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안의 혈통
모든 사람에겐 족보가 있다. 나이 80에 우리 집안 내력을 간략히 진주 지역 친척들에게 알리고저 한다. 우리 집안의 족보를 뒤적거리면 김해김씨 사군파(四君派)로 나온다. 사군파는 네 분 무장의 무맥(武脈)을 이은 혈통이다. 첫번째 극조(克祧) 할아버지는, 신장이 9척((2m 70cm)이고, 얼굴이 아주 붉었으며, 근력이 강하여 활을 당기는 힘이 300근 되는 물건을 들어올리는 힘과 맞먹었다고 한다. 목소리는 천둥소리 같았으며, 손으로는 쇠갈쿠리를 펼 수 있었고, 호두와 잣 같은 아주 단단한 것을 모두 손으로 껍질을 깠다고 한다. 의성현감을 지냈고, 사후에 병조판서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으로, 학천군(鶴川君)에 봉해졌다. 극조 할아버지 아드님 완(完) 할아버지 역시 타고난 무골이었다. 신장은 7척장신이고, 기백이 천사람을 제압하였다. 힘이 다른 사람과 달리 출중하여 크나큰 솥도 불끈불근 드는 용력을 가졌으며, 특히 활을 잘 쐈다. 이괄의 난을 만나, 도원수 장만(張晩)의 선봉장으로 서대문 밖, 질마재에서 반란군을 격파하여, 난이 평정되자 진무공신(振武功臣) 학성군(鶴城君)으로 봉해졌고, 임진왜란 시는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옥포전투, 한산도대첩에서 뛰어난 활약을 보였고, 후에 전라우수사, 황해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다. 학성군 完 할아버지의 장남 여수(汝水) 할아버지는, 인조 때 무과양장(兩場) 장원(狀元) 하시어, 왕이 친히 삼괴당(三魁堂) 3자를 하사했다. 용모가 장대하고, 임기웅변에 능했고, 평상시에도 무기와 사서를 손에서 놓지 않았다. 사헌부 감찰, 절충장군 함경남도 병사 겸 북청부사, 북도병사 등 여러 요직을 역임하다가, 해성군(海城君)에 봉해졌으며, 제주목사, 포도대장 등을 거쳤고, 사후에 의금부 오위도총부 도총관, 호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해성군의 아드님 세기(世器) 할아버지는 효종 때 무과급제하여, 내금위장, 전라좌도수군절도사, 함경남도 병마절도사를 지냈으며, 남한산성 외곽을 쌓으셨고, 학림군(鶴林君)으로 봉해졌다. 우의정 이완(李浣) 장군이 그를 한번 보고는 말하기를 “정말 호랑이 같은 아버지에 호랑이 같은 아들이다.”라고 했다. 행실과 기량은 보통사람보다 뛰어났고, 두드러진 장수의 기풍으로서 동료와 부하들을 어루만지고 사랑했다고 한다. 임종 시는 <어떤 곳이 성을 쌓을 수 있고, 어떤 곳에는 병사를 매복시킬 수 있으며, 어떤 전함은 어떻게 만들어야 한다>는 등 끊임없이 말씀하시기를 애쓰다가 돌아가셨다. 부고를 들은 임금이 괴롭게 애도하며 집무를 보지 않고 예관을 보내어 제사를 드리게 했다. 이로서 이른바 김해김씨 사군파(四君派)가 이뤄진 것이다. 세거지는 영암이었고, 12대 후손인 允原 할아버지가 진주 향교에 부임하여 옮겨와 진양호 옆 石甲山 묻히셨다. 나는 允原 할아버지로부터 11대 후손이며, 작년에 사촌동생 창선이가 석갑산 선산이 진양호 공원에 포함되자, 보상비를 받아 명석면 신기리 산 224 광제산 봉수대 밑 땅 3만평을 사서 옮겼다. 나의 혈통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조 수로왕은 신장이 9척으로 은나라 탕왕과 같았고, 얼굴이 용안인 것은 한나라 고조와 같았으며, 눈섶의 팔채(八彩)는 요임금 같았고, 두 눈동자를 가진 중동(重瞳)은 순임금과 같았다고 한다. 수로왕의 12대 손으로, 삼한을 통일한 김유신 장군 역시 뛰어난 명장이다. 원래 김해김씨 자체가 무골 혈통이다. 무장은 전쟁에 임하여, 남보다 더 용맹스럽고 과감한, 임전무퇴(臨戰無退)의 정신을 가졌을 것이다. 천군만마를 호령하는 기개로, 강한 상대 앞에서도 굽히지 않는 불굴의 정신을 보였을 것이고, 약한 자 앞에서는 큰 도량을 보였을 것이다. 작전에 임하여, 남보다 더 치밀하고, 스케일이 컸을 것이고, 동료를 사귐에 믿음이 강하고, 결코 겉으로 겸손한 척 하면서 속으로 딴 마음 품는, 옹졸한 인간이 아니었을 것이다.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피가 내 혈관 속에 흐르고 있다. 자랑스런 혈통이다.
끝으로 나의 아버님 金性奉 선생을 소개한다. 若山 김성봉 선생은 1944년 해방이 되자, 진주극장에서 열린 시민대회 건국준비 위원회 의장을 하셨다. '건준'은 경찰서와 시청을 일본인에게서 인수 받고 치안을 유지했다. 해방 기념으로 음악인 남인수와 이재호, 여류성악가 황필연을 초청하여, 진주극장에서 아버님 사회로 음악회를 열었다. 해방 전에는 진주 유지들이 나라를 찾기 위한다는 취지로 만든 일본 유학 장학생에 뽑혀 일본에서 수학하기도 했다. 초등학교 시절은 진주 중안 초등에서 당시 5살 연상인 청담스님이 반장, 아버님이 부반장을 하시어 나중에 청담스님이 조계종 종정을 지내실 때 아버님이 상경하시면 우리 형제들을 데리고 조계사로 찾아가시곤 했다. 안의 중학교장, 문산 중고교장, 진양군 교육감을 지내시며, 1960년 까지 30년 지역 교육계의 중심 인물이었다. 진주사범 재직 시는' 화랑전기'를 저술했다. 지금 국립도서관에서 열람해보면, 당시 화랑에 대한 저술을 남긴 분은, 단재 신채효와 아버님 두 분 밖에 없다. 경향신문 편집국장 김경래, 우루과이 대사 김창남, 우리나라 최초로 '악의 꽃'을 번역한 불문학의 태두 숙대 박남수 교수, 교육부 차관을 역임한 정희채 정태수 두 분이 아버님이 사랑한 애제자다. 안의 중고교장은 사범학교 동문 이시우 씨와 아나키스트 꿈을 실현하기 위해 참가한 것이며, 개천예술제를 만든 설창수 씨, 비봉루 은초 정명수 선생과 교류했다. 임란 때 진주성을 지키다 순국하신 분들을 모신 彰烈詞 重修記 비문을 쓰셨고, 인조대왕이 은신하셨던 이반성면 聖殿庵 현판 글씨를 썼고, 촉석루 옆에 세웠던 6.25 전몰군경 충혼탑 비문을 남겼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