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7월 17일 연중 제15주간 수요일
<지혜롭다는 자들에게는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셨습니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25-27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아버지, 하늘과 땅의 주님,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에게는 이것을 감추시고 철부지들에게는 드러내 보이시니, 아버지께 감사드립니다. 26 그렇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선하신 뜻이 이렇게 이루어졌습니다.” 27 “나의 아버지께서는 모든 것을 나에게 넘겨주셨다. 그래서 아버지 외에는 아무도 아들을 알지 못한다. 또 아들 외에는, 그리고 그가 아버지를 드러내 보여 주려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아버지를 알지 못한다.”
잡다한 것들로 가득 차
불교의 경전『반야심경』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명구(名句)가 있습니다.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이라는 말입니다.
물질적인 세계와 평등하고 무차별한 공(空)의 세계가 다르지 않음을 뜻하는 말로 원문은
“색불이공공불이색(色不異空空不異色) 색즉시공공즉시색(色卽是空空卽是色)”입니다.
이는 “색이 공과 다르지 않고 공이 색과 다르지 않으며, 색이 곧 공이요 공이 곧 색이다.”로 번역할 수 있는 말입니다.
그리고 범어(梵語) 원문은 “이 세상에 있어 물질적 현상에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실체가 없기 때문에 바로 물질적 현상이 있게 되는 것이다. 실체가 없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물질적 현상을 떠나 있지는 않다. 또, 물질적 현상은 실체가 없는 것으로부터 떠나서 물질적 현상인 것이 아니다. 이리하여 물질적 현상이란 실체가 없는 것이다. 대개 실체가 없다는 것은 물질적 현상인 것이다.”로 되어 있습니다.
이 긴 문장을 한역(漢譯)할 때 열여섯 글자로 간략히 요약한 것입니다. 따라서, 색은 물질적 현상이며, 공은 실체가 없음을 뜻하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원래 불교에서는, 이원론적(二元論的)인 사고방식을 지양하고 이와 같이 평등한 불이(不二)의 사상을 토대로 하여 교리를 전개시키고 있습니다. 따라서,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 색과 공을 차별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기보다는 대립과 차별을 넘어선 일의(一義)로 관조할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나는 이 사유(思惟)를 이렇게 차별적으로 생각하기도 합니다. 색(色)은 가득 차 있는 것, 공(空)은 텅 비어 있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의 생각이 텅 비어 있으면 세상의 일로 가득 찰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것으로 가득 차 있으면 하느님 생각은 텅 비게 될 것입니다.” 평범한 사람의 생각으로 세상살이는 먹고 살기 위해 돈을 벌어야 하고 아이들을 가르쳐야 하며 부모와 자식들과 형제들과 갖게 되는 그런 인간관계에서 갖게 되는 복잡다단한 세상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무엇인가로 가득 차있기에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기가 참 어려운 것입니다.
세상의 잡다한 학문으로 가득 차 있어서 성경이나 영성은 항상 뒷전은 아니십니까? 세상의 많은 지식을 알고 있으면 돈도 되고 유식하다는 말도 듣고 정치나 영업을 하는데도 요긴하게 사용됩니다. 경제상식이나, 주식 또 새로운 뉴스나, 온갖 잡다한 것을 알고 있어야 사용할 수 있는 지식이며 상식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창업이나 경제적 문제가 담겨져 있는 세미나, 혹은 강연회에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몰려옵니다. 그러나 세상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기에 성당에서 하는 어떤 강연회나 행사에도 사람들은 몰려오지 않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구름처럼 몰려다녔는데, 그 때에는 생명의 말씀이었고, 많은 기적을 베푸시는 모습을 보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지난 월드컵 축구경기 응원을 위해 붉은 악마들이 구름처럼 모이듯이 우리도 뜻을 모으면 남북통일도 금방 할 것 같았습니다. 예수님께서도 공 하나에 그렇게 모아지듯 주님께로 그렇게 순수하게 모여지기를 바라십니다. 대통령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은 응원하는 사람들을 이리저리 몰고 다니고 그런 사람들이 하는 얘기는 공약(空約)이어도 사람들이 관심을 갖는 것은 세상사에 직접적으로 쓸 수 있는 것이고 자신들의 이익과 관심이 모여지기 때문입니다.
나는 참으로 어렵게 공부를 하였습니다. 어려서는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한문 공부도 참 부지런히 하였는데 우스운 이야기지만 간혹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고 ‘잡학박사’ 학위를 지어 주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런 것들이 지금은 아무 소용이 없는 것 같이 느껴지고 단지 묵상할 때 고사성어(故事成語)를 섞어서 그 의미를 새롭게 생각할 뿐입니다. 그런데도 진정으로 하느님을 그 의미 안에 아주 적절하게 표현하고 묵상하였는지 반문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생각입니다. 지혜롭다는 자들과 슬기롭다는 자들은 자신들의 지식과 지혜에 의지하여 어떤 것을 받아들이는 데 기준을 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기준이 과학이라면 과학적으로 증명이 되지 않으면 새로운 사상이나 가치관을 들어오지 못하게 그것들이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신앙인들은 그 기준을 두 가지로 삼고 있습니다. 이는 세상적인 기준과 신학적인 기준입니다. 세상적인 기준은 인문사회학적 기준이고, 경영학적 기준입니다. 그동안 교회에서는 이런 기준을 너무 등한히 하였습니다. 사목과 하느님의 복음도 세상의 변혁하고 세상의 질서를 완성하는 것입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평신도 교령에는 평신도는 "복음 선포와 인간성화에 힘쓰며, 현세 질서에 복음정신을 침투시켜 현세질서를 완성하는 활동으로서 세계 안에서 그리스도의 명백한 증인이 되고, 인간구원에 이바지하므로, 이런 활동으로써 그들은 사도직을 수행한다."(평신도 교령 2항)고 명시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평신도 사도직 활동의 중요성과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데 기왕에 습득한 인문사회학적, 경영학적 지식과 지혜를 활용해서 현세질서를 완성하기 위해서 우리는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새로운 지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사는 지식과 지혜로 철부지(哲不知)에서 하느님의 철이 든 사람이 되어야만 합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명오(明悟)가 열린다고 하였습니다. 성령의 도우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성령의 인도하심으로 예수님과 함께, 예수님을 통하여, 예수님 안에서 우리는 하느님과 이웃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우리가 가진 세상의 해박한 지식을 활용하여 하느님을 섬기고, 이웃을 사귀는 데 더 없는 은총을 받고 세상의 질서를 완성하고 새롭게 만들어야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어린이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제자들을 원하였습니다. 신학교나 수도원에서 가장 어려운 일은 세상의 쓸데없는 것으로 가득 찬 순수성을 찾아내는 것이라고 합니다. 먼저 우리가 신앙을 갖기 위해서는 내 마음에서 순수함을 먼저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잡다한 것에서 머리를 텅 비게 만드는 일입니다. 그런 다음 그 안에 주님을 심는 일을 합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고정관념을 바꾸는 일은 참으로 어려운데 이제는 세상에서 가지게 된 고정관념을 순수한 것으로 바꾸는 일을 해야 합니다. 정말 우리는 철부지입니다. 이제 하느님의 가르침과 은총으로 주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을 향한 우리의 순수성을 회복하고 주님을 믿고 그 안에서 순수하고 깨끗한 사람으로 순수한 주님의 얼굴을 뵈올 수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