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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산성당 → 광희문성지 → 가회동성당 → 성신교정 → 숙소(성신여대)
7.9Km 4Km 5.6Km 1.7Km
44. 광희문성지
조선의 사소문(四小門)중의 하나인 광희문(光熙門)은
생(生)과 사(死)의 갈림길이었다.
장충단에서 한강 사이의 남소문(南小門)이 없어진 뒤
북쪽의 수구문(水口門)을 일컬어 광희문이라고 불렀었다.
시구문(屍軀門)이라고도 하였으며
서소문(西小門)과 함께 시신(屍身)을 내보내던 문이다.
1396년(태조 5) 도성을 축조할 때 창건되었으며,
1422년(세종 4) 개축된 것으로 추측된다.
《숙종실록(肅宗實錄)》에 1711년(숙종 37) 민진후(閔鎭厚)의 건의로
금위영(禁衛營)으로 하여금 개축하게 하고,
문루(門樓)는 목재를 구하기가 어려우므로
후에 개축하기로 하였다는 기사가 있으며,
1719년 문루를 세워서 광희문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그 후 1975년 도성복원공사의 일환으로
석문을 수리하고 문루를 재건하였다.
박해당시 치명한 순교자들은 모두 광희문 밖으로 내던져 졌는데,
그때마다 문 밖은 굴러 떨어진 시신이 너무 많아 분간이 어려울 정도였다.
순교자들의 시신은 그의 가족이나 친지에 의해 남녀 구별에 따라
옷을 달리 입히고, 동여매서 거적으로 싸는 정도로 겨우 매장되었다.
수없이 되풀이되는 박해의 칼바람은
서울과 수원, 용인 등 인근 지역의 교우들을 도성 안으로 끌고 들어왔고
이들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가혹한 고문 속에서 배교를 강요 당하다가
끝내 이를 거부함으로써 가차없이 치명의 길을 가야 했다.
도성 안에서 참수 치명한 순교자들의 시신은
짐짝보다도 못한 취급을 받으며 이곳에 내다 버려졌던 것이다.
살아서 이 문을 들어섰던 이들은 나중에는 시체가 되어
한마디 말도 남기지 못한 채 이 문을 나와야 했다.
현재는 퇴계로와 을지로 길이 만나 왕십리 방향으로 가는 길목에
온갖 사연을 간직하고서도 아무 말 없이 침묵을 지키며 서있는 광희문은
돌 하나하나마다, 풀섶의 풀 한 포기마다
세월이 흘러도 지워지지 않을 깊은 감동을 간직하고 있다.
광희문과 함께 대표적인 시구문으로 꼽히는 곳은
바로 남한산성의 수구문이다.
남한산성 동문 한켠 산비탈 아래에는
사람 두어 명이 지나갈 만한 작은 구멍이 나 있다.
'살아서 들어간 동문'은 곧 '죽어서 나온 시구문'으로 이어진다.
경기도 광주뿐만 아니라 인근 지방인 양주, 이천 등지의 교인들은
체포되자마자 오랏줄로 꽁꽁 묶여 바로 이 동문으로 들어갔다
죽어서는 수구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나섰던 것이다.
45. 가회동성당
북촌한옥마을에 위치한 가회동성당은
최초의 외국인 사제 주문모 신부가 첫미사를 집전한 곳입니다.
한옥과 양옥이 어울어진 아름다운 성당입니다.
계동은 한국 천주교회 최초의 선교사인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조선 땅에서 첫 미사를 집전한 지역으로, 천주교회 창설 초기,
조선 신자들은 북경교구장 구베아 주교에게 성직자의 파견을 요청했고,
구베아 주교는 주문모 신부를 조선 선교사로 임명하였다.
주 신부는 조선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1794년 12월 24일에 조선에 입국하였다.
한양에 도착한 주문모 신부는 계동에 있는
최인길 마티아(1765∼1795)의 집에 머물렀는데
주 신부는 여기서 한글을 배웠으며, 1795년 예수부활대축일에는
신자들과 함께 조선에서의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1765년 한양의 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최인길 마티아는,
1784년 한국 천주교회가 창설된 직후에
이벽(세자 요한)으로부터 천주교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다.
마티아는 입교 초기부터 동료들과 함께 이웃에 복음을 전하는 데 앞장섰으며,
1790년 윤유일(바오로)이 북경 교회를 방문하고 돌아온 뒤에는
성직자 영입 운동에 참여하였다.
당시 그가 맡은 일은 선교사가 은신할 거처를 마련하는 일이었다.
이후 마티아는 한양 계동(현 서울시 종로구 계동)에 집을 마련하고
선교사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1794년 12월 24일(음력 12월 3일) 마침내 조선에 입국한 주문모 신부는
이듬해 초 마티아의 집으로 인도되었다.
마티아는 이때부터 주 신부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지만,
얼마 안되어 한 밀고자에 의해 신부의 입국 사실이 조정에 알려지고 말았다.
다행히 주 신부는 마티아의 집에서 빠져 나와
여회장 강완숙(골롬바)의 집으로 피신할 수 있었다.
그러나 최인길은 신부의 입국을 도운 밀사
윤유일과 지황(사바)과 함께 체포되고 말았다.
체포된 날부터 포도청에서 혹독한 형벌을 받아야만 하였다.
수없이 형벌을 가하였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자 박해자들은
더 이상 그들을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는 때려 죽이기로 결심하였다.
그 결과 마티아와 동료들은 그날로 사정없이 매를 맞고 숨을 거두게 되었으니,
이때가 1795년 6월 28일(음력 5월 12일)로, 당시 마티아의 나이는 31세였다.
순교 후 그들의 시신을 강물에 던져 버렸다.
반면에 주문모 신부는 아주 비밀리에,
이곳저곳으로 다니면서 성사를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교리 공부와 전교 활동을 위해 명도회를 조직하였고,
교리서도 집필하였다.
이처럼 그가 활동한지 6년이 지나면서
조선 교회의 신자 수는 모두 1만 명에 달하게 되었다.
그러나 1801년의 신유박해가 일어나자 야고보 신부는
자기 때문에 신자들이 고통을 받는다고 생각하여 귀국을 결심하였다가,
‘나의 양떼와 운명을 같이 해야 하겠고,
순교함으로써 모든 불행을 막아야 한다’는 생각에서 자수를 결심하였다.
주문모 신부가 의금부에서 군문효수형의 판결을 받고
새남터에서 1801년 5월 31일(음 4월 19일) 처형당함으로써 이곳의 첫 순교자가 되었다.
당시 주문모 신부의 머리는 장대에 매달렸고,
그 시신은 닷새 동안 백사장에 버려졌다가
군사들에 의해 몰래 이장됨으로써 찾을 길이 없게 되었다.
46. 가톨릭대학교성신교정
젊은이들 특유의 생기와 활기가 넘쳐흐르는
서울 종로구 혜화동 대학로 뒤편, 야트막한 산등성이 위에
한국 천주교회를 이끌어 나갈 젊은 신학도들의 못자리가 있다.
소란하고 화려한 카페와 레스토랑, 온갖 화려한 네온등을 뒤로하고
조금 가파른 길을 올라가면 성소(聖召)의 향기가 풍겨 나온다.
가톨릭대학교.
지금은 서초동의 성의 교정(의학대학),
그리고 부천의 성심 교정과 함께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가톨릭대학교 성신 교정(신학대학) 성당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방인 사제인
성 김대건 안드레아 신부의 유해가 모셔져 있다.
1857년에 가경자, 1925년에 복자,
1984년 한국 천주교 전래 200주년을 맞아 방한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다른 한국 순교자 102명과 함께
시성의 영광을 얻은 김대건 신부의 유해는
오늘도 그를 본받아 이 땅의 참된 목자가 되려는
신학도들의 모든 삶에 함께하고 있다.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효시는
어쩌면 한국인 성직자 양성을 위한 노력이 처음 시도된
1830년대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당시 선교사들은 정하상을 비롯한 소년들에게
국내에서 신학 교육을 하는 한편
김대건, 최양업, 최방제 등을 마카오로 유학 보냈다.
그중 김대건과 최양업이 사제품을 받고 귀국해 활동하다가
한 명은 ‘피의 순교’를 다른 한 명은 ‘땀의 순교’를 했다.
그 후 1855년 충청도 제천 배론에 성 요셉 신학당이 세워져
신학 교육을 시작했으나 1866년 병인박해로 폐쇄됐다.
신앙의 자유가 확보됨에 따라 1882년에는 21명의 신학생을 선발해
페낭 신학교로 유학을 보낸 바 있고,
드디어 1885년 강원도 여주군 강천면 범골(부엉골)에서
현 가톨릭대학교 신학대학의 직접적인 전신이라 할 수 있는
예수 성심 신학교가 문을 엶으로써
최초로 국내 신학교의 설립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2년 뒤인 1887년에 신학교는 서울 용산으로 이전했다.
그 후 1914년 대구 성 유스티노 신학교,
1927년 덕원 신학교 등이 연이어 설립되지만
1942년 용산 예수 성심 신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되었다.
하지만 1945년 경성 천주 공교 신학교로 개칭, 다시 설립되고
그 후 성신대학이라는 명칭을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
한편 가톨릭대학교 의학대학은
1954년 문교부로부터 증설 인가를 받아 서울 명동 성당 구내에서 개교,
1959년 가톨릭대학 의학부라는 이름을 거쳐 오늘의 모습으로 발전했다.
현재 여의도와 강남에 있는 종합 부속병원을 포함해
각지의 부속병원과 함께 종합 캠퍼스를 갖춘 가톨릭대학교 의학대학은
뛰어난 의학 연구와 임상 실적으로
한국 최고의 의학대학으로 발돋움하고 있다.
또 성심 여자 대학교가 1995년 정식으로
가톨릭대학교라는 이름 아래 신학 · 의학대학과 통합됨으로써
가톨릭대학교는 국내 다른 어느 대학보다도
양적 · 질적으로 우수한 교육 기관으로 성장하고 있다.
2005년에는 가톨릭대학교 개교 150주년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갖고
신학대학 본부 건물 앞에 성 김대건 신부 부조상을 제작 설치하였다.
2015년 5월 25일에는 개교 160주년을 기념해 미사와 국제 심포지엄을 갖고,
성 김대건 신부와 최양업 신부의 순교와 선교 정신을 본받고자 성당 안에
160주년 기념 이콘 성화를 설치하고 축복식을 거행하였다.
혜화동의 신학대학은 양 떼를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친
성 김대건 신부의 용맹한 신앙과 복음을 전하고,
양 떼를 돌보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한
하느님의 종 최양업 토마스 신부의 정신을 오늘에 되살리려는
많은 신학도들의 못자리로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20년 2월 19일)]
용산 예수성심신학교(1887~1942)
경성천주공교신학교 (1945-1947)
천주공교신학교(天主公敎神學校)는
1942년 일제에 의해 예수성심 신학교가 폐교된뒤
1945년 광복이 되자 천주공교신학교로 개칭하여 다시 개교한 신학교이다.
개칭과 동시에 대구 성유스띠노신 학교도 통합시켰고,
1947년 성신대학으로 다시 개칭함과 아울러
문고 제 31호에 의해 승격 설립되었다.(초대학장에 장금신부)
성신대학(1947~1959)
5일차 성지순례는 의정부교구에서 시작하여 숨가쁘게 달렸다.
내일 마지막날 점심약속도 있고 저녁 비행기를 타야하기에
한 곳이라도 더 순례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오늘은 나의 광야생활을 거쳐 새롭게 갈릴래아로 들어선 장소인
길음동 성당 교우 몇 명과 저녁을 먹기로 했다.
대자는 회사 출장관계로 참석치 못하고, 아내는 대녀와 따로 약속을 했다.
일찍 숙소에 도착하여 잠시 쉬다가 숙소 바로 앞에서 저녁을 먹었다.
1차로 복집에서 복지리, 복껍질, 그리고 복껍질을 태워서 울궈낸
특이한 소주를 먹었다. 복냄새가 나고 부드러웠다.
일생에 처음 먹어본 술이다.
함께 했던 지난날 이야기와 헤어져 살아온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아쉬움이 남아서 자리를 횟집으로 옮겨 못다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헤어지기 전에 내가 맥주로 입가심을 하자고하여 생맥주로 마무리 지었다.
성신여대앞은 젊은이들로 북적여 젊음의 숨결을 느낌과 동시에
우리들이 함께 하기에는 방해가 될 듯하여 맥주집도 전전하다가
어렵게 선택하는 어려움도 겪었다.
이번 여행에서는 그리운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도 함께 해
더욱 알찬 순례여행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