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 사진은 당현종과 양귀비의 데이트장소 화청지이며 화청지가 있는 중국 서안이라는 도시에 대해 먼저 좀 설명해드립니다.
서안은 중국 섬서성의 성도로서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도시중 하나인데 인구는 현재 약 20만명이며 과거에는 동양과 서양의 문화교류를 있는 실크로드의 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볼때 옛날에 이곳 서안이 경제적,정치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에 있었는지 짐작할수 있으리라 봅니다. 그런 연유로 시내외에는 각종 볼거리가 많은데 우리에게는 오히려 '장안'이라는 이름으로 더욱 익숙하지요..
오늘날은 이곳이 중국의 신흥내륙공업지역 중에 하나이며 20여개의 대학과 연구소를 갖춘 교육도시이자 중국의 군수공자와 우주연구센터등 핵심산업체가 자리잡고 있는 핵심지역 이라고 합니다.
중국 서안에서 약 25킬로미터 거리의 여산 산록에 온천이 하나 있는데 이름은 화청지라고 하고 역대 중국제왕이 행궁별장을 세워서 휴양했던 곳입니다만 특별히 당현종과 양귀비가 이곳에서 사랑을 나누었다해서 더욱 유명한 곳입니다.
여기에는 양귀비가 목욕을 했다는 해상탕이라는 섭씨 43도의 온천이 있는데 일반인에게도 공개되며 광물질을 많이 포함하고 있어서 관절염과 특히 피부병에도 효험이 있어서 중국국가에서 보호하고 있다고 합니다.
== 양귀비(719-756)의 본명은 양옥환이다. 그녀는 애초 당 현종과는 시아버지와 며느리라는 관계에 있었다. 사천성 관리의 딸로 태어나 어린시절 부모를 여의고 친척의 집에서 자랐던 양옥환은 16세에 그 미모를 인정받아 당현종의 수많은 아들 중 하나인 수왕의 비로 궁에 들어간다.수왕의 아내로 산 것이 6년이 되던 22세의 어느 날.
양옥환은 당 현종 처소의 환관인 고력사의 은밀한 방문을 받는다. 그리고 불려 간 곳이 당 현종의 술자리. 그녀는 그곳에서 음악 애호가 당 현종이 연주하는 가락에 맞춰 아름다운 춤을 선보인다. 춤이 끝나기 전에 남녀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모든 것이 시작되었다. 당시 예순을 바라보던 당 현종의 마음에 사랑의 불길이 당겨진 것이다.
당 현종은 양옥환이 아들의 아내라는 사실도 잊은 채 아름다운 그녀를 품기 위해 전전긍긍한다. 망설이는 양옥환을 고력사가 특별히 파견한 궁녀들이 설득하기 시작했고 당 현종의 물량공세와 구애가 이어졌다. 마침내 양옥환은 수왕을 버리고 그 아버지 당 현종을 맞아들이기로 결심하고 시아버지의 귀비로 들어갔다.
그러나 아무리 황제라 하더라도 염치는 있는 법. 아들의 아내를 바로 빼앗을 수 없었던 당 현종은 일단 양귀비를 궁에서 내보내 당분간 화산에서 도가의 여도사(女道士)로 생활하게 한다. 그 사이 아들 수왕에게는 위씨 성을 가진 여인과 재혼하도록 주선한다.
마침내 모든 일이 매끄럽게 처리되고 당 현종은 꿈에도 그리던 여인을 맞을 수 있게 되었다. 양옥환은 귀비에 책봉되어 현종의 비로 다시 궁에 들어온다. 양귀비는 비록 비의 신분이었지만 당 현종이 황후의 자리를 비워둔 채 지냈기 때문에 실질적으로는 황후와도 같은 권력을 휘둘렀다.
당 현종이 양귀비를 맞으면서 당나라는 큰 변화를 맞이한다. 당 현종 치세전반기는 <개원의 치> 라는 칭호를 받으며 중국 역사상 몇 안되는 태평성세를 구가하였다. 그러나 양귀비를 맞으면서 사랑에 눈이 먼 당 현종에게정치는 관심 밖의 일이 되었다. 환관과 탐관오리가 득세하면서 일반 백성들은 살림살이는 급속히 몰락하기 시작했고 민심은 흉흉해졌다.
그러나 당 현종에게는 오로지 양귀비뿐이었다. 당 현종은 양귀비를 위해온천인 화청지에 궁을 짓고 오로지 양귀비와 사랑하는 일에만 전념하였다. 양귀비를 자신의 말을 이해하는 꽃, 즉 해어화(解語花) 라 부르며 양귀비의 아름다움 앞에는 꽃조차도 부끄러워한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양귀비가 즐겨 먹는다는 이유로 2,000리 밖에서 나는 여주라는 과실을 매일 공수해오도록 하였고 양귀비가 원하는 모든 사치를 다 누리도록 해주었다. 더불어 그녀의 친인척을 궁과 관직에 대거 등용하여 정치를 모두 다맡겼다. 이때 등용된 양귀비의 6촌 오라비 양국충은 건달출신의 부도덕한간신배로 당 현종 치세 말기를 부정 부패로 얼룩지게 만들었다.
양귀비는 당 현종의 사랑을 붙잡아 두려고 새로운 화장법을 개발하여 미모를 가꾸었다. 양귀비는 날씬하고 가녀린 미녀와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통통한 몸매에 희고 매끄러운 피부를 가졌던 양귀비는 온천물에 몸을 닦고통통한 몸매를 유지하면서 밤이나 낮이나 당 현종을 자신의 침실로 이끌었다.
양귀비의 몰락은 당 현종 외에 양귀비가 총애하던 두 남자 사이의 알력에서 시작되었다. 양귀비는 중국 변방 돌궐족 출신의 안록산을 가까이 하였다. 안록산은 일개 군졸에서 시작하여 용맹으로 공을 세워 일약 중앙으로진출한 인물이었다. 20대의 양귀비는 40대의 안록산을 수양아들로 삼고 그를 매우 가까이 하였다. 일설에는 양귀비가 안록산과 부적절한 관계를 맺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당 현종은 안록산과 양귀비의 관계를 조금도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양귀비가 안록산을 총애하는 것에 비례하여 더욱 안록산을 높은 지위로 등용하였다. 그것이 양귀비의 6촌 오빠인 양국충과 안록산 사이에 갈등의 원인이 되었다. 양국충은 안록산의 성장에 위협을 느끼고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이를 눈치 챈 안록산은 변방에서 난을 일으키고 곧 이어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까지 쳐들어 왔다.양귀비와 함께 급히 피난길에 나선 당 현종이 섬서성 마외파에 이르렀을때였다. 황제의 가마를 운반하던 병사들이 소동을 일으켰다. 나라를 망친양귀비와 그 일족을 죽이지 않으면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고 주저앉은것이다. 뒤에선 안록산의 군사가 쫓아오고 피난의 가마는 조금도 움직이지않자 다급해진 당 현종도 별수 없이 병사들의 요구에 따라 양귀비의 일족을 주살하였다.
그리고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고 자신의 목숨보다 더 귀히 여겼던 양귀비가 인근 절 배나무에 목을 매어 자살하도록 방치하였다. 안록산의 난이 진압되고 다시 장안으로 돌아온 당 현종은 죽을 때까지 양귀비를 잊지 못했다. 양귀비의 초상화를 앞에 두고 끝내 그녀를 지키지 못한 회한과 그리움속에서 남은 세월을 보냈다.
잘못된 아름다움은 타인을 미혹하여 판단을 흐리게 할 뿐만 아니라 때로는 스스로의 목숨마저도 위태롭게 만든다. 그래서 ‘미인 박명’이라는 말이 있는지도 모르겠다. 예순을 바라보던 현명한 성군, 당 현종의 눈을 흐리게 하여 스스로의 명예도, 나라에 대한 의무도 벗어 던지게 한 양귀비의매력은 결국 스스로의 명마저 재촉하게 하였다.
여성에게 있어 아름다움은 그 어떤 것보다 가장 축복받은 일일 것이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반드시 현명하고 바른 가치관과 함께 빛을 더 발할 수있다. 양귀비의 고사에서 발견하듯이 그녀가 조금만 더 현명하였더라면 스스로의 목숨도 구하고 더 나아가 당 현종의 치세를 태평 성세로 유지할 수 있지 않았을까?
== 기록에 의하면 양귀비는 다소 통통한 체형이었던 것 같다. 전통적으로 중국의 미인형은 대부분 날씬하였는데, 이러한 날씬형의 미인으로는 조비연(趙飛燕)이 가장 대표적이라고 합니다. 그후 당대에 이르러 중국의 미인은 양귀비처럼 통통한 체형이 표준이 되었는데 당대에는 경제적 발달과 함께 음식문화가 발달하여 육식을 많이 함으로써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찐 체형이 되었으며, 그 결과 미인의 기준도 바뀌게 되었던 것이지요.
현대의 여성들은 몸매를 날씬하게 유지하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하며 다이어트를 하는데 비해, 양귀비와 당대의 여성들은 먹는 것과 미의 기준을 일치시켰으니 실로 대단한 의식의 전환이었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양귀비는 당도가 매우 높은 "여지(?枝, 열대 과일의 일종)"를 즐겨 먹었을 뿐만 아니라 전혀 다이어트를 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반면 양귀비는 얼굴 화장에는 매우 많은 신경을 쓴 것으로 보여지는데 양귀비가 평소에 사용한 화장품은 "옥홍고(玉紅膏)"였는데 후세 사람들은 그것을 "양태진옥홍고(楊太眞玉紅膏)"라고도 칭하였다고 합니다. 관련 문헌에 의하면 이것은 "얼굴을 붉고 윤기있게 만들어, 바른지 15일이 지나면 얼굴이 홍옥(紅玉)처럼 된다"고 하는데 그것을 만드는 방법을 간단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 먼저 살구씨를 물에 담가 껍질을 벗긴 후 갈아서 미세한 분말을 만든다. 이렇게 만든 행인가루를 감홍(염화 제일 수은), 활석분(탤컴 파우더)과 동일한 비율로 혼합하여 찐 다음, 용뇌(龍腦), 사향을 첨가하고 거기에 계란 흰자위를 배합하여 찐득찐득해질 때까지 잘 섞는다. 이것을 매일 아침 세수한 후에 바르면 피부미용에 아주 좋다고 한다.-
양귀비는 눈과 눈썹 화장도 중시하였는데 그녀는 다양한 화장법으로 눈썹에 수시로 변화를 주었다고 합니다. 낮에는 누에나방이나 원앙 모양의 눈썹을 그렸고 밤에는 굵게 그렸는데, 코 윗 부분은 아주 굵게 그리고 바깥쪽으로 갈수록 점점 가늘게 그려서 저녁에는 등불 아래에서 더욱 많은 변화를 나타낼 수 있으므로 눈꼬리와 속눈썹도 눈썹의 모양에 어울리도록 변화를 주었다고 합니다.
양귀비는 또 입술 화장을 다소 진하게 하여 입술이 도톰하게 보이도록 하고 제일 마지막에 다시 단청(丹靑)으로 양쪽 볼의 보조개에 포인트를 주어 웃는 모습이 매력적으로 보이도록 하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백거이는 이러한 양귀비의 아름다운 모습을 "눈동자 굴려 살짝 웃으면 온갖 아름다움 생겨나네"라는 노래도 했다고 합니다.
오늘 사진중에 제일 처음 나오는 사진이 바로 양귀비가 불려간 당현종의 술자리에서 처음으로 당현종을 만난것을 표현한 그림입니다. 말하자면 역사가 시작되는 순간인 게지요..
그리고 양귀비 입욕(入浴) 조각상이 있는데 광동성 연산현(連山縣)의 흰색 대리석으로 조각한 높이 3m의 입체 조각상입니다. 이 조각상은 몸에 여우가죽을 걸치고 육체를 반쯤 노출시킨 양귀비가 머리를 숙여 요염한 자태로 천천히 욕탕에 들어가는 모습입니다. 여기에는 성당(盛唐)시대 궁정 귀부인의 화려한 생활상이 나타나 있지요
양귀비의 목욕 장면은 당대 화청궁에서 시작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오는 로맨틱한 이야기인데 당시에는 아름다운 여산(驪山)의 풍경과 영원히 끝나지 않을 사랑에 도취되어 화천궁을 지었다고 합니다.
사진중에 처음나오는 연화꽃처럼 생긴 제일 작은 목욕탕이 바로 양귀비가 혼자 목욕하던 바로 그 목욕탕이고 그다음에 나오는 좀더 크고 물이 담긴것은 당 현종이 쓰던 목욕탕이며 마지막으로 사각형 처럼 생긴것은 대신들이 목욕하던 곳이랍니다. 바닥에 보면 조그만 구멍들이 있는데 그곳에 발을 문질러 댔다네요..
화청지 옆에는 양귀비 무덤도 있는데 실제로 양귀비 무덤에는 양귀비의 시체는 없고 옷가지만 묻혀있다고 합니다. 양귀비 무덤에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하나 있는데 옛날에 굉장히 얼굴이 못생긴 여자가 있어서 시집도 못가고 맨날 사람들 놀림거리가 되었다네요.
그여자가 하루는 너무 속이 상해서 양귀비의 무덤가에 가서 울고 있었는데 얼마나 땅을치며 울어제꼈는지 얼굴이 흙투성이가 될 정도로 울고나서 속이 좀 풀리니까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와 잠이 들었는데 글쎄 다음날 아침 얼굴을 씻어보니 피부가 너무너무 깨끗해져서 이뻐져서 시집을 갔더라나 뭐라나...
암튼 그래서 그런지 중국인들은 그 지역의 흙이 피부에 좋은 황토흙이라며 그 흙을 몰래 봉투에 담아오기도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