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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의 주제는 이신칭의와 더불어
그 보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인 것을 깨달을 때
소망의 하나님께서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충만케 하시는 성령의 능력으로
그 소망이 넘칠 것입니다.
바울의 복음은 논리가 아니라 그 결과요,
성령의 처음 익은 열매로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신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 그 자체입니다.
로마서의 복음은 율법의 교훈과 의와 선지자의 증거를 온전히 성취하고
그 율법의 완성이 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성령의 충만으로 증거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에 대한 바울의 이해는
그리스도의 부활로 말미암은 성령의 충만한 믿음의 역사요, 그 성령의 사랑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과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말미암은 그 율법의 완성으로 속량함을 받은 그의 백성은
논리나 이론이나 이념이나 신념이나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살아 역사하는 성령의 인치는 사랑으로 말미암았습니다.
성령의 사랑으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을 가진 바울은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무를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그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하나님께서 기쁘게 받으시는 은혜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바울의 복음은 헬라 철학이나 학문의 논리가 아니라
하늘의 햇빛과 비가 땅에 내려 그 땅이 입을 벌려 구속의 열매를 맺는 생명의 성령의 법으로 충만하였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정관으로 언약의 서정을 깨닫고
그 놀라운 언약의 복을 감사하며 찬양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나를 빙자하여 말씀하심이여
그 말씀이 내 혀에 있도다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말씀하시며 이스라엘의 바위가 내게 이르시기를 사람을 공의로 다스리는 자,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다스리는 자여
저는 돋는 해 아침 빛 같고 구름 없는 아침 같고
비 후의 광선으로 땅에서 움이 돋는 새 풀 같으니라 하시도다
내 집이 하나님 앞에 이같지 아니하냐
하나님이 나로 더불어 영원한 언약을 세우사 만사에 구비하고 견고케 하셨으니
나의 모든 구원과 나의 모든 소원을 어찌 이루지 아니하시랴며 탄성였습니다.
창조적 서정으로 언약의 확신을 가진 다윗은
주의 앞에는 기쁨이 충만하고 주의 우편에는 영원한 즐거움이 가득한 생명의 길로 행하였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의 열심이 하나님꼐서 뜻하신 바로 그 뜻을 반드시 이루실 것이라는
구원 경륜에 대한 비전의 확신을 가졌습니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 이가 없나니 나밖에 신이 없느니라
너는 나를 알지 못하였을지라도 나는 네 띠를 동일 것이요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무리로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너 하늘이여 위에서부터 의로움을 비같이 듣게 할지어다 궁창이여 의를 부어 내릴지어다
땅이여 열려서 구원을 내고 의도 함께 움돋게 할지어다
나 여호와가 이 일을 창조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사45:5-8)
또한 비와 눈이 하늘에서 내려서는 다시 그리로 가지 않고 토지를 적시어서 싹이 나게 하며
열매가 맺게 하여 파종하는 자에게 종자를 주며 먹는 자에게 양식을 줌과 같이
내 입에서 나가는 말도 헛되이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고
나의 뜻을 이루며 나의 명하여 보낸 일에 형통하리라고 하엿습니다.(사55:10-11)
또한 내가 여호와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며
내 영혼이 나의 하나님으로 인하여 즐거워하리니
이는 그가 구원의 옷으로 내게 입히시며
의의 겉옷으로 내게 더하심이 신랑이 사모를 쓰며 신부가 자기 보물로 단장함 같게 하셨음이라
땅이 싹을 내며 동산이 거기 뿌린 것을 움돋게 함같이
주 여호와께서 의와 찬송을 열방 앞에 발생하게 하시리라고 하였습니다.(사61:10-11)
이사야 선지자의 메시야에 대한 비전의 확신은
그 광야로 에덴 같고 그 사막으로 여호와의 동산 같게 하여 땅이 열려 구원을 내고
의를 움돋게 하는 역사로 충만하였습니다.
이사야의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 대한 이해는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알지 못하고
나의 백성은 깨닫지 못하는도다
슬프다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이로다
그들이 여호와를 버리며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만홀히 여겨 멀리하고 물러갔도다는 탄식이었습니다.
발바닥에서 머리까지 성한 곳이 없이 상한 것과 터진 것과
새로 맞은 흔적 뿐인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이해는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고 하였습니다.
성전 예배와 제사로는 범죄한 나라요 허물 진 백성이요 행악의 종자요
행위가 부패한 자식을 구원할 수 없고
그 드리는 제물과 번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을 뿐이었습니다.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는 하나님의 분노는
여호와를 바알로 섬기고 바알을 여호와로 섬기는 제설혼합주의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종교적 제의식이 아니라
너희는 스스로 씻으며 스스로 깨끗하게 하여 내 목전에서 너희 악한 행식을 버리며 악행을 그치고
선행을 배우며 정의를 구하며 학대 받는 자를 도와 주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며 과부를 위하여 변호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켜지리라 여호와의 입의 말씀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은 총체적 부패로 적폐의 온상이 되었고
대적에게 보응하며 원수를 보복하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마음을 편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자기 백성을 원수로 적대시하는 하나님의 마음은
이사야 선지자의 슬픔이요, 탄식이요, 신음이 되었습니다.
총체적 부패의 그 진상은 신실하던 성읍이 어찌하여 창기가 되었는고
정의가 거기 충만하였고 공의가 그 가운데 거하였더니 이제는 살인자들뿐이로다
네 은은 찌꺼기가 되었고 네 포도주에는 물이 섞였도다
네 고관들은 패역하여 도둑과 짝하며 다 뇌물을 사랑하며 예물을 구하며
고아를 위하여 신원하지 아니하며 과부의 송사를 수리하지 아니하는도다는 적폐에 함몰되었습니다.
이스라엘에 대한 하나님의 올바른 이해는
심판과 구원이라는 하나님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주 만군의 여호와 이스라엘의 전능자가 말씀하시되
슬프다 내가 장차 내 대적에게 보응하여 내 마음을 편하게 하겠고 내 원수에게 보복하리라
내가 또 내 손을 네게 돌려 네 찌꺼기를 잿물로 씻듯이 녹여 청결하게 하며
네 혼잡물을 다 제하여 버리고
내가 네 재판관들을 처음과 같이, 네 모사들을 본래와 같이 회복할 것이라
그리한 후에야 네가 의의 성읍이라, 신실한 고을이라 불리리라 하셨나니
시온은 정의로 구속함을 받고
그 돌아온 자들은 공의로 구속함을 받으리라
그러나 패역한 자와 죄인은 함께 패망하고
여호와를 버린 자도 멸망할 것이라
너희가 기뻐하던 상수리나무로 말미암아 너희가 부끄러움을 당할 것이요
너희가 택한 동산으로 말미암아 수치를 당할 것이며
너희는 잎사귀 마른 상수리나무 같을 것이요 물 없는 동산 같으리니
강한 자는 삼오라기 같고 그의 행위는 불티 같아서 함께 탈 것이나 끌 사람이 없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이사야서의 스펙트럼은 하나님 자기 백성에 대한 심판과 구원으로 끝나지 않고
이방 모든 나라에 대한 심판과 또한 구원의 경륜을 하나님의 열심으로 이루었습니다.
바벨론에 대하여 받은 경고,모압에 관한 경고, 다메섹에 관한 경고
애굽에 관한 경고, 해변 광야에 관한 경고, 두마에 관한 경고, 아라비아에 관한 경고,
이상 골짜기에 관한 경고, 두로에 관한 경고, 남방 짐승에 관한 경고 등
열방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선포하였습니다.
그러면서 오직 여호와 하나님께서이스라엘과 이방과 열방의 구원자이심을 선포하며
메시야 복음을 계시하였습니다.
참으로 이사야는 구약의 로마서라고 할 정도로
이사야서와 로마서는 구원에 대한 본질을 같이 하였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이라는 제목의 글을 쓰면서 이사야서에 집중하는 것은
이사야서는 이스라엘은 물론 열방에 대한 심판의 경고와 함께
메시야 구원의 복음을 충만하게 계시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서의 메시야 계시는 예수님께서도 자기 계시의 증거로 삼았고
사도 바울 역시 이방의 사도로 부름받은 사역의 뿌리를 이방의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를 선전하라는
사도적 사역의 본질을 같이 하기 떄문입니다.
이방의 빛을 비추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이방의 사도인 바울은
이사야서의 계시적 성취에 대한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는 바로 그 발이었습니다.
아름다운 소식을 시온에 전하는 자여
너는 높은 산에 오르라 아름다운 소식을 예루살렘에 전하는 자여
너는 힘써 소리를 높이라 두려워 말고 소리를 높여 유다의 성읍들에 이르기를
너희 하나님을 보라 하라고 하였습니다..(사40:9)
좋은 소식을 전하며 평화를 공포하며 복된 좋은 소식을 가져오며 구원을 공포하며
시온을 향하여 이르기를 네 하나님이 통치하신다 하는 자의 산을 넘는 발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가
네 파수꾼들의 소리로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일제히 노래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시온으로 돌아오실 때에 그들의 눈이 마주 보리로다
너 예루살렘의 황폐한 곳들아 기쁜 소리를 내어 함께 노래할지어다
이는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위로하셨고 예루살렘을 구속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열방의 목전에서 그의 거룩한 팔을 나타내셨으므로
땅 끝까지도 모두 우리 하나님의 구원을 보았도다고 하였습니다.(사52:7-10)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와 우리 하나님의 보복의 날을 선포하여 모든 슬픈 자를 위로하되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를 대신하며
희락의 기름으로 그 슬픔을 대신하며 찬송의 옷으로 그 근심을 대신하시고
그들이 의의 나무 곧 여호와께서 심으신 그 영광을 나타낼 자라
일컬음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사61:1-3)
장차 임할 메시야의 통치에 대한 이사야의 탄성은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땅 끝까지 전하고자 하는 바울의 탄성이었습니다.
바울은 이방의 사도로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는 놀라운 은혜를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행하는 것이라는 확실한 정체성을 가졌습니다.
이 은혜는 곧 나로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하게 하려 하심이라고 하였습니다.(롬15:16)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이방에 전하는 바울의 사도적 사명은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거룩한 성령의 천국 잔치, 그 자체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역자와 성도는 밭에 감추인 보화를 발견한 기쁨으로 충만하여
천하 만민을 구원하는 예수의 하나님 나라에 대한 이사야와 바울의 탄성으로 넘쳐야 할 것입니다.
구원 받은 성도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와 특히 그 선교사는
이사야서에 대한 메시야적 복음 계시의 완전한 이해로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을
질그릇에 담은 검격으로 넘쳐야 합니다.
예수 구원 불신 지옥을 외치면 그것이 곧 전도요, 선교요, 사역이 아닌가 생각하겠지만
성경의 참된 진리의 복음, 곧 구원의 말씀은 "예수 구원 불신 지옥"이라는 슬로건으로 함축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기나긴 역사를 통해서 언약의 나라를
종말론적인 예수의 하나님 나라로 이루어 가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은
언약의 뿌리를 가진 예수의 하나님 나라 복음입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하면서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하나님을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로 선포하였습니다.
또한 선지자와 율법의 증거를 가진 메시야의 복음을
옛 언약의 새 언약 성취의 복음으로 증거하였습니다.
오늘날 교회력과 예전주의에 심취하는 사람들은
이사야서의 메시야적 탄성과 바울의 복음에 담긴 그리스도의 충만한 복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는 복음의 파괴가 아닐 수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웃시야 왕의 말기부터 히스기야까지
선지자의 사역을 하였습니다.
히스기야의 종교 개혁에 많은 영향을 끼쳤지만
그 때 이미 이사야 선지자는 계시적 영감으로 하나님의 성전을 통한 그 모든 제사와 율법의 의식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지 못한 다는 사실을 깨닫고 새 하늘과 새 땅을 여는
메시야의 통치를 통한 시온의 영광을 선포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숫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숫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이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냐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
헛된 제물을 다시 가져오지 말라 분향은 내가 가증히 여기는 바요
월삭과 안식일과 대회로 모이는 것도 그러하니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 내가 견디지 못하겠노라
내 마음이 너희의 월삭과 정한 절기를 싫어하나니
그것이 내게 무거운 짐이라 내가 지기에 곤비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사1:11-14)
이러한 깨어있는 의식은 이사야 선지자 보다 훨씬 전인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성소가 파괴되고 언약궤를 빼앗기는 그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사무엘 선지자가 사울에 왕에게 전한 하나님의 말씀은
사무엘이 이르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는 것을 좋아하심 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 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숫양의 기름보다 나으니
이는 거역하는 것은 점치는 죄와 같고 완고한 것은
사신 우상에게 절하는 죄와 같음이라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고 하였습니다.(삼상15:22-23)
사무엘은 번제를 드리는 의식의 순종보다 말씀의 순종을 깨달았으며
실로의 성소가 파괴되고 또 언약궤가 방치되었어도 그것의 회복을 위한 선지자의 사역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무엘 뿐만 아니라 다윗 또한 하나님께서 궁극적으로 원하시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통회하고 자복하는 상한 심령인 것을 깨달았습니다.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고 하였습니다.(시51:17)
잠언의 교훈도
의와 공평을 행하는 것은 제사드리는 것보다 여호와께서 기쁘게 여기시느니라고 하였습니다.(잠21:3)
전도서의 말씀도 너는 하나님의 전에 들어갈 때에 네 발을 삼갈지어다
가까이 하여 말씀을 듣는 것이 우매자의 제사드리는 것보다 나으니
저희는 악을 행하면서도 깨닫지 못함이니라고 하였습니다.(전5:1)
예레미야 선지자도 대저 내가 너희 열조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낸 날에
번제나 희생에 대하여 말하지 아니하며 명하지 아니하고
오직 내가 이것으로 그들에게 명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내 목소리를 들으라 그리하면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겠고 너희는 내 백성이 되리라
너희는 나의 명한 모든 길로 행하라 그리하면 복을 받으리라 하였으나
그들이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도 아니하고
자신들의 악한 마음의 죄와 완악한 대로 행하여 그 등을 내게로 돌리고 그 얼굴을 향하지 아니하였으며
너희 조상들이 애굽 땅에서 나온 날부터 오늘까지
내가 내 종 선지자들을 너희에게 보내되 끊임없이 보내었으나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며 귀를 기울이지 아니하고
목을 굳게 하여 너희 조상들보다 악을 더 행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렘7:22-26)
호세아 선지자는 그러므로 내가 선지자들로 그들을 치고
내 입의 말로 그들을 죽였노니 내 심판은 빛처럼 나오느니라
나는 인애를 원하고 제사를 원하지 아니하며
번제보다 하나님을 아는 것을 원하노라
그들은 아담처럼 언약을 어기고
거기에서 나를 반역하였느니라고 하였습니다.(호6:5-7)
아모스 선지자는 당시 이스라엘 백성의 죄악을 책망하면서
모세 시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드린 것까지 성토하였습니다.
여호와의 날은 빛 없는 어둠이 아니며 빛남 없는 캄캄함이 아니냐
내가 너희 절기들을 미워하여 멸시하며 너희 성회들을 기뻐하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내게 번제나 소제를 드릴지라도 내가 받지 아니할 것이요
너희의 살진 희생의 화목제도 내가 돌아보지 아니하리라
네 노랫소리를 내 앞에서 그칠지어다
네 비파 소리도 내가 듣지 아니하리라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
이스라엘 족속아
너희가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희생과 소제물을 내게 드렸느냐
너희가 너희 왕 식굿과 기윤과 너희 우상들과 너희가 너희를 위하여 만든 신들의 별 형상을 지고 가리라
내가 너희를 다메섹 밖으로 사로잡혀 가게 하리라
그의 이름이 만군의 하나님이라 불리우는 여호와께서 말씀하셨느니라고 하였습니다.(암5:20-27)
이사야와 동시대 남왕국 유다에서 활동하였던 미가 선지자는
내가 무엇을 가지고 여호와 앞에 나아가며 높으신 하나님께 경배할까
내가 번제물 일 년 된 송아지를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갈까
여호와께서 천천의 숫양이나 만만의 강수 같은 기름을 기뻐하실까
내 허물을 위하여 내 맏아들을, 내 영혼의 죄를 인하여 내 몸의 열매를 드릴까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이 오직 공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히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고 하였습니다.(미6:6-8)
뿐만 아니라 시온을 피로, 예루살렘을 죄악으로 건축하는도다
그들의 우두머리들은 뇌물을 위하여 재판하며 그들의 제사장은 삯을 위하여 교훈하며
그들의 선지자는 돈을 위하여 점을 치면서도 여호와를 의뢰하여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우리 중에 계시지 아니하냐 재앙이 우리에게 임하지 아니하리라 하는도다
이러므로 너희로 말미암아 시온은 갈아엎은 밭이 되고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고 성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이 되리라고 하였습니다.(미3:10-12)
예레미야서는 미가서의 이 말씀을 인용하여 당시의 사람들이 예레미야 선지자를 죽이려 할 때
그 지방의 장로 중 몇 사람이 일어나 백성의 온 회중에게 예레미야 선지자를 옹호하며
변호한 것을 기록하였습니다.
유다 왕 히스기야 시대에 모레셋 사람 미가가 유다 모든 백성에게 예언하여 가로되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시온은 밭같이 경작함을 당하며
예루살렘은 무더기가 되며 이 전의 산은 수풀의 높은 곳들같이 되리라 하였으나
유다의 왕 히스기야와 모든 유다가 그를 죽였느냐 하니 히스기야가 여호와를 두려워하여
여호와께 간구하매 여호와께서 그들에게 선언한 재앙에 대하여 뜻을 돌이키지 아니하셨느냐
우리가 이같이 하면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심히 해롭게 하는 것이니라고
예레미야 선지자를 옹호하였습니다.(렘26:18-9)
참으로 이사야 선지자는 이방인에게 언약의 복을 주어 '여호와의 성전으로 하여금 이스라엘 뿐만 아니라
만민이 기도하는 집에 될 것을 예언하며 계시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너희는 정의을 지키며 의를 행하라
이는 나의 구원이 가까이 왔고 나의 공의가 나타날 것임이라 하셨도다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그의 손을 금하여 모든 악을 행하지 아니하여야 하나니
이와 같이 굳게 잡는 사람은 복이 있느니라
여호와께 연합한 이방인은 말하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그의 백성 중에서
반드시 갈라내시리라 말하지 말며 고자도 나는 마른 나무라 하지 말라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안식일을 지키며
내가 기뻐하는 일을 선택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잡는 고자들에게는
내가 내 집에서, 내 성 안에서 아들이나 딸보다 나은 기념물과 이름을 그들에게 주며
영원한 이름을 주어 끊어지지 아니하게 할 것이며
또 여호와와 연합하여 그를 섬기며 여호와의 이름을 사랑하며 그의 종이 되며
안식일을 지켜 더럽히지 아니하며 나의 언약을 굳게 지키는 이방인마다
내가 곧 그들을 나의 성산으로 인도하여 기도하는 내 집에서 그들을 기쁘게 할 것이며
그들의 번제와 희생은 나의 제단에서 기꺼이 받게 되리니
이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일컬음이 될 것임이라고 하였습니다.(사56:1-7)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한 만민이 기도하는 집은
말라기 선지자를 통하여 예수님의 성전 청결의 메세지가 되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해 뜨는 곳에서부터 해 지는 곳까지의 이방 민족 중에서 내 이름이 크게 될 것이라
각처에서 내 이름을 위하여 분향하며 깨끗한 제물을 드리리니
이는 내 이름이 이방 민족 중에서 크게 될 것임이니라고 하였습니다.(말1:11)
예수님은 이에 가르쳐 이르시되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도다고 분노하였습니다.
하나님의 거하시는 거룩한 성전의 본질인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는 몸인 성전을 허물어
부활하여 더 좋은 언약의 중보가 되어 천하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성전이라 이와 같이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들 가운데 거하며 두루 행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나의 백성이 되리라 하셨느니라
그러므로 너희는 그들 중에서 나와서 따로 있고
부정한 것을 만지지 말라 내가 너희를 영접하여
너희에게 아버지가 되고 너희는 내게 자녀가 되리라
전능하신 주의 말씀이니라고 하였습니다.(고후6:16-18)
또한 그러므로 이제부터 너희는 외인도 아니요 나그네도 아니요
오직 성도들과 동일한 시민이요 하나님의 권속이라
너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우심을 입은 자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친히 모퉁잇돌이 되셨느니라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 가고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이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고 하였습니다.(엡2:19-22)
요한 계시록은 이기는 자는 내 하나님 성전에 기둥이 되게 하리니
그가 결코 다시 나가지 아니하리라
내가 하나님의 이름과 하나님의 성 곧 하늘에서 내 하나님께로부터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의 이름과 나의 새 이름을 그이 위에 기록하리라고 하였습니다.(계3:12)
이사야서의 메시야 복음이 어떻게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성취되었는가를
사도 바울은 완전히 이해하고 깨달았습니다.
오늘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예전주의로 고착화 시키는 것은
하나님의 성전에 대한 이사야 선지자와 사도 바울의 복음으로 미루어 볼 때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눕는 것과 같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나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내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
소를 잡아 드리는 것은 살인함과 다름이 없이 하고
어린 양으로 제사드리는 것은 개의 목을 꺾음과 다름이 없이 하며
드리는 예물은 돼지의 피와 다름이 없이 하고
분향하는 것은 우상을 찬송함과 다름이 없이 행하는 그들의 마음은 가증한 것을 기뻐한즉
나 또한 유혹을 그들에게 택하여 주며 그들이 무서워하는 것을 그들에게 임하게 하리니
이는 내가 불러도 대답하는 자가 없으며 내가 말하여도 그들이 듣지 않고
오직 나의 목전에서 악을 행하며 내가 기뻐하지 아니하는 것을 택하였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실로의 성소가 파괴되고, 예루살렘 성전이 무너지고,
스룹바벨 성전이 헬라에게 짓밟히고 헤롯 성전이 로마에 의해 돌 위에 돌 하나 남지 않도록
괴멸되었 데 예전주의가 왠 말입니까?
말씀의 순종이 없는 형식은 예전 의식이 제 아무리 장엄해도
이교도의 종교 활동에 불과합니다.
믿음에 담겨진 말씀의 순종은 열매로 그 나무를 알리라는
믿음의 실상을 성령의 열매로 맺을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충만한 축복은 율법주의나
예전주의로 담아낼 수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