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8일 주일설교
**평안한 얼굴(행 7:54-60)
*신앙생활을 하면서 바람 중 한 가지는 평안의 얼굴을 갖는 것이다.
‘평안(平安’)이라는 말은 ‘걱정이나 탈이 없음’이라는 뜻이다.
-비슷한 말로는 안녕, 평강, 무사, 무고, 무탈 등이 있다.
-살면서 걱정스런 일이나 사고가 없는 상태를 평안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성경이 가르치는 평안은 조금 성격이 다르다.
-문제와 사고가 몰려오는 상황에서도 얼마든지 평안을 누릴 수 있다고 가르친다.
-사도행전의 스데반 집사를 통해 그런 평안을 살펴보겠다.
*스데반은 예루살렘교회가 구제와 섬김의 일을 위해 세운 일곱 집사 중 한 명이다.
-그는 자신처럼 헬라어를 사용하고 로마문화에 익숙한 사람들, 즉 헬라파 유대인에 대해 특별한 애정이 있었다.
-스데반은 그들에게 선한 마음으로 복음을 전한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헬라파 유대인 중에는 스데반이 전한 복음을 거절하는 자들이 있었다.
-그들과 스데반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예루실렘 성전과 모세의 율법 대해 옥신각신 의견을 주고받았다.
-헬라파 유대인은 지혜와 성령으로 말하는 스데반을 이겨 낼 도리가 없었다.
*헬라파 유대인들이 스데반의 가르침에 마음을 열었더라면 참 좋았을 텐데 그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오히려 음모를 꾸미고 거짓 증인을 매수해 스데반을 산헤드린 공회에 고발한다.
-공회의 재판은 짜인 각본대로 진행된다.
-거짓 증인들이 모함과 날조로 스데반을 압박한다.
-고발 내용은 두 가지다.
-스데반이 모세 율법을 무시하고 예루살렘 성전을 모독했다는 것이다.
*무지한 대중의 눈은 분노로 이글거린다.
-증오심이 가득한 저주의 말이 그들의 입에서 튀어 나온다.
-손에는 돌멩이를 움켜쥐고 금방이라도 던지려 준비한다.
-스데반의 생명은 바람 앞의 촛불과 같다.
-모든 상황은 스데반에게 두려움과 공포를 강요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의 표정이 ‘천사의 얼굴’(행 6:15)과 같았다고 기록한다.
-스데반이 어떻게 이렇게 위급한 상황에서 천사의 얼굴을 하며 평안을 누릴 수 있었을까?
-스데반이 바라보는 시선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스데반은 이를 갈며 돌멩이로 자신을 쳐서 죽이려고 하는 군중의 알굴에 집중하지 않았다.
-그는 하늘을 주목했고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예수님이 하나님 우편에 ‘서서 계신 것’을 보았다.(55절)
-그것은 흔치 않는 광경이다.
-신약성경의 다른 부분들(막 16:19, 골 3:1, 히 10:12, 계 20:11 등)을 보면 한결같이 예수님을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 계신 분’으로 묘사한다.
*그러넫 스데반이 본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서서’ 계신다.
-예수님은 지금 스데반이 처한 이 상황에서 앉아 계실 수가 없다.
-스데반이 집단폭력과 거짓 증언의 희생양이 되는 광경을 그냥 묵과하고 계실 수가 없다.
-예수님은 벌떡 일어나 ‘서서’ 스데반의 모습을 주목하시며 응원하신다.
*아~! 그렇다.
-스데반은 자신을 향한 위협이나 사건이나 문제를 본 게 아니다.
-그 순간 스데반이 본 것은 하나님의 영광이었고, 하나님 보좌 우편에 ‘서서’ 자기를 응원하고 계시는 예수님의 얼굴이었다.
-그렇기에 스데반의 얼굴은 천사의 얼굴과 같았다.
-그는 하늘을 주목하고 예수님을 바라보며 임박한 폭력 앞에서도 평안을 유지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무엇일까?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른다는 것은 뭔가 거창한 것을 목표로 두는 것이 아니다.
-하늘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늘 보좌 우편에 ‘서서’ 우리 삶을 응원하시는 예수님을 보는 것, 그렇게 주님을 바라보다가 내 표정 하나하나가 천사의 얼굴이 되고, 나아가 예수님의 얼굴을 닮아가다 예수님의 얼굴처럼 변화되는 것, 그것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른다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 평안의 얼굴을 누리는 우리네 삶이 되길 소망하고 축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