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레지오 단원의 용기
어떤 일에나 그 일이 요구하는 독특한 용기가 필요하다
그래서 세속에서도 용기가 없는 사람은 별 쓸모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레지오에서는 단원들에게 도덕적 용기를 특별히 요구한다.
레지오가 수행하는 활동은 대부분 사람들을 접촉하여
그들이 하느님께 좀 더 가까이 다가가도록 이끄는 것이다.
때때로 이러한 활동은 여러 가지 형태의 반감이나 오해와 부딪치게 된다.
그렇다고 그것이 전쟁터에서 쏟아지는 포탄처럼 위험한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정면으로 대결하려 들지 않고
피해 가는 레지오 단원들을 흔히 볼 수 있다.
비 오듯 쏟아지는 포화 속을 용감하게 헤치고 전진하는
수많은 단원들이 있는가 하면 욕을 먹거나 비웃음을 당하지나 않을까,
비난을 받거나 이상한 눈총이나 받지 않을까
또는 사람들이 설교가나 성인이라도 된 척한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몸을 사리는 단원들도 있다.
이들이 태도는 '예수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게 된것을 특권으로 생각하고 기뻐한 사도들'(사도 5,41)과는 달리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무엇이라고 수군댈까?'
하고 걱정하며 움츠러든 모습이다.
흔히 체면이라고 부르는 이런 소심한 태도가
그대로 통용되도록 방치하면 영혼들을 위한
모든 활동은 보잘것 없이 되고 만다.
주위를 돌아보면 이런 비극이 쉽게 눈에 띈다.
어디를 가나 가톨릭 신자들은 수많은 이교도나 비가톨릭 신자나
또는 냉담자들에 둘러 싸여 알고 있다.
이러한 사람들에게 개별적으로 가톨릭 신앙을 알려 주려고
진지하게 노력한다면 첫 번째 시도에서
100명 중 다섯 사람은 입교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 다섯 명은 장차 많은 사람들을 입교시키는
직접적인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신자들은 그러한 노력조차 보이지 않고 있다.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마음은 지니고 있으나 체면이라는
치명적인 독소가 실천으로 옮기는 힘을
마비시키고 있끼 때문에 움직이지 못하는 것이다.
이 독소는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니고 여러 형태로 나타난다.
즉, '좀 더 신중하자' '남의 의견을 존중해야 한다.'
'노력해 보았자 소용없다' '누가 먼저 착수하기를 기다리는 중이다' 등등의
그럴듯한 이유가 그것이다. 이렇게 변명만 늘어놓다 보면 막상 행동으로 옮기기는 어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