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을 읽다 보면 타르세오(θαρσέω)라는 단어와 마주친다.
우리말 성경은 이를 '안심하라' 혹은 '담대하라'고 간단히 번역해 두었다.
꽤나 위로가 되는 말처럼 들린다. 다 끝났으니 이제 발 뻗고 쉬라는 뉘앙스마저 풍긴다.
하지만 문맥을 파고들어 보면 사정은 좀 다르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특이하게도 오직 명령형으로만 쓰였고,
그 명령의 주체는 늘 예수님이다.
그렇다면 언제 이 명령을 내리셨을까.
대부분 타이밍이 기가 막히다.
예루살렘의 살기등등한 유대인들 틈바구니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바울에게, 로마로 가서 또 고생길을 걸으라며 이 단어를 썼다.
풍랑이 몰아치는 한밤중, 유령인 줄 알고 비명을 지르는 제자들에게도 이 말을 던졌다.
혈루증을 앓던 여인이나 앞을 못 보는 맹인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종합해 보면 이 단어는 따뜻한 코코아 한 잔 쥐여주며 "수고했어, 이제 자라"고 하는 말이 아니다.
오히려 "지금까지 고생한 건 내가 다 안다. 억울한 거, 아픈 거, 부끄러운 거 다 안다. 그런데 말이다, 아직 갈 길이 남았다. 조금만 더 힘내자"라는, 다소 야속하지만 그래도 동행하신다는 격려에 가깝다.
요한복음의 거리 감각을 빌려 계산해 보자.
제자들이 물 위를 걸어오시는 예수를 만난 지점은 갈릴리 호수 한가운데였다. 이 '가운데'라는 위치가 주는 절망감을 아는가. 돌아가기엔 너무 멀리 왔고, 나아가기엔 턱없이 많이 남은 그 진퇴양난의 지점.
바로 그 숨 막히는 정중앙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이때 들려온 타르세이테(θαρσεῖτε), 즉 "안심하라"는 외침은 "상황 종료" 선언이 아니라, "내가 함께하니 다시 노를 저어라"는 작전 변경 명령이다.
타르세이테, 에고 에이미, 메 포베이스테(θαρσεῖτε, ἐγώ εἰμι· μὴ φοβεῖσθε).
"안심해라, 나다. 두려워 말라."
이럴 때 주님은 절대 순간 이동 시키지 않으신다.
우리는 종종 인생의 파도 앞에서 리셋 버튼을 찾는다.
그냥 눈 딱 감았다 뜨면 목적지에 도착해 있기를, 이 지긋지긋한 과정이 생략되기를 바란다. 내 무능함이든, 환경 탓이든, 부끄러운 과거든 다 덮어두고 '새 파일'을 열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인생은 편집을 허용하지 않는다.
비바람은 여전히 몰아치고, 옷은 젖어 있고, 팔은 떨어져 나갈 듯 아픈데 예수는 다가와서 "힘내라"고 한다. 우리 성경에서는 “담대하라”고 많이 번역되었다.
때로는, 참 서운하다.
하지만 뒤집어 생각하면 이것만큼 확실한 보증수표도 없다.
끝이 아니기에 힘을 내라는 것이고,
당신이 감당한 그 고통을 하나님이 알고 있다는 뜻이니까.
목적지가 남아 있다는 건, 아직 당신이 필요하다는 증거다.
그러니 밤새워 노를 젓고 있는 믿음의 동지들이여,
파도가 높다고 낙심하거나 노를 집어던지지 말자.
예수는 "세상에서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θαρσεῖτε),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고 했다. 평화는 파도가 없는 상태가 아니라, 파도 위에서 예수와 함께 있는 상태 그 자체다.
어차피 늘 평온할 수는 없다.
꽤 오랫동안 더 젖어야 하고, 더 지쳐야 할지도 모른다. 잠들지 못하는 밤이 이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주님이 배에 타셨다. 가라앉지 않는다.
가라하신 분도 주님이시다.
그러니 쥐고 있는 그 노를 놓치지 말자.
우리는 결국 도착한다.
꼭 도착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