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
박정원
연자방蓮子房에 들어가 보니
연자 하나가 사라졌다
아니다
누군가 탈취해갔다
아니다
스스로 가출했다
아니다
다른 놈팡이와 눈이 맞아
가버렸다
사라진 한때가 모여
한동안이었다가
한참동안이었다가
내 것인 양
한 시절이었다가
연자는 어디로 갔을까
그 한순간 한때
연자에게 휘둘린
예순여섯 해의 토막집이
나의 일생一生인 동안
연자는 정말 어디에 있을까
연자방이란 연꽃의 열매이며, 연실, 연자육, 연자 등의 다양한 이름을 갖고 있으며, 성인병 예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고 한다. 젊음은 사랑과 행복이 가득한 집이 되고, 늙음은 사랑과 행복이 떠난 빈집이 된다. 박정원 시인은 연자방에서 연자 하나가 사라진 것을 보고, 사랑과 행복이 떠나간 빈집을 생각해 본다. 사랑과 행복은 연자와 연자가 모여 한때가 되었듯이, “한동안이었다가/ 한참동안이었다가/ 내 것인 양/ 한 시절이었다가” 그 어디론가로 감쪽같이 사라져 가버린 것이다.
연자는 어디로 사라져 가버린 것일까? 누군가가 탈취해간 것일까? 스스로 가출해버린 것일까? 어떤 놈팽이와 눈이 맞아 달아나 버린 것일까? 하지만, 그러나 연자는 누군가가 탈취해간 것도 아니고, 스스로 가출해 버린 것도 아니며, 어떤 놈팽이와 눈이 맞아 달아난 것도 아니다. 사랑과 행복은 열매이며, 이 열매는 때가 되면 그 보금자리를 떠나 새로운 자손의 씨앗이 되어야 한다. 늙은 몸은 사랑과 행복의 열매가 떠나간 빈집이 되고, 다만, 시인은 이 자연의 이치를 알면서도 그 빈집의 외로움과 공허함을 달랠 길이 없었던 것이다. 늙음은 외롭고 서러운 것이고, 목숨은 너무나도 즐겁고 기쁘게, 이 세상을 떠나갈 수가 없었던 것이다.
예순여섯 해의 토막집과 예순여섯 해의 연자방, 아들과 딸들이 제각기 장성하여 출간한 빈집----. 나는 이 빈집이 텅 비어 있음으로 하늘과도 같은 은총으로 충만하기를 바랄 뿐이다. 우리는 빈집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그토록 아름답고 화려한 연꽃을 피울 수가 있었던 것이고, 우리는 그토록 아름답고 화려한 연꽃을 피웠었기 때문에 사랑과 행복의 연자방을 이룰 수가 있었던 것이다. 텅 빈다는 것은 이 세상에서 나의 임무가 끝났다는 것이고, 이 세상에서 나의 임무가 끝났다는 것은 새로운 신생아의 울음소리가 들려온다는 것이다.
빈집은 존재의 집이고, 텅 비었음으로 꽉찬 존재의 보금자리가 된다. 한때, 한동안, 한참동안, 한시절, 잘 먹고, 잘 살고, 잘 놀았으니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떠날 때가 된 것이다.
연자는 반드시 나의 빈집에서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며, 열매를 맺을 것이다.
어떤 존재의 일생은 한순간에 지나지 않지만, 그 존재의 집은 영원할 할 것이다. 자주 명상하고,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떠나가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