ‘사회 정의’, 중단원명은 ‘부패는 왜 발생하며, 그것을 어떻게 예방할 수 있을까?’이다. 교과서 각주에 ‘국민권익위원회를 통해 부패‧공익 신고 처리 절차를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고 나와 있으며, 본문에서는 ‘우리는 이러한 방법으로 부패를 뿌리 뽑고 좀 더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어 갈 수 있다’로 되어 있다. 학습활동은 ‘이 밖에 부패‧공익 신고의 대상이 되는 행위는 무엇이 있는지 조사하여 써 보자’였다고 한다.
도덕교사로서 자괴감이 커서 교과서 내용을 수업하기 어려웠단다. 학습내용과 현실의 괴리가 커지면 학생들은 기성세대와 사회에 냉소를 보낸다. 따라서 말과 글을 다루는 교육자와 언론인은 직업 특성상 불의에 저항해야 할 숙명을 지닌 존재일지도 모른다.
다행히 교수학습 내용과 실제 현실이 부합하는 방향으로 일이 벌어졌다. 우리가 누구인가. 권선징악의 민족 아닌가. 권익위의 ‘종결 처리’ 후 열흘 뒤, 국회 국민동의청원 홈페이지 등에 게시된 ‘윤석열 대통령 탄핵소추안 즉각 발의 요청에 관한 청원’(이하 본 청원) 동의자 수가 지난 7월 3일 오전 기준 100만 명을 넘은 것이다.
윤석열 대통령에 대한 탄핵 청원 사유를 열거하는 것은 사태의 본질을 제대로 이해하는데 오히려 방해가 된다. 열거하는 순간, 열거되지 못한 수많은 부정이 가려지기 때문이다. 많은 일들을 들 수 있지만 엄습하는 전쟁 위기는 정말 두렵다. 남북 간의 군사적 긴장 고조, 신중함을 더해야 하는 국제 외교에서의 균형감 상실에 이어 집권당 일부 당대표 후보의 핵무장 당론화 주장까지 나왔다.
해학과 권선징악이 합쳐지면 끈기가 된다. ‘윤석열 퇴진 및 김건희 특검 촛불집회’가 곧 100차 집회를 앞두고 있다. 과연 끈기의 민족이다. 웃음과 착한 마음이 아니라면 이렇게 오래갈 수가 없다. 윤석열 대통령도 참으로 끈기(?) 있게 민심을 외면한다. 하지만 기억하기를. 진실을 품고 있는 곳이 이길 수밖에 없다. 역사는 항상 그래왔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탄핵 국면에서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섰다. 이제 그렇게 모이지 않아도 형성되는 민심이 있다. IT강국답게 그 물리적 외침을 온라인으로 모은 것이 본 청원이다. 이것이 국회 법제사법위원회로 회부된 만큼 이제는 국회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국회는 응당 해야 할 민심 반영의 역할을 방기하지 않기 바란다.
이는 학생들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도록 사회적 여건을 마련해 달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도탄을 예감한 대통령 퇴진 시국선언이 작년에 이미 전 사회 영역에서 들불처럼 일어났었다. 세월호 참사, 국정교과서 문제 등 부정한 사회문제에 적극적으로 대응했던 많은 교육자들의 목소리가 당시에는 들리지 않았다. 징계를 감수하면서라도 시국선언에 동참했어야 한다는 스스로의 자책감이 크다. 한 50여 명 가량 인천의 현직 교육자들이 함께 뜻을 모은 적이 있다. 당시에는 실행에 옮기지 못했다.
지금과 같이 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가 모아졌다면, 그리하여 만약 작년에 윤석열 대통령이 시국선언의 요구대로 되었다면 어떠했을까. 이후 만시지탄의 일들이 정말 많았다. “이렇게 사회가 나빠질 때까지 아빠는 교육자로서 어떤 역할을 하셨나요?”라고 나의 아들과 딸이 훗날 내게 물어온다면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부끄럽다. 사회가 어찌되든 교육만 제대로 해도 된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사회와 교육은 둘이 아니다.
엊그제 서울 시청역에서 개최된 97차 촛불집회(2024. 7. 6.)에서는 교원단체 최초로 전교조 위원장이 대통령 퇴진에 대해 언급했다. 교육계 전체를 통해서도 처음 있는 일이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이라는 사실 자체가 참으로 비교육적이다. 이런 사람이 대통령을 하는 사회에서 정의와 민주와 도덕을 가르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며 “대통령은 그 자리에서 내려와야 한다”고 말했다.
이대로 가면 공멸이다. 정치, 경제, 외교, 문화, 예술, 교육, 행정, 민생 등 가히 전 사회 영역의 국정 오류도 오류지만, 교육계 또한 상황이 만만치 않다. 없다는 국고 예산에도 불구하고 사교육업체를 통해 AI디지털교과서 등 에듀테크 사업에 천문학적인 돈을 쏟아붓고 있다. 또 수능과 학업성취도 성적 등 초중고 학생 정보 데이터를 시군구 지역까지 100% 전면 개방하려고도 한다. 지역 교육균형 발전은 안중에도 없다. 안 그래도 입시경쟁에 신음하고 있는 현재의 학교에 성적 서열화를 더욱 부추길 것이며 지역도 성적순으로 쪼개질 것이다. 이미 사상 최고치를 넘어선 사교육은 폭증할 것이다.
우리 교육이 왜 무너지고 있는지 차분히 돌아보자. 교과학습을 배움의 전부인 양 착각하기 때문이다. 문제풀이를 열심히 하는 것도 필요하지만, 근본적으로는 사람됨에 관한 가르침이 우리 교육의 바탕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런 점에서 본 청원은 전도된 선악의 가치를 복원하려는 시도다. 잠재적 교육과정 측면과 인성교육의 기반이 된다는 점에서 교육적 의미가 적지 않다. 이것은 정의와 진실, 공동체와 협력, 신뢰와 청렴의 가치를 교육자들이 학생들에게 당연하고도 당당하게 가르칠 수 있는 사회적 토대가 된다.
이후 사태가 어떻게 전개될지 알 수 없다. 그것은 그것대로 민심과 국회의 몫이다. 훗날 사건을 사건으로 덮었던 윤석열 대통령의 탄핵 청원 사유에 대해 역사는 한치도 빠짐없이 기록할 것이다. 언젠가는 교과서에도 실릴 것이다. 다만 너무 늦은 정의는 정의가 아니다. 이를 위해 교육자들이 해야 할 역할이 있다면 마다할 수 없는 시점까지 왔다고 생각한다.
<참고 문헌>
1. 정창우 외 12인(2019), 『중학교 도덕 2』, 미래엔, 2017 교육부 검정, p.99 ~ 103.
2. 김호경, ‘탄핵 독립군’의 외침 “1000만 청원, 100만 촛불로!”, 시민언론 민들레(7월 7일)
3. 국민권익위원회 홈페이지, “정보공개 - 청탁금지법 질의응답(6월17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