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선슬리퍼의 외출 /
이복희
어쩌다 그녀의 발에 신겨 전철까지 탔는지 나도
잘 몰라. 그녀가 시간에 쫓겨 허둥대다 아무 생각 없이 발에 꿰었을까, 아니면
갑자기 굽이 떨어져 구두 수선소에 맡기고 할 수 없이 신세를 졌을까, 어찌 됐든 삼선슬리퍼라 해서 전철을
타지 말라는 법은 없지 않겠어?
지금 외출용 신발들 사이에 끼어 전철에 실려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내게도 이런 날이 있다니 말이야. 허구 한 날 집안이나
골목길에서 찍찍 끌려 다니다 이게 웬 호사야. 남들 눈엔 이상해 보일 것이라는 것쯤은 나도 잘 알지만 어쩌겠어.
어휴, 구두에
운동화, 그리고 부츠까지 모두 내게 눈총을 쏘고 있구먼. 뭐 상관없어. 승객들은 모두 스마트폰에 코를 박다시피 엎드려 있어 다행이다 싶었지. 그런데
맞은편에 앉아있는 저 여자, 몹시 맘에 걸려.
이게 웬 구경거리냐 싶은지 계속 쳐다보면서 내
주인의 얼굴, 옷차림 할 것 없이 전신을 스캔하고 있는 거야. 좀 염치없지
않아? 대놓고 그렇게 보는 건 아니지. 아무리 안 보는 척 하지만 내
눈엔 다 보인다고. 어쩌다 그랬을까 싶겠지? 열심히 머리 굴려봐야 소용없어. 나도 모를 일인데 당신이라고 별 수 있어?
알 수 없는 건 나의 그녀였어. 의자 밑에 숨어버리고 싶은 내 심정은 아랑곳없이 너무나 태연한 거야. 아무래도
삼선슬리퍼가 새로운 패션의 하나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남들의 시선 같은 건 얼마든지 무시할
수 있는 강심장을 가졌는지도 몰라.
하긴, 누구나
숨어있는 사연들로 어쩌다 남의 시선을 받기도 하겠지만 일일이 마음 쓰다가는 아무것도 못해. 사람들은 그게
문제더라고. 알지도 못하면서 고정관념의 잣대를 들이미는 버릇, 내남직
할 것 없이 다 똑같더란 말이지. 삼선슬리퍼 신고 전철 좀 탔기로서니…. 그런
면에서 당당한 나의 그녀가 훨씬 멋지잖아? 전철 안에서 음식 먹고 뽀뽀하고 화장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말이야.
앞자리 아줌마, 아직도
눈길이 그대로네. 생각할 게 그리 없으면 남들처럼 차라리 스마트 폰이라도 보시든가. 뭐라고? 옷차림하고 전혀 안 어울린다고? 그건
그래. 딱 떨어지는 정장에 고급 핸드백, 그뿐인가? 반짝이는 액세서리까지, 거의 완벽한 차림이거든. 삼선슬리퍼가
당치도 않지. 게다가 나로서는 스타킹 신은 발은 정말 처음이야. 대개는
맨발로 나를 걸치거든.
이쯤해서 나의 자존감에 관해 말하고 싶어. 이래 뵈도 나 삼선슬리퍼는 국민슬리퍼라고 다들 인정해 준다는 사실, 알고 계시지? 명사 앞에 ‘국민’이 붙으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다 눈치 채셨으리라 믿어. 국민엄마, 국민누나, 국민여동생, 또 뭐 있더라? 아 국민첫사랑. 말하자면 모두가 이견 없이 좋아하는 대상이란 말이지.
뭐 차원이 좀 다르다고 항변한다면 접수하겠어. 그래서 때로는 의기소침해질 때도 있으니까. 언제부터인가 백수나 실업자의 전형으로
꼭 나를 내세우더라고. 값싸게 누구나 장만할 수 있어서 모두 애용하다 보니 그리 되었겠지. 뭐 나쁘지 않아.
‘복면가왕’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 생각나시나? 온갖 캐릭터로 복면을 쓰고 거기에 맞춘 의상을 입어 누군지 알아볼 수 없는 모습으로 노래 부르는 프로그램. 말하자면 선입견 없이 가창력 하나로 대결을 하는 거야. 가면을 쓰고도 아, 얼마나 노래를 잘 하는지.
그런데 말이지. 거기서
나, 삼선슬리퍼를 보게 되리라고 누가 짐작이나 했겠어. ‘그거 실화야?’ 그렇게 묻고 싶겠지. 정말이라고.
좀 더 자세히 들려줄까? 혹시 ‘음악대장’이라고 들어봤나? 엄청난 가창력으로 가왕의 자리를 오래 지켰지. 금단추가 화려한 장교복에 멋진
술이 달린 견장과 깃털모자에 동그랗고 귀여운 가면을 썼던 음악대장. 분장도 멋졌지만 그의 노래에 감동되어
어떤 이는 자기도 모르게 눈물을 흘렸다는군. 연속 아홉 번이나 계속해서 왕위를 지켰으니 대단하고말고.
그런데 그 음악대장이 의외의 적수를 만난 거야. 누구냐고? 가만 있어봐. 설명해줄게. 그가 무대에 나서는 순간, 완전히 허를 찔린 것 같았어. 푸르죽죽한 트레이닝복은 낡고 허름했는데 가면에 그려진 눈은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이 처져 있어 불쌍해 보였지. 헝클어진 더벅머리를 질끈 동여맨 넓적한 머리띠에 쓰인 ‘백수탈출’이라는 글자는 조악하긴 했지만 그런대로 필사의 각오 같은 게 서려 있더군. 이쯤이면
그의 신발이 뭐였는지는 말 안 해도 알겠지? 삼선슬리퍼를 신은 그의 맨발. 상상이
가는가? 탈출은 커녕 대번 탈락하리라 싶었는데….
그런데, 그런데
말이야. 백수탈출이, 삼선 슬리퍼가 이긴 거야. 그 막강한 음악대장, 모든 시청자들이 열광하는 그 사람의 왕좌를 빼앗은 거라고. 슬리퍼 두 짝으로 내가 얼마나 신나게 박수를 쳐댔는지 모를 걸. 아니 박족이라고
해야겠지?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는 노래 가사가 그 순간 생각나기도 했지.
전철 안이 점점 붐비기 시작하네. 나의 그녀는 여전히 다소곳하게 앉아있고 다행히 이제 누구의 시선으로부터도 자유로워졌어.
나도 눈치 보지 않고 좀 쉬면서 ‘백수탈출’ 그 고마운
남자가수를 떠올려볼까 해. 가왕을 노리고 나온 출연자들의 차림새는 모두 화려해서 우선 눈길을 사로잡았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을 했을까. 정말 파격이었어.
세상의 모든 백수들에게 잠시나마 희망을 주고 싶었던
게야. 그런 간절함이 있었기에 막강한 음악대장을 이길 수 있지 않았나 싶어. 비록
가왕의 자리는 두 번으로 끝났지만 그게 어디야. 덕분에 나도 난생 처음 왕좌의 기쁨을 맛보았으니 전철쯤이야. 하지만 그 일로 내 분수를 잊은 건 아니야. 누구네 집 베란다나 현관에서 졸고
있다 잠깐잠깐 쓰인다 해도 불만은 없어. 왜냐고? 나는 이래 뵈도 국민슬리퍼
아니겠어?
그래도 말이지, 부스스한
머리에 허름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대낮에 담배나 쏘주 한 병 사러 가는 젊은이들로부터는 버림받아도 좋아. 반짝이는
구두코를 대견해하며 출근길에 오르는 그들을 볼 수만 있다면 절대로 외롭지 않을 거야.
그녀가 일어섰어. 거리로
나서게 되면 또 얼마나 눈총을 받게 될지 걱정이지만 뭐 어쩌겠어. 우리는 오늘 한 배를 탔으니 갈 데까지
같이 가야지. 어쨌든 이 순간, 나는 그녀에게 꼭 필요한 존재이니까. 그것으로 만족이야. 누구에겐가 없어서는 안되는 존재, 잠시라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이 중요하니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