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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천여 년 전 인류 역사 전체를 뒤바꾸는 놀라운 사건이 이스라엘 베들레헴에서 일어났습니다. 이 세상 누구와도 비견될 수 없는 위대한 분이 태어나신 것입니다. 인간의 역사는 예수님 이전과 예수님 이후로 바뀝니다. 그래서 우리가 쓰고 있는 달력도 BC(기원전), AD(기원후)로 나누지 않습니까? BC는 Before Christ(예수님 이전)입니다. AD는 Anno Domini(주 이후)입니다. 서력은 예수님을 기원으로 날짜를 샙니다. 이 서력은 이제 전 세계 모든 나라에서 날짜의 기준으로 쓰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예수님의 이름은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이며, 가장 큰 능력의 이름입니다. 그 분은 이 땅에서 인간으로서는 33년밖에 존재하지 않으셨지만 그 영향력은 인류 역사상 어마어마하게 컸습니다. 우리는 지금도 그분의 이름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살며 그 이름으로 감사하고 그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그 이름은 바로 ‘예수’입니다. 우리의 주인이신 예수님의 삶은 그의 탄생으로 시작되지도 않았고 그의 죽음으로 끝나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항상 계셨던 분으로서 영원하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주 만물을 창조하신 하나님 자신입니다. 성경은 예수님이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몸으로 오신 분이라고 말씀합니다. 즉 완전한 하나님이신 동시에 완전한 사람이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기 전, 선지자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몸으로 오실 것을 예언했습니다.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로 오실 예수님에 대한 300가지 이상의 예언들이 나와 있으며, 예수님은 이 모든 예언을 성취하심으로 자신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입증하셨습니다. 구약 예언의 성취뿐 아니라 그분이 행하신 기적과 죽음 후 부활하심으로 그분이 하나님이라는 주장을 강하게 증거합니다.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를 언급하며 시작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메시아로 오신 것을 강조하며 유대인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대인이 인정하는 성군 다윗, 유대인들의 혈통적 뿌리인 아브라함을 시작으로 예수님의 족보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고대하던 다윗의 후손으로 오셨고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을 통치할 왕으로 오셨습니다. 마태복음에서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들과 예수님께서 가르치신 교훈들을 정리하면서 구약성경에 예언된 메시아라는 사실을 증명했습니다. 우리가 지난 주에 이어 마태복음 1장을 살펴볼 때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대한 이유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이 말씀을 통해 예수님께서 메시아라는 사실, 예수님께서 약속의 왕이라는 사실, 예수님께서 우리의 구원자되신다는 사실을 깨닫고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에 감사하며 그 예수님이 우리의 주인이신 것을 기뻐하며 참된 하나님의 백성으로 은혜가운데 살아가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첫째로 하나님의 약속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7절입니다.
“그런즉 모든 대 수가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 열네 대요 다윗부터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갈 때까지 열네 대요 바벨론으로 사로잡혀 간 후부터 그리스도까지 열네 대더라”
우리가 이제 매 주 살펴보게될 이 마태복음의 첫 부분 1장부터 3장에는 예수님의 족보, 예수님의 탄생기사, 나사렛에서의 성장기록을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 것을 통해 구약성경의 예언이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3장에 가서는 갑자기 세례 요한의 활동이 등장합니다. 왜 갑자기 세례 요한의 활동이 나올까요? 그리고 그 세례 요한은 선지자처럼 활동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며 회개를 가르치는 사역을 했던 것이 기록되어 있을까요? 그것은 구약성경 이사야, 말라기에 예언된 메시아보다 앞에 나타나 메시아의 길을 평탄케 하는 선지자의 등장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세례 요한의 사역, 예수님의 탄생, 예수님의 생애 이 모든 것이 하나님 약속 성취의 확고한 증거라고 마태복음에서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런 관점에서 또한 지금 우리가 살펴보는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족보도 하나님의 언약이 분명하게 성취되도록 하나님께서 아브라함과 다윗의 계보를 사용하신 것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이 족보를 통해 아브라함과 다윗에게 주신 언약의 성취가 예수님이시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사도행전 13장 23절입니다.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신약성경 마태복음에 기록된 이 족보를 통해 예수님께서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후손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아,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으로 하나님 나라의 왕권을 세우시기 위해 오신 통치자라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특히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 16절을 보십시오. 다시 같이 읽겠습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우리는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족보를 보면서 2절부터 16절까지 이어진 이 족보의 규칙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규칙은 ‘누가 누구를 낳고 누가 누구를 낳고’로 이어지는 아버지와 아들의 규칙입니다. 이 규칙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까지 그대로 이어집니다. 하지만, 16절에 와서는 이제 “낳고”라는 단어가 사라집니다. 그리고 주어가 바뀝니다. 아버지가 아들을 낳았다는 표현으로 하며 아버지와 아들의 연계로 족보가 기록되다가 이제 16절에 와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주체가 되어 예수님의 탄생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16절 후반절을 보십시오.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예수님께서 태어나신 것입니다. 아브라함부터 요셉까지는 부모가 아들을 낳았습니다. 출생한 아들은 부모에 의해 태어난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예수님 스스로 주체적으로 이 땅에 나신 것입니다. 신약성경 원어인 헬라어를 살펴보면 이 사실을 분명히 알 수 있습니다. 헬라어 원어 성경에서는 ‘우리 주 예수님께서는 스스로 나오셨다’는 사실을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성경 원문에 따라 예수님의 탄생에 있어 마리아는 주님의 탄생 도구였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성령의 역사로 마리아를 도구로 잉태되어 출생하였다는 사실을 분명히 우리는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 이 사실이 중요할까요? 그것은 바로 예수님께서 언약의 성취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을 확고히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장 2~4절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을 통하여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 그의 아들에 관하여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아브라함의 언약을 성취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인성을 취하시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 인성을 취하기 위해 선택된 인물들이 바로 예수님의 계보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피조물인 인간의 모습을 취하심으로 언약을 성취하러 오셨다는 사실을 밝혀주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약속대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하나님, 그 위대하신 하나님의 본체이신 분이 인간의 육신을 입고 약속대로 오신 것을 감사하며 우리를 구원하실 약속을 이루시기 위해 오신 것에 기뻐하며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둘째로 은혜로 살아가는 인생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5,6절 말씀입니다.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인간의 죄를 해결하시고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를 주신 것에 대해 오늘 본문에서는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인간의 모든 공적도, 인간의 모든 죄악의 문제도, 인간의 모든 노력의 결과도 인간 스스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임해야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을 말씀해 주십니다. 분명 역사속에서 아브라함이나 다윗은 훌륭한 믿음의 사람인 것은 맞습니다. 하지만, 그들의 생애를 하나하나 세밀하게 살펴본다면 그들도 이 땅의 모든 죄인들과 똑같이 죄를 짓고 살아가며 실수하며 살아가는 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예수님의 이 족보를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우리가 발견하게 되는 것, 그것은 바로 우리 모든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의 삶가운데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사람들의 면면을 한 번 살펴보십시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과연 거룩하신 메시야, 영광의 다윗의 자손의 족보에 오를 자격이나 조건이 되는 사람들이 얼마나 있는 지 찾아보십시오. 이 거룩한 족보에 하나님께서 명하신 율법을 지키고 인간적인 죄를 하나도 짓지 않고 살아간 사람이 들어갈 수 있다고 한다면 예수님의 이 족보에 그것에 합당한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우선 제일 먼저 등장하는 아브라함부터 정말 이 족보에 들어갈 자격이 없는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갈대아 우르에서 태어나 하란에서 지냈던 사람이고 혈통으로 따지자면 가나안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습니다. 약속의 땅에 들어갈 자격을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부르시고 그 약속의 땅으로 인도하셨기에 그는 하나님의 선택받은 민족, 선택받은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선택,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었고 그 선택과 부르심에 응답했기에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런 아브라함도 부르심을 받고 약속의 땅으로 들어간 이후에도 순종과 불순종, 신앙과 불신앙의 행위를 반복했던 것을 성경에서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약속의 땅으로 들어가고 믿음의 조상이 되고 구원받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하나님만 신뢰하며 살지 못하고 인간적으로 삶의 문제를 해결하려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약속의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종을 후계자로 지명하기도 하고 여종의 태를 빌어 아들을 낳기도 했습니다. 그렇게 여종을 통해 낳은 아들, 인간적 계획과 인간적 방법으로 낳은 아들 이스마엘을 약속의 아들로 지명하려고 하다가 하나님의 질책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약속의 땅 가나안에 두 번의 큰 가뭄이 찾아왔을 때 임의로 가나안 땅을 벗어나 가뭄이 없는 풍족한 곳으로 찾아갔고 그 곳에서 이방족속 왕에게 아내를 빼앗길 위기에 처하기도 했습니다. 후계자의 문제와 가뭄의 문제 등 자신에게 놓인 일들을 자신의 지식, 자신의 노력으로 해결해보려고 하다가 하나님앞에 죄를 짓게 되었습니다. 이런 죄악을 저지른 아브라함에게 하나님께서는 인간적인 능력으로는 절대 약속의 아들을 얻을 수 없었던 나이 아브라함 100세, 사라 90세가 되었을 때 약속의 아들 이삭을 주셨습니다. 이렇게 인간적인 노력으로 죄와 실수를 반복했던 아브라함이지만 결국 약속의 아들을 얻고 난 후 비로소 여호와 하나님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믿음의 조상으로 회복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아브라함을 보면서 우리가 인간적 관점으로 볼 때 정말 이 거룩한 족보에 오를만한 합당한 자격을 갖춘 사람은 아브라함 때부터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을 우리는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인간적인 방식으로 살았던 아브라함과 아브라함의 후손들 모두 어쩌면 자신들의 생을 살펴보면 절대 거룩한 계보, 영광의 족보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을 보십시오. 야곱도 완전히 인생 자체가 사기꾼 아닙니까? 하지만 그 또한 하나님의 언약에 포함된 믿음의 조상 반열에 들어 있는 것을 보게 됩니다. 야곱의 열 두 아들 중 믿음의 조상으로 선택된 유다를 보십시오. 어쩌면 믿음의 삶만 따져보면 유다보다 요셉이 더 거룩한 족보에 합당한 사람같이 여겨지지 않으십니까? 그런데 왜 요셉이 아니고 유다일까요? 이유는 알 수 없습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택한 계보는 유다후손, 유다의 계보였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유다와 요셉 사이에 선택된 메시아 족보를 완성하실 때 인간 개인의 능력, 자질, 성품 등의 자격이 아닌 하나님 선택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 3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유다는 다말에게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고 베레스는 헤스론을 낳고 헤스론은 람을 낳고”
유다는 며느리인 다말의 배에서 자식을 낳았습니다. 만약 이게 이 시대 뉴스로 나왔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인터넷 포털사이트 뉴스란에 한 기사가 떴습니다. “며느리와의 관계를 통해 아들을 낳은 유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포털 사이트에 떴다면 어떤 댓글이 달리게 될까요?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아마 이런 종류의 댓글이 달리지 않을까요? ‘어떻게 유다같은 사람이 믿음의 조상이 될 수 있냐?’ ‘어떻게 이렇게 성적인 문란이 이 사회에 일어날 수 있냐?’ ‘정말 사회 말종같은 존재다’ ‘세상이 어떻게 이렇게 돌아가냐? 말세다. 말세야’
정말 부끄러워 어떻게 얼굴을 들고 살아야 할 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유다의 가문에서 다윗이 나왔습니다. 위대한 왕이라고 여겨지는 이 다윗이 유다의 가문에서 나왔습니다. 그런데 그 위대한 왕 다윗에 대해 마태복음의 족보에서는 뭐라고 기록하고 있습니까?
오늘 본문 마태복음 1장 6절을 같이 보시겠습니다.
마태복음 1장 6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이새는 다윗 왕을 낳으니라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이스라엘의 최고의 성군이라고, 이스라엘의 통일과 번영 왕국의 시대를 열었던 위대한 왕이라고 일컫는 다윗에 대한 기록,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에서 다윗은 어떤 존재입니까? 예수님의 족보에는 다윗의 일생일대의 사건, 인생 최악의 치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예수님의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이 있습니다. 총 다섯 명의 여인입니다. 이 여인들의 이름이 성경 마태복음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밧세바’라고 알고 있는 솔로몬의 어머니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여인의 이름인 ‘밧세바’ 대신에 ‘우리야의 아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미 우리야가 살아있을 때 다윗과의 불륜을 통해 잉태해서 출산했던 아이는 다윗에 대한 하나님의 징계로 태어난 지 얼마되지 않아 죽었습니다. 그 아이가 죽은 이후 밧세바가 않은 아들 솔로몬은 이미 우리야는 죽고 난 후에 다윗이 밧세바를 정식 아내로 맞이하고 정당한 부부의 관게가 된 이후에 태어났습니다. 솔로몬이 잉태될 때는 우리야의 아내라는 호칭은 맞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 계보에는 솔로몬은 다윗과 우리야의 아내의 불륜을 통해 낳은 것처럼 기록되어 있습니다. 마태복음 1장의 예수님의 족보에서 솔로몬의 어머니 이름은 ‘밧세바’가 아닌 ‘우리야의 아내’입니다. 집안의 수치, 다윗의 치명적 죄가 족보에 기록된 것입니다. 이렇게 부끄러운 죄를 가진 유다, 이렇게 부끄러운 죄를 가진 다윗의 혈통, 왜 예수님은 유다의 후손, 다윗의 후손으로 오셔야 했을까요? 바로 여기에 바로 은혜가 있습니다. 참 놀라운 하나님의 뜻속에 큰 은혜가 있습니다. 일단 우리는 유다를 향한 하나님의 예언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창세기 49장 10절입니다.
“규가 유다를 떠나지 아니하며 통치자의 지팡이가 그 발 사이에서 떠나지 아니하기를 실로가 오시기까지 이르리니 그에게 모든 백성이 복종하리로다”
야곱은 마지막 임종 전에 자신의 열 두 아들에게 축복을 남겼는데 유다에 대해서는 방금 읽은 이 예언을 남겼습니다. 이 말씀을 근거로 유다지파에서 다윗이 나왔고 다윗은 유대민족의 위대한 왕으로 세워졌습니다. 이것은 유다가 의로워서가 아닙니다. 유다가 특별한 공적을 세웠기 때문이 아닙니다. 그리고 다윗 이후 세워진 왕들을 보십시오. 제대로 된 왕들이 있는 지 말입니다. 아사, 여호사밧, 히스기야, 요시야 정도를 제외하면 삶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며 살았던 왕은 거의 없습니다. 제대로 된 왕이 없다는 말씀입니다. 다윗의 아들인 솔로몬때부터 이스라엘의 왕들은 이방 종교를 받아들이고 이방 종교와 혼합한 사상의 영향을 받으며 그들의 통치권을 행사했습니다. 이렇게 혼탁해진 종교관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왕인데도 하나님께서는 유다지파 다윗왕조의 후손을 통해 메시아가 올 것이 예언되었고 결국 유다족속 다윗의 후손으로 메시아 예수 그리스도가 오셨습니다. 바벨론으로 끌려가는 것도, 그 바벨론 포로 중 언약의 백성을 구별하고 회복의 역사를 허락하신 것도 모두 우리 하나님, 여호와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이 족보를 통해 바벨론으로 끌려간 후에도 족보가 이어지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런 족보를 통해 보여주는 것은 바로 인간의 공로, 인간의 노력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만 하나님의 뜻이 이뤄진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9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구원하사 거룩하신 소명으로 부르심은 우리의 행위대로 하심이 아니요 오직 자기의 뜻과 영원 전부터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은혜대로 하심이라”
인류의 구원자 예수님, 세상을 통치하실 메시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실 때에 인간의 공로가 전혀 개입되지 않고 있음을 성경은 분명히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언약의 도구로 쓰임받는 인간들은 그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언약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실수를 범하였습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언약을 방해하는 존재일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을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인간들의 큰 실수에도 오히려 그 실수를 변화시켜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셨습니다.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해결되지 못하는 구속사라는 역사를 하나님께서 만드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족보는 인간의 힘으로는 이룰 수 없는 그 일을 하나님의 은혜로 이루어 내셨음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부르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믿음의 반열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하나님의 긍휼을 힘입고 하나님의 용서를 받은 자만이 참 하나님의 뜻가운데 들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 사랑의 은혜를 경험하며 은혜에 감격하며 신앙생활하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것은 셋째로, 보잘것없는 인생도 쓰임받는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마태복음 1장 16절입니다.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으니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
마태복음 1장에 기록된 ‘아브라함부터 예수까지’의 역사를 보면 대략 약 2천 년의 역사가 이어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부터 다윗까지가 약 1천 년 정도, 다윗부터 바벨론 포로까지 약 4백 년 정도, 바벨론 포로시기부터 예수 그리스도까지가 약 6백 년 정도가 됩니다. 마태복음은 유대인들을 대상으로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쓰여진 복음서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자랑스러워하는 왕족의 계보, 다윗의 계보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런 왕족의 족보에 부끄러운 역사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부끄러운 역사속에는 5명의 여인이 등장합니다. 이 족보에 등장하는 여인은 ‘다말, 라합, 룻, 밧세바, 마리아’입니다. 특히 여기에 나오는 다섯 여인들은 이스라엘의 관점에서 보면 하나 같이 문제가 많은 여성들입니다. 기록된 여인 중 첫 번째 여인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에게서 자녀를 생산한 여인이며 가나안 지역에 거주한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두 번째 여인인 라합은 이스라엘이 여리고를 점령하기 전 이스라엘의 정탐꾼이 성을 정탐하러 왔을 때 정탐꾼을 숨겨준 여성입니다. 그는 그 성에서 몸팔며 생계를 유지했던 창녀입니다. 혈육으로 이방인일 뿐만 아니라 윤리적으로도 부도덕할 수 밖에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셋째 여인 룻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떠나지 않은 효부이지만 모압 태생의 이방 여인이었습니다. 넷째 여인 ‘우리아의 아내’라고 표현된 밧세바는 다윗이 외모에 현혹되어 다윗과 불륜을 저지르게 된 상대였고 그 불륜의 결과로 아이를 잉태하게 되었을 때 다윗이 자신의 죄를 덮기 위해 우리아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밧세바는 남편 우리아를 죽게 만든 여인입니다. 권력과 성욕에 눈이 먼 다윗이 하나님의 뜻을 벗어난 큰 죄를 저지르도록 동조했던 여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계보에 등장하는 다섯 여인 중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를 제외한 족보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인들은 모두 이방인이었습니다. 족보에 기록된 여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속에서 지우고 싶은 더러운 죄, 잊어버리고 싶은 치욕의 과거의 상징이 되는 여인들입니다. 영광스러운 왕의 족보, 거룩하신 메시아의 족보에 어떻게 ‘다말, 라합, 룻, 밧세바’ 같은 인물이 들어갈 수 있는 지 놀랍고 신기합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예언을 이루시기 위해,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를 성취하시기 위해 메시아로 오신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이 여인들을 사용하셨습니다. 비록 비천하고 실수도 많고 자질에 대해 문제를 삼을 수 있는 여인들이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들어서 쓰시고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은혜를 허락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일을 위해 사람들을 사용하실 때 빈부귀천, 남녀노소, 혈통인종을 절대 따지지 않으셨습니다.
로마서 3장 22절입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골로새서 3장 11절입니다.
“거기에는 헬라인이나 유대인이나 할례파나 무할례파나 야만인이나 스구디아인이나 종이나 자유인이 차별이 있을 수 없나니 오직 그리스도는 만유시요 만유 안에 계시니라”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시기 위해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을 택하시고 일하게 하셨습니다. 예수님 족보에 기록된 그 모든 사람들도 하나님께서 이 역사를 위해 상황을 만드시고 일을 하게 하시고 하나님 일의 동역자로 쓰셨습니다. 비록 능력이 부족한 사람, 나약한 사람, 비천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비록 죄가 있어 당장은 거룩하지 못한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쓰임 받으면 귀한 존재로 세워지고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이 마태복음의 족보를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바로 그것입니다. 비록 지금 이 순간 죄가 있고 비록 지금 이 순간 쓰임받지 못할 더러운 존재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택하시고 회개하게 하시고 새로운 인생으로 만드시면 우리는 귀한 쓰임을 받는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시편 51편 7절입니다.
“우슬초로 나를 정결하게 하소서 내가 정하리이다 나의 죄를 씻어 주소서 내가 눈보다 희리이다”
이사야 1장 18절입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오라 우리가 서로 변론하자 너희의 죄가 주홍 같을지라도 눈과 같이 희어질 것이요 진홍 같이 붉을지라도 양털 같이 희게 되리라”
오늘 본문 예수님의 족보를 통해서 보여주시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사람의 실패, 사람의 악함에 의해서 영향받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절대 인간의 자질에 따라 좌절되거나 실패할 일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어떤 자질, 능력, 혈통을 보며 행하시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전적 은혜와 하나님의 전적 선택을 통해 하나님 쓰실 사람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시고 하나님께서 일을 만드시고 행하게 하시면서 역사를 만드십니다. 비록 비천하다 할지라도, 비록 가진 것이 없다고 할지라도, 비록 죄를 지어 사람들에게 손가락질 받는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는 나중에 새롭게 변화되어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는 도구로 쓰임받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택하셔서 일을 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족보에 기록된 이 사람들도 하나님의 선택을 받아 예수님의 족보에 들어간 사람들입니다. 우리 또한 지금 당장 능력도 없고, 자질도 없고, 심지어 아직 은혜를 못 받아 구원의 확신조차 없다고 할지라도 이제라도 하나님께서 쓰시면 갑작스럽게 변화되고 하나님의 위대한 일에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앞에 쓰임받기를 기대하며 기도하며 살아가야 할 줄 믿습니다.
고린도전서 1장 27~29절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이 지금 보잘것없는 형편, 뭔가 해내기 힘든 자질, 부족한 인성이 있습니까? 지금 은혜 체험을 하지 못해 열정이 없는 삶이 있습니까? 우리의 모습을 볼 때는 정말 부끄럽기 짝이 없지 않습니까? 하지만 이런 우리 자신의 모습에 낙담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비록 이런 나의 모습, 비록 나의 형편이라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시고 나를 사용하시면 하나님의 큰 일을 해낼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살아가시기를 소망합니다. 비록 자격과 조건은 안되지만 언제라도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귀한 도구로 쓰시기 위해 나를 부르실 때 내가 ‘아멘 내가 순종하겠습니다’라고 응답할 때 하나님께서 쓰시고 크게 쓰임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말씀을 맺을까 합니다.
오늘 우리가 살펴본 예수님의 계보에 가장 크게 주목받을 인물은 예수님의 어머니 마리아입니다. 사실 예수님의 족보를 앞에서 기록했던 방식을 따라 예수님의 부모에 대해 기록해야 한다면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고 표현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에서는 요셉은 단지 “마리아의 남편”일 뿐입니다. 또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마리아가 낳았다라고 표현되지도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 칭하는 예수가 나시니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를 낳은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마리아의 몸을 빌어 태어나셨다’는 것입니다. 예수탄생의 주체는 마리아도 아니고 요셉도 아닙니다. 예수탄생의 주체는 바로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께서 마리아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이 땅으로 보내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신 모든 과정의 주권자는 여호와 하나님이십니다.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으로 요셉과 마리아의 가문을 도구로 사용하셔서 이 땅에 하나님의 아들을 보내신 것입니다. 마태복음의 예수님 족보는 하나님 언약의 성취를 보여주며 이 언약의 성취를 위해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의 모습으로 오셨다는 사실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또한 이 족보를 통해 하나님의 은혜를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인간의 노력, 인간의 공로, 인간의 자질 등 인간이 가진 어느 것도 이 족보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마태복음의 이 언약 족보를 통해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은 바로 이제 구원받을 백성들은 하나님의 은혜로 부르심을 받게 될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의 은혜가 온 세상 모든 민족에게 퍼지게 될 것을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오늘 살펴본 이 예수님의 족보는 우리에게 혈통의 우수성을 강조하지 않습니다. 이 족보가 유대인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것도 아닌 것을 우리는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의 혈통을 강조하고 유대인만을 위한 족보를 기록하려고 했다면 절대 악한 죄의 모습, 이방 여인들의 이름 기록, 불법적인 가계 흐름을 기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족보를 통해 예수님을 통해 이 땅에 선포될 하나님의 나라, 예수님을 통해 전 세계 가운데 퍼질 하나님의 복음을 강조합니다. 그리고 그 복음의 위대한 역사를 위해 인간의 죄를 짊어지고 죽어주실 하나님 아들이 이 땅에 오신 것을 선포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 언약의 혜택으로 구원을 받습니다. 우리는 이 족보에도 기록된 여인들처럼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의 반열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우리가 구원받을 이유 그것은 바로 우리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예수님, 우리의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 때문입니다. 저와 여러분이 예수님께서 나를 구원하여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을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