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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4년 가해 1월11일 (백)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청주] 달이 더욱 밝으려면 -
청주 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 영억 라파엘 신부
† 제1독서 : 1요한 5, 14 - 21
† 복음 : 요한 3, 22 - 30
★ 요한의 첫째 서간의 마지막은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우리에게
참하느님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셨음을 상기시킨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시다. 우리는 그분
안에 있다(제1독서).
★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이 요한에게 예수님께서 세례를 주고 계신다고
말하자, 요한은 자신의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하며
예수님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자신은 작아져야 한다고 말한다(복음).
◈ 오늘의 묵상
영원한 생명이시며 참하느님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깨달을 수
있는 이해력은 분명 하늘에서 온 지혜를 말할 것입니다. 세상에서
똑똑하다는 사람들이 자랑하는 지식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이들에게 따뜻한 빛처럼 다가오는 깨달음일 것입니다.
중세의 신비 신학자 마이스터 에크하르트는 그의 책 『신적 위로의
책』에서 사물을 비움으로써 하느님에 관한 참된 인식을 얻게
된다고 가르칩니다. “가득 차려면 비워라. 도달하기 위해서는
뒤로 물러나라. 영혼이 더욱 순수하면 순수할수록, 더욱 벗어나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가난하면 가난할수록, 더욱 적게 사물을
가지고 있으면 있을수록, 하느님이 아닌 모든 사물이 비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순수하게 하느님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을 누구보다도 앞서, 그리고 더욱 잘 알아본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님을 알아보고 마침내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께서 오셨음에 기뻐하였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 하느님의 아드님을 알아보게 된 지혜가 어디서 왔는지를
그의 말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자신을 철저하게 비움으로써 비로소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종교와 신학에 대한, 우주의 이치와 기원에 대한 지적인 욕구에
넘친 학자와 현인은 지난날도 오늘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그러한 지식욕으로 밝혀지시는 분이
아닙니다. 자신을 비우고 그 안에 주님을 채우고자 하는 겸손한
신앙인에게 당신을 보여 주시는 분이십니다.
- 매일 미사 -
◈ [청주] 달이 더욱 밝으려면 | 반신부의 복음 묵상
2014년 가해 1월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 3,22-30
달이 더욱 밝으려면
모임에 참석해 보면 사람들의 다양한 모습을 접하게 됩니다. 늘
다른 사람을 챙겨주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대접을 받으려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가만히 앉아서 인사받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일일이 먼저 찾아다니며 인사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좋게 소개해 주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초대받은 신분을
잊어버리고 자기가 주인공인 것처럼 행세를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자리에 있든 자신의 위치를 알고 그 자리를 빛낼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자 요한은 세상 사람들에게 “회개하여라.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언하였습니다. 두 분은 다 자신의
방식으로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가르침을 주었습니다. 그런데
인간적으로 생각해 보면, 광야에서 금욕생활을 하고 세례를 베풀던
요한이 먹고 마시며 떠돌던 예수님보다 훨씬 더 구도자처럼 보이고
존경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런데 요한은 자신을 내세우지 않고
예수님을 앞세우셨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으로 자기의 할 임무를 다 하였기에
예수님과 함께 나누는 자기의 기쁨을 신랑과 신부의 관계를 빗대어
자신을 “신랑의 친구로”비유합니다. 신랑 친구의 역할은 당시 혼인
잔치가 잘 이루어지도록 이것 저것 챙기며 준비하는 것이었습니다.
친구는 주인공이 아니라 잔치 뒤편에서 묵묵히 보조하는 역할입니다.
그 일에 충실한 사람이 요한입니다. 요한은 분명히 말합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그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그런 일은 당연하지 않습니다. 사실 “달이 더욱 밝으려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은 그만큼 흐려져야 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달을 이용하여 자기 손을 돋보이게 하려니 문제가 많습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기의 위치를 결코 잊지 않았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예수님의 등장에 질투를 하는 제자들에게 오히려
자신이 물러설 때가 되었음을 밝혔습니다. 물러선다는 것은 쫓겨나는
것이 아니라 그야말로 스스로 물러나는 것입니다. 그 때를 잘 아는
사람이 성인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것을 하지 못해 추하게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참으로 끝이 아름다워야 합니다.
‘요한의 세례는 그의 제자들에게 자부심과 긍지를 갖게 해 주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당시 유다이즘 안에서 회개의 세례는 공식적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고, 요한은 세례를 통해 많은 사람을 회개의 길로
이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이 요한에게 몰려들었고, 그로
인해 얻은 명성은 요한의 제자들이 갖고 있는 자부심을 부추겨
주었습니다’(박병규). 이때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나타난 예수라는
인물에게 몰려가고 있으니 요한의 제자들은 적잖이 당황했으리라
봅니다. 그러나 자신들의 스승인 요한에 대한 애착은 예수라는 참된
메시아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걸림돌로 작용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런 상황 안에서 요한은 자기의 있어야 할 자리와 역할을 잊지
않았고 신랑과 함께 기뻐하였습니다.
우리 모두가 세례자 요한처럼 각자의 자리에서 자신의 임무가 완성되는
순간에 모두가 함께 기뻐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우리가 열심히 봉사를
하고 물러선 자리도 늘 그렇게 주님만이 으뜸으로 계셨으면 좋겠습니다.
결코 주님을 몰아내고 그 영광의 자리를 내가 차지하는 일은 없기를
희망합니다. ‘사랑에 사랑을 더하여’ 사랑합니다.
- 청주교구 감곡 매괴 성모 성당 반영억 라파엘 신부 -
◈ [인천] 예수님을 준비하기위해
저는 고등학교 때 아주 우연한 기회에 기타를 배우게 되었습니다.
아니 기타를 쳐야만 하는 상황이었지요. 당시 성탄 예술제 때에
성당의 고등부 학생들이 반드시 해야 하는 것이 “Sing-Out”
이었습니다. 기타 반주에 맞추어 노래를 크게 부르고 동시에
정확하게 동작을 맞추면서 춤을 추는 공연이었습니다. 그런데 저의
가장 큰 문제가 몸치라는 것이지요. 동작을 제대로 따라하지를
못하니 항상 틀리기만 했습니다. 그래서 선배들에게 노래와 동작을
배우면서 계속해서 혼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저한테는 두
가지 선택의 기로에서 무엇인가를 선택을 해야만 했지요. 첫째는
‘Sing-Out’ 공연에서 아예 빠지는 것, 둘째는 기타를 배워서 이
공연의 기타 반주를 맡는 것이었습니다.
남들 다 하는 공연에서 빠질 수는 없어서, 정말로 열심히 기타를
배우고 연습했습니다. 그때가 방학 때였는데, 밥 먹고 잠자는 시간
빼고는 기타만 쳤습니다. 그리고 기타를 전혀 알지 못했던 제가
드디어 기타 반주를 할 수 있게 되었지요.
벌써 거의 30년 전의 일입니다. 그런데 그때 그렇게 연습했던 곡들을
지금도 그냥 저절로 연주할 수가 있습니다. 마치 저의 손이 기타
줄을 기억하는 것 같습니다. 당시 수백 번을 연습했던 곡이라서
그런지 지금은 눈으로 악보를 읽거나 머리로 악보를 떠올리지
않아도 그 곡이 저절로 제 손을 통해 재생되는 것입니다. 물론
이제는 손이 굳어서 종종 이상한 소리를 내기는 하지만 30년 전에
배우고 연습했던 곡들을 지금도 칠 수 있다는 사실 자체가 놀랍기만
합니다.
그만큼 반복적으로 연습하는 것은 또 다른 기억을 내 몸에 새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불가능해 보이는 것 역시 가능할 수 있도록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들은 그러한 노력은 전혀 없이 자신이
원하는 것을 이루려고 하는 욕심만을 또 자신만이 중심이 되려는
이기심만을 내세우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싶습니다.
예수님을 준비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세례자 요한을 생각해보십시오.
그분은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었습니다. 더군다나
그가 자신의 몸으로 보여주었던 금욕적인 생활과 힘이 있는
말씀으로 인해 사람들에게 ‘혹시 이 분이 우리가 기다려온 메시아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갖도록 만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는 한
번도 스스로를 높은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사명을 알고 있었고 이를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기 때문에,
오늘 복음에서와 같이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라는 겸손 가득한 말씀을 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기도나 묵상 중에 ‘주님’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정작 일상의 삶
안에서는 내 자신이 스스로 주인 행사를 하려고 했었던 것은
아닐까요? 그래서 주님은 작아지고, 자신은 커져야만 한다고
행동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요?
주님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는 것을 몸 스스로가
기억할 수 있도록 더욱 더 주님의 뜻에 맞게 살아가도록 노력하는
오늘을 만드시길 바랍니다.
안타까운 것은 사람들 대부분이 행복을 목표로 삼으면서 지금
이 순간 행복해야 한다는 사실을 잊는 것이다(프랑수아 를로르).
세례자 요한이 갇혀있던 감옥이 있었고 순교하셨던 마케루스
요새입니다.
양보다 질일까?(‘행복한 동행’ 중에서)
예전에 보았던 어떤 잡지에 나온 기사 내용입니다. 흥미로운
내용이라 여러분들에게 소개해 봅니다.
한 도예 수업 첫날, 강사가 학생을 두 그룹으로 나누었다. 그리고
교실을 반으로 나눠 왼편에 앉은 학생은 ‘작품의 수’로, 오른편에
앉은 학생은 ‘작품의 질’로 점수를 매기겠다고 했다. 방법은
간단했다. 첫 번째 그룹의 경우 수업 마지막 날 저울을 가지고
와서 완성한 작품의 총 무게가 20Kg을 넘으면 A, 18Kg이 넘으면
B... 이런 식으로 점수를 매긴다. 두 번째 그룹의 경우 단 하나의
작품만 완성하면 그것으로 점수를 매긴다.
채점 당일, 흥미로운 결과가 나타났다. 가장 완성도가 높고 훌륭한
작품은 모두 양으로 점수를 매긴 첫 번째 그룹에서 나온 것이다.
이들이 실수에서 교훈을 얻으며 점점 나은 작품을 만드는 동안,
두 번째 그룹은 가만히 자리에 앉아 계획만 세웠다. 그 결과 그들은
평범한 작품 이상의 결실을 얻지 못했다.
이는 양과 질이 함께 올 때가 많다는 사실을 상기해 준다. 양을 위해
질을, 질을 위해 양을 포기하지 마라. 두 가지는 똑같이 중요하며,
둘 사이의 균형점을 찾아야 한다.
여기서 양이라는 것은 바로 노력의 모습이 아닐까 싶습니다. 많은
양을 채우기 위해 그만큼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노력이 질의 향상을 가져왔던 것입니다. 노력을 따라갈 수 있는
것이 있을까요? 주님을 아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냥 저절로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닙니다. 마치 친구를 사귈 때, ‘오늘부터 사귀자’
라고 말을 하자마자 가까운 사이가 되는 것이 아니지요. 계속해서
대화를 나누고 만남을 가져야 가까운 사이, 둘도 없는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처럼, 주님과의 관계에서도 계속해서 만나고 대화를
나누는 수많은 노력을 통해 주님과 가까운 사이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과의 만남에서는 어떤 노력을 하고 있습니까? 양과
질은 함께 온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 인천교구 성소국장 조명연 마태오 신부 -
◈ [기타] “그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내 삶의 한 가운데, 내가 아닌 하느님이 계셔야 합니다.
그것이 올바른 신앙입니다.'
2014년 가해 1월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복음묵상
“그분께서는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요한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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곱게 늙는다는 표현이 있다. 잘 늙는다는 말이리라.
신앙도 곱게 늙어야 한다. 교만과 아집, 편견과 독선은 가장
경계해야 할 죄이다.
나를 위해서 그리스도가 필요한 것인지 그리스도를 위해 내가
필요한 것인지를 생각해보자. 부인을 하려 해도, 십중팔구 나를
위해 그리스도가 필요한 삶을 살고 있으리라.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가 필요해서 신앙생활을 하는 지도 모른다.
하지만 성숙한 신앙인의 삶이란 내 뜻이 아닌 그리스도의 뜻을
따르는 삶이다. 우리의 욕망이 그분의 뜻을 넘어설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분은 커져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이러한 삶은 우리의
의지와 노력에 의해서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가지고
있는 신앙의 깊이와 크기에 따라 저절로 따라오는 삶이다.
그러니, 혹시라도 그리스도가 있어야 할 자리에 내가 있다면
그처럼 불행한 신앙은 없다.
유혹이란 우리의 가장 약한 부분을 건드리기 마련이다.
의식하지 못하는 가운데,
주객이 전도된 삶이 아닌지 늘 주의 깊게 살펴보아야 할 일이다.
그분 안에서 작아진다는 것은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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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삶 안에서 하느님께서 허락하신 모든 것은 하느님께 영광을
드리고, 우리를 정화하도록 디자인되어 있다.” – 마일즈 맥퍼슨 -
(“Everything God allows in our life is designed to ‘Glorify’
God and ‘Purify’ us.” - Miles McPhers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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섣달 삭풍 맞으면서, 철 모르고 양지바른 곳에 얼굴을 드러낸
수선화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예쁘기도 하고, 애처롭기도 한
모습에 가던 길을 잠시 멈추었습니다.
- 사이타마 교구 오타(太田)본당 주임
김 대열 프란치스코 사베리오 신부
https://www.facebook.com/WithfatherPinetree
- 소나무 신부와 함께 하는 마음의 산책 -
◈ [수도회] 슬픈 사연이 깃든 성모상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 요한3,22-30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슬픈 사연이 깃든 성모상>
지난 연말 파리외방선교회 본부에 들렀을 때의 일입니다. 건물
뒤쪽으로 확 트인 큰 정원이 있었는데, 그 한쪽 구석에 정말이지
슬픈 사연이 깃든 성모상과 슬픈 길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천주교 박해가 한창이던 시절, 조선 선교사 파견이란 말은 곧
100% 죽음과 동일한 말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대
후반, 30대 초반의 젊디젊은 파리외방선교회 선교사들께서 조선
파견을 지원했습니다.
파리외방선교회 본부 성당에서 파견미사가 끝나면 파견될
선교사들은 마지막으로 정원 구석에 서 있는 성모상 앞으로 가서
마지막으로 성모님께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왼쪽으로 방향을
틀어 대문을 향해 천천히 걸어 나가면 길 양쪽으로 부모님들,
친척들, 친구들, 동네사람들이 줄지어 서 순교의 길을 떠나는
선교사와 이승에서의 마지막 작별인사를 나누곤 했답니다.
꽃다운 청춘의 나이에 어떻게 그렇게 큰 결단을 내릴 수 있었는지...
오늘 제 모습이 참으로 부끄럽기만 합니다. 그분들의 짧은 생애에서
예수님은 점점 커지셔야 하고 나는 점점 작아져야 한다고 외친
세례자 요한의 향기를 진하게 맡을 수가 있었습니다.
이토록 아름다운 선교사들이 흘린 피와 땀의 결실인지 교황청
인류복음화성성 분류에 따르면 아직도 선교지에 해당되는 한국
천주교회이지만 수많은 한국 출신 선교사들이 세상 끝까지 나아가
열심히 복음을 선포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 여러 국가 중에서도 가장 낙후된 국가로 파견된 지
어언 사반세기가 넘은 수녀님이 한분 계십니다. ‘선교 정신’
‘선교 영성’이 얼마나 제대로인지 제가 참으로 존경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의미의 선교가 무엇인가?’ 생각했을 때, 물론 선교지
백성들이 처한 열악한 현세적 삶을 개선시키기 위한 물질적 투자도
아주 중요한 측면임이 분명합니다. 그러나 보다 본질적인 측면은
영적인 것이며, 신앙적인 것이며, 그들에게 하느님의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다른 무엇에 앞서 인간 세상에 육화강생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한 선교사는 선교지에 육화되는 것이
중요합니다. 철저하게 그곳 백성들과 동화되고 그 문화에 토착화
하려는 노력이 중요한 것입니다.
수녀님에게 물질적 투자는 그리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
곁에 묵묵히 계셔주는 것으로 만족하셨습니다. 그들이 일상적으로
겪는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을 함께 나누며 동고동락하는 것,
그들의 일원이 되고 그들이 가족이 되어 주는 것만이 수녀님의
유일한 소망이었습니다.
선교지의 비참한 실상에 대해 이렇다 저렇다 일언반구 한번 하지
않으셨습니다. 꼭 좀 도와달라고 외치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그들을
끝까지 떠나지 않고 한결 같이 함께 계셨습니다.
수도자로서 한국에서 수도공동체의 한 회원으로서 열심히 사셨듯이
그곳에 설립된 수도 공동체의 일원으로 그들과 보조를 맞춰가며
청빈하게, 그리고 그곳 장상에게 순명하며 그렇게 아름다운 선교사로의
삶을 살아가셨습니다.
처음에는 5~6년에 한번, 최근에야 3~4년에 한번 본국휴가차 한국에
들르실 때도 참 선교사로서의 태도는 한결같았습니다.
모금활동에 열을 올리지도 않았습니다. 여기 저기 여행도 다니지
않았습니다. 지난 선교지에서의 생활이 소홀함은 없었는지, 수도자로서의
삶이 뒤틀리지는 않았는지 돌아보며 피정에 전념하셨습니다. 침묵 속에
재충전하시며 선교지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맑은 눈망울의 형제자매들을
한명 한 명 떠올리며 기도에 전념하셨습니다.
선교지의 구체적인 현실을 세심하게 고려하지 않은 채 일방적이고도
물질적 공세만을 최고로 여기는 선교방식을 깊이 돌아보게 하는 선교사
수녀님입니다.
선교사로서의 행한 사목적 봉사가 이 세상에서부터 다 알려지고 거듭
칭찬받고 박수 받는 다면, 받을 상 안 받을 상 다 받게 된다면 천상에서
하느님으로부터 받을 상이 어디 남아있기나 하겠습니까?
그 오랜 세월 최선을 다해 지구 반대편 열악한 오지에서 봉사하고
헌신하였지만 나는 아무것도 한 일이 없노라고 수녀님은 말씀하십니다.
조금이라도 좋은 일을 했다면 그것은 하느님께서 하신 일이라며
철저하게도 예수 그리스도 뒤로 숨는 수녀님의 겸손한 모습에서 참
선교사가 누구인지를 알게 합니다.
그 오랜 세월 정말이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고통을 겪으셨을 텐데도
조금도 내색하지 않는 수녀님의 모습 속에 자신의 삶 속에 예수님은
점점 커지시고, 자신은 점점 작아져만 갔던 세례자 요한의 향기가
진하게 느껴집니다.
- 살레시오회 한국 관구 부관구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 [서울] 주님 공현 후 토요일
2014년 가해 1월11일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 3,22-30
어제는 세검정 성당에 있을 때 알던 자매님을 만났습니다. 1995년에
세검정 성당에 있었으니 20년 가까이 되었습니다. 자매님은 저의
식성, 저의 성격을 아직도 잘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중학생이었던
아이들은 결혼을 했고, 자매님은 손자들을 돌보고 계셨습니다.
거울에 비친 저의 모습은 별로 변한 것이 없는 것 같은데 세상은
강산이 두 번 바뀌는 만큼 많이도 변했습니다. ‘기억, 문화, 전통,
역사, 문명, 신화, 종교’ 이런 것들을 통해서 우리는 작은 지구별에서
무한한 우주를 생각하고, 짧은 삶을 살면서도 영원한 생명을 추구하는
것이라 생각합니다.
어제도 말씀을 드렸지만 영원한 생명을 사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아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았을까요? ‘마리아, 엘리사벳, 요셉, 즈카리야, 목동, 동방박사,
시메온, 안나, 베로니카, 키레네 사람 시몬, 십자가상의 한 죄인,
요한,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입니다. 이 사람들의 공통점은 겸손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성실한 삶을 사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였을까요? ‘헤로데, 왕궁의 사람들, 율법학자,
사두가이파, 바리사이파, 빌라도, 군중들’입니다. 그 사람들의 공통점은
자기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파지는 사람들입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사람들입니다.
성서를 보면 죄의 현장들이 잘 나타납니다. 아담이 뱀의 유혹을 받아
‘선악과’를 먹은 일은 하느님과 같아지려는 교만함 때문이었습니다.
카인이 동생 아벨을 죽인 것은 동생에 대한 질투 때문이었습니다.
다윗이 우리야를 죽이고 바세바를 차지한 것은 미색 때문입니다.
아합이 나봇의 포도밭은 빼앗은 것은 탐욕 때문입니다. 헤로데가
2살 이하의 어린이를 죽인 것은 분노 때문입니다. 부자 청년이
예수님을 따르지 못한 것은 인색함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밤을
새워 기도할 때 잠을 자던 제자들은 게을렀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빨간 십자가가 도시를 가득 채워도, 화려한
교회의 건물이 우뚝 솟아도 우리와 함께 하는 예수님을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세례자
요한은 많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았습니다. 회개의 세례를 주었고,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온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의
능력과 그분의 지혜를 보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분이 보여준
겸손함입니다. ‘나는 내 뒤에 오시는 분의 신발 끈을 풀 자격도 없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한다.’ 세례자 요한은
겸손함을 보여 주셨기에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더 큰 사람은 없다.’
오늘 제1독서에서 사도요한은 이렇게 말을 합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또한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하느님의 자녀가 된 우리는 겸손함으로 죄의 뿌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주님과 함께 참된 진리의 길로 가야
하겠습니다.
- 서울 대교구 성소 국장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
◈ [수원]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 중매와 중재
2014년 가해 1월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복음 : 요한 3,22-30
<중매와 중재>
방송작가인 송정림씨가 전하는 자신의 한 선배 이야기입니다.
그 선배는 사업을 하다가 모든 것을 잃었습니다. 가진 돈도 다
잃고 결국 이혼까지 당해 가족과 떨어져 시골에 집을 구해야만
했습니다.
보증금도 없는 월세 20만 원짜리 집은 낡고 허름했습니다. 그
선배는 자신의 처지와 함께 비슷하게 겹쳐 보이는 허름한 집을
바라보며, ‘과연 이런 집에서 살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자꾸만
눈시울이 붉어졌습니다. 농부인 집 주인도 그 선배의 얼굴빛을
살피며 집이 누추해서 미안하다고 몇 번이나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며칠 후 그 선배는 짐 몇 개를 들고 그 집으로 들어갔습니다.
발걸음이 무거웠습니다. 마치 폐가 같은 집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했습니다.
그런데 집 안에 들어선 순간 깜짝 놀랐습니다. 처음 구할 때는
허름하기만 했던 집이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그야말로
완전히 수돗물에 씻어 놓은 듯했습니다. 집주인은 집을 산뜻하게
도배해 놓고, 구석구석 깨끗하게 청소도 해 두었습니다. 그리고
작은 탁자를 갖다놓고 그 위에 들꽃까지 꽃아 놓고는 “이 집에서
좋은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라는 쪽지를 남겼습니다.
마치 천사가 다녀간 듯했습니다. 선배는 크게 감동했습니다.
그리고 희망을 품어 보았습니다. 좋은 사람의 집이라면 좋은
기운을 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이제 다 잘 될 거야!”
선배는 심호흡을 하고는 힘차게 그 집에 들어섰습니다.
[송정림, 참 좋은 당신을 만났습니다, 이 집에서 좋은 일이 있기를]
그 집 주인은 송정림씨의 선배에게 그저 집만 준 것이 아닙니다.
그 집을 통해 절망의 어둠에 있던 사람에게 ‘희망’의 빛을 만나게
해 주었습니다. 만날 수 없는 두 남녀를 이어주는 역할을 중매라고
합니다. 중매쟁이는 직접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둘의 결혼이
잘 성사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만 하면 되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그냥 농담으로 한 자매에게 “왜 결혼 안 해?”라고
물어보았습니다. 대답은 역시나 결혼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어떤 사람을 원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신자다운 대답을 들었습니다.
“저보다 하느님을 더 사랑하는 남자요.”
보통은 자신을 가장 사랑해 줄 사람을 원한다고 할 텐데 이
자매는 그 사람을 최종 목적지가 아닌 하느님께로 향하는 길로
여기고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사람이 아닙니다. 다만 무언가를 해 줄 수 있는 분을
소개시켜줄 수는 있는 것입니다.
세례자 요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요한은 회계의 세례를 베풀던
사람이었고 예수님은 성령의 세례를 베푸셨습니다. 자신은 물로
세례를 베풀겠지만 그분은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베풀 것이라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세례를 베풀 분이 지나가실 때
“하느님의 어린양이 저기 가신다.”라고 하며 사람들에게
일러주었습니다. 요한의 많은 제자들이 모두 예수님께로 가는
것을 보고 다른 제자들이 걱정하자, “신부를 차지하는 것은
신랑이다. 그분은 더 커지셔야 하고 나는 더 작아져야 한다.”
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이 나에게만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 더 큰 빛을 보게 해야 합니다. 등불을 보았다면
이제 태양을 찾게 만들어야합니다.
우리가 조금만 노력하면 우리의 노력을 통해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이 사람들 앞에 나타나셔 그들을 이끄시게 됩니다. 내가
무엇이나 된 듯이 사람들이 나에게서 배우게 해서는 안 됩니다.
배워서 그분께 가도록 해야 합니다. 또 그렇게 예수님께로 가는
이들을 보면서 요한처럼 기분이 좋아져야 합니다.
예수님도 세례를 주시고 요한도 세례를 줍니다. 어떻게 보면
경쟁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요한은 자신의 세례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세례를 준비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무언가 대신 해
줄 수는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소개해 줄 수는 있습니다.
송정림씨도 드라마가 취소되고 또 몇 년 동안 일이 들어오지 않아
어떻게 살까 막막할 때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 때 인생의 바닥을
치고 있을 때 고개를 푹 숙이고 걷고 있었다고 합니다. 마음은
슬픈데 꽃은 어찌 이리 아름다운지. 아파트 단지로 들어섰을 때
허리가 굽고 지팡이를 짚고 계신 할머니를 보았습니다. 할머니가
멀리서 걸어오는 송정림씨를 계속 쳐다보시더니 말을 건넸습니다.
“안녕하시우?”
십 년 넘게 산 동네에서 처음 보는 할머니의 미소와 또 다른 말을
들었습니다.
“댁이 꽃보다 훨씬 곱수.”
그렇게 혐오스럽고 초라하게만 느껴졌던 자신 안에 환한 등불이
켜지는 것 같았습니다. 갑자기 신분상승을 해 여왕이 된 기분
이었습니다. 힘이 솟았습니다. 그냥 웃고 들어온 것이 미안해서
다시 인사를 드려야 할 것 같아서 과일 몇 개를 꺼내어 뛰어
내려왔지만 더 이상 그 할머니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아무에게도
물어보아도 모르고 그 이후로도 본 적이 없다고 합니다. 그 할머니는
그저 희망을 중매해 주는 천사였던 것입니다. 하느님을, 사랑을,
희망을 소개해 주는 이가 바로 천사의 삶을 사는 중재자인 것입니다.
- 수원 교구 복음화국 부국장 기획 연구 담당 전삼용 요셉 신부 -
◈ [수도회] 참 아름다운 사람 -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 이수철 프란치스코 신부님
(십자성호를 그으며)
†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2014년 가해 1월11일 주님 공현 후 토요일,
1요한5,14-21 요한3,22-30
<신랑 친구는 신랑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 요한 3,22-30
참 아름다운 사람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하느님은 아름다움이십니다.
사랑할수록 하느님을 닮아 아름답습니다.
이런 이가 진정 사랑의 신비가입니다.
바로 1독서 요한1서의 저자 사도 요한이 사랑의 신비가의
전형입니다. 요한1서를 통해 하느님의 신비, 예수님의 신비,
사람의 신비가 환히 들어납니다. 하느님의 인간에 대한 사랑이
가득 담긴 참 아름다운 요한 서간입니다. 주님 공현 후
월요일부터 오늘 공현 후 토요일까지 계속되는 요한1서의
똑같은 서두 말씀에 감격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바로 우리 향한 하느님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도 요한을 통해
하느님의 넘치는 사랑이 가득 담긴 참 아름다운 요한서간입니다.
세례 받아 새롭게 태어난 우리들, 또 매일 미사를 통해 하느님
사랑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은 그대로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입니다.
다음 말씀은 사도 요한은 물론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은 아무도 죄를 짓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압니다. 하느님에게서 태어나신 분께서
그를 지켜 주시어 악마가 그에게 손을 대지 못합니다. 우리는
하느님께 속한 사람들이고 온 세상은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다는 것을 압니다.”
정말 세상 돌아가는 모습을 보면 악마의 지배 아래 놓여 있는
세상 같기도 합니다. 다음 고백 역시 얼마나 신비롭고 은혜로운지요.
그대로 주님의 미사은총을 가리킵니다.
“하느님의 아드님께서 오시어 우리에게 참되신 분을 알도록 이해력을
주신 것도 압니다. 우리는 참되신 분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이분께서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십니다.”
사랑의 신비가로 불림 받은 우리들입니다. 사실 알고 보면
우리 모두가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랑의 신비가 입니다.
참되신 분 하느님 안에 있고 그분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안에 살아가는 우리들이니 악마가 손댄다는 것은 언감생심
어림없는 일입니다.
매일 미사를 통해 참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을 모시는 우리들입니다. 그러니 세상에 이보다 더 큰
축복도 없습니다.
하느님에게 태어난 참 아름다운 사람이 오늘 복음의 주인공인
세례자 요한입니다. 세례자 요한을 통해 참된 겸손을 배웁니다.
겸손한 사랑이요 겸손한 사람이 아름답습니다. 참 사람의 표지가
겸손이며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사람의 특징이 겸손입니다.
악마가 다 모방할 수 있어도 겸손만은 모방하지 못합니다.
다음 세례자 요한의 고백은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태어난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하늘로부터 주어지지 않으면 사람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
주님은, 형제들은 질투의 대상이 아니라 사랑의 대상임을
깨닫습니다. 그러니 각자 타고난 것에 대하여 아무도 자랑할
수 없습니다. 이 모두가 하늘로부터 주어진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 진리를 통감할 때 참된 겸손입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그분에 앞서 파견된 사람일 따름이다.”
바로 이게 세례자 요한은 물론 우리의 신원입니다.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관계 안에서 만이 우리의 제자리 신원이 환히
드러납니다.
“신부를 차지하는 이는 신랑이다. 신랑 친구는 신랑의 소리를
들으려고 서 있다가, 그의 목소리를 듣게 되면 크게 기뻐한다.
내 기쁨도 그렇게 충만하다.”
세례자 요한뿐 아니라 우리 역시 신랑인 주님의 친구들입니다.
이 거룩한 미사시간, 신랑인 그리스도 예수님의 목소리를 듣고 크게
기뻐하는 우리들입니다.
“그분은 커지셔야 하고 나는 작아져야 한다.”
오늘 복음의 절정입니다. 이 한마디가 참된 겸손의 정의입니다.
진정한 기쁨과 행복도 바로 이런 겸손한 삶의 자세에 있습니다.
그분은 커지면서 나는 ‘사라지는(lose)게’ 아닌 ‘작아지면서(decrease)’,
그분 안에서 참 나를 ‘발견(find)’함으로 충만한 기쁨입니다.
매일 주님의 미사은총으로 하느님에게서 겸손한 사람으로 새롭게
태어나는 우리들입니다.
아멘.
- 이수철 프란치스코 성 요셉 수도원 원장 신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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