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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호산나교회. 원문보기 글쓴이: 행복한보배
<요절>
(신28:12)"여호와께서 너를 위하여 하늘의 아름다운 보고를 열으사 네 땅에 때를 따라 비를 내리시고 네 손으로 하는 모든 일에 복을 주시리니 네가 많은 민족에게 꾸어 줄지라도 너는 꾸지 아니할 것이요"
신28:23 축복을 못받는 요소(1)
"네 머리 위의 하늘은 놋이 되고 네 아래의 땅은 철이 될 것이며" (신 28:23)
"십일조를 하며 사는 성도들에게 하늘 문을 닫게 하는 요소가 많습니다."라고 말씀을 드리면 많은 사람들이 믿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사실입니다.
십일조 하는 사람들 중에 그들의 행동, 신념, 결정, 생각들이 하늘 문을 닫게 해 놓은 채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마 23:23)
이 본문 속에 살펴보면 사람들이 십일조를 할지라도 그들의 가운데 방해물 때문에 하늘 문이 닫힐 수밖에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23:23 본문에서 義 仁 信을 좀 생각해 보겠습니다.
義 : 본문에서는 정당하고 공정한 뜻으로서의 '정의'라는 의미와 더불어 실천적 측 면에서의 인간 관계의 올바름이라는 의미도 함께 지니고 있습니다.
仁 : '자비'라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에게, 또는 사람이 사람에게 베푸 는 것으로 됩니다. 즉 하나님에 대한 사상과 사람에 대한 사랑의 행위를 말하 고 있습니다.
信 : 믿음,신뢰,신용,약속,서약,증거,담보,보증,확신 등의 뜻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믿음이란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이웃에 대한 신뢰를 나타내는 것을 말합니다.
이와 같은 세 가지 단어 義, 仁, 信의 개념은 설명할 수 있거나 객관적으로 말하기 어렵습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 속에서 실천을 통해서만 보여줄 수 있는 것입니다. 즉 십일조는 객관적으로 분명하게 드러내 보일 수 있지만 義, 仁, 信은 삶을 통해서 사람과 사람,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서 몸으로 보여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바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삶에서 그대로 되어졌습니다. 그들이 모든 수확의 수입에서 지나칠 정도로 정확하게 십일조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책망을 받았으니 하나님의 축복에서 제외된 것입니다.
1. 옳은 일을 그릇되게 할 수가 있습니다.
"어떻게 옳은 일을 하고서도 하늘 문이 닫히는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입니까?"
사울 왕의 삶에서 찾아 볼 수 있습니다.(삼상13:8-14) 사울 왕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하지만 하나님께 드리는 바로 그 과정에서 사울 왕은 자기가 받을 축복을 막아버렸던 것입니다. 권위에 대한 사울 왕의 거역이 결국 하늘 문을 닫게 했습니다. 사울 왕의 실수는 사무엘이 와서 제사를 드려야 하는데 이를 기다리지 못한 것입니다. 초조해진 나머지 그 자신이 제사를 드렸던 것입니다. 하지만 결국에는 하나님의 축복대신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오는 제사를 드리고 말았던 것입니다.
(1)선한 뜻이 잘못되었을 경우입니다.
다윗 왕이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가져오려고 했을 때 이와 똑같은 일을 경험했습니다.(삼하 6:1-10) 다윗 왕은 언약궤를 새 수레에 실었습니다.
사람들이 언약궤를 다윗성으로 옮기는 것은 의심할 여지없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나 다윗 왕이 그것을 운반하려고 했던 방법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대로가 아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 중에서 다윗 왕만은 언약궤를 소가 끄는 수레에 실어 운반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제사장들만이 언약궤를 옮기게 되어 있었다는 것을 그것도 반드시 채로 꿰어 가지고 어깨로 메어 옮겨야 한다는 것을 말입니다.
(대상15:13)"전에는 너희가 메지 아니하였으므로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서 우리를 충돌하셨나니 우리가 규례대로 저에게 구하지 아니하였음이니라"
2. 기독교는 삶의 양식입니다.
많은 목사님들이 성도들에게 이렇게 위로를 합니다.
"곧 응답해주시겠지요" "그저 신실하게 참고 기다리면 응답이 될 것입니다" 라고. 그런데 이게 정확한 위로와 가르침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성도의 삶이란 믿는 사람을 구원받지 못한 사람의 맹목적이고 죄악 된 상태에서 이끌어 내어 (엡 4:13)"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라는 말씀대로 복합적인 과정인 것입니다. 즉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말입니다. 진정한 기독교란 그저 일정한 규정과 신앙 형식 체계 그 이상인 것입니다.
(1)하나님의 말씀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의심하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전혀 잘못됨이 없습니다. 문제는 성도 자신에게 뭔가 잘못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조사 연구해 보면 발견하게 되는 것은 그들의 삶 가운데 반드시 뭔가 잘못된 점이 있더라는 것입니다. 때로는 문제의 정확한 원인을 찾기란 쉽지 않습니다. 어려운 때도 있습니다.
1) 자신의 결점을 볼 수 없는 사람들
어떤 사람의 경우: 자기 생각에 다른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고 지적하기를 좋아합니다.
2) 가르침이 잘못되어 있는 사람들
어떤 사람의 경우: 십일조를 믿지 않는 사람들
3) 참고 또 참아야 합니다.
어떤 사람의 경우: 참지를 못합니다.(약1: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4) 대체로 닫혀져 있는 하늘 문
이런 어려운 문제에 대한 해답은, 헷갈리게 하는 전통과 오늘날 교회에서 문맥을 벗어난 성경 교육 때문에 빨리 얻어지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의 충만한 능력이 당신의 백성을 통하여 역사하기 전에 전 교회가 하늘 문이 열린 가운데서 움직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하늘 문이 닫힌 가운데 활동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능력이 약해졌습니다.
실제로 십일조 하는 교인이 18-20%밖에 안 된다면 이는 사실 가증한 일입니다. 이런 경우 80-82% 교인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합니다. 이 정도로 불균형이니 십일조를 하지 않는 교인들 때문에 그리스도의 몸인 전 교회가 대체로 하늘 문이 닫힌 가운데 있어야 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입니다. 만일 그 비율을 역전시켜서 교인들 대다수가 십일조를 하도록 할 수 있다면 교회는 하늘 문이 활짝 열리게 될 것이라고 나는 확신합니다. 그 때 가서야 기적을 일으키는 하나님의 위대한 능력의 역사가 다시 한번 초대 교회 규모로 나타나지게 될 것입니다.
(2)기독교는 십일조 하는 것 그 이상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이 하늘 문을 닫는 많은 요인 중 하나에 불과합니다. 우리 생활상에 많은 것들을 정비할 필요가 있습니다. 목회자는 하나님의 말씀에서 적절한 교훈을 가르쳐야 하고, 이런 목회자에게 모든 사람들은 그 가르침을 따라야 합니다. 동기가 옳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소원과 태도가 옛 정욕과 욕망을 대신해야 합니다. (롬12:1-2)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하나님께서 기대하시는 것은 전적으로 위탁이요 헌신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을 할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신앙생활에 성공이 있을 것을 약속하고 계심을 아십시오. 우리가 우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릴 때 우리는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을 경험할 것입니다.
말3:10 십일조(2)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십일조를 하는 것이야말로 하늘 문이 열리는 삶으로 가는 첫 걸음입니다. 하나님께서 십일조 하는 사람에게 하늘 문을 여시겠다고 약속을 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약속으로 볼 때 그 반대의 것 또한 사실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늘 문은 닫히게 됩니다. 사람들이 가르쳐온 잘못된 교리가 없다면 십일조 문제를 논하기가 일도 아닐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잘못된 가르침이 있기에 시간을 내어서 십일조에 관한 진리를 재확립시킬 필요가 있는 것입니다. 이상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성경을 가르치는 사람들 중 상당수가 신약시대 성도들은 십일조를 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속죄로 인해 율법의 저주가 제거되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더 이상 십일조를 요구하시지 않는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이들 성경 교사들이 저지르는 잘못은 말라기 3장9절에서 말하는 저주를 율법의 저주로 보는 데 있습니다.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9) 이 구절은 율법의 저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정하신 원리를 범함으로 써 스스로 치루어야 될 형벌을 말하는 것입니다.
1. 하나님은 그리스도인을 저주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저주하시는가의 문제를 놓고 논쟁이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예로 들어봅시다. 이 신약시대의 부부는 물질 드리는 일에 잘못한 것 때문에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들은 헌금을 하면서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였으며, 하나님께서 그들의 죄를 드러내셨다는 것을 듣는 순간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여기서 의문이 생깁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저주가 그들을 죽였습니까? 만일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인을 저주하시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저주가 그들을 죽인 것이 아니라면 어찌하여 그들이 죽게 되었습니까? (요12:48)"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답은 간단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님께 거짓말을 하였을 때 영적인 원리를 범한 것입니다. 그들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그들은 죄의 형벌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들 쪽에서 죄악 된 행동을 함으로써 그들의 죽음이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본문을 자세히 읽어보면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은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짓말은 죄입니다. 거짓말이 죄라는 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일치된 견해입니다. "죄의 삯은 사망이라"(롬6:23)는 것을 그들은 다 압니다.
하나님께서 이 원리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겔18:4) 거짓말하는 사람은 죄인이며, 죄인은 죽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거짓말을 하였고, 그래서 그들은 죽었습니다. 그들은 죄의 형벌을 받았습니다. 사람이 죄를 범한 후에는 정한 때도 없이 형벌을 받게되어 있다는 점을 유념하십시오. 50년 아니 50일이 걸릴 수도 있고,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경우에서 보듯 즉각 죽음이 닥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 점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아나니아와 삽비라를 저주하시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 죽음의 형벌이 내려진 것은 그들 자신이 "죄와 사망의 법"(롬8:2)을 고의적으로 어겼기 때문입니다.
만일 여러분이 어떤 원리를 범하기로 작정했다면 스스로 형벌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예를 들어 공기 역학의 법칙을 따르면 비행기는 날게 됩니다. 그 법칙을 따르지 않으면 비행기는 추락합니다. 죄를 범하면 죽습니다. 죄를 범하지 않으면 삽니다. 여러분의 행동이 이러한 반응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이 일으키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짓말장이를 죽이지 않습니다.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1)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형벌을 받습니다.
말라기가 "너희가 저주를 받았느니라"(말3:9)고 했을 때 그 말은 십일조의 영적 원리를 범한 것에 대한 자동적으로 치루어야 될 형벌(저주)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십일조를 드리지 않음에는 형벌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그것을 범하는 사람에게는 하늘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축복이 그칩니다. 하나님께서 그 사람을 위해 하고자 하시는 많은 것들이 일어날 수가 없습니다. 사실 더 정확하게 말씀을 드리자면 [십일조]만이 아니라 [십일조와 헌물]이 라고 해야 옳습니다. (말3:8)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것을 도적질하겠느냐 그러나 너희는 나의 것을 도적질하고도 말하기를 우리가 어떻게 주의 것을 도적질하였나이까 하도다 이 는 곧 십일조와 헌물이라" (말3:8)
(1) 구약에서도 아브라함이 십일조를 하였습니다.
(창14: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율법을 주시기 수 백년 전에 일어났던 일입니다.
(2) 예수님께서 친히 십일조를 승인하셨습니다.
주님께서 십일조에 대하여 뭐라고 하시는지 들어보십시다. 주님께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반드시 십일조를 해야 한다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십일조를 주님께서 친히 승인하신 것이 분명합니다. (마23:23)"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박하와 회향과 근채의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 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그러나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할지니라"
(3)초대 교회가 십일조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승천하신 후 약 35년경입니다. 히브리서 기자가 썼습니다.
그 구절은 신약 교회시대에 십일조가 시행되고 있었음을 잘 말해주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아브라함이 멜기세덱에게 십일조 드린 때를 언급했습니다. (창14장) 그는 멜기세덱이 실제로 누구인가를 설명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아주 의미 있는 말씀을 했습니다.
히브리서 저자는 신약의 성도들이 바로 당시에 십일조를 하고 있었다고 말했습니다.(AD65년)
(히7:4)"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히7:8)"또 여기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으나 저기는 산다고 증거를 얻은 자가 받았느니라" '여기'와 '저기'의 뜻 ; 이 구절에서 두 단어를 잘 이해를 해야합니다. 그것은 '여기'와 '저기'라는 말입니다. '여기'라는 말은 '바로 이 장소에서'라는 뜻입니다. 저자는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 즉 내가 서있는 바로 이 장소에서는 죽을 자들이 십분의 일을 받는다" 또 하나의 관심은 '저기'라는 단어입니다. 이 말의 뜻은 '다른 때' '다른 장소'를 말합니다. 그래서 히7:8을 풀어서 말해 보면 그 참된 의미가 더 잘 드러날 수가 있습니다. "또 여기는 AD65년 내가 지금 서 있는 바로 이곳에서(지금 내가 있는 데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다) 죽을 자들이 십일조를 받고 있으나, 저 먼 옛날 다른 곳에서는 지금도 살아 있다고 우리가 증거 하는 그 분(멜기세덱)이 십일조를 받았느니라" 십일조는 지금도 모든 거듭난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참으로 부끄러운 것은 오늘날에도 십일조가 유효하다는 이 모든 증거에도 불구하고 십일조 문제가 가장 많이 범하는 계명 중 하나로 남아 있다고 하는 점입니다.
2. 십일조를 안 하면 성도가 손해이지, 하나님의 손해가 아닙니다.
성도들이 십일조를 하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굶으실까 걱정이 되십니까? 그래서 주의 종들이 십일조를 강조하는 것으로 오해하지 마십시오. 전혀 하나님께는 손해가 없으십니다. 다만 성도들 자신에게 손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가 신약시대 거의 전 기간을 대체로 하늘 문이 닫힌 가운데 목적 없이 방황하며 보냈다는 것을 깨달을 때 우리는 이 불순종의 결과가 어떤 것임을 볼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얼마나 의로우냐, 또 여러분이 성경 구절 암송을 얼마나 많이 하느냐는 상관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십일조를 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하늘 문을 열어 두지 않는다고 성경은 잘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하든지, 아니면 하늘 문이 닫힌 가운데 살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1)10 %는 성경이 정한 금액입니다.
누군가가 허공에서 10%라는 숫자를 끌어온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다음 성경 구절을 읽어보면 이 의미가 분명합니다. (창14:20)"너희 대적을 네 손에 붙이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찬송할지로다 하매 아브람이 그 얻은 것에서 십분 일을 멜기세덱에게 주었더라" (히7:4)"이 사람의 어떻게 높은 것을 생각하라 조상 아브라함이 노략물 중 좋은 것으로 십분의 일을 저에게 주었느니라" 두 구절에서 저자들은 동일 사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십일조를 안 하면 하늘 문이 닫힙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는 것이 하늘 문을 닫는 방법 중 하나입니다. 여러분 중에 아직까지도 십일조를 하지 않고 살아왔다면 오늘부터 시작을 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이 문제에서 하나님을 시험해 보라고 하십니다. 여러분이 십일조를 한다면 하나님께서는 하늘 문을 여실 것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말3:10)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 만일 여러분이 십일조 안 하는 사람들이 직면하는 의심과 두려움을 깨뜨리고 나와서 신실하게 십일조 생활을 시작하면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한 대로 체험하게 될 것입니다. 하늘 문이 열린 가운데서 살게 될 것입니다. 잘 깨달으십시오. 여러분은 십일조가 신약시대에 속한 것임을 배웠습니다. 이제는 그것이 여러분의 삶에 하늘 문을 열어주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이 사실을 확고하게 유념하시면서 또 다시 하늘 문을 닫게 하는 다른 요건들을 범하지 않도록 조심하시길 바랍니다.
마6:33 잘못된 우선 순위(3)
(마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본문은 하늘 문을 열고 닫는 일에 관하여 성경에서 가장 직접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1. 하나님께서 우리를 돌보십니다.
25절부터 시작해서 우리 주님께서는 우리가 먹고 마시고 입을 것들을 중심으로 말씀하십니다. 주님께서는 그가 어떻게 새와 꽃들을 돌보시는가에 우리의 주의를 집중시키고 있습니다. 그는 하늘 문을 열고 얼마나 그들을 잘 돌보며 공급하시는가를 보여줍니다. 그런 다음 주님께서는 우리들의 모든 필요들을 얼마나 더욱 잘 채워주시고 돌보시기 원하는지를 선포하십니다. (마6:30)"오늘 있다가 내일 아궁이에 던지우는 들풀도 하나님이 이렇게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보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그 다음의 두 구절(31-32)에서 주님은 이러한 일상 필수품에 대하여 염려하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는 말씀하시기를 기본적인 필요에 대해서 염려하고 추구하는 것은 어두움의 자녀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시간을 들여야 할 방법이 결코 아닌 것입니다.
2. 너희는 먼저 구할 것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나오는 구절이 본 주제와 특별히 관련 있는 말씀입니다.
이 구절은 앞에 나오는 여덟 구절들의 약속과 보증을 붙잡게 해주는 열쇠가 됩니다. (마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먼저>=순서, 중요성, 가치에 있어서, (프로토스) 그렇습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우리 자신의 의지의 지배를 받아서는 안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의 주권에 무조건 복종하라고 하십니다.
나아가서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덧입어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의는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인격)입니다. 성경은 이 개념을 분명하게 가르칩니다.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벧후1:4) (엡4: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추구하는 일이 우리의 삶에서 첫자리를 차지하게 될 때 이방인들(구원받지 못한 사람들)이 얻으려고 물고 뜯고 하는 그 모든 것들을 우리가 마음껏 받을 수 있는 하늘 문이 열리게 되는 것입니다. (마6: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3.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한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하나님 아버지께서 우리의 필요를 알지 못한다고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우리의 하늘 아버지께서는 이 땅에 살려면 "여러 가지 것들"이 필요하다는 것을 전적으로 알고 계십니다. 이 가장 중요한 것을 우리는 자주 지내쳐 버립니다. (마6:8)"그러므로 저희를 본받지 말라 구하기 전에 너희에게 있어야 할 것을 하나님 너희 아버지께서 아시느니라"
4. 하나님은 우리의 필요를 채워주기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신 것뿐만 아니라 또한 그 모든 것을 채워주려고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새와 꽃들의 필요를 채워주시는데, 하나님 자신의 입으로 여러분은 새와 꽃들보다 훨씬 더 중요한 존재들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구절로 볼 때 하나님께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고 싶어하시는 게 분명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먼저 요구조건을 만족시켜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이 가르침을 충실하게 따를 때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채워주시겠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이 요구조건을 충족시키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에 아무것도 더해주지 않을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하지 않으면 하늘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1)하나님의 나라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란 하나님의 통치를 말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언제 어디서나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자기의 삶을 다스리게 하면 바로 그 곳이 하나님의 나라인 것입니다. 얼마나 간단한 설명입니까?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는 것은 예수님으로 하여금 우리의 삶을 다스리는 왕 노릇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의 삶에 대한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나라란 그저 지리적인 장소를 말하는 게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왕과 그의 백성의 관계입니다. 만일 백성이 왕을 자신의 주(主)로 받아들인다면 그의 모든 토지와 재산은 왕의 토지와 재산이 되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 세상이 언젠가는 완전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배 아래에 들어 갈 것이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고전6:19-20)"...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 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빌2:10-11)"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라" 만일 우리가 하늘 문이 열릴 것을 확신하고(굳게 믿고), 그로 인해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이 우리의 삶에 더해지기를 원한다고 하면 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주재권을 추구해야 합니다. 그만한 추구가 없으면 아무것도 역사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경주를 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를 그의 주님으로 삼는 일의 필요성을 잘 깨달았기에 그의 육신을 쳐서 그리스도의 다스림을 받도록 항상 깨어 있었습니다. (고전9:24-27)"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 는 하나인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 이기기를 다투는 자마다 모든 일에 절제하나니 저희는 썩을 면류관을 얻고자 하되 우리는 썩지 아니할 것을 얻고자 하노라, 그러므로 내가 달음질하기를 향방 없는 것같이 아니하고 싸우기를 허공을 치는 것같이 아니하여,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기가 도리어 버림이 될까 두려워함이로라"
바울은 하나님의 나라를 붙들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했습니다. 만일 이런 노력이 없다면 하늘을 통해서 우리가 필요로 하는 모든 것을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자기가 최선을 다 하지 않는다면 자기에게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것을 중단하지 말아야 합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전적인 주님이자 주인으로 모시고 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이를 중단한다면 우리의 삶에 하늘 문이 닫힐 것이며,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더해지는 것도 그칠 것입니다.
(2)하나님의 의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나라는 행동에 관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의란 그 행동으로 나타나는 반응입니다. 먼저 위치적인 의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는 두 가지 면으로 나타납니다. 그 두 가지 면은 다 우리의 구원과 관계가 있습니다. 구원을 받을 때 모든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으로부터 위치적인 의를 받습니다. 위치적인 의라는 말은 하나님의 아들의 피가 우리를 속량하였기 때문에 우리가 자동적으로 하나님 앞에 바로 설 수 있는 지위를 뜻합니다. 이것은 법적 조처입니다. (롬4:21-24)"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를 하나님께서 우리를 의롭다고 여기시는데, 그것은 우리가 어떤 일을 해서가 아니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신 그 공로에 근거한 것입니다. (고후5:21)"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다음은 실제적인 의가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를 하나님 앞에 바로 서게 해 줍니다. 그러나 우리의 의에는 또한 실제적인 차원이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의 인격이 우리의 삶 가운데 점진적으로 나타나게 하는 것을 말합니다. 사도 바울은 분명히 밝히기를 우리가 위치적으로 의로울 뿐 아니라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형성 되게 해야 한다고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서 바울은 갈라디아 교인들에게 말했습니다. (갈4:19)"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바울은 이와같이 갈라디아 교회에 대하여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해야겠다고 하였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인격이 그들 안에 제대로 형성되지 않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의 인격이 우리의 삶 가운데 나타날 것을 분명하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2:20)"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벧후1: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엡4:24)"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 (벧전2: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늘 문이 열리게 하려면 적극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추구해야 합니다. 이 추구는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한다면 자동적으로 되어질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를 삶의 주님으로 모시려고 할 때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우리는 하나님의 의를 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의라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우리 삶의 주님으로 삼으면 삼을수록 더욱 그의 의가 우리 안에서 나타나게 될 것입니다. 십일조 하는 사람들도 이를 따라야 합니다. 우리가 십일조를 하면 하늘 문이 우리의 삶에 열려질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지 않는다면 우리의 자기 중심적인 삶의 방식이 즉각 그 열린 하늘 문을 다시 쾅 닫아버리게 할 것입니다. 기억하실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적극적으로 구하지 않으면서 십일조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조작하려고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늘 문이 닫히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닮고자 하는 사람들에게는 하늘 문이 활짝 열리게 됩니다. (엡5:1)"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고"
약1:7-8 두 마음(4)
(약1:7-8)"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이 성경 구절은 자주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어떤 사람이 그의 마음을 바꾸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 그 사람 마음이 두 마음이라구. 그래 가지고서야 어떻게 하나님으로부터 무엇을 받을 수 있을까?" 그러나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마음을 바꾸는 사람들이 반드시 두 마음인 것은 아닙니다. 사실대로 말하면 그런 사람들은 결단력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성경에 보면 결단력이 없는 사람들이 확실하게 하나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을 수 있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21:28-31에 두 아들을 가진 사람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포도원에 가서 일 하자고 하였습니다. 한 아들은 아버지를 도와드리겠다고 하고서는 가지 않았습니다. 다른 아들은 도와드리지 않겠다고 하였지만, 나중에 마음을 바꿔 결국 아버지를 도와 드렸습니다. 도와드린 아들은 아버지의 칭찬을 받았으나, 다른 아들은 받지 못하였습니다. 이 두 아들 어느 누구도 두 마음은 아니었습니다. 보다 정확히 표현한다면 결단력이 없었습니다. 즉 자신의 결정에 책임을 지지 않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1. 사람에게는 두 개의 마음이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가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께 무엇이든지 얻기를 기대하지 말라고 했을 때, 그 말은 단순히 결단력이 없다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로 말씀한 것입니다. 그는 두 마음 안에서 별개의 두 의견이 동시에 진행되고 있는 사람을 가리켜 말 한 것입니다. 그렇게 보아야 정확한 것입니다. 두 마음이 있습니다. 이것을 의식의 마음과 잠재의식의 마음이라고 합니다. 그 중 하나는 매우 엄격한 마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훨씬 덜 엄격합니다. 그것은 나태해지기 쉬운 마음입니다.
(1)무의식의 마음이 있습니다.
무의식의 마음은 아마도 인간에게 있어 가장 복잡한 부분일 것입니다.
그것은 인간의 몸이 수행해야 할 많은 기능들의 미세한 것들을 알고 있습니다. 이 마음에 대해서 놀라운 것은 그 기능의 대다수를 아무런 의식적 노력 없이도 수행한다는 점입니다. 무의식의 마음은 우리의 삶 가운데 일어났던 일의 대부분을 기억합니다. 그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고, 냄새 맡았던 것들을 거의 다 잊지 않고 간직합니다. 그것의 수용 한계는 사실상 무제한입니다.(이것이 무의식의 마음을 가장 간단하게 정의한 것임을 유의하십시오)
(2)의식의 마음이 있습니다.
우리의 의식의 마음 역시도 굉장한 마음이지만, 좀 나태합니다. 그것은 눈으로 보는 것을 대부분 지내쳐 버리고, 또 그것이 주의해서 알아차린 것들을 빨리 잊어버리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것은 타협하고, 거짓말하고, 왜곡하고, 무의식의 마음과는 늘 사이가 안 좋습니다. 의식의 마음에서는 거짓말이나 半진리에도 아주 태평할 수가 있지만, 무의식의 마음에서는 사실이라고 믿는 것과 다른 어떤 것을 들으면 반발을 하는 것입니다.
2. 두 마음을 가진 그리스도인은 우리 주위에 흔합니다.
두 마음을 가진 사람이란 동일한 주제에 대해서 두 가지 다른 견해가 그의 두 마음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두 마음 간의 이러한 불일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흔히 있는 일입니다. 특히 하나님의 말씀을 정규적으로 공부하지 않는 신자들에게서 자주 보게 됩니다. 우리의 두 마음이 서로 일치 상태에 있기를 원한다면 정규적인 성경공부가 절대 적으로 필요합니다. 내가 성경을 공부하라고 하는 말은 사람들의 전통으로 우리의 마음을 채우라는 뜻이 아닙니다. 진정한 성경공부는 하나님의 말씀이 말하는 바를 찾아내는 것입니다. 그것은 단지 말씀에 이러하다고 사람들이 말하는 것을 찾아내는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말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사람들이 가르치는 것을 절대 공부하지 말라는 뜻이 아닙니다. 내가 지금 말하는 것은, 성경이 실제로 말씀하고 있는 바를 사람들이 거스려서 가르치는 것들을 항상 체크해 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1)비성경적인 선입견들이 있습니다.
성경을 일부분만이라도 조금 읽어본 사람이라면 사람들이 말하는 성경 내용의 많은 부분이 사실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이런 까닭에 거듭난 신자들 거의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 선입견을 가지고 기독교로 들어옵니다. 이들 선입견을 만들어 내는 원천은 다양합니다. 부모, 교사, 친구, 라디오, 텔레비젼, 영화, 소문, 복음 전파자들, 심지어 복음을 반대하는 자들까지도 선입견의 제공자들입니다. 예를 들면, 부요에 대한 가르침을 들은 신자들은 틀림없이 그것에 이끌리게 됩니다. 그 이유는 가난하게 살고 싶은 사람은 없기 때문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그의 의식의 마음은 즉시 불충분의 사이클을 깨뜨릴 수 있는 합당한 계획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런 계획은 성경에 나와 있습니다. 추수의 법칙이 그 안에 포함됩니다. 이 신자가 십일조를 하고 감사헌금을 드리기 시작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받고자 하는 그의 소망은 부풀어오를 것입니다. 그런데 신실하게 오랫동안 헌금 생활을 해 왔는데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이렇게 얼마쯤 지나면 의식의 마음은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을 비난하기 시작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역사하지 않는구나" 이와 같은 생각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이 의식의 마음에서 진행되어가고 있는 동안 사뭇 다른 어떤 것이 무의식의 마음속에서 진행되어질 수가 있습니다. 이 사람이 예전에 부요에 대해서 부정적인 의도를 보이는 가르침이나 권위있는 영향에 접한 적이 있었을지 모릅니다.
만일 그가 가난은 정직함의 표시이고, 풍요는 정직하지 못함의 확실한 증표라고 믿게 하는 정보를 입수했다면, 그의 무의식의 마음은 부요하고자 하는 그의 의식의 마음의 소원과 충돌할 게 뻔합니다. 이러한 상황이 바로 야고보 사도가 두 마음을 품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이 사람은 의식의 마음으로 풍요를 생각하지만 동시에 그의 무의식의 마음에서는 부요가 잘못 된 것이라고 확신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두 갈래의 마음 상태에서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약1:7-8)"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
(2)두 갈래 마음이 하늘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두 마음을 품게 되면 어떻게 하나님의 풍성함을 받을 수 없게 만드는지 좀 더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우리 주님은 가난한 사람이었다고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믿고 있었다고 해보지요. 이 개념을 어렸을 때부터 배워서 간직하고 있는 것입니다. 존경하는 주일학교 선생님들이 예수님은 가난하셨다고 체계 있게 가르쳤습니다. 훌륭한 목사님들이 권위 있게 큰소리로 예수님의 가나을 선포하셨습니다. 그림 그려 놓은 것을 보면 언제나 예수님은 가난한 사람의 옷을 입은 모습으로 나타나셨습니다. 반면 예수님의 주변의 통치자들과 서기관들은 화려한 복장을 하고 있습니다. 이상과 같은 예화를 염두에 두고, 이제 우리에게 누군가가 부요의 메시지를 소개할 때 어떤 일이 생길 것인지 살펴봅시다. 우리의 의식의 마음에서는 즉시로 풍성함과 부요의 사상을 붙잡았습니다. 잘되기를 바라면서 십일조와 헌금을 드리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실망으로 나타나고 맙니다. 왜냐구요? 막연하게나마 풍요 비슷한 것도 일어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문제가 무엇입니까? 왜 아무런 역사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까?
3.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어져야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같이 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러 그의 놀라운 형상으로 변화되어 지기를 바라십니다. (고후3:18)"우리가 다 수건을 벗은 얼굴로 거울을 보는 것 같이 주의 영광을 보매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니 곧 주의 영으로 말미암음이니라" 모든 착실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엡4:13) 이르도록 전진 해가야 합니다. 우리의 의식의 마음이 부요를 향해 전진해 갈 때 우리의 무의식의 마음은 그저 무감각 상태에서 움직이고 있을 뿐입니다. 설사 우리의 의식의 마음이 적극적으로 풍요를 추구하기로 확고한 결정을 내렸다고 할지라도 무의식의 마음에서는 계속적으로 "안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처럼 되어야 한다는 성경적인 의무감을 갖고 있고, 또 그분은 가난하셨기 때문에 무의식에서는 우리가 부요해질 수 없다고 우겨댈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인 여러분들이여! 야고보 사도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두 갈래 마음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으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다는 것입니다. 서로 안 맞는 이런 생각들이 우리의 두 마음을 점령하고 있는 한 하늘 문은 여전히 닫혀 있게 됩니다. (약1:7)"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
(1)출구는 있습니다.
이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중요한 것 한 가지를 결정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기는 가난 가운데 사셨다고 말씀하셨는데 우리는 풍요 가운데 살 수 있습니까? (고후8: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우리의 무의식의 마음이 그 견해를 바꾸려면 그런 견해를 처음 확립 시켜 주었던 권위보다도 더 큰 권위로부터 교정을 받을 때에만 가능해집니다.
(2)하나님의 말씀은 뚫고 들어갑니다.
믿는 사람의 두 마음(무의식과 의식)에 최종의 궁극적 권위는 성경 즉 하나님의 말씀뿐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무의식의 마음속으로 뚫고 들어가도록 그의 말씀을 특별하게 하셨습니다. 우리의 가장 깊은 생각에까지 미쳐서 변화시키는 데에 하나님의 말씀만큼 효과적인 것은 없습니다. (히4:12)"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죄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예수님이 가난하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 어떤 영향을 끼칠 것인지 성경을 통해서 확인해 봅시다. (고후8:9)"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를 너희가 알거니와 부요하신 자로서 너희를 위하여 가난하게 되심은 그의 가난함을 인하여 너희로 부요케 하려 하심이니라" 예수님은 원래는 하늘 나라에서는 부요하신 분이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 분이 이 세상에 오셔서 가난하게 되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가난하게 되신 이유는 우리로 하여금 부요케 하기 위해서라고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실제적으로 예수님의 생애를 살펴보면- *"부요하신 자": 5병2어,(마14:15-21, 막6:34-43, 요6:5-13) 7병2어,(마15:32-38) (욥41:11)"누가 먼저 내게 주고 나로 갚게 하였느냐 온 천하에 있는 것이 다 내 것이니라" *"가난하게 되심은": 여우도 굴이 있고... (마8:20, 눅9:58)
(3) 두 갈래 마음은 다양한 형태로 옵니다.
두 갈래 마음을 품으면 또한 다른 많은 영역들에서도 받지 못하게 방해를 할 수 있습니다. 열등감을 일으켜서 승리하지 못하게 만들 수가 있습니다. 기쁨을 빼앗아 갈 수 있습니다. 어느 상황에서든지 이중적 마음을 극복할 수 있는 유일한 해답은 하나님의 말씀을 꾸준히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전통과 비성경적인 개념들을 건전한 성경적 사실들로 점차 바꾸어 가는 것입니다.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의 의식과 무의식의 두 마음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모든 면에서 일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고후8:12 열납되지 않은 헌금(5)
(고후8: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오늘은 올바른 헌금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올바른 헌금이란 사람의 표준에 따라서 올바르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표준으로 보아서 올바른 헌금을 드리는 것을 말합니다.
1. 하나님은 우리의 헌금을 받을 필요가 없으십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몇 가지가 성경적으로 맞아야 합니다. 이 단계를 정확하게 따르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거절하십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헌금을 받으시는지 안 받으시는지 도무지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암5:22)"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말1:10)"...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드리는 예물을 거부하실 때가 있으시다는 것입니다. 헌금을 드리는 사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아니하면 하나님께서 그 예물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불순종 가운데 드리는 예물은 받지 않으십니다.
우리의 삶에 대한 하나님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받을 생각에서 드려지는 헌금은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십니다.
2. 기꺼이 드릴 마음을 가지고 드리십시오.
(고후8: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열납하시도록 하는 첫 번째 단계는 우리가 기꺼이 드릴 마음을 가지고 드린다는 확신을 갖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즐겨 드리는 자에게 상을 주십니다.
불평하면서 혹은 마음도 없으면서 마지못해 드리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합니다. 만일 우리가 기쁨으로 드리는 것에 문제가 있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헌금을 받으시지 않습니다. (레1:3)"그 예물이 소의 번제이면 흠 없는 수컷으로 회막 문에서 여호와 앞에 열납하시도록 드릴지니라" (레19:5)"너희는 화목제 희생을 여호와께 드릴 때에 열납되도록 드리고" (레22:19)"열납되도록 소나 양이나 염소의 흠 없는 수컷으로 드릴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고후9:7)
3. 우리가 받은 대로 드리십시오.
(고후8: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하나님은 언제나 심고 거두는 원리에 의해서 역사 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은 언제나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거두는 몫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헌금이 되게 하는 두 번째 단계는 우리가 가진 것에 따라서 드리는 것입니다. 이 요구 사항에서 중심이 되는 말은 따라서 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에 따라서 헌금을 드려야 합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지금 소유하고 있는 것들에 대해서 말하는 것입니다.
(1)주의할 것
약속을 믿고 드리는 헌금에 반대하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소유하고 있지 않는데 얼마의 금액을 하나님의 사업에 드리기로 약속하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이미 주신 것들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독생자, 우리의 매일 매일 채워지는 필요, 건강, 행복 등등, 어떻습니까? 계산해 낼 수 없습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은 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약1:17)"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 로서 내려오나니 그는 변함도 없으시고 회전하는 그림자도 없으시니라" 우리가 드리는 금액은 그것을 드리는 우리의 마음의 동기만큼 하나님께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에게 주신 것들이 우리의 드리는 헌금을 지도하게 될 때 우리는 감사의 동기로 드리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베푸신 그분의 선하심 때문에 우리의 마음이 드리 고 싶어졌을 때 우리의 헌금을 틀림없이 받으실 것입니다.
(2)억지로 드리지 마십시오.
(고후8: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기쁨이 없이 드리면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헌금을 거절하십니다. 즐겨내는 자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4. 헌금과 십일조는 다릅니다.
헌금과 십일조의 차이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헌금은 언제나 주님께 드리는 예물입니다. 드리는 자의 소유인 일정한 금액 또는 돈 이외의 다른 어떤 물건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리는 것이 헌금입니다. 반면 십일조는 구체적으로 두 가지 면에서 헌금과 다릅니다.
첫째, 십일조는 드리는 자의 소유가 아닙니다. 그것은 주님의 소유물입니다. (레27:30)"땅의 십분 일 곧 땅의 곡식이나 나무의 과실이나그 십분일은 여호와의 것이니 여호와께 성물이라"
둘째, 십일조는 드리는 자가 금액을 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드려야 할 금액을 정해 놓으셨습니다. 언제나 수입의 10%가 십일조라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십일조 금액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마련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수입의 10%라는 사실입니다. 이 사실을 곰곰히 생각해 보십시오! 십일조와 헌금의 차이에 대하여 더 할 말이 많습니다. 여타의 모든 헌금은 십일조를 떼고 난 다음에만 할 수 있습니다. 십일조를 떼어놓고 교회에 바치지 않고 자기 스스로가 그 가운데에서 구제비를 제공하는 사람도 있는데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십일조를 떼어 하나님께 바치는 의무는 있지만 그것을 내 임의대로 사용 할 권리는 없습니다. 그런 일은 분명 하나님의 권리에 대한 월권 행위입니다. 어떤 사람은 또 십일조를 거를 양으로 감사헌금만 하는 경우도 있는데 그것도 잘못된 헌금 태도입니다.
(1)받으실 만한 헌금
만일 우리의 헌금이 우리 자신을 움직이지 못한다면 하나님도 움직이지 못합니다. 우리에게 무의미한 금액을 하나님께 드린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하나님께도 무의미한 것이 될 것입니다.
우리가 헌금을 드릴 때 언제나 우리에게 의미 있는 금액을 드려야 합니다. 기꺼이 드리고자 하는 마음으로 드리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일들에 대한 감사가 우리의 헌금을 드려지도록 하십시오. 두려움 때문에 헌금을 드리는 일이 없기를 바랍니다. (고후8:12)"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
마13:23 깨닫지 못하는 것(6)
(마13:23)"좋은 땅에 뿌리웠다는 것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자니 결실하여 혹 백 배, 혹 육십 배, 혹 삼십 배가 되느니라 하시더라"
오늘 나누려고 하는 진리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것입니다. 이 진리가 주는 통찰력은 새롭고도 강합니다. 그것은 새로운 것이 아니고 소홀히 여겨진 진리입니다. 만일 우리의 삶에 하늘 문이 계속 열려 있도록 하려면 이 진리를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마가복음 4장에 나오는 성경 구절 세 개를 살펴보겠습니다.
이것을 제대로 이해하면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능력은 크게 증가 할 것입니다. (막4:23-25)"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그 헤아림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있는 자는 받을 것이요 없는 자는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1. 듣고 깨달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사용하신 "듣는다"는 말은 <아쿠오>라는 헬라 말입니다. 스트롱 사전에 의하면 그 말의 일차적인 의미는 "깨달음을 가지고 듣는다"는 뜻입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에서 이 뜻이 더 잘 밝혀졌습니다. (마15:10)"무리를 불러 이르시되 듣고 깨달으라" 마가복음에 나오는 그 말들도 그와 꼭 같이 듣고 깨달으라로 번역되었으면 좋았을 뻔하였습니다. 마가복음 4:23을 다시 보도록 합시다. 그러나 이번에는 듣는다는 말을 제대로 번역해 놓고 보도록 합시다. "예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듣고 깨달을 귀가 있는 자는 깨달을지니라"
(1)우리가 듣는 것이 해를 끼칠 수도 있습니다.
24절에서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듣고 깨달을 것인지 조심해야 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나는 선량한 사람들이 "어떤 교회에 다니든 별로 상관이 없어, 교회는 다 똑같거든" 이렇게 말하는 것을 들어보았습니다.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누구의 가르침을 받을 것인지 조심해야 합니다. 마태복음의 한 구절이 이러한 개념과 일치합니다.
예수님께서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에게 사람들을 잘못 가르치고 있다고 지적하신 것입니다. 이 잘못된 가르침 때문에 사람들이 진리를 받아들일 수 없게 되었다고 예수님은 계속 말씀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결론 짓기를 거짓 교사는 사람들을 올바로 인도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런데도 인도하려고 힘쓴다면 가르치는 자와 배우는 자가 모두 불행해질 것입니다. (마15:14)"그냥 두어라 저희는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는 자로다 만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우리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는 사람이 그 말씀에 대한 우리의 깨달음에 틀을 만들어 줄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바가 바로 우리가 깨닫는 바인 것입니다. 우리의 목사님이나 선생님이 깨닫는 바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능력에 도움을 주기도 하고, 지장을 주기도 합니다. 마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들을 살펴보면 이런 사실들의 증거가 보여 집니다. (막4:24)"또 가라사대 너희가 무엇을 듣는가 스스로 삼가라 너희의 헤아리는 [너희가 주는] 그 헤아림[깨달음의]으로 너희가 헤아림을 받을 것이요 또 더 받으리니"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헌금할 때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우리의 받을 수 있는 능력이 확대되기도 하고 제한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깨닫는 게 적으면 적게 받을 것이고, 깨닫는 게 많으면 많이 받을 것입니다. 많이 깨달을 수록 많이 받게 되는 것입니다.
(2)끼리끼리 노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채찍 맞으심이 더 이상 우리를 치유할 수 없다고 잘못 깨달은 선생님으로부터 배운다면 신적인 치유를 받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성경적인 부요와 형통을 깨닫지 못한 선생님으로부터 배우는 사람은 하나님의 물질적 축복을 받을 수 있는 능력에 심각한 지장을 초래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기를 우리가 어느 정도의 깨달음을 가지고 드리느냐에 따라 그대로 돌려 받게 될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를 깨닫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깨닫지 못하면 그만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말씀이 건강을 약속하면 그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병을 안고 살아가야 합니다.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겠다고 약속을 하시면 그 약속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늘 부족한 가운데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는 범위를 넘어서 그 이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이 말로 비추어 볼 때, 우리가 올바른 깨달음을 갖지 못하면 우리의 삶에는 하늘 문이 닫히는 것입니다.
(3)부요와 건강에 대하여
우리가 건강과 부요를 받기 위해서는 이 말씀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요삼1:2)"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 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이 구절을 살펴보면 요한 사도가 맨 먼저 드린 기도는 우리가 잘되고[형통하고] 건강하기를 바란 것입니다. 그 조건은 우리의 영혼이 잘 되어야[형통해야]한다는 것입니다.
2. 우리의 영혼은 우리의 지성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됨에 따라서 건강과 부요가 증가한다고 요한이 말한 그 의미를 깨닫기 위해서는 우리의 영혼이란 우리의 지성, 곧 우리의 깨달음이라는 것을 먼저 깨달아야 합니다. 이 말씀을 다시 풀이 해 보겠습니다. "사랑하는 자여, 무엇보다도 네 깨달음이 증가함에 따라서 네가 잘되고[형통하고] 건강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
(1)생명과 경건을 위해서 모든 것이 공급됩니다.
(벧후1: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우리에게 올 수 있는 유일한 길은 그 분(예수님)을 앎(깨달음)으로써만이 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고 깨닫는 것을 통해서 생명과 경건을 위해 우리의 모든 필요들을 마음껏 채워 주십니다. 좀 더 정확히 말씀드리자면, 예수님께서 아시는 바를 깨달음으로써 우리는 모든 필요에 대한 공급을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을 쉽게 풀이해 보겠습니다. "그의 신적인 능력은 예수님께서 깨달으시는 바를 우리가 이해하고 깨달음을 말미암아 생명과 경건에 필요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느니라"
(2)하나님은 우리를 복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잠10:22)"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시고 근심을 겸하여 주지 아니하시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을 주시어 부하게 하시길 원하신다는 것을 듣고 깨달으십시오. 그러나 아실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부를 가져오시되 그것으로 인한 근심은 없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 구절을 이해하고 깨달으면 우리는 그러한 부를 받을 수 있게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가난하기를 원하신다고 잘못 이해하게 되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부요를 받을 수 없습니다.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주셨을 때 이미 그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그의 가장 귀중한 소유를 주셨습니다. 이제 잠시 시간을 내어 그것을 깊이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께서 이미 그의 가장 귀중한 소유를 우리에게 주셨다면 어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주지 않겠습니까?
하나님께 그의 아들이 얼마나 귀한 분이라는 것을 일단 우리가 깨닫기만 하면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무것도 아까워하지 않으시리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3)우리가 아는 진리
우리의 깨달음은 언제나 하나님께로부터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제한시킵니다. 여기에 그 모든 것을 말해 주는 간단한 구절 하나를 소개합니다. (요8:32) 진리를 알지니[우리가 아는]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 우리를 자유케하는 것은 진리가 아니고, 우리가 아는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이해와 깨달음을 계속 증가시킨다면 우리의 받을 수 있는 능력도 계속 증가될 것입니다.
(4)깨달음을 얻어야 합니다.
깨달음에 대한 말씀은 아주 중요한 말씀입니다. 솔로몬은 지혜와 총명을 하나님께 구했습니다. (왕상3:5-14)"기브온에서 밤에 여호와께서 솔로몬의 꿈에 나타나시니라 하나님이 이르시되 내가 네게 무엇을 줄꼬 너는 구하라, 솔로몬이 가로되 주의 종 내 아비 다윗이 성실과 공의와 정직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주의 앞에서 행하므로 주께서 저에게 큰 은혜를 베푸셨고 주께서 또 저를 위하여 이 큰 은혜를 예비하시고, 오늘날과 같이 저의 위에 앉을 아들을 저에게 주셨나이다, 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종으로 종의 아비 다윗을 대신하여 왕이 되게 하셨사오나 종은 작은아이라 출입할 줄을 알지 못하고, 주의 빼신 백성 가운데 있나이다 저희는 큰 백성이라 수효가 많아서 셀 수도 없고 기록할 수도 없사오니, 누가 주의 이 많은 백성을 재판할 수 있사오리이까 지혜로운 마음을 종에게 주사 주의 백성을 재판하여 선악을 분별하게 하옵소서, 솔로몬이 이것을 구하매 그 말씀이 주의 마음에 맞은지라, 이에 하나님이 저에게 이르시되 네가 이것을 구하도다 자기를 위하여 수도 구하지 아니하며 부도 구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원수의 생명 멸하기도 구하지 아니하고 오직 송사를 듣고 분별하는 지혜를 구하였은즉, 내가 네 말대로 하여 네게 지혜롭고 총명한 마음을 주노니 너의 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없었거니와 너의 후에도 너와 같은 자가 일어남이 없으리라, 내가 또 너의 구하지 아니한 부와 영광도 네게 주노니 네 평생에 열왕 중에 너와 같은 자가 없을 것이라, 네가 만일 네 아비 다윗의 행함같이 내 길로 행하며 내 법도와 명령을 지키면 내가 또 네 날을 길게 하리라" 과연 그대로 되었습니다. 솔로몬왕의 삶에 하늘 문을 열어준 것은 그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지혜와 총명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모든 필요와 소원을 만족시켜 주셨습니다.
3. 깨달음을 얻는 방법
이 말씀들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삶에 적용을 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1)주님을 구하라 (잠28:5)"악인은 공의를 깨닫지 못하나 여호와를 찾는 자는 모든 것을 깨닫느니라"
(2)악을 피하라 (단12:10)"많은 사람이 연단을 받아 스스로 정결케 하며 희게 할 것이나 악한 사람은 악을 행하리니 악한 자는 아무도 깨닫지 못하되 오직 지혜 있는 자는 깨달으리라"
(3)믿음으로 행하라 (히11:1-3)"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선진들이 이로써 증거를 얻었느니라, 믿음으로 모든 세계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지어진 줄을 우리가 아나니[깨닫나니] 보이는 것은 나타난 것으로 말미암아 된 것이 아니니라"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4)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라 (딤후2:15)"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꾼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 [드리기 위해서 말씀을 연구하라]"
(5)사도의 기도를 드려라 (엡1:16-18)"너희를 인하여 감사하기를 마지아니하고 내가 기도할 때에 너희를 말하노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 영광의 아버지께서 지혜와 계시의 정신을 너희에게 주사 하나님을 알게 하시고, 너희 마음 눈을 밝히사 그의 부르심의 소망이 무엇이며 성도 안에서 그 기업의 영광의 풍성이 무엇이며"
욥3:25 두려움(7)
(욥3:25)"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욥기의 처음 서른 세 구절을 읽어보면 우리는 사람이 상상할 수 있는 모든 불행이한 일이 욥에게 일어났음을 알 수 있습니다. (1)스바 사람들이 욥의 소와 나귀 떼를 도둑질해 갔고(1:14-15), (2)욥의 양과 종들은 불에 타버렸고(1:16),(3)갈대아인들이 욥의 약대들을 강탈해 갔고(1:17), (4)대풍이 그의 집을 무너뜨려 그의 아들들과 딸들을 죽였고(1:18), (5)악창이 욥의 전신을 덮었습니다(2:7), (6)그것도 모자라서 그의 아내는 욥에게 하나님을 저주하고 죽으라고 퍼부어댔습니다(2:9), (7)마지막 타격으로는 그의 친구들이 방문하여 그를 비난하기 시작하였습니다(2:11).
1. 두려움이라는 관문
욥이 당한 모든 파멸의 중요한 원인은 사단이었습니다.(욥1장-2장) 그러나 욥은 사단이 들어가는 기회의 관문을 제공하였습니다. 욥에게 닥친 모든 불행은 두려움이라는 관문을 통하여 왔습니다. 재난이 발생하기도 전에 욥은 그것을 크게 두려워하고 있었다고 성경은 분명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욥은 하나님께서 그의 삶에 주신 모든 분복들이 지속되지 않을까봐 항상 두려워하였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서 욥에게 주신 모든 분복들을 주목해 보는 것이 중요합니다. 두려움은 그 가운데 없었습니다.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딤후1: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1)은사를 거두어 가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우리 하나님은 은사를 우리에게서 거두어 가시지 않으심을 알 수 있습니다. (롬11:29)"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것을 주실 때 그것은 우리의 것입니다. 만약 하나님께서 혹 그분의 은사를 거두어 가신다면 그 이유는 우리에게 어떤 변화가 있기 때문이지, 하나님께 변화가 있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기 때문입니다.(히13:8) 두려워하는 마음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 아닙니다.
(2)두려움은 부정적인 자석입니다.
놀랍게도 두려움은 실제로 우리가 일어날까봐 두려워하는 일이 일어나도록 조장합니다. 예수님께서 젊은 회당장의 딸을 고치기 위하여 그의 집으로 가시고 있었을 때 두려움이 그 자리에 들어서려고 했습니다. 그들이 가고 있는 도중에 그 어린 딸이 죽었다는 소식이 그들에게 들려 왔습니다. (눅8:49)"아직 말씀하실 때에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이 와서 말하되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선생을 더 괴롭게 마소서 하거늘" 우리 주님께서 얼마나 빨리 두려움을 봉쇄하셨는지 보십시오. (눅8:50)"예수께서 들으시고 가라사대 두려워 말고 믿기만 하라 그리하면 딸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시고" 두려움이란 한 인간의 삶을 사단의 지배 가운데로 이끄는 관문입니다. 두려움이란 우리가 가진 소유물들을 우리에게서 빼앗아버리는 기회를 사단에게 제공해 줍니다. 우리의 삶 속에 두려움이 들어오도록 허용한다면 하늘문은 닫히고 맙니다.
(3)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우리는 두려워할 것이 아무것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우리를 이길 수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요일4:4)"자녀들아 너희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또 저희를 이기었나니 이는 너희 안에 계신 이가 세상에 있는 이보다 크심이라" (딤후1:12)"이를 인하여 내가 또 이 고난을 받되 부끄러워하지 아니함은 나의 의뢰한 자를 내가 알고 또한 나의 의탁한 것을 그 날까지 저가 능히 지키실 줄을 확신함이라"
2. 두려움의 종류
인간을 공격하는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두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일곱 종류의 두려움이 특히 일반적이고 매우 강력합니다.
(1)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
인류는 미래에 대한 굉장한 호기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사실은 신문에서 오늘의 운세표를 보고 나서야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수백 만의 사람들에게서 볼 수 있습니다. 미래에 관한 호기심은 세상 사람들에게서만 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역시 보편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미래 예언서들은 모든 기독교 문학의 베스트셀러 가운데 있습니다. 정치계에 가벼운 동요만 일어나도 예언에 관한 책들이 곧장 팔리기 시작합니다. 물론 어느 정도의 호기심은 정상적이며, 건강하다는 증표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호기심에 두려움을 결합시키면 그 두려움은 치명적인 것이 되고 맙니다. 왜냐하면 그때의 두려움은 미지의 것에 대한 두려움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한 인간의 삶의 모든 방면에 영향을 미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엄청난 약속을 주셨습니다. (롬8:28-32)"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로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또 미리 정하신 그들을 또한 부르시고 부르신 그들을 또한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미래에 대하여 마음을 편히 가지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해롭게 하지 않습니다.하나님을신뢰하기만하면우리의미래는 멋지게 펼쳐질 것입니다.
(2)죽음에 대한 두려움
이 대적은 태초부터 인류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오늘날까지도 온 세상은 여전히 이 대적에게 잡혀 있습니다. 죽음은 물론 성도들과 죄인들 모두에게 똑같이 찾아옵니다. 그러나 거듭난 사람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이길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히2:14-15)"자녀들은 혈육에 함께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한 모양으로 혈육에 함께 속하심은 사망으로 말미암아 사망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없이 하시며,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 주려하심이니" 그리스도는 우리를 죽음의 공포로부터 구원해 주셨을 뿐만 아니라 죽음이 쏘는 바로 그것을 제거하여 주셨습니다. (고전15:55-57)"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죽음과 무덤을 두려워 마십시오. 그리스도의 부활 승리를 통하여 우리 주님은 사망과 무덤을 정복하셨습니다.
(3)사람에 대한 두려움
(잠29:25)"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게 되거니와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안전하리라" 우리는 결코 혼자가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히13:5-6)"그가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과연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과연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담대히 가로되 주는 나를 돕는 자시니 내가 무서워 아니 하겠노라 사람이 내게 어찌하리요 하노라" 사람에 대한 두려움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있을 때 떠나갈 것입니다.
(4)실패에 대한 두려움
목표 지향적인 우리 사회에서는 실패에 대하여 지나치게 염려하기 쉽습니다. 이 두려움은 실제로 사람을 무능력하게 할 수 있고 하늘 문을 닫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의 약속을 붙잡으면 우리는 이 두려움을 쉽게 극복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고후2:14)"항상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우리로 말미암아 각처에서 그리스도를 아는 냄새를 나타내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롬8:37-39)"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5)거절에 대한 두려움
예수님께서는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으시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요6:37):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
(6)질병에 대한 두려움
건강한 사람은 병약한 것이 어떤 것인지 거의 이해하지 못합니다. 건강 상태가 양호하게 유지되는 한, 질병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의 마음을 점령하지 못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의사로부터 좋지 못한 보고를 받거나 중병의 징후가 나타나기 시작하면 갑작스럽게 무서운 두려움이 생깁니다. 이것이 질병에 대한 두려움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두려움을 제거하지 않는다면, 이것은 우리에게 질병을 가져다 줄 것입니다. (사53:5)"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가 환경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계속 의지할 수 있다면, 우리는 질병에 대한 두려움을 벗어 던지고 질병을 유발시키는 힘을 제거할 수 있습니다.
(7)부족한 것에 대한 두려움
이 세상 사람들은 부족과 결핍에 붙잡혀 있습니다. 지금 다이아몬드 소유자들은 세상의 부요를 손에 쥐고 있습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이 땅에는 부족이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실제로는 부족한 것이 아닙니다. 인간의 탐욕이 이러한 방법을 궁리해 놓은 것입니다. 한편 인간이 부족을 고안해 놓았습니다. 수 백 만의 사람들이 매년 굶어 죽고 있습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실제로 부족감을 느끼면서 살아가고 있습니다. 날마다 필요를 채우지 못할 가능성을 안고 있는 것입니다. 이 가능성 때문에 부족에 대한 두려움은 늘 존재합니다. 이 두려움으로 인한 심각한 결과는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을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벧후1:3)"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롬8:32)"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 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우리가 이 말씀을 읽을 때 그것을 믿고, 말하고, 기대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대로 이루시는지 않으시는지를 보십시오. (전5:18-19)"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이로다, 어떤 사람에게든지 하나님이 재물과 부요를 주사 능히 누리게 하시며분복을 받아수고함으로 즐거워하게 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물이라"
3.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두려움은 그 어떠한 종류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시기 바랍니다. 두려움이 가까이 오면, 강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몰아내십시오. 두려움은 하나님으로부터 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딤후1:7)"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 두려움이 하늘 문을 닫는다는 것은 성경적인 사실입니다. (욥3:25)"나의 두려워하는 그것이 내게 임하고 나의 무서워하는 그것이 내 몸에 미쳤구나" 두려움을 물리치십시오. 그리고 하늘 문이 우리의 삶 위로 열려지는 것을 지켜보십시오. (눅12:32)"적은 무리여 무서워 말라 너희 아버지께서 그 나라를 너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느니라"
히11:1, 마13:58 두 종류의 불신앙(8)
(히11:1)"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
(마13:58)"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아니하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믿음으로 살기를 원하십니다.
(롬1:17)"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1. 신자의 믿음
믿음이 없는 것이 우리의 삶에서 하늘 문을 닫게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믿음에 비례하여 우리에게 공급해 주십니다. (마9:29)"이에 예수께서 저희 눈을 만지시며 가라사대 너희 믿음대로 되라 하신대" 두 소경에게 하신 이 능력 있는 교훈의 말씀으로 우리 주님은 주님으로부터 받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한 그들의 믿음을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 소경들은 예수님께 자비를 베풀어 달라고 외쳤습니다. (마9:27)"예수께서 거기서 떠나가실 새 두 소경이 따라오며 소리질러 가로되 다윗의 자손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더니" 예수님은 곧바로 그들의 문제의 근본을 캐내셨습니다. 그들은 고침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필요했습니다. 예수님은 두 소경에게 그들의 믿음에 따라 눈이 고쳐짐을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이 세상의 모든 소경을 고칠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치료해 달라고 요청할 때마다, 하나님의 치유 능력이 나타나는 것은 아닙니다. 치료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그 치료를 받을 만한 믿음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입니다.
(1)믿음이 부족해서 하늘 문이 닫힙니다.
믿음을 떠나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해 드릴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히11:6)"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하나님께서 기뻐하시지 않는 사람에게는 결코 하늘 문이 열릴 수 없습니다. 우리는 오직 믿음에 의해서만 하나님께 받기를 원하는 복들을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더 커질수록 우리는 더 많은 것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믿음이 전혀 없으면 우리는 하나님께로부터 아무것도 받을 수 없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부족해서 우리가 아무것도 받을 수 없는 자리에 놓일 때 하늘 문은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를 갖게 하는 바로 그 구원은 믿음을 통해서만 주어집니다. 성경은 또한 세상을 이길 수 있는 믿음의 능력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습니다. (요일5:4)"대저 하나님께로서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긴 이김은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믿음 없이 행한다면 세상이 우리를 이길 것입니다. 만일 세상이 우리를 이기면 우리는 열린 하늘 문 아래에 있을 수 없습니다.
(2)어떻게 받는가?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에게 믿음의 분량을 주시겠다고 말씀했습니다. (롬12:3)"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이 구절에 따르면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분량을 모든 사람에게 주시지 않는다는 점을 유의하셔야 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믿음의 분량을 거듭난 우리들 중의 모든 사람에게 주십니다. 우리가 구원을 받으면 믿음의 분량을 받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의 믿음이 자라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에 잠기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롬10:17)"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하셨기 때문입니다.
(3)강한 믿음을 가르치는 설교자와 연합하십시오.
가장 좋은 방법은 강한 믿음에 기초한 설교를 전하는 사역자들과 연합하는 것입니다. 즉 주의 종을 잘 선택하여 신앙생활을 하라는 말씀입니다. 아주 중요합니다. 강한 성경적 믿음에 반대하여 설교하는 사역자들과 계속 연합하는 것은 우리에게 결코 이익이 못됩니다. 믿음 없이 하루를 보내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늘 문이 열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2. 신자의 불신앙
(마13:58)"저희의 믿지 않음을 인하여 거기서 많은 능력을 행치 아니하시니라" 불신앙은 단지 불신자들에게만 영향을 끼치는 것은 아닙니다. 불신앙은 자주 신자들에게도 영향을 끼칩니다. 하나님의 자녀들이 불신앙으로 행동할 때는 대개 잠시 동안일 뿐입니다. 이같은 상황은 불신자가 되는 것과는 다릅니다. 왜냐하면 불신자들은 항상 불신앙에서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1)불신앙을 경험한 세례 요한
하루는 믿음으로 행한다고 다음 날은 불신앙이 믿음을 밀쳐내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세례 요한이 이러한 경험을 한 것 같습니다. 그가 사역을 시작할 때에 그는 강한 믿음과 능력으로 활동했습니다. 그런 그가 감옥에 간 다음에는 불신앙이 그의 마음속에 스며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을 주님께 보내어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바로 그분"인지 아닌지 알아보려고 말입니다.
(2)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우소서
불신앙이 때때로 신자들에게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들이 벙어리 귀신들린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 명백합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믿음에 대하여 말씀하셨을 때 그 사람의 대답은 두 가지 사실을 보여 줍니다.
첫째, 우리는 그가 믿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둘째, 우리는 불신앙이 그가 믿은 것들을 몰아내려고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막9:23-24)"예수께서 이르시되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하시니, 곧 그 아이의 아비가 소리를 질러 가로되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하더라" 위대한 사도 시몬 베드로의 경우를 보십시오. 잠시 믿음에서 떨어졌습니다. 그의 불신앙은 물위를 걷는 그 유명한 행진을 중단시켰습니다. 성경은 그가 물위를 걸으려고 했다라고 말하지 않고 물위로 걸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기적이 시작되자마자 불신앙이 그의 마음에 들어갔고 기적은 끝났습니다. (마14:29-31)"오라 하시니 베드로가 배에서 내려 물위로 걸어서 예수께로 가되, 바람을 보고 무서워 빠져 가는지라 소리질러 가로되 주여 나를 구원하소서 하니, 예수께서 즉시 손을 내밀어 저를 붙잡으시며 가라사대 믿음이 적은 자여 왜 의심하였느냐 하시고"
(3)불신앙과의 싸움
고린도후서를 보면 어떻게 불신앙과 싸워야 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고후10:4-5)"우리의 싸우는 병기는 육체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하나님 앞에서 견고한 진을 파하는 강력이라, 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진실한 신자가 불신자가 되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것입니다. 특히 하나님께서 선하시다는 것을 경험한 후에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믿음이 없는 일시적인 시간들은 우리의 믿음의 능력을 흐뜨려 버리고 우리가 믿고 있는 것들을 우리가 이해할 수 없도록 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있다면 우리는 그러한 나쁜 상상들을 몰아내 버려야 합니다.
시37:4 잘못된 소원들(9)
(시37:4)"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말할 수 없이 기쁘고 영광에 가득 찬 삶일 수도 있고, 또 실망스럽고 보답 받지 못하는 삶일 수도 있습니다.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대답이 우리의 삶의 방향을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는 누구의 소원을 성취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까? 우리의 소원입니까, 아니면 주님의 소원입니까? 우리가 이 질문에 어떻게 답하느냐가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신지 아닌지를 결정할 것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소원만을 성취하려고 한다면 그것은 예수님이 우리의 삶에서 그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의 성경 구절이 이 원칙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합니다. (마6:24)"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 예수님이 자기 의지를 내려놓고 예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들에게만 '주님'이 되십니다.
1. 완전한 모범이 되신 예수님
예수님은 완전한 모범이신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만일 우리가 어떻게 하면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하는 것인지를 알고 싶다면 예수님이 우리가 따라야 할 유일한 본보기이십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이라면 이런 환경에서는 어떻게 하실까 하고 맡길 수 있다면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는 쉽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를 기쁘시게 해 드리기 원하는 사람들을 위하여 중요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것들만 하셨습니다. (요5:30)"내가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노라 듣는 대로 심판하노니 나는 나의 원대로 하려 하지 않고 나를 보내신 이의 원대로 하려는 고로..."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것이 우리 주님의 주된 소원이었습니다. 가장 어려운 결정의 순간에서조차도 예수님은 그 자신의 뜻보다 아버지의 뜻을 위에 두셨습니다. 예수님은 극도의 십자가의 공포가 엄습했던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러한 선택을 하셨습니다. 그때에 예수님은 자기의 소원을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그 경험을 겪지 않기를 더 원했습니다. 그러나 항상 그랬듯이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에 복종했습니다. (눅22:42)"가라사대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예수님은 한 번도 그의 소원을 하늘에 계신 그의 아버지의 소원보다 앞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하늘 문이 열린 가운데에서 사셨습니다. 겟세마네에서의 그 어두웠던 순간에도 하늘 문은 그에게 열려 있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다음 구절에서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눅22:43)"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 예수님께 하늘 문이 닫힌 유일한 시간은 예수님이 우리를 위하여 지옥에서 삼일 밤낮을 보내셨을 때였습니다. (마27:45-46)"제 육 시로부터 온 땅에 어두움이 임하여 제 구 시까지 계속하더니, 제 구 시 즈음에 예수께서 크게 소리질러 가라사대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하시니 이는 곧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하는 뜻이라" 이런 하나님으로부터의 분리가 예수님이 불순종하였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잘 알 것입니다.
(1)하늘 문을 닫는 잘못된 소원들
처음에는 깨닫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우리가 자신의 소원대로 행한다면 하늘 문이 닫히게 되는 것입니다. (약4:2)"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살인하며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너희가 다투고 싸우는도다 너희가 얻지 못함은 구하지 아니함이요" 이 구절에서 욕심, 살인, 시기 이 세 가지 핵심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너희가 욕심을 내어도 얻지 못하고" 여기에서 '욕심'은 단순히 '우리 자신의 소원들을 갈망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자신의 소원들만 갈망하는 것은 우리가 아무것도 갖지 못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우리가 소원을 가진 것 자체가 문제는 아닙니다. 문제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 대신에 우리가 원하는 것을 갈망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우리가 살인한다고 말합니다. '살인'은 실제로는 '부러움'을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부러움이란 우리의 소원의 중심이 하나님의 원하시는 바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가진 것에 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 다음은 시기하여도 능히 취하지 못하나니 라고 말합니다. 시기한다로 번역된 단어는 '질투'를 의미합니다. 질투는 경쟁과 관계가 있습니다. 그래서 어떤 다른 사람이 가지고 있는 것을 원하여 그 사람에게서 그것을 빼앗으려고 노력하는 것으로 그 모습을 드러내게 됩니다. 자신의 소원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자기 자신을 하늘 문이 닫힌 가운데 두게 된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다음 구절은 명백하게 이 사실을 말해 주고 있습니다. (약4:3)"구하여도 받지 못함은 정욕으로 쓰려고 잘못 구함이니라" 자기 의지가 강한 그리스도인은 잘못된 동기로 구하기 때문에 받을 수가 없습니다.
(2)올바른 소원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어떻게 하면 하늘 문을 계속 열어 둘 소원을 가질 수 있는지 그 방법을 우리에게 말해 줍니다. 우리는 그 열쇠를 시편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시37:4-5)"또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너의 길을 여호와께 맡기라 저를 의지하면 저가 이루시고" 얼핏보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주님 안에서 기뻐하는 것이 전부이고 그러면 하늘 문을 열고 우리가 원하는 모든 것을 얻게 될 것이라고 말하는 듯합니다. 이것은 이 구절들이 가르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두 구절의 의미를 함께 알지 않고는 이 구절들을 완전히 이해할 수 없습니다. 4절부터 시작하여 5절 끝까지 공부해 봅시다. 그래야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무엇을 말씀하시고 계시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를 기뻐하라'는 말은 불충분하게 번역된 것입니다. 이 말은 원문의 의미를 전달하는 데 있어서 시작조차 못하고 있습니다. 스트롱의 성구사전에 따르면 이 말의 어원은 여호와의 손안에서 "부드럽고 유연하다"는 의미라고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토기장이의 손에 있는 반죽 진흙같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손에서 부드럽고 유연한 한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 그의 뜻이 이루어지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소원이 이루어지게 하실 것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만일 우리가 부드럽고 유연하면 그의 소원을 우리의 마음에 두실 것이 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빌2:13)"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이렇게 이해할 때 비로소 5절이 이해되기 시작합니다. 5절은 우리의 길(우리의 뜻)을 주님께 맡기면 주님이 이루실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에서 무엇을 이루신다는 것일까요? 5절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속에 두신 소원을 이루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느 길로 가야 할 것인지 결정하는 책임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을 의지하면 우리가 기꺼이 옛 소원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우리의 마음에 두신 새로운 소원들을 이루실 것입니다.
(4)쉬운 길을 좇아가지 마십시오
얼마나 쉽게 하나님의 자녀가 자기 의지대로 삶을 살아가고, 또 그렇게 하는 것이 얼마나 쉽게 하늘 문을 닫는지 모릅니다. 우리의 뜻을 버리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붙잡으십시오. 그런 다음 얼마나 빨리 하늘 문이 열리고 우리의 필요가 채워지는지 지켜보십시오. 우리의 잘못된 소원들을 사라지게 하십시오. 예수님이 행하셨던 것처럼 행하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만을 추구하십시오.
2. 뒤를 돌아보는 것
(창19:26)"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이전 죄에 대하여 매력을 느낍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는 가운데 이 매력은 그들의 그리스도인의 삶의 성장과 발전을 저해합니다. 이것은 정말 그들의 하늘 문을 닫히게 합니다. 이 문제는 아주 수치스러운 과거를 가진 소수의 신자들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닙니다. 과거에 깡패와 방탕자였던 사람들이 간증하는 것을 들으려고 열심히 쫓아다니는 청중들이 있는 듯합니다. 그들의 호기심은 과거의 죄인이 어떤 집회나 책에서 내용을 자세하게 세밀한 부분까지 말할 때 특히 고조됩니다. 편의상 이 수법을 "간증"이라고 부릅니다.
(1)즐겁게 누리기보다는 인내합시다.
이런 사람들은 재미있고 모험적인 그들의 과거 삶을 갈망하면서 뒤를 돌아봅니다. 그 재미와 모험과 함께 있었던 비참함은 잊고서 말입니다. 그들은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을 그저 그들이 하늘나라로 갈 때까지 '단지 인내하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상태 즉 뒤를 돌아보면서 즐기려는 상태를 위험하다고 경고하십니다. (눅9:62)"예수께서 이르시되 손에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아니하니라 하시니라" 계속해서 과거의 삶을 뒤돌아보는 것은 새로운 삶에 합당치 않습니다. 만일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다면 뒤를 돌아보는 것은 하늘 문을 닫는다고 결론을 내려야 합니다. 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보면 훌륭한 삶이 있으리라고 잘못 생각한 나머지 뒤돌아봄으로써 그녀의 삶에 하늘 문이 닫히게 했습니다. (창19:26)"롯의 아내는 뒤를 돌아본 고로 소금 기둥이 되었더라" 사실 하늘 문은 이 여인의 삶에 넓게 열려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천사들이 멸망하기로 작정된 그 도시로부터 그녀를 이끌어내기 위하여 몸소 왔었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하나님과 함께 하는 새로운 삶을 바라보지 않고 소돔에서의 좋았던 시간들을 뒤돌아보았습니다. 뒤를 돌아본 것은 하나님의 은혜가 그 여자의 삶에 열려 있었던 하늘 문을 닫아버렸던 것입니다. 이것은 원어상으로 롯의 아내가 단순히 뒤를 흘긋 보지 않고 '갈망하며 뒤를 돌아보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뒤를 돌아보고 타락한 데마, 사도 바울의 동역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이 문제 때문에 타락하였습니다. 그가 데마입니다. 그는 그의 과거 삶에 잘못 집착하였습니다. 데마는 능력 있는 하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특권 받은 사역자였습니다. 왜냐하면 그 위대한 사도와 함께 직접 일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그러하리라고 말씀하셨던 것처럼 뒤를 돌아본 것은 그에게서 자격을 박탈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한 때는 위대한 하나님의 사람이었던 이 사람에 대하여 쓴 것에서 배우시기 바랍니다. (딤후4:10)"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데마에게서 자격을 빼앗은 죄는 그가 이 세상을 사랑한 것이었습니다. 그의 마지막 활동들은 그가 뒤를 돌아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 주었습니다. 세상에 대한 그의 애정은 그를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게 하였고 그가 과거에 집중을 함으로써 그에게 하늘 문이 닫혔던 것입니다.
(2)뒤를 돌아보지 않게 하는 방법
우리의 신앙심이 미지근한 한 이 세상의 일들은 그리스도인 삶의 일들보다 더 재미있어질 것입니다. 히브리서의 저자는 이 주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현대어로 번역된 것으로 그가 말한 것을 들어보십시오. (히5:12-6:2)“여러분은 벌써 오래 전에 그리스도인이 되었습니다. 그러니 이제는 남을 가르칠 만도 한데 아직도 하나님의 말씀의 초보적인 원리도 채 이해하지 못하는 형편입니다. 단단한 음식을 먹을 만큼 크지를 못하고 언제까지나 젖만 먹는 갓난아이에 머물러 있습니다. 젖만 먹는 사람은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지 못합니다. 아직 어린아이에 불과하기 때문입니다.(12절에 포함되어 있음)여러분이 성장한 그리스도인이 되어 올바른 일을 실천함으로써 옳고 그른 것을 분별하게 되어야만 비로소 단단한 음식을 먹고 하나님 말씀의 깊은 뜻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는 그리스도교의 초보 진리를 배우느라 같은 자리에서 언제까지나 맴도는 일은 그만두고 더 깊은 진리를 배우는 자리로 나아가십시오. 또한 이해력을 키워서 건장한 교인의 품격을 갖추도록 하십시오. 착한 일을 해서 구원얻으려는 어리석은 생각이나 하나님을 믿어야 한다는 필요성만 가지고 떠드는 일에 더 이상 귀기울이지 마십시오. 세례와 성령의 은사와 죽은 자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해서도 더 이상 가르침을 받을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고귀한 부르심을 향하여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옛 삶을 동경하며 뒤를 돌아 볼 가능성이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게 될 것이고, 그래서 하늘 문은 닫힐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바울이 살았던 것처럼 산다면 하늘 문은 우리에게 절대로 닫히지 않을 것입니다. (빌3:10-15)"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우리 온전히 이룬 자들은 이렇게 생각할지니 만일 무슨 일에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이 이것도 너희에게 나타내시리라"
(3)앞을 바라보라
우리의 과거 삶의 방식을 계속해서 뒤돌아보는 것은 우리를 하나님 나라에 합당치 않은 사람으로 만들고 맙니다. 그것은 축복의 하늘 문이 닫히고 우리가 하늘로부터 받는 것을 방해합니다. 만일 우리가 이러한 상태에 있다면 여기에 그 치료방법이 있습니다. (엡4:22)"너희는 유혹의 욕심을 따라 썩어져 가는 구습을 좇는 옛 사람을 벗어버리고, 오직 심령으로 새롭게 되어"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연구하기 시작하면 전혀 새로운 삶의 길을 발견할 것입니다.
벧전3:7 잘못된 부부관계(10)
(벧전3:7)"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 하게 하려 함이라"
사탄은 여성을 미워합니다. 사탄의 증오는 여자의 후손이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사탄은 처녀에게서 난 하나님의 아들이 그의 공포의 지배에 종지부를 찍으리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1. 고통받는 여성들
여성에 대한 사탄의 증오 때문에 여성들은 항상 남성들 보다 더 고통을 받아 왔습니다. 이것은 전 역사를 통하여 명백합니다. 많은 사회에서 남성들은 여성들을 인격적 존재가 아니라 마치 사유 재산인 것처럼 대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여성들이 시민의 권리를 거의 가지지 못하는 곳들이 많습니다. 대부분의 사회들에서는 그들을 억압하고 조직적으로 그들을 이등 시민의 위치에 머물러 두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남성들에게 허락하셨던 모든 특권들을 여성들에게도 허락하셨습니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초대교회는 예수님이 그의 지상사역 동안에 여성들에게 부여 하셨던 자유를 박탈하였습니다. 사탄이 직접 교활한 공격을 교묘하게 지휘하였습니다. 사탄이 그렇게 한 것은 다른 이유가 아니라 여성을 하나님께서 정하신 위치인 남편 다음 자리에 있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1) 하늘 문을 닫게 하는 무지한 남편들
여성에 대한 차별이 보통의 기독교 가정에서 일으켜 온 문제는 명백합니다. 성경 베드로전서는 만일 남편이 그의 아내에 대하여 무지한 채로 산다면 그는 그의 모든 가족에게 하늘 문이 닫히게 하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의 무지가 모든 가족의 기도를 막습니다. (벧전3:7)"남편 된 자들아 이와 같이 지식을 따라 너희 아내와 동거하고 저는 더 연약한 그릇이요 또 생명의 은혜를 유업으로 함께 받을 자로 알아 귀히 여기라 이는 너희 기도가 막히지 아니 하게 하려 함이라" 성경이 말하는 대로 만일 우리가 우리의 아내와 함께 지적인 태도(성경적인 지식에 따른)로 살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기도를 막고 하늘로부터 오는 공급을 차단시킬 것입니다. 우리의 기도를 막는다 함은 우리가 하나님께 간청하고 있는 동안에 하나님으로 하여금 전화를 끊게 하는 것과 같습니다.
(2)관계에 관한 세 가지 영역
베드로 사도는 세 가지 특수한 영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첫째는 남편들에게 아내와 함께 지식에 따라 살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둘째로 그 남편들이 아내를 더 연약한 그릇으로 여겨 귀히 여겨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 말은 정신적으로 또는 영적으로 열등하다는 의미가 아니라 단지 신체적으로 더 연약하다는 의미입니다.
셋째는 함께 공동으로 유업을 받는 자라고 말했습니다.
남편들은 예수님이 교회를 대하신 것과 똑같은 식으로 아내를 대해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의 기도 생활이 풍성해질 것입니다.
(3)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어떻게 사랑하셨는가?
만일 남성들이 아내들과 성경적인 지식에 따라 산다면 교회 안에서 이혼에 대한 이야기는 없어질 것입니다. (엡5:25)"남편들아 아내 사랑하기를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위하여 자신을 주심같이 하라" (엡5:28)" 이와 같이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 몸같이 할지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2. 형제들과 불화하는 것
(롬12:18)"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1)불화는 값비싼 댓가를 치루게 합니다.
저는 그리스도인들 중의 불화, 분쟁과 교회의 부족한 재정 사이에는 명백한 연관성이 있다고 확신합니다. 예수님께서 친히 형제들 사이에 갈등이 있으면 드리는 헌물이 무익하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마5:21-24)"옛 사람에게 말한 바 살인치 말라 누구든지 살인하면 심판을 받게 되리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그리스도인들이 그들 중에 분쟁을 허락하면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예물은 열납되지 않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물을 거절하시면 우리는 자동적으로 닫혀진 하늘 문 아래에 머물러 있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인 형제에게 화를 내면 심판의 위험에 처해지고, 형제를 일러 "바보"라고 하면 지옥불에 들어갈 위험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형제에게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매우 심각한 악행이라고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2)다툼은 잃어버린 영혼들을 혼란케 합니다. (딤후2:24)"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전략을 정면으로 거스릅니다. 다툼 때문에 세상 사람들은 예수님이 진정 어떤 분이신지 알 수 없게 됩니다. 또한 다툼은 잃어버린 영혼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시는 것을 볼 수 없도록 합니다. (요13:34-35)"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 하나님을 믿는 성도들 간에 생기는 불화와 다툼은 세상을 얻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에 반대로 작용합니다.
(3)다투지 맙시다.
우리는 어떤 일로 인해서든지 형제를 비난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또한 우리는 우리의 형제와 자매들이 무슨 이유이든 우리를 비난하도록 허용하지 맙시다. 예수님은 그리스도이시며,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세상이 알도록 그들을 사랑하고 하나가 되어 행하도록 모든 노력을 다 하십시다. 불신자들이 우리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을 보고 또한 하나님께서 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도 알 수 있도록 행합시다. 우리와 우리의 모든 형제 자매간에 모든 일이 화평하면 하늘 문이 열리고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능력은 방해받지 않을 것입니다. (마5:24)"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
대하20:20 하나님의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 것(11)
(대하20:20)"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은사운동의 부활은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에 여러가지 유익을 가져다주었습니다. 그렇지만 또한 그와 함께 몇 가지 부정적인 것들도 초래하였습니다. 부정적인 것들 중의 하나는 하나님의 사람인 주의 종들을 경시하는 태도입니다. 이러한 불경은 성령님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의 개입 때문입니다.
1. 우리는 제사장들입니다.
제가 설명하겠습니다. 은사운동의 부활로 신자의 제사장직을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벧전2:9)"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이것은 좋은 일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교회원들이 자신이 누구인지 알지 못하는 한 결코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교회다움의 수준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께서 제사장이 되도록 부르신 대로 행동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식으로 말미암아 교회의 지도적 위치에 있는 하나님의 종들에 대한 존경심은 눈에 띄게 감소하게 되었습니다.
(1)사단은 항상 무엇인가를 덧붙입니다.
하나님의 운동이 일어날 때마다 사단이 그것에다 자신의 규정을 몇 가지씩 덧붙이는 게 역설적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종교개혁 이후의 전시대에 뒤따랐습니다. 마틴 루터는 은혜에 의한 구원과 오직 은혜로만을 공표하였는데, 사단은 물을 끼얹는 세례를 추가하였습니다.(세례를 받아야 구원을 얻을 수 있다고 함) 부흥운동이 성령의 충만을 회복시키자 사단은 교회의 민주적 정치를 더하였습니다. 교회는 '민주적'인 것이 아닙니다. 말씀적이어야 합니다. 민주적인 것은 다수의 논리가 이끌고 가는 것이지만 교회는 진리의 논리가 이끌고 나가는 곳입니다. 한편, 교회의 회원이 제사장과 사역자라고 가르친 하나님의 은사운동이 일어나자 사단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존경하지 않는 분위기를 조성하였습니다. 오해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소위 말하는 몇몇 지도자들은 어떠한 존경도 받을만한 자격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삯군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진실한 하나님의 종은 특히 하나님의 말씀 사역을 하고 있다면 배로 존경을 받아야 합니다. (딤전5:17)"잘 다스리는 장로들을 배나 존경할 자로 알되 말씀과 가르침에 수고하는 이들을 더할 것이니라"
(2)선물로 주신 교회의 지도자들
순종하는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께서 세우신 지도자들을 신뢰하고 존경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들을 교회에 선물로 주셨기 때문입니다. (엡4:8)"그러므로 이르기를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힌 자를 사로잡고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 하였도다" (엡4:11)"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하나님은 단지 잠시 동안만 이 다섯 분류의 지도자들을 주시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은사운동이 부활할 때에는 쓸모 없이 되도록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들을 전 은혜시대, 즉 예수님의 승천으로부터 재림 때까지 교회에 주셨습니다. (엡4:11-13)"그가 혹은 사도로, 혹은 선지자로, 혹은 복음 전하는 자로, 혹은 목사와 교사로 주셨으니, 이는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심이라,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13절에서 까지라는 단어를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이것은 교회가 온전해질 때까지 그 5중 사역이 우리와 함께 할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하나님의 종은 신자의 제사장직을 방해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것을 도울 것입니다. (롬13:3)"관원들은 선한 일에 대하여 두려움이 되지 않고 악한 일에 대하여 되나니"
2.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선지자(하나님의 종)와 신뢰관계를 가지지 않으면 우리는 형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대하20:20)"이에 백성들이 일찌기 일어나서 드고아 들로 나가니라 나갈 때에 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이 성경 말씀은 특히 그 중요성을 생각할 때 제가 발견한 것 중에 가장 무시되는 성경 구절 중의 하나입니다. 그러나 마귀는 그것을 간과하지 않았습니다. 마귀는 그것을 교회를 재정적으로 무능하게 하기 위하여 사용하였습니다. 왜냐하면 마귀는 만일 그가 하나님의 자녀들과 그들의 하나님의 종 사이의 신뢰를 깨뜨릴 수 있다면 그들의 삶이 더 이상 형통해지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너무도 잘 알기 때문입니다.
(1)저는 여러분 가운데 상당수의 사람들이 "물론이지요, 저는 저의 교회 목사님을 충분히 신뢰합니다."라고 말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정말 우리가 그러한지 봅시다. 우리는 우리의 가정의 저금 통장 전부 사본을 우리의 교회 목사님께 보여 드릴 수 있습니까? 이 질문이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왜냐하면 성경은 어떤 과부를 도와주기 전에 그 여자의 재정상태를 물어본 하나님의 사람에 대하여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왕하4:1)"선지자의 생도의 아내 중에 한 여인이 엘리사에게 부르짖어 가로되 당신의 종 나의 남편이 이미 죽었는데 당신의 종이 여호와를 경외한 줄은 당신이 아시는 바니이다 이제 채주가 이르러 나의 두 아이를 취하여 그 종을 삼고자 하나이다, 엘리사가 저에게 이르되 내가 너를 위하여 어떻게 하랴 네 집에 무엇이 있는지 내게 고하라 저가 가로되 계집종의 집에 한 병 기름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 그 과부가 무거운 빚 때문에 도움을 구하러 엘리사에게 찾아갔을 때 그 선지자가 물어본 첫 번째 것은 재정상태였습니다. 그는 "네 집에 무엇이 있느냐?"하고 물었습니다. 고맙게도 이 과부는 하나님의 사람을 신뢰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전체 내용(왕하4:1-7)을 읽으면 엘리사가 그 여자의 삶에 하늘문을 열어준 것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여자와 엘리사와의 신뢰관계는 그 여자의 빚을 다 갚게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여자의 생활비도 생기게 하였습니다.
(2)설교자들이 원하는 것은 여러분의 돈이 전부가 아닙니다.
이 모든 이야기는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 사랑스러운 여인이 사단의 거짓말을 듣고 "목사들이 원하는 것은 우리의 돈이 전부입니다."하는 말을 믿었다고 가정해 봅시다. 만일 그 여자가 엘리사를 거짓 선지자들 중의 한 사람으로 생각했다면 어떤 일이 일어났겠습니까? 그 여자는 그 선지자에게 전혀 딴판으로 대답을 했을 것입니다. 그 여자는 기름병 하나가 있다고 말하는 대신 정중하지만 단호하게 말했을 것입니다. "그것은 목사님과 상관없는 일이 아닙니까?"라고요. 의심할 것 없이 그가 떠난 후에 그 여자는 이렇게 말했을 것입니다. "뻔뻔스러운 목사, 내가 그에게 내 빚에 대하여 상담하러 갔을 때 목사가 원하는 것은 내 돈이 전부였어. 어떻게 감히 목사가 내 집에 무엇이 있는지 물어볼 수 있단 말인가?" 저는 우리가 여기에서 진리를 알게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담임목사님께 우리의 재정은 상관할 바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한편으로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우리의 모든 재정 명세서를 불신의 은행가에게는 내 보이고 간청까지 할 것입니다.(대출 받기 위해서)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십시오. (대하20:20):여호사밧이 서서 가로되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들아 내 말을 들을지어다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견고히 서리라 그 선지자를 신뢰하라 그리하면 형통하리라 하고" 반대로 생각해 보면 이 구절은 만일 우리가 하나님의 선지자를 신뢰하지 않으면 우리는 형통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자녀인 우리는 진리에 눈을 떠야 합니다. 우리의 신뢰 부족은 하나님의 종들의 비행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단 자신으로부터 옵니다. 왜냐하면 사단은 우리와 하나님의 종과의 신뢰관계를 깨뜨릴 수 있다면 우리의 형통을 방해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3)가난한 사람들의 말은 듣지 않습니다.
마귀는 우리가 형통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면 마귀는 자동적으로 우리의 복음 전하는 일을 훼방하는 것임을 압니다. 왜냐하면 아무도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그리스도인의 전도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습니다. 마귀가 그런 생각을 스스로 갖게 된 것이 아닙니다. 마귀는 그런 생각을 성경에서 알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아무도 가난한 사람들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전9:16)"그러므로 내가 이르기를 지혜가 힘보다 낫다마는 가난한 자의 지혜가 멸시를 받고 그 말이 신청되지 아니한다 하였노라" 일반 사람들이 여러분의 말을 듣지 않는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이 되어 가난하게 사는 것은 닫혀진 하늘문 아래에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의 목적은 세상 사람들을 구원하는 것인데 그들이 우리의 말을 듣지 않으려 한다면 우리는 실패한 것입니다.
(4)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키지 마십시오. 이번에는 다른 구절을 생각해 보겠습니다. 이 구절은 하나님의 집의 합당한 지도자들을 존경하지 않거나 복종하지 않으면 그것이 실제로 우리의 생명을 단축시킨다는 것을 깨닫게 해 줄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집에 있는 지도자들을 아버지와 어머니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젊은 남자와 여자들에게 하나님의 일들을 가르쳐야 합니다. (딛2:3-5)"늙은 여자로는 이와 같이 행실이 거룩하며 참소치 말며 많은 술의 종이 되지 말며 선한 것을 가르치는 자들이 되고, 저들로 젊은 여자들을 교훈하되 그 남편과 자녀를 사랑하며, 근신하며 순전하며 집안 일을 하며 선하며 자기 남편에게 복종하게 하라 이는 하나님의 말씀이 훼방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젊은 남자와 여자들"이라고 한 것은 꼭 나이를 두고 말하는 것만이 아니고 그리스도 안에서 어린 사람을 뜻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우리가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면 장수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엡6:2-3)"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바울이 한 이 말씀은 부모와 육신의 자녀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하지만 이 원리는 또한 교회와 그 지도자들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인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지 않으면 우리의 지상 생활은 단축되고 말 것입니다. 수명이 줄어지면 그게 바로 하늘 문이 닫힌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 위에 있는 권위인 하나님의 종을 신뢰하지 못할 합당한 이유가 있으면 우리는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찾아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하늘 문은 닫힌 채로 있을 것이고,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 위의 하나님의 종과 적절한 신뢰관계를 가져야 합니다. 그의 뒷편에서 그를 지원하고, 그를 격려하고, 그에게 복종하십시오. 그러면 우리에게 하늘 문은 열릴 것입니다.
살후3:10 일하지 않는 것(12)
(살후3:10)"우리가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도 너희에게 명하기를 누구든지 일하기 싫어하거든 먹지도 말게 하라 하였더니"
잠언서의 가르침은 성경적인 노동 윤리에 대한 철학을 분명하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열심히 일하여 형통해지는 법을 인간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하여 미물인 개미를 사용하셨습니다. 이 비유에서 모든 사람들이 주의 깊게 생각해야 할 교훈을 배우게 됩니다. (잠6:6-11)"게으른 자여 개미에게로 가서 그 하는 것을 보고 지혜를 얻으라, 개미는 두령도 없고 간역자도 없고 주권자도 없으되, 먹을 것을 여름 동안에 예비하며 추수 때에 양식을 모으느니라, 게으른 자여 네가 어느 때까지 눕겠느냐 네가 어느 때에 잠이 깨어 일어나겠느냐,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 더 눕자 하면,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1. 감독 없이 일하는 것을 배우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게으름뱅이(게으른 사람)는 개미의 일하는 습관을 관찰함으로써 지혜롭게 될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개미의 성공의 많은 부분이 주어지는 의무를 독립적으로 수행하는 능력에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개미는 감독자가 필요하지 않습니다. 오늘날 세상에서 감독 없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빨리 부상하는지는 놀랍습니다. 산업은 실제로 이 능력을 가진 사람들에 의해 움직이고 있습니다. 좋은 노동 습관은 승진과 소득 증가를 빨리 가져옵니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이 가르침에 특별히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가 꼬리가 아닌 머리가 되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신28:13)"여호와께서 너로 머리가 되고 꼬리가 되지 않게 하시며 위에만 있고 아래에 있지 않게 하시리니 오직 너는 내가 오늘날 네게 명하는 네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고 지켜 행하며" 하나님은 우리가 지배받는 것이 아니라 지배하기를 원하십니다.
(1)파종기와 추수의 원리
잠언은 개미가 하나님의 추수 원리를 따라서 일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개미는 모을 때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개미는 경제적으로 불경기가 오더라도 굶지 않습니다. 만일 하나님의 자녀들이 경기 침체와 결핍을 내다보는 세상의 전망에서 눈을 떼어 씨 뿌리는 사람에게 하신 하나님의 약속에 착념한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경기 침체가 온다고 하더라도 씨 뿌리고 추수하는 원리를 여전히 작용합니다. 이 교훈을 배울 때 우리는 절대로 경기 침체와 불경기의 희생물이 되지 않을 것입니다. (창8:22)"땅이 있을 동안에는 심음과 거둠과 추위와 더위와 여름과 겨울과 낮과 밤이 쉬지 아니 하리라"
(2)가난을 보증하는 게으름
하나님은 계속해서 게으름의 죄를 엄격하게 다루십니다. 하나님은 게으름뱅이를 꾸짖으시고 가져오는 유일한 결과는 가난이라는 것을 그에게 보여주십니다. 가난이 게으른 사람에게 오지 않게 하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왜냐하면 성경은 가난이 무장 강도처럼 온다고 말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가난과 결핍이 게으른 사람의 삶을 지배할 것이라고 실제로 말씀합니다. 그것이 그가 강도를 당하는 것과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그는 저항할 힘이 없을 것입니다. 잠언 24장은 다시 확언을 하고 있습니다. 게으름의 결과는 항상 똑같습니다. 그것은 가난을 가져옵니다.
(잠24:30-34)"내가 증왕에 게으른 자의 밭과 지혜 없는 자의 포도원을 지나며 본즉, 가시덤불이 퍼졌으며 거친 풀이 지면에 덮였고 돌담이 무너졌기로, 내가 보고 생각이 깊었고 내가 보고 훈계를 받았었노라, 네가 좀더 자자, 좀더 졸자, 손을 모으고 좀더 눕자 하니 네 빈궁이 강도같이 오며, 네 곤핍이 군사같이 이르리라"
2. 부양하지 않는 사람은 불신자입니다.
일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보다 더 게으른 사람은 없습니다.
성경은 일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 단호합니다. 디모데 전서는 생계를 맡은 사람이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지를 거부하면 그는 불신자보다 더 악하게 된다고 말씀합니다. 불신자라는 말은 문자적으로 "믿지 않는 사람"을 의미하는 헬라어입니다. 사도는 만일 자신의 가족을 부양하기를 거부하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서 불신자보다 더 악하게 된다고 말씀했습니다. (딤전5:8)"누구든지 자기 친족 특히 자기 가족을 돌아보지 아니하면 믿음을 배반한 자요 불신자 보다 더 악한 자니라" 이것이 대하여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일하지 않는 것이 하늘 문을 닫히게 합니다.
(1)게으름을 물리쳐야 합니다.
만일 우리가 게으르게 살아왔거나 일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면 회개하시고 하나님께 우리의 일하는 습관을 돌이키게 해 달라고 하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이 하라는 대로하십시오. 우리가 해야 할 일이면 무엇이든지 간에 전력을 다해 하십시오. (전9:10)"무릇 네 손이 일을 당하는 대로 힘을 다하여 할지어다 네가 장차 들어갈 음부에는 일도 없고 계획도 없고 지식도 없고 지혜도 없음이니라" 만일 우리가 이 새로운 태도를 취하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따른 승리하는 노동윤리가 몸에 배게 될 것입니다.
(2)열심히 일하는 사람이 되는 방법
에베소서 6장은 마치 우리가 실제로 주님을 위하여 일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의 고용주들에게 우리의 업무를 수행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엡6:5-7)"종들아 두려워하고 떨며 성실한 마음으로 육체의 상전에게 순종하기를 그리스도께 하듯 하여, 눈가림만 하여 사람을 기쁘게 하는 자처럼 하지 말고 그리스도의 종들처럼 마음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여, 단 마음으로 섬기기를 주께 하듯 하고 사람들에게 하듯 하지 말라"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고용주라면 우리가 어떻게 직장 일을 할 것인지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일하려는 것처럼 우리의 고용주를 위하여 일한 다면 틀림없이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일할 것입니다.
(3)열심히 일한 결과
이제 만일 우리가 하나님이 가르쳐 주신 방식과 태도로 일한다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보답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하늘 문이 열리고 하나님의 복이 쏟아질 것입니다.
(엡6:8)"이는 각 사람이 무슨 선을 행하든지 종이나 자유하는 자나 주에게 그대로 받을 줄을 앎이니라" 올바른 노동윤리는 우리의 삶에 복을 끌어옵니다. 그 반대도 물론 진리입니다. 일하지 않는 것은 성실하게 십일조를 내는 사람에게조차도 하늘 문을 닫습니다. 하나님은 가난과 부족이 일하지 않는 사람에게 무장 강도 같이 엄습한다고 약속 하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하나님은 그를 불신자로 여기실 것입니다. 우리의 십일조는 하늘 문을 열어주며, 우리의 성경적인 노동윤리는 풍성한 씨앗을 우리의 손에 놓아줍니다. 우리가 그 씨앗을 뿌릴 때 풍성하고 넘치는 수확을 하나님으로부터 거두게 됩니다. (고후9:10)"심는 자에게 씨와 먹을 양식을 주시는 이가 너희 심을 것을 주사 풍성하게 하시고 너희 의의 열매를 더하게 하시리니"
우리가 그 씨앗을 뿌릴 때 풍성하고 넘치는 수확을 하나님으로부터 거두게 됩니다.
잠23:7 잘못된 생각과 말(13)
(잠23:7)"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인간의 마음은 아주 복잡한 창조물입니다. 마음은 과학의 세계에서조차도 정복되지 않은 미개척 분야입니다. 인류의 모든 진보에도 불구하고 마음은 여전히 비밀로 남아 있습니다. 인간의 마음에 대한 지식의 가장 좋은 자료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사실 성경에는 마음에 대한 정보가 가득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과 갖는 관계는 일차적으로 마음에서 일어납니다. (물론 성령의 지배를 받는 마음을 말합니다.) 이 때문에 마귀는 우리의 생각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에 영향을 끼치려고 모든 노력을 다 기울입니다. 잠언 23장에서 한 구절은 악한 눈을 가진 사람에 대하여 말합니다. 이 구절에서 그가 그의 마음에 악한 생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 사람에게 악한 눈이 존재한다고 말합니다. (잠23:6-7)"악한 눈이 있는 자의 음식을 먹지 말며 그 진찬을 탐하지 말지어다, 대저 그 마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한즉 그가 너더러 먹고 마시라 할지라도 그 마음은 너와 함께 하지 아니함이라"
1. 생각은 창조적인 힘입니다.
우리가 마음속으로 어떻게 생각하느냐가 우리가 말하는 것을 만들어 낼 것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무엇을 말하든지 간에 그 말대로 갖게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마가복음에서 우리 주님은 마음의 창조적인 힘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만일 우리가 어떤 것에 우리의 생각을 확고하게 집중하고 있다가 그것을 말하게 되면 우리가 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막11:22-24)"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예수님은 우리가 산에게 말해야 한다고 명백하게 말씀하신 반면에 또한 우리가 확고하게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않아야 한다고 강조하셨습니다. 이 구절은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에 한 차원을 더 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무엇을 원하든지 우리가 기도할 때에,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은 줄로 믿는다면 그것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반복해야겠습니다. (막11:24)"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
(1)우리 생각이 하늘 문을 열거나 닫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만일 우리가 원하는 것들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받게 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 말의 반대는 만일 우리가 그것을 받는다고 믿지 않는다면 우리의 그것을 갖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의 주님은 두 가지 마음이 우리에게 가능하다고 말씀하십니다. 우리는 믿고 받을 수 있습니다. 혹은 의심하고 못 받을 수 있습니다. 하늘 문은 잘못된 방식으로 생각하는 사람에게 닫혀집니다. 만일 우리가 받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하면 받지 못할 것입니다. (마21:22)"너희가 기도할 때에 무엇이든지 믿고 구하는 것은 다 받으리라 하시니라"
(2)우리는 우리의 생각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릇되게 생각하는 것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후서에서 어떻게 그릇된 생각을 고칠 수 있는지를 가르쳐주었습니다. (고후10:5)"모든 이론을 파하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파하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케 하니"
(3)사실 지식이냐, 신앙 지식이냐
사실 지식이 우리의 신앙 지식과 갈등을 일으킬 때에는 사실 지식을 버리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실 지식은 보이는 세계에서 옵니다. 보이는 세계는 일시적이고 일정한 변화의 지배를 받습니다. 신앙 지식만이 우리를 움직이도록 하게 하십시오. 신앙 지식의 기초는 성경이 말씀하는 하나님의 약속입니다. 우리가 환경의 말보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것을 믿을 때에 하나님의 기적이 열린 하늘 문을 통하여 우리에게 마음껏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이 점을 생각해 보면 간단하게 결정이 날 것입니다. 우리는 보는 것을 믿을 것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을 믿을 것입니까? 만일 우리가 보는 것을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하시는 것을 믿을 수 있다면 그 즉시 모든 것들이 우리에게 가능해 집니다.
(4)재정을 만들어 내는 올바른 생각
이 동일한 원리는 우리의 재정관계에도 작용합니다.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것만 믿으면 우리는 빨리 낙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눈에 보이는 부족한 것을 거부하고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풍성함을 믿을 수 있다면 하늘 문은 열리고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아낌없이 채워집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이 적게 채워질 때 부족이라는 물리적인 증거를 초월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믿음이라는 보다 높은 증거를 보십시오. 바울이 에베소 사람들에게 말한 것을 들어보십시오. (엡3:20)"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에게" 우리의 눈에 보이는 부족한 것을 거부하십시오. 그 대신에 하나님이 약속하시는 넘치는 풍요만을 믿으십시오.
2. 잘못된 말
(막11:23)"...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그 말하는 것을 받으리라]" 혀는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혀를 가지고 우리는 위대하고 놀랄 만한 일들을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또한 무시무시하고 파괴적인 일들도 할 수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똑같은 혀를 가지고 파괴적인 힘과 건설적인 힘을 만들어 낸다는 사실을 말씀했습니다. (약3:8-12)"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 이것으로 우리가 주 아버지를 찬송하고 또 이것으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은 사람을 저주하나니, 한 입으로 찬송과 저주가 나는도다 내 형제들아 이것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샘이 한 구멍으로 어찌 단 물과 쓴 물을 내겠느뇨, 내 형제들아 어찌 무화과나무가 감람 열매를, 포도나무가 무화과를 맺겠느뇨 이와 같이 짠물이 단 물을 내지 못하느니라" 이 사도는 같은 샘에서 쓴 물과 단물 둘 다 나올 수 있는 가능성을 말씀했습니다.
야고보는 혀의 파괴적인 힘이 어두움의 전체 구조에 불을 붙일 수 있다고 말씀합니다. (약3:5-6)"이와 같이 혀도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라는 구절을 다음과 같이 풀어서 말하면 더 잘 이해 할 수 있습니다. "혀는 옛사람의 본성에 다시 불을 붙여서 그것을 멸망의 길로 돌아가게 하나니"
(1)혀 안에 죽음과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잠언서에서 혀의 양극을 달리는 능력을 볼 수 있습니다. (잠18:21)"죽고 사는 것이 혀의 권세에 달렸나니 혀를 쓰기 좋아하는 자는 그 열매를 먹으리라" 우리의 혀는 생명을 빼앗든지 아니면 생명을 주든지 할 수 있습니다. 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지는 우리에게 달려 있는 것입니다. 혀의 긍정적인 가능성을 봅시다. 만일 우리가 혀를 올바로 사용하면 혀는 우리의 삶에 보급 담당 하사관이 될 수 있습니다. 잠언은 우리가 혀에 의해 풍요로워질 수 있다고 말합니다. (잠18:20)"사람은 입에서 나오는 열매로 하여 배가 부르게 되나니 곧 그 입술에서 나는 것으로 하여 만족하게 되느니라" 좀더 보면 우리의 말이 삶의 필요와 소원들을 채워주는 나무가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잠15:4)"온량한 혀는 곧 생명나무라도..." 올바로 한 말은 건강을 가져옵니다. (잠12:18)"...지혜로운 자의 혀는 양약 같으니라" 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자신을 보존시킵니다. (잠12:19)"진실한 입술은 영원히 보존되거니와..." 잘못된 말은 멸망을 가져옵니다. (잠15:4)"...패려한 혀는 마음을 상하게 하느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글자 그대로 그릇되이 말하는 것이 영혼을 망친다고 말합니다. 잠언 12:18에서 우리는 같은 것을 읽게 됩니다. (잠12:18)"혹은 칼로 찌름같이 함부로 말하거니와" 야고보의 평가가 얼마나 정확합니까! 생명을 가져올 수 있는 혀가 또한 치명적인 상처를 입힐 수 있습니다.
(2)생명을 구하는 올바른 말
이제, 어떻게 하면 혀가 하늘 문을 열고 닫을 수 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열왕기하4:8-37에서 우리는 아이가 없는 여인을 발견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이 아이를 낳으리라는 말을 한 후에 그 여자는 임신하였고 아들을 낳았습니다. 그 소년이 자라 그의 아버지와 함께 들에서 일하고 있던 어느 날 아프게 되었고 조금 후에 죽었습니다. 어머니는 그 아이를 선지자의 침대에 누인 후에 가까운 도시로 가서 엘리사에게 말할 준비를 하였습니다. 이 여자의 남편은 왜 하나님의 종을 만나러 가려 하는지 물었습니다. 이 때의 이 여자의 대답은 "평안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아이가 죽었습니다"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엘리사가 사환을 통해 평안한지를 묻습니다. 그 때도 "평안입니다"였습니다. 결국 아이는 살아났습니다.
(3)하늘 문을 열고 닫는 말
우리가 이야기하는 방식은 하늘 문을 열어 놓느냐 마느냐를 결정할 수 있습니다. (마18:19)"진실로 다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중에 두 사람이 땅에서 합심하여 무엇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저희를 위하여 이루게 하시리라" 동의는 굉장한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의 말이 우리를 압도하려고 하는 원치 않는 환경에 동의한다면 그것은 반드시 일어날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할 때나 설교를 들을 때 "아멘"이라고 하는 동의가 그렇게도 중요한 것입니다.
(4)올바로 말하기 시작합시다.
만일 우리가 그릇되게 이야기해 온 것을 깨닫게 되었다면 솔직히 하나님께 용서를 구하십시오. 오늘 이후로는 하나님의 말씀과 일치하는 것만을 말하겠다고 결심하십시오. 우리의 혀를 전적으로 사망의 말이 아닌 생명의 말을 하는 데에 사용하도록 하십시오. 가난이나, 질병, 또는 실패에 동의하는 말을 이 후로는 멈추십시오. 만일 우리에게 하늘 문이 열려 있기를 원한다면 하나님이 우리에 대해 말씀하시는 것만을 말해야 합니다. 무엇이든지 우리가 말하는 대로 받게 될 것이라는 점을 꼭 기억하십시오.
약1:4 인내하지 못하는 것(14)
(약1:4)"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하나님으로부터 받는 문제를 말할 때 인내를 능가하는 미덕은 없습니다. 히브리서는 인내를 믿음과 동등하게 탁월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히6:12)"게으르지 아니하고 믿음과 오래 참음으로 말미암아 약속들을 기업으로 받는 자들을 본 받는 자 되게 하려는 것이니라"
1. 믿음과 인내는 병행합니다.
신약은 항상 믿음과 인내를 함께 결부시킵니다. 그 이유는 믿음은 시험을 맞이하여 통과한 후에만 성숙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으로 믿고 있는 것에 대해 완전한 응답을 받을 때까지 인내하며 지속되어야 합니다. 그럴 때에만 우리는 완전히 작용하는 믿음을 가진 것입니다. 로마서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가르치셨습니다. (롬5:1-4)"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또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하느니라,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이 구절에서 바울의 가르침을 주의하여 따라가 보면 우리는 인내를 발전시키는 데에 필요한 과정을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환난과 시험 중에도 즐거워해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이것은 그 자체로는 어려운 말입니다. 왜냐하면 시험이나 시련은 그것이 일어나고 있는 동안에는 하나도 즐겁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믿음이 바라던 것을 응답 받는 경험을 하면 그것이 얼마나 유익한 가를 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우리가 우리의 믿음에 대한 시험이 무엇을 생기게 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즐거워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3절에서 무엇을 말하는지 주의하여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견뎌내는 시험은 우리에게 인내라는 놀라운 속성을 개발하게 합니다. "인내"라고 불리우는 이 놀라운 것은 우리가 자신의 믿음을 시험하도록 허락하지 않는다면 쓸모가 없습니다. 계속해서 바울 사도는 인내와 결합된 믿음으로부터 오는 완전한 보상을 우리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롬5:3-5)"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이 말씀에서 "소망"이라고 불리우는 새로운 것이 소개되어 있습니다. 소망은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말합니다. 믿음이 인내의 지점까지 성숙할 때 믿음은 소망을 낳고 소망은 우리를 사자같이 담대하게 합니다.
(1)우리는 부끄러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예를 들어, 치유의 영역에서 건강이 쇠약해진 상황은 강하고 성숙한 믿음을 일으키지 못합니다. 인내는 확고하게 서며 시간이 지나도 우리의 믿음을 약화시키지 않게 합니다. 그리고 소망은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를 낫게 하셨다는 담대한 선언을 하게 합니다.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우리는 우리가 치유될 것이라는 것을 믿습니다. "어떻게 우리를 하나님께서 고치시리라는 것을 압니까?"라고 물을 때 우리는 간단하게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그렇게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히 동일하십니다. 우리는 전에 하나님의 말씀을 신뢰하였고 그것은 한 번도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많은 시험을 통과하면서 끈기있는 믿음이 되었고 그것은 항상 우리에게 승리를 가져다주었습니다.
우리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소망 때문에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앞으로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성숙한 믿음을 가질 때 우리는 하등에 부끄러워 할 이유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충만하고, 인내로 충만하고, 소망으로 충만할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것으로 믿고 있는 것은 무엇이든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부끄러워하지 않을 것입니다.
(2)받으려면 인내가 필요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받기 위해서는 인내를 가져야 한다고 명백하게 말씀합니다. (히10:36)"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을 받기 위함이라" (갈6:9)"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피곤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 인내는 우리가 사탄에 대하여 승리하는 데에 필수적입니다. 우리가 믿음을 인내에 결합시킬 때에만 우리는 적을 이길 수 있는 능력을 가질 것입니다. (엡6:13-14)"그러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취하라 이는 악한 날에 너희가 능히 대적하고 모든 일을 행한 후에 서기 위함이라, 그런즉 서서..." 마귀를 대적하고 있는 동안 우리의 확고한 인내는 승리를 보장하여 줍니다. 현대어 성경은 말씀이 실제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을 좀더 명백하게 보여 줍니다. (엡6:13 현대어 성경)"그러므로 언제 적이 공격해 오든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기를 다 사용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러분은 굳게 서 있을 것입니다."
이 구절은 "만일 우리가 믿음 안에서 시작한다면" 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만일 우리가 믿음 안에 계속 서 있다면"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른 말로 하면 우리가 마귀와 싸우기 위하여 서 있을 때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어야 합니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인내하며 기다리면서 믿음 안에 서서 그 상태를 유지하기만 하십시오. 전쟁이 끝났을 때 "우리는 여전히 서 있을 것입니다." 우리가 열린 하늘 문 아래에서 살기를 원한다면 인내가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마귀에 대한 승리는 그 놈을 대적하는 데에 지친 성도의 삶에서는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인내가 약해질 때 우리는 굴복하고 하늘 문을 닫힙니다. 인내하지 못하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최상의 것을 절대로 받지 못할 것입니다. (전11:1)"너는 네 식물을 물위에 던지라 여러 날 후에 도로 찾으리라" 여러 날은 인내하는 날들이 되어야 합니다. 식물은 우리가 던진 그 날에 돌아오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내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그것이 여러 날 후에 돌아올 것입니다.
(3)우리는 인내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인내하지 못해서 하늘 문이 닫힌다면 우리는 그 문제를 고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것을 하나님의 말씀에 따라 해야만 합니다. (롬5:3)"...이는 환난은 인내를," 이 구절은 만일 우리가 인내를 원한다면 고통을 겪어야만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구절은 만일 우리가 인내를 원한다면 우리의 믿음을 시험받게 해야 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씨(돈)를 뿌리고 즉석에서 당장 수확을 보지 못한다고 "안 되는구나"라고 말해서는 안됩니다. 그보다는 주고, 그런 다음 우리의 자리를 지켜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신 것을 받았다고 믿으십시오. 수확이 생기기를 인내하며 기다리면서 우리의 일을 계속하십시오. 동요하지 마십시오. 의심하지 말고 굳게 서 있으십시오. 오직 믿기만 하십시오. 우리가 신실하게 서 있을 때 수확이 생길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갖기 전에 거의 평생을 기다렸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25년간을 기다렸습니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는데, 강산이 두 번 하고도 반이나 흘러간 세월을 인내하였습니다. 그의 믿음은 의심의 시험을 이겼습니다. 그는 인내하며 기다렸고 그 기다림이 끝났을 때 그의 약속된 아들을 얻었습니다.
(4)인내는 즉각적이 아닙니다.
우리에게 즉각적인 인내를 가져다 줄 말이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성경적인 방법으로 인내를 발전시켜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의 믿음을 시험한 결과이어야 할 것입니다. 인내 없이는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최상의 것을 바랄 수 없다는 것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인내와 함께 하늘 문은 넓게 열립니다.
전5:5-6 갚지 않은 서원(15)
(전5:5-6)"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네 입으로 네 육체를 범죄케 말라 사자 앞에서 내가 서원한 것이 실수라고 말하지 말라 어찌 하나님으로 네 말소리를 진노하사 네 손으로 한 것을 멸하시게 하랴"
서원이라는 말은 오늘날의 기독교에서는 일반적으로 사용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 말이 성경에서는 90번 이상 나타납니다. 서원이라는 말은 서약이라고도 합니다. 서약이라는 말은 미래에 어떤 것을 주겠다거나 하겠다는 약속입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서약을 한 적이 있으며, 아니면 최소한 어떤 사람이 그 말을 사용하는 것을 들었을 것입니다.
1. 믿음으로 약정하는 헌금에 대하여
50년대에서 80년대 중반 사이에 북미에 있는 교회는 굉장히 많은 서약 또는 서원을 하였습니다. 교회는 주로 그것을 가지고 해외 선교비 모금에 사용하였습니다. 그것으로 인하여 그 시기에 수백 만 불이 복음에 투자되었습니다. 믿음으로 약정하는 헌금이 활용한 방법은 헌금자가 그의 헌금을 나누어 내도록 한 것이었습니다. 예를 들어, 만일 어떤 사람이 120만원을 헌금하기를 원하는데 그것을 현금으로 못하게 되면 그는 매달 10만원씩 헌금할 것을 단지 믿음으로 약속할 수 있습니다. 만일 그가 신실하게 12 달 (1년)동안 그 액수를 헌금하면 그는 그가 원했던 120 만원을 헌금할 수 있을 것입니다. 미국에서 기독교 텔레비젼이 성장하기 시작했던 80년대 초반에 믿음으로 약정하는 헌금은 필요한 돈 수백만 불 모금하는 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뭔가가 잘못되었습니다. 사람들이 큰 금액의 돈을 함부로 서약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렇게 약정한 금액은 깜짝 놀랄 만한 것이었습니다. 문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그들이 서약한 것을 이행하는데 성실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작정한 대로 이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교회는 믿음으로 약정하는 헌금을 점점 강조하지 않게 되었고, 마침내는 거의 없애버리다시피 되고 말았습니다.
(1) 서원을 갚지 않는 것은 죄입니다.
지난 수년간 많은 거듭난 사람들이 서원과 서약을 하고서는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서원하고 갚지 않는 것에 대한 하나님의 태도를 명백하게 밝힙니다.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전5:4-5)"네가 하나님께 서원하였거든 갚기를 더디게 말라 하나님은 우매자를 기뻐하지 아니하 시나니 서원한 것을 갚으라, 서원하고 갚지 아니하는 것보다 서원하지 아니하는 것이 나으니" 신명기 저자는 하나님께서 사람이 서원한 것은 갚기를 원하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는 서원하고 갚지 않은 것은 죄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신23:21-23)"네 하나님 여호와께 서원하거든 갚기를 더디 하지 말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반드시 그것을 네게 요구하시리니 더디면 네게 죄라, 네가 서원치 아니하였으면 무죄하니라마는, 네 입에서 낸 것은 그대로 실행하기를 주의하라 무릇 자원한 예물은 네 하나님 여호와께 네가 서원하여 입으로 언약한 대로 행할지니라" 우리는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이야기에서 서원하고 자기들이 약속한 것을 드리지 않은 사람들을 하나님께서 기뻐하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히 볼 수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이 두 성도들은 그들이 서원한 대로 행하지 못하여 엎드러져 죽었습니다. 사도행전 4:36-5:11을 읽어보면 그들이 당한 큰 비극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습니다. 그 비극은 그들이 하나님께 드리는 헌금에 대하여 성령님을 속였을 때에 일어났습니다.
(2)하나님은 서약을 반대하지 않으십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연구해 보면 하나님은 그의 자녀들이 서원하는 것을 기뻐하신다는 것이 성경적으로 명백해집니다. 성경은 사실 우리가 올바른 서원을 할 때 하나님께서 빨리 역사하신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한나의 서원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이 여자의 기도에 빨리 응답하셨음을 보여 줍니다. 한나는 하나님께서 아들을 주시기만 하면 그 아들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서원 했습니다. (삼상1:11)"서원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여 만일 주의 여종의 고통을 돌아보시고 나를 생각하시고 주의 여종을 잊지 아니하사 아들을 주시면 내가 그의 평생에 그를 여호와께 드리고 삭도를 그 머리에 대지 아니하겠나이다" 이 여자의 기도에 대한 응답은 이 여자와 남편이 집으로 돌아간지 불과 며칠 안에 이루어졌습니다. 성경은 이 여자가 곧 임신하게 되었음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삼상1:19)"그들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여호와 앞에 경배하고 돌아가서 라마의 자기 집에 이르니라 엘가나가 그 아내 한나와 동침하매 여호와께서 그를 생각하신지라" 이스라엘의 사사인 입다는 서원으로 말미암아 그의 적들에 대하여 큰 승리를 얻도록 하나님의 손을 움직였습니다. (삿11:30)"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3)서원한 것을 갚아야 하늘 문이 열립니다.
성경은 서원을 갚는 것과 연결된 회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능력을 회복시킨다고 말합니다. 우리가 이 능력을 회복할 때 우리의 삶에 하늘 문은 열리게 됩니다. 욥기에서 엘리바스는 이렇게 설명하였습니다. (욥22:23-28)"네가 만일 전능자에게로 돌아가고 또 네 장막에서 불의를 멀리 버리면 다시 흥하리라, 네 보배를 진토에 버리고 오빌의 금을 강가의 돌에 버리라, 그리하면 전능자가 네 보배가 되시며 네게 귀한 은이 되시리니, 이에 네가 전능자를 기뻐하여 하나님께로 얼굴을 들 것이라, 너는 그에게 기도하겠고 그는 들으실 것이며 너의 서원한 것을 네가 갚으리라, 네가 무엇을 경영 하면 이루어질 것이요 네 길에 빛이 비취리라"
시편 기자는 하나님의 손은 서원을 성실하게 갚는 사람들을 기꺼이 도와줄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시50:14-15)"감사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며 지극히 높으신 자에게 네 서원을 갚으며,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2. 갚지 않은 서원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성경의 두 부분이 갚지 않은 서원을 바로잡는 것을 다루고 있습니다. 레위기는 특정한 양과 특정한 물건의 서원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만일 우리가 레위기를 주의 깊게 읽는다면 짐승의 약속에 대한 말을 발견할 것입니다. 만일 짐승을 약속한 사람이 마음을 바꾸어 그것을 드리고 싶지 않으면 그는 그 짐승의 가격에 오분 일 (20%)을 더하여 하나님께 그 돈을 드려야 합니다. (레27:13)"그가 그것을 무르려면 정가에 그 오분 일을 더할지니라" 이 구절은 오분 일(20%)의 벌금이 이행되지 않은 서원에 시행되어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과거의 서원을 실행하는 또 다른 방법은 그것을 갚거나, 아니면 갚도록 재약정 하는 것입니다. 이 방법을 요나의 삶을 통해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알다시피 요나는 큰 물고기 배속에 들어가 있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가 니느웨에 전파하러 가는 것을 거부한 불순종 때문에 거기에 있었다고 믿습니다. 요나가 물고기 배속으로 들어간 충분한 이유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보다 무엇인가 더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께서 요나를 기뻐하지 않으신 이유 중에는 그의 이행되지 않은 서원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요나가 그의 서원을 갚기로 약속하였을 때 하나님은 빨리 그를 물고기 밖으로 열린 하늘 문 아래로 옮기셨습니다. (욘2:9)"나는 감사하는 목소리로 주께 제사를 드리며 나의 서원을 주께 갚겠나이다 구원은 여호와께로서 말미암나이다 하니라, 여호와께서 그 물고기에게 명하시매 요나를 육지에 토하니라"
(1)갚지 않은 서원을 바로 잡으십시오.
우리 세대가 이행하지 않은 서원들과 약정들이 엄청나게 많다는 것을 생각해 볼 때 저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그것들을 갚기는 고사하고, 전부 기억이나 할 수 있을까 의심스럽습니다. 만일 우리가 서원이나 서약을 갚지 않고 있다면 얼마를 서약했는지 기억할 수 있고 지금 갚을 돈이 있다면 서약한 교회나 기관들에게 편지를 써서 알리고 약정한 것을 갚아야 합니다. 그러나 만일 갚을 돈이 없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 가운데 하나님 앞에 나아가 용서를 구하십시오. 그리고 나서 우리의 서약에 대하여 얼마를 갚을 수 있는지 알려 달라고 간구하십시오. 필요하다면 약속한 사람이나 기관에 우리가 작정한 것의 나머지를 면제해 달라고 요청하십시오. 이러한 노력이 시간 낭비가 아닙니다. 성경은 이행되지 않은 서약은 죄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이행되지 않은 서약이 우리의 열린 하늘 문에 끼친 부정적인 영향을 제거하기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합니다. 성경은 또한 교회의 사역자(주의 종)에게 이런 면에서 죄를 용서하는 권세가 있다고 말씀합니다. (요20:23)"너희가 뉘 죄든지 사하면 사하여질 것이요 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있으리라 하시니라" 용서를 구하는 일에 망설이지 마십시오. 우리가 약정했던 것들에 대하야 문제를 바로 잡도록 기꺼이 도와줄 것입니다. 진실한 사역기관이나 사역자(주의 종)들은 모두 우리의 돈을 원하기보다는 우리가 열린 하늘 문 아래에 있기를 더 원합니다.
제 사역에서의 간증입니다.
예배당을 건축하기 위하여 성도들이 건축헌금을 하기로 했습니다.(1990년도의 일) 어느 가난한 성도 부부가 일금 50만원을 건축헌금으로 약정했습니다. 예배당의 공사가 끝나고 헌당식까지 마치었지만 이 부부는 그 중의 일부인 10 몇 만원만 몇 번에 나누어서 바치고 그 이상은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고민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재정부장이신 장로님과 의논하였습니다. 그 가정에 구제비를 40만원 주어서 그 돈으로 약정된 나머지를 <약속했던 건축 헌금 바침> 이라고 명시하여 바치라고 했습니다. 그 부부 성도는 그렇게 했습니다. 이제 그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불이행한 서원이 해결되었던 것입니다!
갚지 않은 서원의 문제가 커 보일지 모르지만, 우리 하나님은 이보다 더 크십니다. 일들을 바로 잡으시고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서약하는 것을 그만두지 마십시오. 아니, 하나님께 서약하는 것을 강력히 제안합니다. 왜냐하면 서약 기도만큼 능력 있는 기도는 없으니까요. 그리고 우리가 약정한 것이 있다면 그것을 다 갚도록 하십시오. 더디게 마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우리의 삶에 있어 하늘 문을 열게 될 것입니다.
마25:24-25 불의한 청지기(16)
(마 25:24-25)"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와서 가로되 주여 당신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헤치지 않은 데서 모으는 줄을 내가 알았으므로, 두려워하여 나가서 당신의 달란트를 땅에 감추어 두었었나이다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
(마25:24-25현대어 성경)"이번에는 한 달란트를 받은 사람이 와서 말하였다. '주인님, 저는 주인님이 씨를 뿌리지도 않은 곳에서 거두어들이고 심지도 않은 데서 모아들이는 인색하고 매정한 분이신 줄을 잘 알고 있지요. 그래서 제가 이익을 남기더라도 빼앗아 갈 것이므로 돈을 다만 땅 속에 감추어 두었다가 그냥 가지고 왔습니다!'" 주인의 돈에 성실치 못했던 사람의 이야기는 일부 사람들이 얼마나 완전히 혼란 될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완전한 본보기입니다. 이 불의한 종은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르는 죄를 범하였습니다.
첫째로 그는 그의 주인이 그에게서 빼앗기를 원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둘째로 그가 벌게 될 돈은 그의 주인 것이 아니라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는 이 생각이 둘 다 모두 잘못된 것임을 알게 될 것입니다.
1. 우리는 모두 주님의 것입니다.
오늘날 이러한 두 가지 실수를 저지르는 그리스도인들은 그들의 삶에 하늘 문을 닫고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가 이 세상의 사람들 같이 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잊어버리기가 쉬운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값을 지불하고 사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속해 있습니다. (고전6:19-20)"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 우리는 하나님께서 정당하게 값 주고 산 하나님의 재산입니다. 우리의 생각 속에 이 개념을 넣는 것이 어려우면 어려울수록 그리스도인들은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우리가 구원받은 날로부터 우리 존재의 모든 것과 우리가 소유한 모든 것은 주님의 것이 됩니다. 이것은 우리의 벌어들이는 능력을 포함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진리를 알지 못한다 할지라도 성경은 이에 대하여 명백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돈을 버는 능력도 바로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오는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신8:17-18)"또 두렵건대 네가 마음에 이르기를 내 능과 내 손의 힘으로 내가 이 재물을 얻었다 할까 하노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이 구절들에서 우리는 재산을 획득하는 능력이 우리 자신에게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돈을 버는 우리의 능력이 그에게서 온다고 말씀하십니다. 성경은 계속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능력을 주어 얻게 한 재산에 대하여 요구할 권리가 있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언약을 이루기 위한 특별한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신8:18)"네 하나님 여호와를 기억하라 그가 네게 재물 얻을 능을 주셨음이라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오늘과 같이 이루려 하심이니라"
(1)우리는 결정해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그의 성실한 청지기가 될 수 있도록 우리에게 재산을 얻을 수 있는 능력을 주셨습니다. 우리는 이제 결정을 해야만 합니다. 우리가 번 돈이 우리의 것이 되어 우리의 살림을 꾸려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것이 되어 하나님의 마지막 때의 추수를 위해 사용될 것인가? 우리가 당황한 나머지 "나의 필요는 어떻게 되는가?" 또 "나의 돈이 언약을 이루는데 쓰일 것이라면 나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와 같은 질문을 시작하기 전에 이 말씀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고전9:7)"누가 자비량하고 병정을 다니겠느냐 누가 포도를 심고 그 실과를 먹지 않겠느냐 누가 양 떼를 기르고 그 양 떼의 젖을 먹지 않겠느냐" 바울 사도는 청지기는 자기가 일한 몫을 후하게 누릴 권리가 있다고 조심스레 강조하였습니다. (고전9:8-10)"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 하느냐, 모세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전혀 우리를 위하여 말씀하심이 아니냐 과연 우리를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밭가는 자는 소망을 가지고 갈며 곡식 떠는 자는 함께 얻을 소망을 가지고 떠는 것이라" 만일 우리가 충성된 종으로 일한다면 주님은 우리를 적절하게 돌보아 주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충성스런 종들이 받게 될 댓가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진리를 확고하게 확립하셨습니다. (마25:20-21)"다섯 달란트 받았던 자는 다섯 달란트를 더 가지고 와서 가로되 주여 내게 다섯 달란트를 주셨는데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 그 주인이 이르되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할지어다 하고" 하나님은 이 종의 청지기직의 질을 보시자 그의 삶의 양식을 향상시켜 주셨습니다. 오늘날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식으로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훌륭한 삶의 양식을 확립하여 복음으로 들어가려고 노력을 합니다.
이 방법은 좋은 것처럼 들리지만 성경적 본보기를 따른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자신의 소유를 가지고 복음을 뒷바라지하려고 하는 사람들을 찾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 대신에 주님은 주님의 자산의 관리자가 될 충성된 청지기를 만들어 가기를 원하십니다. 이 청지기들이 주님의 일을 더 잘 관리하면 할수록 주님이 그들에게 제공해 주실 삶의 질은 더 좋아질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잘못 짚은 성도들은 넉넉히 남은 것을 가지고 삶의 양식을 확립한 다음 복음을 뒷바라지하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나 지식이 있는 성도들은 주님께서 말씀하신 청지기직을 잘 알고 있습니다.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는 내가 너에게 관리하라고 준 적은 일에 충성하였구나. 이제 너의 청지기직의 질 때문에 너에게 많은 일을 맡김으로써 너의 삶의 양식을 향상시키려고 한다."
2.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구상의 모든 것을 창조하셨다는 사실을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들의 짐승들도 그의 것이고, 가축도 그의 것이고, 금도 그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시24:1)"땅과 거기 충만한 것과 세계와 그 중에 거하는 자가 다 여호와의 것이로다" (시50:10-12)"이는 삼림의 짐승들과 천 산의 생축이 다 내 것이며, 산의 새들도 나의 아는 것이며 들의 짐승도 내 것임이로다, 내가 가령 주려도 네게 이르지 않을 것은 세계와 거기 충만한 것이 내 것임이로다" (학2:8)"은도 내 것이요 금도 내 것이니라 만군의 여호와의 말이니라" 하나님은 세상과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그의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확실히 지식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 자신이 청지기일뿐 소유자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려야만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지배하는 약간의 소유에 일시적인 감독만을 하도록 하셨습니다. 이것을 생각할 때에 우리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창조물을 이렇게 많이 지배할 수 있게 하신 것은 우리 하나님의 넘치는 자비하심이라고 말해야 합니다. 다윗 왕은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을 철저하게 믿은 사람입니다. 그래서 그가 하나님께 드릴 때 그는 이미 하나님께 속한 것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다고 알았습니다. (대상29:14)"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관대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 분명히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소위 그들의 소유를 이런 식으로 보지 못합니다. 대체로 그들은 그들이 소유자이고 하나님이 그들의 돈을 취하려고 하신다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민일 우리가 청지기직에 대한 진리를 우리의 영 속에 새겨 넣을 수 있다면 하늘문이 계속 열려 있게 하는 것은 쉬울 것입니다. 우리가 소유자가 아니라 관리자라는 것을 완전히 이해할 때 즐겨 내는 자가 쉽게 되어질 수가 있습니다. (고후9:7현대어 성경)"얼마를 바쳐야 할 것인가는 각자가 스스로 결정할 일이므로 강요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즐거운 마음으로 바치는 사람을 사랑하십니다."
(1)하나님의 것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우리가 지배하고 있는 모든 것이 사실은 하나님께 속해 있다는 것을 이해를 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단지 관리자일 뿐입니다. 만일 우리가 이 사실을 깨닫는다면 우리는 이 비밀로부터 유익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은 이것입니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과 우리가 앞으로 갖게 될 모든 것을 하나님께 드리십시오. 우리는 단지 하나님의 것을 재분배할 뿐입니다.
(2) 이제 청지기직을 회복하십시오.
청지기직을 회복할 수 있었던 불의한 청지기에 대한 기사를 보겠습니다.
(눅16:1-2)"또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허비한다는 말이 그 주인에게 들린지라, 주인이 저를 불러 가로되 내가 네게 대하여 들은 이 말이 어찜이뇨 네 보던 일을 셈하라 청지기 사무를 계속하지 못하리라 하니" 이 청지기는 큰 문제에 빠졌습니다. 그의 하늘 문은 빨리 닫히고 있었습니다. 그는 그의 주인으로부터 더 이상 아무 이익도 받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그의 잘못은 명백했습니다. 주인의 소유를 허비했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와 똑같은 죄를 저지르고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서 마지막 때의 추수에 쓰기 위하여 그들에게 맡기신 돈을 취하여 그것을 자신을 위해 쓰고 있습니다. 그들의 잘못 때문에 그들의 삶에 하늘 문이 닫혀 버립니다. 그들은 그들의 추수 밭에 황충을 풀어놓았습니다. 만일 이 말씀이 우리 자신의 청지기직을 묘사한 것이라면,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말씀은 그 불의한 청지기가 어떻게 그의 청지기직을 지켰는지 또 어떻게 그의 하늘 문이 다시 열렸는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그의 주인의 일로 바빴습니다. 그는 그의 주인의 악성 부채를 수금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그의 주인의 돈을 빌려간 사람들에게로 가서 그들이 즉시 갚는다면 그들의 채무를 감해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그의 주인은 이처럼 열을 내어 수많은 악성 부채를 수금한 것을 보고 그 불의한 청지기가 지혜롭게 행하였으므로 그를 칭찬하였습니다. 불의한 청지기직이 우리의 삶에 하늘 문을 닫았다면 여기에 처방이 있습니다. 일어나서 십일조를 드리고 올바른 헌금을 드리기 시작하십시오. 우리가 하나님의 일에 관심이 있고, 하나님께서 우리의 청지기직을 회복시켜 주시기를 원하고 있다는 것을 하나님께 증명하십시오. 우리는 우리가 남용한 모든 것을 되돌려 줄 수 없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할 수 있는 대로 많이 드리기 시작하십시오. 누가복음의 불의한 청지기 같이 우리는 주님의 손실 중에 일부를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가 하나님 나라에 진지하다는 것을 보시면 확실히 하나님은 청지기직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하늘 문은 다시 활짝 열릴 것입니다.
고전11:29 몸을 분변하지 못하는 것(17)
(고전11:29)"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전통적인 해석들은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가장 단순한 진리들을 흐리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렇게 하는 한 가지 이유는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가 가르치는 영역과 설교하는 영역 사이에 균형을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확신합니다. 우리는 설교는 많이 듣지만 가르침은 너무 적게 듣는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이 말은 설교가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을 드립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르침이 더 많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설교와 가르침 사이의 주요한 차이 중의 하나는 설교가 대개 청중들의 감정적인 반응에 더 많이 관련되는 반면에, 가르침은 성경의 문맥에 관련된다는 것입니다.
1. 예수님은 두 몸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 대하여 가르침이 부족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해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현대의 많은 설교는 주로 우리 주 예수의 살과 피로 된 몸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주님이 우리의 영생을 위하여 지불하신 값을 올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의 육체적인 몸에 짊어지신 고통을 아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의 육체적인 몸에 대해서만 설교하는 것을 들을 때 그의 공동체(오늘날 지상에서 활동하는 그리스도의 몸)에 대한 시각을 잃어버리기가 쉽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을 가리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생각을 염두에 두고 이 성경 구절을 생각해 봅시다. (고전12:27)"...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거듭난 사람은 모두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골1:27)"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안에 계시기 때문에 우리도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시기 때문에 나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성경은 우리 각자가 개인적으로 그리스도의 몸이라는 개념을 뛰어 넘습니다. 우리는 개개 지체들을 한데 모아 집단적으로 한 거대한 몸, 즉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몸이 되는 것입니다. (고전12:12-14)"몸은 하나인데 많은 지체가 있고 몸의 지체가 많으나 한 몸임과 같이 그리스도도 그러하니라,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다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몸은 한 지체뿐 아니요 여럿이니"
(1)성찬식에서의 그리스도의 몸
그리스도인들이 성찬식을 할 때마다 그들의 삶에 하늘 문을 닫게 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들이 우리 주님의 몸을 분변하지 못할 경우 이렇게 됩니다.(고전11:23-30) "내가 너희에게 전한 것은 주께 받은 것이니 곧 주 예수께서 잡히시던 밤에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가라사대 이것은 너희를 위하는 내 몸이니 이것을 행하여 나를 기념하라 하시고, 식후에 또한 이와 같이 잔을 가지시고 가라사대 이 잔은 내 피로 세운 새 언약이니 이것을 행하여 마실 때마다 나를 기념하라 하셨으니, 너희가 이 떡을 먹으며 이 잔을 마실 때마 다 주의 죽으심을 오실 때까지 전하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누구든지 주의 떡이나 잔을 합당치 않게 먹고 마시는 자는 주의 몸과 피를 범하는 죄가 있느니라, 사람이 자기를 살피고 그 후에야 이 떡을 먹고 이 잔을 마실지니, 주의 몸을 분변치 못하고 먹고 마시는 자는 자기의 죄를 먹고 마시는 것이니라, 이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성경은 그리스도의 몸을 분변하지 못하는 것 때문에 교회에 큰 문제를 가져온다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이 약함, 질병, 죽음을 일으킨다고 말했습니다. 확실히 이 말들은 닫힌 하늘 문을 말합니다. 분변한다는 단어는 "어떤 것을 인정하고 그것에 올바른 자리를 주는 것"을 의미하는 헬라어 단어의 번역입니다. 여기에서 그 단어는 문자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을 우대해야 한다는 것을 의합니다. 처음에 언뜻 보면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예수님의 살과 피로 된 몸을 분변하는 것을 주로 이야기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주제를 더 깊이 연구한 후에는 이것이 그의 공동체인 교회를 말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우리는 바울이 고린도전서 10장에서 말한 것을 참작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그는 특별히 교회로서의 그리스도의 몸을 인식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성찬의 떡이고, 우리 모두는 교회인 그 한 떡 안에 참여한다는 것을 이해하는 것이 지혜롭다고 말했습니다. (고전10:15-17)"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우리가 축복하는 바 축복의 잔은 그리스도의 피에 참여함이 아니며 우리가 떼는 떡은 그리스도의 몸에 참여함이 아니냐, 떡이 하나요 많은 우리가 한 몸이니 이는 우리가 다 한 떡에 참여함이라" 성경의 몇 구절은 이 진리를 여실히 보여 주고 있습니다. (행9:4-5)"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 있어 가라사대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뉘시오니이까 가라사대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라" 우리 주님이 사울에게 말씀하신 것을 들어보십시오. 주님은 "사울아, 왜 네가 나를 핍박하느냐? 나는 네가 핍박하는 예수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울은 결코 예수님을 해한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교회를 핍박해 왔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사울이 교회를 핍박했을 때 그것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것이라 고 말씀하셨습니다. (마25:40)"임금이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예수님은 우리가 형제를 위하여 또는 형제에 반대하여 조처를 취하면 그것은 예수님을 위하여 또는 예수님에 반대하여 조처를 취한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성도들이 그의 몸이기 때문입니다.
2. 주님의 몸을 올바로 분변하십시오.
이제 잠시 멈추어 우리에게 가장 가까이 있는 성도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만일 우리가 혼자라면 신자의 사진을 보십시오. 만일 사진도 없다면 눈을 감고 우리가 알고 있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우리 마음에 떠오르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큰 소리로 말하십시오. "이 사람은(그 사람의 이름을 말하며)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입니다." 이렇게 새롭게 이해하면서 우리의 눈을 여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형제나 자매를 볼 때마다 강제라도 그를 새로운 눈으로 보도록 하십시오. 그를 더 이상 감리교도, 침례교도, 또는 어떤 교회의 한 성도로 보지 마십시오. 그를, 교회로, 그리스도의 몸으로 바라보십시오. 만일 우리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이 새로운 관점으로 보기 시작한다면 형제들에 대한 우리의 전 태도는 변하게 될 것입니다. 성찬에 대한 우리의 이해가 변할 것입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성도들을 대하는 방법이 변할 것입니다. 이 새로운 관점을 가지면 하늘 문은 열릴 것입니다. 정말로 약함, 질병, 그리고 너무 일찍 죽는 것까지도 더 이상 우리를 지배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 가장 중요한 주제에 대한 이 몇 마디가 하늘 문을 닫아버리고 하나님으로부터 받을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방해할 수도 있을 이 작은 여우를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열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딤전6:10 돈을 사랑하는 것(18)
(딤전6: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돈을 사랑하는 사람의 삶에는 작용과 반작용의 끊임없는 연쇄가 일어납니다. 그가 이런 작용을 알아챌 수 없을지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면 돈이 그의 삶을 완전히 지배할 것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그의 삶에 물질주의의 형태로 자주 그 모습을 나타낼 것입니다.
1. 물질주의
물질주의는 하나의 강력한 힘입니다. 사람들은 물질주의를 "20세기의 신"이라고 정확히 불렀습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루의 대부분을 물질적 소유물 추구에 씁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좋은 물건을 소유하는 것을 반대하신다고 생각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우리의 천부께서 우리의 물질적인 필요를 아신다고 친히 말씀하셨습니다. (마6:32)"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물질은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그의 뜻밖에 있지 않다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에 보면 분명 합니다. 물질주의와 관계된 문제는 제 위치를 벗어나 물질을 축적한다는 것입니다. 물질주의의 덫에 걸려 사는 사람들에게는 물질을 모으는 것이 그 밖의 다른 어떤 것보다 더 중요하게 여겨집니다. 결국에는 심지어 하나님 그분 자신보다도 더 중요하게 여깁니다. 예수님은 물질적인 소유들을 올바른 시각으로 보셨습니다. (마6:33)"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우리가 하나님을 맨 첫자리에 둘 때, 하나님은 우리가 형통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시35:27)"나의 의를 즐거워하는 자로 기꺼이 부르고 즐겁게 하시며 그 종의 형통을 기뻐하시는 여호와는 광대하시다 하는 말을 저희로 항상 하게 하소서" 그러나 만일 우리가 물질을 첫자리에 두고 산다면, 무엇이든 영적인 세계에서 형통해지기를 기대하지 마십시오.
(1)탐욕
오해하지 마십시오. 물질주의는 결코 문제의 근원이 아닙니다. 그것은 원인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간의 내부에서 일어나고 있는 훨씬 더 깊은 어떤 일의 결과입니다. 물질주의란 내면의 탐욕이 밖으로 드러난 것뿐입니다. 탐욕은 무서운 것입니다. 탐욕은 순전한 악입니다. 탐욕은 무엇으로도 만족시킬 수 없는 욕망을 갖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탐욕을 가지고 있으면 그를 어리석은 자로 낙인을 찍습니다. 탐욕은 죽어가는 억만장자가 겨우 1000원을 더 얻으려고 애쓸 때 그를 몰아가는 힘입니다. 그것은 부유한 농부로 하여금 곡간을 헐고 더 큰 창고를 짓게 만드는 동력입니다. (눅12:16-21)"또 비유로 저희에게 일러 가라사대 한 부자가 그 밭에 소출이 풍성하매, 심중에 생각하여 가로되 내가 곡식 쌓아 둘 곳이 없으니 어찌할꼬 하고, 또 가로되 내가 이렇게 하리라 내 곡간을 헐고 더 크게 짓고 내 모든 곡식과 물건을 거기 쌓아 두리라, 또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하리라 하되,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오늘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예비한 것이 뉘 것이 되겠느냐 하셨으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탐욕은 아합왕으로 무고한 이웃을 죽이게 하였습니다. (왕상21:1-6)"그 후에 이 일이 있으니라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이스르엘에 포도원이 있어 사마리아 왕 아합의 궁에서 가깝더니, 아합이 나봇에게 일러 가로되 네 포도원이 내 궁 곁에 가까이 있으니 내게 주어 나물밭을 삼게 하라 내가 그 대신에 그보다 더 아름다운 포도원을 네게 줄 것이요 만일 합의하면 그 값을 돈으로 네게 주리라, 나봇이 아합에게 말하되 내 열조의 유업을 왕에게 주기를 여호와께서 금하실지로다 하니, 이스르엘 사람 나봇이 아합에게 대답하여 이르기를 내 조상의 유업을 왕께 줄 수 없다 함을 인하여 아합이 근심하고 답답하여 궁으로 돌아와서 침상에 누워 얼굴을 돌이키고 식사를 아니하니, 그 아내 이세벨이 저에게 나아와 가로되 왕의 마음에 무엇을 근심하여 식사를 아니하나이까, 왕이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 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저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않겠노라 함을 인함이로라" 아합왕은 그가 이미 얻은 부로 만족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는 나봇이 소유한 땅을 얻지 못한다면 행복할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가 이 나머지 부분을 읽는다면 이세벨 왕비가 나봇에게 덫을 놓는 것을 보게 됩니다. 거짓 증거를 내세워 나봇을 처형하고 아합이 탐내었던 포도원을 차지하게 했습니다. (왕상21:6)"왕이 이르되 내가 이스르엘 사람 나봇에게 말하여 이르기를 네 포도원을 내게 주되 돈으로 바꾸거나 만일 네가 좋아하면 내가 그 대신에 포도원을 네게 주리라 한즉 저가 대답하기를 내가 내 포도원을 네게 주지 않겠노라 함을 인함이로라" 탐욕은 그것의 갈증을 만족시켜 줄 것이 없기 때문에 멈추어지지가 않습니다. 탐욕은 정말로 만족할 줄 모릅니다.
(2)우상숭배
이제 우리는 물질주의와 탐욕의 근본 원인으로 갑니다. 그것은 우상숭배입니다. 저는 물질의 숭배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을 숭배할 목적으로 모으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 사랑은 한 개인의 삶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대신할 수 있습니다. 사람의 근본적인 욕구가 더 이상 하나님을 경배하려는 소원이 아닐 때, 그는 재빨리 그리고 힘차게 자기 숭배로 방향을 바꿉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전적으로 하나님 그분께 촛점을 맞추지 않는 어떠한 경배도 반대한다고 분명히 말합니다. 십계명은 이 계명으로 시작하고 끝을 맺습니다. 첫 계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출20:3)"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이 계명이 자기 숭배를 반대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마지막 계명은 이렇게 말합니다. (출20:17)"네 이웃의 집을 탐내지 말지니라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그의 소나 그의 나귀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지니라" 이 계명 역시 자기 숭배를 반대합니다. 왜냐하면, 탐욕이란 물질을 경배의 형태로 자기 자신에게 바치려는 욕망이기 때문입니다.
2. 돈을 사랑함이 하늘 문을 닫게 합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힘이 셉니까! 디모데전서는 우리에게 돈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무서운 결과를 말해 줍니다. (딤전6:9)"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부하려 하는 자들이란 구절은 실제로 "부자가 되려고 결심한 자들"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부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갖는 것을 말합니다. 성경은 인생의 목적을 부의 축적에 두는 자들은 시험에 빠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런 후에 그들은 수많은 어리석은 욕망을 좇기 시작할 것입니다. 그들의 최종 결과는 영적인 파멸(지옥)뿐만 아니라 육체적인 파멸(멸망)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10절에서 바울은 계속하여 돈을 사랑함이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기를 찌르는..."원인이 된다고 말합니다. (딤전6:10)"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분명히 돈을 사랑하게 되는 사람은 실제적인 문제가 생깁니다. 그는 열린 하늘 문 아래서 살 수 없습니다.
(1)돈을 제 자리에 두십시오.
돈이 우리를 소유하지 않는 한, 돈을 소유하는 것은 잘못이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돈을 사랑하는 덫에 걸려 있다면 즉시 하나님께 우리의 죄를 고백하십시오. 우리의 돈의 일부를 주어 버리는 과감한 계획을 세워서 우리를 장악해 온 돈의 지배력을 깨뜨리시기 바랍니다. 삭개오는 친히 돈을 나누어줌으로써 돈을 사랑하는 마음을 교정하였으며, 그래서 예수님은 삭개오의 승리를 증거 해 주셨습니다. (눅19:8-9)"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뉘 것을 토색한 일이 있으면 사 배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우리는 나누어 줄 기회를 붙잡으십시오. 어떤 특정의 사업과 관계를 맺으십시오. 예를 들면 장애인 단체나 고아원이나 양로원이나 장학재단이나 등. 우리보다 불행한 가정을 찾고 그들의 재정적인 어려움을 덜어 주도록 하십시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행20:35)는 말씀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잠21:13 가난한 자들을 외면하는 것(19)
(잠21:13)"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만일 우리가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동정심을 갖고 경청하지 않는다면 결국에는 우리도 곤경에 처하게 될 것이 확실합니다. 본 구절이 얼마나 단호하게 이 점을 말하고 있는지 주목하십시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외면한다면 우리도 언젠가는 부르짖게 될 것인데, 그러나 우리의 부르짖음을 들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들을 듣지 않으면 우리의 하늘 문은 닫히고 맙니다.
1. 하나님께 빌려 드리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하나님과 이 세상의 가난한 자들과의 견고한 유대 간계를 깨닫지 못합니다. 성경은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을 동정하여 돈, 음식 또는 필수품을 주게 되면 그것은 하나님께 꾸어주는 것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친히 갚아 주겠다고 약속하시는 대출금입니다. (잠19:17)"가난한 자를 불쌍히 여기는 것은 여호와께 꾸이는 것이니 그 선행을 갚아 주시리라" 가난한 자가 우리에게 손을 벌릴 때 이 성경 구절을 기억하는 것은 아주 현명한 일입니다. 우리가 실제로 보고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내미신 손입니다. 만일 우리가 그 벌린 손을 무시한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신 것입니다. 가난한 사람들과 우리의 관계는 그리스도인의 정상적인 성장에 너무도 중요하기에 하나님은 우리가 늘 그들과 함께 있을 것이라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막14:7)"가난한 자들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니..."
(1)왜 우리가 가난한 삶들을 돌보아야 합니까?
예수님은 자신의 사역 가운데 많은 부분을 가난한 자들에게 할애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그의 기름 부으심을 묘사하실 때 가난한 자들을 포함시켰습니다. (눅4:18)"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난한 자들을 돌보도록 요구하신 이유를 주목합시다. (사51:1)"의를 좇으며 여호와를 찾아 구하는 너희는 나를 들을지어다 너희를 떠낸 반석과 너희를 파낸 우묵한 구덩이를 생각하여 보라" 이사야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전에 우리가 처해 있었던 도덕적, 영적 빈곤의 비참한 상태를 기억하도록 가르치셨습니다. 우리가 최악의 빈곤 상태에 있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의로운 심판의 법정에서 파산 선고를 받았습니다. 우리가 곤궁한 상태에서 부르짖었을 때 하나님은 관대하게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그와 똑같은 이유에서 가난한 자들은 항상 우리와 함께 있습니다. 그들이 있는 것은 우리가 궁핍으로 가장 암울했던 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그분의 최상의 것을 아낌없이 주셨다는 것을 기억나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분은 우리에게 그의 독생자를 주셨던 것입니다. 우리가 영적으로 가난하던 시절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아낌없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다른 사람들이 궁핍에 처해 있을 때 기꺼이 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2)"복 받으세요" 인사치레 그 이상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가난한 자들에 대해서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들에게 복받으세요"라고 정성 어린 축복의 인사말보다 더 많은 것을 그의 자녀들에게서 기대하십니다. 우리가 가난한 자들의 문제를 해결하도록 개인적으로 동참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기도하는 것으로 그들을 간단히 지나쳐 버릴 수 없습니다. 사도 야고보가 이 주제에 관하여 말한 것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약2:14-17현대어 성경)"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여러분이 믿음이 깊은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면서 남 돕는 일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한다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그런 신앙으로는 아무도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친구 한 사람이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는 빈털터리가 되었다고 합시다. 그런 사람에게 여러분이 '참 안됐구려. 따뜻하게 지내고 배불리 먹으시오' 하는 말만하고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는다면 그따위 신앙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이것으로 알 수 있듯이 믿음을 가지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믿음을 선한 행실로 증명해 보이십시오. 증명해 내지 못하는 믿음은 믿음이 아닙니다. 그런 믿음은 아무 짝에도 소용없는 죽은 것입니다." 야고보는 참된 믿음이란 선행을 함으로써 꾸준히 입증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야고보가 예시한 선행이란 공공 화장실에 복음 전도지를 남겨 두거나 교회의 청소부서에서 봉사하는 것이 아니었다는 것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그는 배고픈 자를 먹이고 헐벗은 자를 입히는 것을 믿음의 확증으로 선택하였습니다. 여러분, 오해하지 마십시오. 제가 복음 전파와 교회 봉사가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저는 가난한 자들에 대한 동정심은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겉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가난한 자들을 소홀히 여겨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에 대한 그분의 감정을 야고보서 2 장 서두에 명백하게 표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부자들을 대하는 방식과 조금이라도 다르게 가난한 자들을 대하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약2:1-4현대어 성경)"사랑하는 형제들이여, 만일 여러분이 부자는 친절하게 대하고 가난한 사람은 얕잡아 본다면 어떻게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가령 여러분의 교회에 값비싼 옷을 두르고 손에 값진 금반지를 낀 사람과 남루한 옷을 입을 가난한 사람이 나란히 들어왔다고 합시다. 그때 여러분이 부자에게는 야단스럽게 떠받들어 교회의 특별석에 앉히고, 가난 한 사람에게는 '당신은 거기 서 있든지 마룻바닥에 앉든지 하시오'하고 말한다면, 결국 여러분은 나쁜 동기에 이끌려 재물로 사람을 판단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야고보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가난한 배경의 출신이라고 계속하여 지적하였습니다. 더 나아가서 야고보는 교회가 겪는 많은 핍박은 부자들로부터 오는 것이라고 지적하였습니다. 그가 가난이 부요보다 더 낫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주목하십시오. 그는 다만 부유층에서 구원받는 사람보다는 가난한 계층에서 구원받는 사람이 더 많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을 뿐입니다.
2. 가난한 자들을 축복하십시오.
가난한 자들에게 동정심을 갖는 것이 지혜롭습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자들을 생각해 주는 사람들에게 특별한 약속을 하십니다. (시41:1-2)"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재앙의 날에 여호와께서 저를 건지시리로다, 여호와께서 저를 보호하사 살게 하시리니 저가 세상에서 복을 받을 것이라 주여 저를 그 원수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하나님은 두 가지 방식 중 하나로 가난한 자들에 대한 우리의 행동을 주목하십니다. 우리의 행동은 하나님께 대한 개인적인 모욕, 혹은 하나님께 대한 존경, 이 둘 중에 어느 하나일 것입니다. (잠14:31확대번역 성경)"가난한 사람을 압제하는 자는 그를 지으신 이를 나무라고, 조롱하고, 모욕하는 자요,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고 친절히 하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입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의 말씀은 명확합니다. 가난한 자들에게 베푼 우리의 자비 행위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 그분 자신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마25:31-36현대어 성경)"인자가 영광에 싸여 모든 천사를 거느리고 와서 영광스러운 보좌에 앉을 때에, 모든 민족이 불려 나와 인자 앞에 모일 것이다. 그때 내가 마치 목자가 양과 염소를 갈라놓듯이 사람들을 갈라서, 양은 오른 편에, 염소는 왼편에 둘 것이다. 그리고 왕인 나는 내 오른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할 것이다.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사람들아, 와서 천지창조 때부터 너희를 위하여 준비한 이 나라에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내가 나그네 되었을 때에 너희 집으로 따뜻하게 맞아들였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고, 병들었을 때와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와 주었다." 성경의 이 대목은 우리가 존귀하신 주 예수님께 음식, 의복, 거처 그리고 선행을 베풀 수 있는 훌륭한 방법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기회가 닿는 대로 단순히 가난한 사람들에게 귀를 기울이고, 먹이고 입힘으로써 날마다 그것을 성취할 수 있습니다. 만일 마태복음 25:31-36의 말씀이 그 주제에 관하여 주님이 말씀하신 내용의 전부라면 그것은 가난한 자들을 축복해야 할 충분한 이유가 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가난한 자들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고도 자기들의 귀를 막아 버리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지옥이 기다리고 있다고 계속하여 말씀하셨습니다. (마25:41-46현대어 성경)"그리고 나는 왼편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할 것이다. '너희 저주받은 자들아, 내게서 물러가 마귀와 그 부하들을 가두려고 준비한 영원한 불 속으로 들어가라. 너희는 내가 배고플 때에 먹을 것을 주지 않았고, 목마를 때에 마실 것을 주지 않았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들이지 않았다. 또 헐벗었을 때에 입을 것을 주지 않았고 병들었을 때나 감옥에 갇혔을 때에도 찾아와 주지 않았다.' 그러면 그들도 대답할 것이다. '주님, 주님이 언제 배고프고 목마르셨으며, 나그네 되고 헐벗으셨으며, 병들고 감옥에 갇히셨던 일이 있었기에 저희가 보고도 돌보아 드리지 않았다 하십니까?' 그때 왕이 말할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말한다. 여기 있는 내 형제 중에 가장 보잘 것 없는 사람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영원히 벌받을 곳으로 쫓겨날 것이고 바르게 산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으로 들어갈 것이다."
(1)가난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귀를 여십시오.
가난한 사람들에게 우리의 귀를 열어 놓는 것이 좋습니다. 배고픈 자들을 먹이고 헐벗은 자들을 입히고 비천하고 소외된 자들을 도와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런 종류의 활동을 매우 기쁘게 여기신다고 하나님의 말씀은 확실하게 보증해 줍니다. 만일 우리가 가난한 사람들에게 등을 돌린다면 우리 인생의 하늘 문은 닫혀 버린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잠21:13)"귀를 막아 가난한 자의 부르짖는 소리를 듣지 아니하면 자기의 부르짖을 때에도 들을 자가 없으리라" 만일 우리가 가난한 자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알 수 없다면 우리의 목사님께 여쭈어보십시오. 무슨 일이든 해보시되 즉시 실천하셔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늘 문은 가난한 자들을 돕지 않는 성도들에게 닫혀지기 때문입니다.
시66:18 숨겨진 죄(20)
(시66:18)"내가 내 마음에 죄악을 품으면 주께서 듣지 아니하시리라"
본문에 나오는 "죄악"이라는 단어는 정의하기가 매우 광범위합니다.
그러나 그 단어를 오래도록 조사하면 할수록 그 구절이 완벽하다는 것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죄악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람이 혹시 갖고 있을지도 모르는 모든 숨겨진 죄를 망라합니다.
1. 죄의 정의에는 차이가 있습니다.
가령 제가 죄악 목록표를 작성했다고 합시다.
그러나 다른 사람이 이 표를 보면서 어떤 것은 죄악이 아니라고 생각할 것도 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죄악을 생각할 때 하나님께서 그 악행을 죄로 여기지 않으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개인의 삶 속에 감춰진 죄가 타인에게는 유혹조차도 안될 수 있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한 사람을 끈질기게 괴롭히는 죄가 타인에게는 문제거리 조차 되지 않을 수가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교회가 자신들의 죄악을 제거하고 승리의 경주를 하도록 격려하면서 이 차이점을 분명하게 나타내 주었습니다. 이 문제를 말하면서, 기자는 가능한 모든 죄를 체계적으로 나열하는 것으로 시작하지 않았습니다. 기자가 그렇게 하려고 노력했다면, 틀림없이 그는 어떤 죄를 빠뜨리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런 목록을 보고 어떤 성도는 자신에게 많은 죄악이 있음을 발견했을지도 모릅니다. 또 다른 성도는 그 죄 목록에서 자신에게 해당되는 어떤 죄도 발견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기자는 모든 죄를 기록하려고 하기보다는 현명하게도 우리가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히12:1) 그렇게 말함으로써 기자는 얽매이게 하는 죄를 밝혀야 할 책임을 기자 자신에게서 죄인의 양심에로 전가하였습니다. 시편 기자는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으로 죄악을 중요시한다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을 때 이와 똑같이 하였습니다. 좀더 설명하겠습니다. 만일 제가 저의 교파의 틀 안에서 쉽게 우리가 죄라고 분류한 것들을 4-5페이지에 걸쳐 나열할 수가 있습니다. 아마 저는 우리 속에 감춰진 몇 가지 죄들을 밝혀내도록 할 수도 있습니다. 한편으로 저는 우리가 반드시 "죄"라고 하지 않을 몇몇 행동들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 간에 일치하지 않는 문제 중 완벽한 본보기는 흡연에 관한 것입니다. 의심할 여지없이 흡연은 많은 목록들에서 죄라고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흡연을 죄라고 말하지 않을 것입니다. 예를 들자면 어느 교파에서는 목사도 장로도 집사도 기타 등 흡연과 음주도 허용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그런 교회 대부분의 사람들이 흡연가일 수 있습니다. 그런 특별한 공동체에서는 흡연이나 음주를 죄로 여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저는 흡연이 죄라는 것을 믿습니다. (롬14:23)"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현대인의 성경으로부터 같은 구절을 들어봅시다. (롬14:23 현대인의 성경)"자기가 하는 일이 다소라도 남에게 해가 되거든 그 일을 하지 마십시오. 이미 그 일이 나쁜 줄 알면서도 계속하는 것은 죄를 저지르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에서 벗어난 일이라고 느끼면서 하는 일은 무엇이나 죄가 됩니다." 이번에는 확대번역 성경으로 보십시다. (롬14:23 확대번역 성경)"그러나 먹는 데 의심(걱정, 그리고 불안한 양심)하고, 그런 후에[아마도 당신 때문에] 먹는 사람은 정죄를[하나님 앞에]받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 사람의 뉘우침은 진실하지 않으며 또 그는 믿음으로 행동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이는 믿음으로 말미암지 않는 것은 무엇이든지 죄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승인하셨다는 확신이 없이 행하여지는 것은 무엇이나 죄악입니다]" 특별히 뽑은 이 성경 말씀이 길긴 하지만 대단히 강력합니다.
(엡4:17-6:18현대어 성경)“이제 나는 주님의 이름으로 여러분에게 말합니다. 더 이상 구원받지 못할 자들이 사는 방식대로 살지 마십시오. 그들은 분별력을 잃어버리고 혼란에 빠져 있습니다. 그들은 마음을 닫고 깜깜한 어둠에 갇혀 지냅니다. 하나님을 향해 마음을 닫아 버렸기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에서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길을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선과 악도 구별하지 못하고 자신을 불결한 생활 속에 내맡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악한 생각과 무분별한 욕망에 이끌려 그런 생활을 멈추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여러분에게 그렇게 살라고 가르쳐 주시지 않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참으로 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그리스도에 대한 진리를 배우고자 한다면,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사람을 뽑아 던지십시오. 여러분의 그 낡고 악한 옛 사람이야말로 육욕과 속임수로 가득 차서 속속들이 다 썩어 버린 지난날 여러분의 자화상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태도와 생각을 새롭게 바꾸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전혀 다른 새사람, 거룩하고 선한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새사람이 되십시오. 거짓말을 하지 말고 진실만을 말하십시오. 한 몸의 지체인 우리가 서로 거짓말을 하면 우리 자신에게 상처를 입히는 셈입니다. 혹시 분한 일을 당하더라도 원한을 품어서 죄를 짓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해가 지기 전에는 다 잊어버리고 냉정을 되찾으십시오. 여러분이 화를 내면 악마에게 발붙일 기회를 주기 쉽습니다. 만일 도둑질로 살아온 사람이 있거든 당장에 그 일에서 손을 떼고 그 손으로 정직한 일을 해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십시오. 악담을 하지 말고 상대방에게 유익하고 도움이 되고 복이 되는 말만을 하십시오. 성령을 슬프게 하지 마십시오. 성령께서는 구원이 완성되는 날 여러분에게 구원의 보증을 인쳐 주실 분이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심술궂고 불쾌한 태도와 성내는 버릇과 싸움과 가시 돋친 말과 남을 멸시하는 태도를 버리고, 친절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사람들이라는 이유만으로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용서한 것같이 여러분도 서로 용서하십시오. 사랑받는 아이가 그의 아버지를 닮는 것같이 여러분도 모든 일에 하나님을 닮은 사람이 되십시오. 여러분을 사랑하신 나머지 여러분의 죄를 없애려고 자신을 향기로운 희생 제물로 하나님께 바치신 그리스도를 본받아 다른 사람을 한마음으로 사랑하십시오. 성적 범죄나 불결한 행동이나 탐욕 때문에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거나 남을 비난하지 마십시오. 여러분에게 어울리지 않는 추잡하고 난잡한 말이나 저속한 농담을 입에 담기보다는 하나님이 얼마나 선한 분인지를 서로 이야기하고 감사를 드리십시오.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하나님의 나라에는 불결하거나 탐욕스런 사람은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을 것입니다. 탐욕스런 사람은 우상 숭배자이므로 하나님보다도 이 세상의 것을 더 사랑하고 숭배하고 있습니다. 이런 죄를 짓고도 그것이 옳다고 변명하는 자들에게 속아넘어가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무서운 진노가 이런 자들에게 내릴 것입니다. 이들과는 상종도 하지 마십시오. 과거에는 여러분의 마음이 어둠에 싸여 있었으나 지금은 주께서 주시는 빛으로 가득 차 있으니 생활로 그것을 증명해 보여야 합니다. 이 빛을 간직한 여러분은 선한 일과 옳은 일과 진실한 일만을 하십시오. 여러분이 과연 어떤 생활을 해야 주님이 기뻐하실지를 생각해 보십시오. 악과 어둠의 무가치한 쾌락에 몸을 맡길 수 있겠습니까? 그럴 수 없습니다. 오히려 그런 일을 폭로하십시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이 어둠 속에서 행하는 쾌락은 입에 담기에도 부끄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그것들을 폭로할 때 빛이 그 정체를 밝혀 줄 것입니다. 그러면 스스로 잘못을 깨우쳐 그 중의 몇 사람은 빛의 자녀가 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성경에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온아, 어서 깨어나 힘을 내어라!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아! 지극히 화려한 네 예복을 다시 입어라!' 그러므로 여러분은 자신의 행실에 늘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지금은 악한 시대입니다. 그러니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현명한 자가 되십시오. 모든 기회를 충분히 살려서 선한 행동을 하십시오. 분별없이 행동하지 말고 주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을 실천하십시오. 술에 취해 살지 마십시오. 그 길에는 많은 악이 숨어 있습니다. 그보다 성령에 취하여 성령의 지배를 받으십시오. 시편과 찬송가를 암송하고 거룩한 노래를 부르십시오. 마음속에서 우러난 노래를 불러 주님을 찬양하십시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십시오. 서로 순종하면서 그리스도를 높이십시오. 아내 된 사람은 주께 순종하듯이 남편에게 순종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분의 몸인 교회를 책임지시듯이 남편도 자기 아내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교회를 돌보고 또 교회의 머리가 되려고 목숨까지 버리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내 된 사람은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 어떤 일에나 기쁜 마음으로 남편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또 남편 된 사람은 그리스도께서 목숨을 버리면서까지 교회를 사랑하신 것처럼 자기 아내를 사랑하십시오. 그리스도께서는 세례와 하나님의 말씀으로 교회를 씻어 거룩하고 정결케 하시려고 목숨까지도 버리셨습니다. 한 점의 티나 주름도 없고 어떠한 상처도 없는 거룩하고 흠 없는 영광스러운 교회로서 맞아들이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이것이야말로 남편이 아내에게 취할 태도입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의 지체처럼 사랑하십시오. 남편과 아내는 이제 한 몸이 되었기 때문에 남편이 아내를 사랑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자기 몸을 미워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몸을 더 사랑하고 돌보아줍니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몸인 교회를 돌보아 주시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몸에 딸려 있는 각 지체입니다. 남편과 아내가 한 몸이라는 것은 성경도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부모를 떠나 자기 아내와 결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룬다'라고 한 말씀이 바로 그것입니다. 여기에는 깊은 뜻이 담겨 있어 쉽게 이해하기 어렵지만 우리가 그리스도의 몸에 딸려 있는 각 지체라는 것을 뜻하는 데는 좋은 예입니다. 한번 더 당부합니다. 남편은 아내를 자기 몸의 한 부분처럼 사랑하십시오. 그리고 아내는 남편에게 순종하고 진심으로 받들어 깊이 존경하십시오. 자녀들은 부모에게 순종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자녀를 감독 할 권리를 부모에게 주셨으므로 자녀들은 마땅히 부모에게 순종해야 합니다. '네 부모를 공경하라.' 이것이 십계명 중에서 약속이 붙어 있는 첫째 계명입니다. 그 약속이란 '네 부모를 공경하면 너는 복을 받고 오래 살리라'는 것입니다. 부모들에게도 한마디 당부하겠습니다. 자녀들을 너무 꾸짖지 마십시오. 또 잔소리를 늘어놓아 반항심을 일으키거나 분노를 품게 하지 마십시오. 그보다는 주님의 사랑이 담긴 훈계와 조언과 충고로 키우십시오. 종들은 주인에게 복종하고 섬기는 일에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섬기듯 자기의 주인에게 봉사하십시오. 주인이 볼 때는 열심히 일 하는 척 하다가 뒷전에 가서는 딴 짓을 해서야 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마음을 다해서 행하고 그리스도를 위해 일하는 것과 똑같이 언제나 기쁜 마음으로 주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십시오. 여러분이 종의 신분이든 자유인이든 간에 선한 일을 하면 일일이 주께서 갚아 주신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주인들도 지금 내가 종들에게 권면 한 것과 같은 태도를 가지십시오. 종들을 윽박지르지만 말고 정당하게 대하십시오. 여러분 자신도 그리스도의 종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여러분의 주님은 그들에게도 주님이 되십니다. 주께서는 사람을 차별하시지 않습니다. 끝으로 내가 여러분에게 깨우쳐 드리고 싶은 것은 여러분 속에서 역사 하시는 주님의 능력으로 강한 사람이 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 사단의 어떤 속임수나 올무에도 대항할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기로 무장을 하십시오. 우리가 싸워야 할 적들은 살과 피를 가진 인간이 아니라 육체가 없는 자 들입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눈에는 보이지 않는 세상의 악한 지배자들과 강력한 존재와 이 세상을 지배하는 어둠의 왕들과 영적 세계에 있는 무수한 악령들입니다. 그러므로 언제 적이 공격해 오든지 맞서 싸울 수 있도록 하나님의 무기를 다 사용하십시오. 그렇게 하면 전쟁이 끝난 후에도 여러분은 굳게 서 있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은 진리의 허리띠를 띠고 하나님이 인정하신다는 흉패를 가슴에 붙여야 합니다. 평화의 복음을 전하기 위해 빨리 달릴 수 있는 신을 신어야 합니다. 어떤 싸움에서든 악한 세력이 쏘는 불화살을 막아 꺼버릴 수 있는 믿음의 방패를 들고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구원의 투구를 쓰고 하나님의 말씀인 성령의 칼을 손에 쥐고 있어야 합니다. 여러분은 또한 항상 기도하십시오. 무슨 일에나 성령께서 원하시는 선 안에서 하나님께 간구하십시오. 여러분이 필요한 것을 계속해서 아뢰십시오. 각지에 흩어져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열심으로 기도하십시오."
2. 숨겨진 죄를 제거하는 방법
저는 지금까지의 특별한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해서 우리의 마음속에 숨겨 놓았을지도 모르는 어떤 죄를 드러냈다고 믿습니다. 그렇다고 하면 재빨리 하나님께 그 죄를 고백하고 회개하십시오. 또한 우리가 하나님의 열린 하늘 문 아래서 살고자 한다면 그 죄를 버려야 합니다. (잠28:13)"자기의 죄를 숨기는 자는 형통치 못하나 죄를 자복하고 버리는 자는 불쌍히 여김을 받으리라" 우리의 죄를 고백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 죄악들을 고백하자마자 우리를 붙들고 있는 죄악의 세력은 힘을 잃고 맙니다. 예수님이 흘리신 보혈은 문자 그대로 그 죄악들을 지워버립니다. (행3:19)"그러므로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 함을 받으라 이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의 마음속에 죄를 숨겨 놓았다면 하나님은 우리의 기도를 듣지 않으신다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그러나 우리가 죄악을 인정하고, 고백하고, 회개하고, 버린다면 죄는 그 권능을 잃게 되며 우리 위로 하늘 문이 열릴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