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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행15:6-21)
2023, 6/25 설교문
오늘 하나님께서 저와 여러분들에게 주시는 말씀은 행15:6-21절 말씀으로“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이런 제목으로 말씀 전할 때 주의 크신 은혜와 사랑이 이곳에 함께하길 원합니다.
한 주간 평안하셨는지요? 오늘이 6월 마지막 주일입니다. 내일부터는 본격적으로 장마가 시작된다는 예보가 나왔는데, 장마가 예년에 비해 늦었지만 비의 양도 많고 장마기간도 길다고 하니 습기 때문에 고생하지 않도록 환경관리 건강관리 잘 하시고 밝고 긍정적인 생각으로 장마철 잘 이겨내시기 바랍니다.
우리 인사 나누겠습니다. 사랑합니다. 반갑습니다.
하나님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다음과 같은 3가지로 은혜를 주셨습니다.
첫째로, 교회의 의사결정도 민주적 토론과정이 필요합니다.(6-7上절)
둘째로, 신앙인은 나와 다른 견해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5-7절)
셋째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사람이 바뀝니다.(13-21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한국교회는 개척한 1세대가 은퇴하고 2세대로 위임되는 과정에서 많은 교회들이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분쟁이 심해 많은 교인들이 교회를 떠나는 가슴 아픈 일을 겪었거나 겪고 있습니다. 또 2세대가 목회하는 과정에서도 갈등을 극복하지 못하고 분열분쟁이 계속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문제가 생기면 하나님께서 직접 깔끔하게 정리해주시면 좋으련만 그렇지 않고 사람에게 맡기니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기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공동체가 모여 토론을 통해 결정하는 민주적 절차가 생겨난 것입니다.
이런 토론에서 필요한 덕목은 나와 견해가 달라도 충분한 토론을 통해서 서로의 주장을 좁혀가며 합의를 도출해야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토론이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들이라면 순조롭게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많은 어려움이 있을 것입니다. 때문에 모든 면에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여러분들은 그리스도를 인격적으로 만남으로 지혜로운 삶 살아가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말씀을 따라가면서 주님이 원하시는 의사결정에서 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난 사람이 필요한지 성령께서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로, 교회의 의사결정도 민주적 토론과정이 필요합니다.(6-7上절)
본문 6-7上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아멘.
바나바와 사도바울이 약 2년간에 걸쳐 2240㎞를 다니며 복음을 전하다 안디옥으로 돌아왔을 때 예루살렘에서 온 일단의 무리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만으로는 구원받을 수 없고, 할례도 받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고 주장하여 난리가 납니다. 그래서 안디옥교회는 급하게 바울과 바나바를 예루살렘으로 파송해 이에 대한 판단을 구하게 되는데, 이 때문에 예루살렘교회에 최초로 회의가 열립니다.
여러분!!! 우리는 흔히 교회에서 목회자가 신정(神政)을 이유로 일방적으로 결정하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합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닙니다. 모세가 백성들을 인도할 때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을 주시고 백성들을 인도하는 전권을 주심으로 가나안으로 인도하셨고,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점령할 때도 독단적으로 그 무더운 땡볕에 백성들에게 불평불만을 못하도록 입을 봉한 채 성을 일곱 바뀌나 돌게 하는 독재를 합니다.
또 하나님은 제사장들에게 권한과 임무를 주어 대리 통치를 하셨고, 신약에서도 감독과 장로들이 강하게 그립을 쥐고 교회를 이끌도록 하신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이 제사장이나 선지자, 장로나 감독들이 불완전하다는 것입니다. 구약시대 제사장들이 변질되고 타락해서 얼마나 많은 책망을 받았습니까? 또 교회지도자도 본능적인 욕심 때문에 100% 하나님 뜻대로 결정하기가 어렵습니다.
불완전한 지도자의 욕심과 이해관계에 따라 결정되면 공동체의 불만과 불평을 초래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많은 문제들이 생겨났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차선책으로 나온 방법이 무엇일까요? 공동체가 함께 모여 기도하고 토론하여 결정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이 그래도 문제를 최소화하는 최선의 방법이라는 것입니다.
가롯유다를 대신할 사도를 뽑을 때 사도와 120명의 형제들이 함께 모여 새 사도를 뽑았습니다.(행1:15-26) 또 예루살렘교회가 과부를 공궤하는 문제로 시끄러울 때 온 교회가 모여 일곱 집사를 선택함으로써 이 문제를 원만하게 해결합니다.(행6:2) 오늘 또 이신칭의의 중요한 문제도 온 예루살렘교회가 다 모여 기탄없이 토론하여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대 명제를 확립한 것입니다.
여러분!!! 교회는 어떤 문제라도 활발하게 의논할 수 있어야합니다. 잠15:22절에 "의논이 없으면 경영이 파하고 모사가 많으면 경영이 성립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불만이 없는 교회가 꼭 좋은 교회는 아닙니다. 정말 잘하고 은혜로워서 말이 없다면 감사할 일이지만, 말할 수 없는 분위기 때문에 할 말을 못한다면 교회는 속으로부터 곪게 되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생각이 다르다고 불온 세력처럼 매도하면 안 됩니다. 이런 태도는 초대교회로부터 내려오는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끌어온 교회전통을 무시하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한국교회도 이런 토론의 장이 열려야합니다. 토론에서 반대의견도 말할 수 있어야 하고, 생각이 다른 여러 사람들이 토론을 통해 하나가 되어야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사도바울의 주장과 유대교 기독인들의 주장이 얼마나 다릅니까? 할례를 받아야하고, 율법도 지켜야 구원받는다는 이 말이 얼마나 심각한 말입니까? 그럼에도 회의에서 이들을 비난하지도 않았고, 떠들고 방해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들도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충분히 말할 수 있었습니다.
자유로운 토론을 통해 얻은 것이 무엇일까요? 교회가 분열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교회가 안정이 되고, 복음은 더욱 활발하게 전파되어 많은 사람들이교회를 찾아와 큰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충분히 기도하고 토론한 후, 하나님말씀에 근거하여 민주적 절차에 따라 결정했고, 이 결정에 모두가 순복했기 때문에 이런 결과가 나온 것입니다.
22절에 "이에 사도와 장로와 온 교회가 그 중에서 사람들을 택하여 바울과 바나바와 함께 안디옥으로 보내기를 결정하니..." 이 결정에 모두가 따랐다는 뜻입니다.
이게 중요합니다. 토론은 마음껏 하되 일단 결정하면 불만이 있고, 내 마음에 안 들어도 따라야합니다. 만약 따르지 않는다면 교회는 단호하게 대응하여 교회질서를 세우고, 진리를 지켜가야 합니다. 이런 교회가 앞으로 우리가 지향해야할 교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교회를 만들어가는 여러분 되시기 바랍니다.
둘째로, 신앙인은 나와 다른 견해도 들을 수 있어야합니다.(5-7절)
본문 5-7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바리새파 중에 어떤 믿는 사람들이 일어나 말하되 이방인에게 할례를 행하고 모세의 율법을 지키라 명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사도와 장로들이 이 일을 의논하러 모여 많은 변론이 있은 후에 베드로가 일어나 말하되 형제들아 너희도 알거니와 하나님이 이방인들로 내 입에서 복음의 말씀을 들어 믿게 하시려고 오래 전부터 너희가운데서 나를 택하시고." 아멘.
우리는 지금 여러 이해집단들이 토론에 참가하여 자신들의 견해를 말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이신칭의’대 진리를 도출하는 과정을 보았습니다.
베드로는 예루살렘교회의 최고지도자였지만 이번에 제기된 문제에 대해 성급하게 자기견해를 말하지 않고 많은 토론이 있은 후에 비로소 자신의 견해를 말합니다.
사실 할례주의자들의 주장은 들을 가치도 없는 하나님을 대적하는 위험한 주장입니다. 이신칭의의 복음이 이미 이방인에게 전파되었고, 그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일 때 할례를 받지 않았어도, 율법을 몰라도 그들에게 성령이 임하여 구원이 확증되었습니다.(행10:45) 이렇게 하나님은 오직 예수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사실을 이미 확인해주셨습니다. 행11:17절에 "그런즉 하나님이 우리가 주 예수그리스도를 믿을 때에 주신 것과 같은 선물을 그들에게도 주셨으니 내가 누구이기에 하나님을 능히 막겠느냐 하더라." 아멘. 이렇게 우리가 예수를 믿을 때 성령을 주셨다는데 더 이상 무엇이 필요하겠습니까?
그럼에도 저들은 메시야가 오심으로 누리는 축복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이건 말도 안 되지만 베드로는 말도 안 되는 그들의 말을 끝까지 들어주었던 것입니다.
잠18:13절에 "사연을 듣기 전에 대답하는 자는 미련하여 욕을 당하느니라." 이렇게 말씀합니다. 결국 갈등이 해소되었는데, 베드로의 말이 효과적이었던 것은 하나님께서 그와 함께하심으로 그의 말에 권위가 있게 하신 것도 있지만, 저들이 토론하는 과정에서 서로 잘못 생각한 것을 발견하고 상대의 의견을 받아들이는 일명 소크라테스문답법의 효과가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이념적 대립이 극심해서 상대의 말이 아무리 옳아도 인정하지 않습니다. 거짓으로 밝혀진 광우병선동과 사드기지 전자파선동이 그 좋은 예입니다. 지금 후쿠시마원전 오염수문제도 IAEA 국제원자력기구가 과학적으로 아무 문제가 없다는데도 듣질 않고 오직 선동자의 말만 듣고 혼란을 가중시킨 결과입니다. 이렇게 편협하면 아무리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말을 해도 통하지 않습니다.
우리 신앙인은 기도하면서 옳고 그름을 바르게 분별하여 선동되지 말아야합니다.
어쨌든 상대의 주장이 내 생각과 다를지라도 일단 토론을 통해 내 주장이 틀리면 내 생각을 바꾸고, 상대의 주장이 틀리면 상대가 바꾸어야겠지요.
이 과정에서 상대방을 무시하거나 우격다짐이 있어서는 안 됩니다. 옳은 말도 상대방을 무시하면 안 되고, 틀린 주장도 끝까지 들어줄 수 있는 인내력과 포용력도 있어야합니다. 하나님도 우리의 말(기도)을 끝까지 들어주지 않습니까?
그러니 우리도 형제들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맞습니다. 상대방이 옳아서도 아니고, 들을 만해서가 아니라 들어주다보면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에 그러는 것입니다.
여러분도 형제들의 말을 잘 들어주고 경청하여 좋은 결과 만들어가시기 바랍니다.
셋째로,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인생이 바뀝니다.(13-21절)
본문 13절 말씀 함께 읽겠습니다. "말을 마치매 야고보가 대답하여 이르되 형제들아 내 말을 들으라." 아멘.
여러분!!! 우리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민주적 토론도 잘할 수 있고, 남의 말을 경청하며 좋은 결과를 만들어내는 것도 쉬워집니다.
13-21절에 나오는 야고보의 주장이 베드로를 능가할 정도로 설득력이 있었는데, 이 야고보는 사도 야고보가 아니라 야고보서의 저자이자 예수님의 젖동생인 야고보입니다. 그는 권위 있는 말로 이신칭의의 문제를 깔끔하게 정리하는데 일조했는데, 그가 처음부터 이렇게 훌륭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도 당시 다른 형제들과 똑같이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예수님 사역이 막바지일 때는 주님에 대한 소문이 온 이스라엘을 덮었고, 죽은 자까지 살리는 많은 기적과 이적을 행하는데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습니다.(요7:5) 심지어 막3:21절에는 자기 육신의 형을 미친 사람 취급까지 한 강퍅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랬던 그에게 놀라운 변화가 일어나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후 그의 생각과 맘이 180도 바뀌어(고전15:7) 예루살렘교회의 기둥 같은 존재가 됩니다.
오늘도 이 중차대한 토론에서 이신칭의를 지지하는 발언을 하는데, 여러분, 그가 왜 이렇게 변했을까요?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생각과 마음이 변화는 것은 당연합니다. 왜 그럴까요? 지금까지 몰랐던 하나님나라를 경험하는데 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한 일이겠지요.
세리장 삭개오도, 세리 마태도, 수가성의 여인도 주님을 만나고 새사람이 되었고, 믿는 형제들을 잡아가두던 사울도 주님을 만나고 완전하게 달라져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로 바뀝니다. 또 천하에 탕자였던 어거스틴도 주님을 만난 후 교부시대의 탁월한 지도자가 되었고, 평양에서 유명했던 깡패 이기풍 목사님도 꿈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스왈른 선교사의 설교를 통해 회심하여 제주도로 들어가 복음을 전하다 신사참배 거부로 광주형무소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돌아가십니다.
여러분!!! 이들이 이렇게 변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그러나 예수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사람이 변하게 되어있습니다. 아무리 흉악한 자라도 예수님을 믿고 영접하면 사람이 바뀌게 되어있습니다.
우편강도를 보십시오. 예루살렘을 공포에 떨게 했던 흉악한 자가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자 변하여 새사람이 되고, 천국백성이 되지 않았습니까?
그러므로 우리는 사람을 쉽게 판단해서도 안 되고,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예수님과 상관없이 성현의 말이나 또는 그리움이나 추억, 두려움이나 욕구 같은 것이 결단으로 이어져 사람을 바꾸기도 합니다. 그러나 이렇게 변하는 것은 자신의 약한 의지에 의해 언제든지 되돌아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만나고 영적세계를 경험한 후 변하면 쉽게 바뀌질 않습니다.
예수님의 12제자 중 천수를 다한 사도요한을 빼고 모두 죽음 앞에서도 배교하지 않고 목숨으로 주님을 시인한 것도 저들이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났기 때문입니다.
물론 타고난 성품은 바뀌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나쁜 성품을 숨기고 가장하기 때문에 선하게 보이기도 하지만 죽음을 앞둔다든지 결정적인 순간에는 거의 드러나게 됩니다. 그래서 사람을 알려면 노름판에 데려가라는 말이 있고, 돈 앞에서 정직하면 그 사람은 믿을 수 있다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그러나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면 이 세상이 전부가 아니라 돌아갈 영원한 본향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주께서 우리를 구원하셨으니 더 이상 욕심 부릴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니 세상을 초월할 수가 있고, 주께서 도우시기 때문에 세상이 어떻게 변해도 그것을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먼저 우리도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야합니다. 나아가 주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복음을 전해서 저들도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사도바울처럼 이기풍목사님처럼 또 신실한 우리믿음의 선배들처럼 주님만 인격적으로 만나면 우리의 인생도 완전히 바꿀 수 있습니다.
고후5:17절에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새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새 사람답게 오직 말씀을 따라 믿음으로 순종하는 삶을 통해 바뀐 새 사람의 기쁨과 영광을 누리며 살아가는 여러분 되시길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