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8월 29일 ‘경술국치’를 당하여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괴로워했다. 차마 일본의 노에로 살 수 없다고 하여 많은 지사들이 순국 자정의 길을 택했다. 국외로 망명했던 박은식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구차하게 살아가는 노예라고 짜책하면서 자신의 호를 무치생(無恥生) 혹은 태백광노(太白狂奴)라 불렀다.
그는 한민족의 고토(故土)인 간도에서 영광스러운 고대사 연구를 통해 괴로움을 이겨냈다. 국치 후에도 적국 일본에 남아 법학을 공부해야 했던 조소앙은 심신이 파면되는 위기를 맞았으나, 기독교에 귀의하고 세계의 종교와 철학을 연구하면서 이를 극복했다.
경북 성주에서 태어난 김창숙(1879~1962)은 어려서 유학을 배웠으나 일찍부터 개화하여 구국운동에 참여했다. 1908년 대한협회 성주지부를 조직하고 총무로서 개화와 혁신에 앞장섰으며, 성주지역 국채보상운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1909년 합방론을 전파하던 일진회 성토운동을 주도하여 일본 헌병과 경찰에 수차례 연행되기도 했다. 이처럼 김창숙은 자주독립국가 건설을 위한 성주지역 구국운동 지도자로 성장하고 있었다.
31세 청년 지도자에게 경술국치는 크나큰 시련이었다. 그는 파멸적 상황에 직면했다. ‘자서전’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경술년 8월 나라가 망하자 나는 통곡하며 ‘나라가 망했는데 선비로서 이 세상을 사는 것은 큰 치욕이다’하고, 매일 술을 마시어 취하지 않고는 그만두지 않고 취하면 문득 울었다.”
명색이 양반이라고 하는 자들이 일본으로부터 은사금을 받고 기뻐하는 것을 보고는 침을 뱉으며 “개돼지‘라고 비난했다. 이후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양반들과 상종하지 않고, 잇속 하인배 따위의 술꾼, 노름꾼과 어울려 놀기를 좋아했다. 매일 술퍼 마시고 윷이나 던지며 읍내 장터를 미친 듯이 노래하며 쏘다니고 산과 바다를 헝클어진 머리로 방황하기도 하였다. 이런 모습을 보고 남들이 ”김창숙이 미쳤다“고 하면 ”맞는 말이다. 내가 생각해도 미쳤다고 할 수밖에 없다“고 대꾸했다.
김창숙은 이런 미치광이 행동을 스스로 끝낼 수가 없었다. 1913년 겨울 어머니는 집에 돌아온 탕아를 붙들고 크게 울면서 다음과 같이 꾸짖었다.
“너는 훌륭한 어른의 종손으로 책임이 중하다. 그리고 늙은 어미가 너를 믿고 의지하고 있다. 경술년 이후 술에 취해 무뢰배와 어울리면서 난봉꾼․악소배가 되었구나. 남들이 미쳤다고 하는데 참으로 미친 것 같다. 조상의 사당에 어찌 서겠느냐? 그러나 이제라도 개과천선하면 사람들이 우러러 보게 될 것이다. 너는 나이가 젊다. 학술를 닦으면서 서서히 우리나라의 광복을 도모하되 기회를 보아 움직이는 것이 곧 너의 나아갈 길이다. 네가 늙은 어미의 훈계를 잘 생각해서 스스로 새 사람이 되고 분발한다면 이 어미는 비록 죽는 날에도 아무런 여한을 갖지 않을 것이다.”
훈계를 들은 김창숙은 어머니를 껴안고 통곡하면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이후 그는 4~5년 동안 독서에 전념하였는데, 그는 회고하기를 자신 일생의 학문의 득력은 이때 이루어졌다고 했다. 이후 그는 유림단의파리장서 운동을 주도하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했다가 체포․투옥되었다. 해방 후에는 성균관대학교를 설립하고 초대 학장이 되었다.
[김기승 순천향대 교수․한국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