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남순 시인의 시집 『이녁이란 말 참 좋지요』
책 소개
우회 화법과 반어의 묘미
200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남순 시인의 네 번째 시집 『이녁이란 말 참 좋지요』가 시인동네 시인선 229로 출간되었다. 이 시집에서 이남순 시인은 재난의 시기를 거쳐 왔다는 말만으로는 다 표현하지 못할 내면의 고투를 글로 간추려 낸다. 친밀한 상대를 지칭하는 ‘이녁’에 담긴 훈기가 전해오는 이 시집은 우리에게 어느 날 그 정감을 잃어버린 이의 마음에 공감케 한다. 재난 통과 후 사후적으로 그것을 말한다는 점에서는 아픔과 고통을 다독이는 기록물이며, 그럼에도 여전히 미완료형 서사로서 지금 이곳 삶의 현장을 반영하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남순 시인은 늘 깨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집으로 인해 이남순의 시가 시단에서 제대로 평가받는 계기가 될 것이라 믿는다.
시인의 말
비 오자 깨닫는다.
구두 밑창 새는 것을
궂은 길 비탈진 곳
나 대신 건넌 사람
찔레꽃 대신
안부 전한다.
2024년 4월
이남순
약력
이남순 시인
경남 함안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8년 《경남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시집으로 『민들레 편지』 『그곳에
다녀왔다』 『봄은 평등한가』가 있다. 〈이영도
시조문학상〉 신인상, 〈박종화문학상〉,
〈여성시조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긍휼히 여기소서
북한산 살구나무에
넥타이를 왜 걸었나
시큼하고 떨떠름한 유서 몇 자 던져놓고
미투가 무슨 과시라고 너나없이 불사하나
시늉할 걸 해야지
빛 좋은 여권운동
서울판 그린 뉴딜, 개꿈으로 흘러가니
아마도 올해 농사는 개살구 천지렷다!
봄눈 백서
구의역에 빼곡하다 핑크빛 포스트잇
추모장 다 적시는 천천히 먹으란 말
뚜껑을 열어주는 손, 컵라면이 풀어지네
너희는 구름 속에 빛 모르고 살았다지
오늘 역시 볕 숨은 날 추적추적 찾아와서
발전소 조형물 아래 털목도리 둘러주네
밥 한술 넘기는 일 허투루 짚으셨네
얼마나 더 보내야만 돌아볼 수 있으려나
시대를 피하지 못한 천형의 휘핑보이
플랫폼
로고 새긴 유니폼을 등에 진 그날부터
턱에 찬 숨 뱉으며 가쁜 시간 달렸으리
다람쥐
쳇바퀴 돌듯
밥줄 좇던 김원종 씨
끄무레한 새벽녘 봉두난발 눈 비비며
“어제보다 더 늦으니 먼저 주무세요”
그 말이
마지막일 줄
몰랐다는 아버지
미필적 고의였나, 도미노 현상인가
덮친 박스 껴안으며 막숨을 몰았을 때
눈앞에
무얼 봤을까
무슨 말을 했을까
꽃 두른 영정사진 이제야 편히 쉬나
아비는 자식 빈소 망연자실 지키는데
회사는
깜깜무소식
캄캄한 시월 대낮
뿌리는 아십니까
폭격의 회오리에 피할 겨를 전혀 없이
정류장이 무너졌다
아들이 쓰러졌다
자식이 쏟은 피 앞에 무릎 꿇는 아버지
하르키우 곳곳에는 수지포가 널렸는데
얼마나 더 죽어야
너, 멈출 수 있겠느냐
점령한 모반의 땅에 무슨 씨를 심겠다고
발아래 공손히
한쪽 발 삐죽하니
이불 밖에 나와 있다
덮어주는 손안으로
뒤꿈치가 잡힌다
현무암 돌계단처럼
불퉁하게
굳었다
등에 지던 짐만큼이나 겹겹이 쌓였겠지
뒤틀린 발가락만큼 온몸을 굽혔겠지
그렇게 사는 동안에 종양도 커졌겠지
퉁퉁 부은 발등 보니
울음 참는 목젖 같다
저 혼자 쌓은 시간
오늘에야 들켰구나
조였던 작업화 풀고
수술대에 누운 발
해설
시에서 흔히 죽음을 다루는 것은 삶을 사유하려는 방편이다. 죽음을 상정하지 않고서는 삶을 실감하지 못하고, 과거를 통하지 않고서는 현재의 의미를 알 수 없다. 이는 우리가 현재를 사는 존재자이며 과거도 미래도 현재라는 기반을 통해서만 가능한 시간 개념이라는 의미다. 이남순 시에는 사고·전쟁·재난·병치레를 겪는 인물이 빈번히 등장하고, 여기에 죽음 사건이 끼어들면서 살아남은 자의 정념이 어디서 발생하는지 여실히 보여준다. 삶과 죽음은 얽혀 있고 이러한 얽힘 속에서 떠난 자와 남은 자의 자리가 확인된다. 죽음이 만연한 사회를 향하여 건강성을 묻지 못하는 것처럼 살아남은 자에게도 쉽사리 행복을 주문하지는 못한다. 시인이 그 죽음의 내면에 천착하는 바를 간과하지 않을 때 우리는 숱한 죽음들에 도사린 현실이 얼마나 막막한 것인지 짐작할 수 있다.
시집의 앞머리에 놓인 이 시는 두 살 터울의 형제가 불길에 휩싸이자 형이 방패 역할을 하지만 동생을 구할 수 없었다는 내용이다. 부모가 모두 일터로 나갔거나 결손 가정에서 주식을 대체한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려고 화기를 다루다가 화재가 발생한 것으로 보인다. 이 시를 필두로 시인은 대사회적 발언을 이어가면서 죽음을 강력한 시대적 병증으로 진단한다. 죽음을 질병보다 깊은 위험으로 자각하는 시인에게 미투 해시태그의 여파는 여권운동의 표면에 머물지 않고 이면으로 잠입해 들어가 어떤 죽음의 이유를 짚어보는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긍휼히 여기소서」). 삶의 조건이 위험한 일들로 점철되는 사회에서 관계성이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위험한 것일 수밖에 없고, 타자에게로의 지향조차 유해한 것으로 의심받는 상황으로 이어진다.
지하철 스크린도어 정비업체 직원의 사망사고를 다룬 시(「봄눈 백서」)에서 보여주듯이 그에게 맡겨진 과업은 모두의 안전을 위해 위험을 불사하는 것이다. 채 스무 살이 되지 않은 노동자가 품었을 희망은 결코 죽음이나 불행이 잠식할 수 없는 것임에도 위험한 사회의 안전장치는 전방위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안전이 불명의 타자가 불안전을 통과한 뒤에 주어진다는 점은 또 다른 노동자의 삶에서도 여실히 입증된다. 이런 점은 안전이 담보되지 않는 노동 현실에도 불구하고 온몸으로 투신하는 노동자를 돌아보게 한다. 그를 영웅시하는 것을 넘어 불안전한 환경 속에서도 모두의 안녕과 안전을 위해 위험에 처한 이들을 기리는 데서 이남순 시인의 모럴이 드러난다. 이때 모럴은 개인 차원의 윤리에 머물지 않는 대사회적 태도를 뜻하며 이어지는 시편에서도 이 같은 시인의 태도는 보여주기식 나열에 머물지 않는 확산성을 지닌다. 20년 차 플랫폼 노동자의 과로사, 텔레비전과 짝이 된 58세 ‘돌싱’의 고독사, 로드킬 당한 동물과 다름없는 고압선 노동자, 대공습으로 죽은 우크라이나의 무고한 시민들, 일일 노동자인 물류창고 화재 사망자. 이들이 처한 현실은 위험성을 기준으로 보면 평범을 상회하지만 하위 계층이 떠맡아야 할 위험이라는 점에서 사회적 성찰을 요구하는 문제다. 사람답게 살고자 하는 열망을 이뤄내기 어려운 위험사회를 향해 이들 각자가 지닌 최종 조건인 온몸으로 항거하는 방식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 김효숙(문학평론가)
추천사
인간에게 애별리고(愛別離苦)의 상처는 자신의 죽음보다 더 큰 슬픔일지도 모른다. 남은 사람은 사랑했던 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슬픔을 견디며 긴 시간을 버텨내야 하기 때문이다. 부부의 인연이 더욱 큰 별리로 남는 이유는 서로 살을 나누고 자식을 낳아 기른 각별한 인연이어서 그렇다. “현무암 돌계단처럼 불퉁하게 굳”은 발을 보며 그이가 “등에 지던 짐만큼이나” 힘들었던 과거를 곱씹는 일이며 “손 한 번 잡아주는 그 쉬운 걸 놓쳤다”는 애원도 “아직도 건네지 못한 속말 아직 남았는데”라고 읊조리는 회한도 당사자가 아니면 어찌 가늠이나 할 수 있겠는가. 밥상을 차리다가도 “이 저녁 놀빛을 타고 드시러 오시려나” 창밖에 눈길을 주고 초저녁별만 보아도 “애근하게 손 놓고 간 당신인가 했습니다”라고 되뇌게 되는 것이리라. 혼자 남은 “나 역시 잠들지 못하고 사막을 건너가”야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큰 형벌일 수도 있지만 “때때로 이슬 사리 온몸에 맺어놓고 줄기가 비틀어지도록” 익어가는 「늙은 호박」처럼 인생은 그렇게 길고 긴 시간과의 어울림이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아픔도 빛이 바래 고운 명주(明紬)같이 아롱거리며 들창가에 바람처럼 아련해질 것이니 그때는 “사늑히 안고 우는 범종을 닮”은 호박은 얼마나 더 다정할 것인가. 그러나 당장 무너진 벽을 안고 마냥 슬프기만 한 이별은 사람의 일이라 어떤 간절한 위무로도 감당하기 어려운 범사려니 참 좋은 ‘이녁이란 말’을 굳건한 방패 삼아 다시 마음을 추스를 일이다. 아직 시인 앞엔 가야 할 멀고 신비로운 길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니.
― 정용국(시인, 한국시조시인협회 이사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