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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마가복음 제15강
뭇사람의 끝이 되어야 하리라
말씀 / 마가복음 9:30-50
요절 / 마가복음 9:35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사람은 누구나 첫째 되는 인생을 살고 싶어 합니다. 아무것도 아닌 자가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첫째 되는 사람이 되고자 권력 싸움도 하고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으려고 피나는 노력도 합니다. 그렇게 하다 보면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를 얻고 어떤 모임의 일인자가 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들을 가리켜 첫째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첫째는 어떤 사람일까요?
30절을 보십시오. 귀신 들린 아들을 둔 아버지를 도와주셨던 그곳으로부터 나와 갈릴리 지역의 가운데를 통과하는 중이었는데 예수님은 제자들과 자신이 그곳을 통과한다는 사실을 아무도 알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방지역도 아닌데 왜 그러셨을까요? “이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며 또 인자가 사람들의 손에 넘겨져 죽임을 당하고 죽은 지 삼일만에 살아나리라는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이더라(31).” 예수님이 넘겨지고 죽고 삼일만에 살아날 것을 제자들에게 반드시 가르치셔야만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일을 철저히 자제하면서까지 제자들을 가르치는 일에만 집중하셨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예수님이 집중적으로 가르치는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깨닫지 못하면 질문이라도 해야 하는데 질문하기조차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다 어느덧 가버나움에 도착했고, 베드로의 집에 계실 때 예수님은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너희가 길에서 서로 토론한 것이 무엇이냐?” 그러나 제자들은 대답하지 않았고 침묵만 흘렀습니다. 왜냐면 길에서 서로 “누가 크냐?”며 논쟁을 벌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넘겨지고 죽고 삼일만에 살아날 것을 가르치기 위해 온 힘을 다 쏟고 있는데 정작 제자들은 “누가 크냐?”라는 문제로 다투고 있었던 것입니다. 토론 주제가 예수님의 생각과는 너무 달라 막상 그걸 말하려니 면목이 없었던 모양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도착하시면 당장에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것으로 기대했습니다(눅19:11). 그러면 예수님이 왕이 되고 내각이 구성될 것입니다. 그들은 내각 편성 때 누가 가장 높은 자리에 앉을 것인가 하는 문제로 신경이 날카로워졌습니다. 그들은 한 치의 양보도 없이 가장 선두를 달리고 있는 베드로를 깎아내리기 위해 네거티브 전략을 쓰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야말로 첫째 자리에 앉기에 가장 합당하다고 열변을 토했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생긴 알력 다툼으로 제자공동체는 사랑의 관계성이 파괴되고 시기심, 미움, 분노가 자라나기 시작했습니다. 제자들은 모두가 다 자기가 가장 큰 자가 되기를 바랐습니다. 아무도 둘째 되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제자공동체의 위기입니다. 이때 예수님은 어떻게 하십니까? 35절을 읽겠습니다. “예수께서 앉으사 열두 제자를 불러서 이르시되 누구든지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하시고”
“내가 지금 넘겨지고 죽을 것이라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너희들은 서로 첫째가 되려고 싸우고 있다고? 너희들 정신을 못 차리는구나. 아무래도 내가 너희들을 잘못 가르친 것 같다. 너희들은 이제 내 제자가 아니다. 나를 떠나거라!” 이렇게 예수님은 초강수를 둘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자리에 앉으셨습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불렀습니다. 다시 가르치기 위해서입니다. 그런데 이제 가르침의 주제가 달라졌습니다. “만약 누구든지 첫째가 되기를 원한다면”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집중하여 가르치려던 주제를 내려놓고 제자들이 논쟁하던 그 주제를 채택하여 설명하기 시작합니다. “너희가 지금 누가 크냐고 논쟁할 때냐!” 책망하기보다는 큰 자가 되는 길을 설명해 주십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면 뭇사람의 끝이 되며 뭇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 이 말씀은 모순입니다. 뭇사람의 끝은 꼴찌지 첫째가 아닙니다. 그리고 사람이 첫째가 되려 하는 이유는 ‘존경과 대접을 받기 위해’ 그러는 것인데 뭇사람을 ‘섬기고 대접하라면’ 첫째가 될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이해할 수 없는 궤변 같습니다. 제자들 사이에 다시 침묵이 흘렀을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 말씀의 의미가 무엇일까요?
먼저, 뭇사람의 끝이 되는 게 뭘까요? 이는 영어로 “he must be the very last”로 순서상의 맨 끝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서열상 가장 낮은 위치에 가서 서라는 것입니다. 아니 치열하게 경쟁해도 겨우 살아가는 세상에서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다른 사람들이 좋은 것 다 챙겨 가는데 맨 끝에 서서야 어디 자기에게 돌아올 국물이라도 있을까요? 세상은 꼴찌를 생각해 주지 않습니다. 기억하지도 않습니다. 2등도 잘 기억해 주지 않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세상 같습니다. 세상은 그만큼 여유롭고 자비롭지만은 않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항상 남들을 자기보다 앞세우는 것, 자기는 맨 끝으로 내려가는 것, 이것이 ‘첫째’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사실, 사람들은 자기보다 앞에 서 있는 사람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왜냐면 그가 좋은 것을 나보다 먼저 가져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모든 영광을 그 사람이 다 가져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만큼 자기는 무시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내 영광은 어디 있냐고요?” 자신의 영광을 악착같이 챙기려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어찌하든 남보다 앞에 서려고 나섭니다. 이걸 생각해 보면, 우리는 절대 맨 끝에 서면 안 될 것 같습니다. 그럼 맨날 꼴찌만 하라는 말일까요? 학교 공부에서도 꼴찌, 직장에서 승진 고가 반영하는 평가에서도 꼴찌, 이런 말일까요? 우리는 예수님의 모습 속에서 끝이 되는 게 뭔지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시지만 사람의 모양이 되셔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이 땅에 오시되 사람들 위에 군림하는 자의 모습으로 오지 않으시고 인생들을 섬기는 종의 모습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태어나실 때부터 창조주로서는 도저히 거할 곳이 못 되는 ‘the very last’의 장소인 마구간 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모든 면에서 당연히 첫째의 서열로 사셔야 했지만 이렇게 모든 사람의 끝이 되시고 만물의 찌꺼기 같은 모습으로 인생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이 죽으신 십자가 형틀은 죄인들에게는 가장 끝에 있는 저주의 형틀입니다. 이 십자가는 우리 인생들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의 으뜸이신 예수님이 선택하신 길입니다. 사람 중에는 게을러서 꼴찌가 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누구보다도 능력 많으신 분이시지만 모든 사람을 섬기기 위해 맨 끝에 서셨습니다. 능력이 많냐 적냐를 말하는 게 아니라 자동으로 끝이 되고 자동으로 꼴찌가 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가 끝이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을 위해 내가 섬기는 위치에 서는 것입니다.
여기, 또 ‘뭇사람을 섬기는 자’라는 말을 영어 성경에 보면 “servant of all”입니다. 모든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된다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영광 받고 대접받기를 좋아합니다. 아무도 다른 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기꺼이 다른 사람의 종이 되고자 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떤 때입니까? 최고 권력자나 최고 권위자, 혹은 재벌 총수의 종이 되는 것은 오히려 영광스럽게 생각하기도 합니다. 사람은 자기가 존경하여 섬길 만한 사람은 섬깁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다른 것입니다. 뭇사람의 종이 된다는 것은 섬길 만한 사람, 존경하는 사람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세상에 얼마나 많은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까? 이해 안 되고 감당 안 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상식에 벗어난 일을 아무런 문제의식 없이 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골치 아픈 사람, 예의 없는 사람, 무시하고 싶은 사람, 미운 사람, 각종 죄인, 아무리 섬겨도 변하지 않는 사람, 언제나 자기를 비판하고 공격하는 사람 등 세상에는 정말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별의별 사람들이 정말 많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말씀은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이런 사람들의 종이 되어야 한다고 하십니다. 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필요를 알고 섬기는 것을 말합니다. 여기에는 당연히 자기희생이 따릅니다. 이것은 너는 무작정 다 받아주고 너는 무작정 견디라는 말은 아닙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을 섬기는 마음, 대접하는 마음, 그 사람에게 무엇이 진정한 유익과 도움이 되는지를 깊이 헤아려 도와주는 것입니다. 물론 때로는 가르침과 책망도 필요할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우리 마음 가운데 그 사람을 진심으로 위하는 마음이 밑바탕에 있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섬김이 필요한 그 사람을 돕기 위해 여러 섬김과 돌봄을 감당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뭇사람을 섬기는 것이 무엇인지 보여주십니다. 어린아이 하나를 데려다가 제자들 가운데 세우시고 팔로 끌어안으시며 말씀하셨습니다. 37절을 보십시오. “누구든지 내 이름으로 이런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면 곧 나를 영접함이요, 누구든지 나를 영접하면 나를 영접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함이니라.” 예수님과 제자들이 모인 그 집은 베드로의 집으로 여겨지는데, 심각한 주제로 지금 토론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평소에는 집에 들어가면 식사부터 하고 아이들과 잠깐 놀아주기도 할 여유가 있었을 것인데 워낙 심각한 사안이기 때문에 집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안방으로 직행하여 가르침을 시작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다 보니 “지금 어른들이 중요한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너희들은 저기 가 있어.” 이런 식으로 아이들을 대했을 것입니다. 그럴 때 예수님의 이름으로 어린아이를 영접한다는 것은 어떻게 하는 것일까요? 여기 ‘영접한다’는 것은 팔을 벌려 ‘welcome’하며 품에 안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님이 친히 시범을 보여주셨습니다. 우선은 아이를 데려와야 합니다. 다음에는 가운데 세워야 합니다. 다음에는 팔로 끌어안아야 합니다. 그러나 어린아이는 낯선 사람이 부르면 잘 오지 않습니다. 제가 그렇게 봄별이를 안아보려고 해도 지금껏 제대로 안아본 적이 없습니다. 아이가 원하는 것을 주거나 충분한 시간을 두고 잘 해줘야 옵니다. 종종 어른들 중에 아이가 귀엽다고 덥석 안으려고 하는 경우가 있는데 도망치던가 울기 십상입니다. 어른들 가운데 아이를 세우는 것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유대인들은 당시 이런 어린아이들을 별 도움이 못 되고 미성숙하다 하여 사람 수를 셀 때 숫자에도 포함하지 않았습니다. 정리하면 어린아이는 섬김을 많이 필요로 하는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를 데려다가 먼저 팔 벌려 그 품에 안으시고 품어주셨습니다. “welcome!” 예수님은 많은 섬김을 필요로 해서 사람들이 귀찮아하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들을 한 인격으로 대접하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귀하게 여겨주신 것입니다. 이렇게 어린아이와 같은 한 사람을 받아주고 섬기고 사랑하는 것이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의 할 일이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영접하는 것이고 하나님을 영접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은 죄로 병든 우리들을 위해 독생자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우리는 참 부족하고 연약하고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입니다. 정말 어린아이 같이 미성숙하고 많은 돌봄과 섬김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런 어린아이 같은 우리 인생들을 영접해 주시고 섬겨주셨습니다. 우리의 끝이 되어 주시고, 마지막에는 십자가에서 자기 목숨을 우리를 위한 대속 제물로 희생하여 드리셨습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모두 다 섬김이 필요한 자들입니다. 그런 만큼 주 안에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사람의 끝에 서고 헌신과 희생으로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첫째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인생들의 끝에 서시고 자신을 희생하시면서까지 인생들을 섬기신 예수님의 “첫째로의 가치관”을 배우고 따라가야 합니다.
사실, 이렇게 희생하여 섬기지 않더라도 누가 뭐라 하지 않습니다. 일반 세상 사람들처럼 그저 그렇게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제자로서, 성도로서 “첫째의 의미”에 대한 가치관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가치관으로 달라져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우리 성도들에게 뭇사람의 끝이 되는 것과 섬기는 것의 표준은 언제나 예수님이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배우고 따라가는 삶은 자기를 희생해야 하기 때문에 피곤하고 좀 힘들겠지만, 그러나 이렇게 뭇사람의 끝에 서고 뭇사람을 섬기는 사람은 마음에 하나님의 위로와 하나님이 주시는 신령한 기쁨을 얻고 누리게 될 것입니다. 결국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귀하게 여겨주시고 “진정한 첫째”로 세워주십니다. 이런 우리에게 하나님이 이 땅에서도 인정과 영광과 존귀를 받게 하실 것입니다. 또한 장차 하늘의 상과 영광을 우리 성도들에게 허락하실 줄 믿습니다.
38절을 보십시오. 한 번은 요한이 분개하며 예수님에게 여쭈었습니다. “선생님, 우리를 따르지 않는 어떤 자가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내쫓는 것을 우리가 보고 우리를 따르지 아니하므로 금하였나이다.” 얼마 전, 예수님은 귀신을 쫓아내지 못하는 제자들을 ‘믿음이 없는 세대’라고 책망하셨습니다. “기도 외에 다른 것으로는 이런 종류가 나갈 수 없다”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그러니 귀신을 쫓아낸 그 사람은 기도하는 사람이 분명하고, 심지어 제자들보다 믿음이 좋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를 따르지 않는 사람’이라고 단정하고 배척했습니다. 예수님은 많은 섬김을 필요로 하는 어린아이라도 영접하라는 가르침을 주고 있는데 예수님의 제자라는 요한은 믿음의 본이 될 만한 사람도 배척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믿는 제자들끼리도 경쟁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사람과도 경쟁하는 모양입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마지막 자리에 서 있는 사람, 섬기는 자의 자리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지 영접할 수 있습니다. 나보다 믿음이 좋고, 귀신을 잘 쫓아내더라도 그 사람을 시기하거나 미워하지 않고, 영접하고 존중하고 그에게서 배울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의 하는 일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을 의지하여 일을 행해 놓고는 그 즉시 예수님을 비방할 자는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 놓고는 예수님을 비방하면 모순이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과 제자공동체를 반대하지 않는 자는 우리를 위하는 자라고 말씀하십니다. 또 누구든지 제자들이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을 것이며, 반대로 누구든지 믿는 이 작은 자들 중 하나라도 실족하게 하면 연자 맷돌을 목에 두르고 바다에 뛰어드는 것이 낫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생각해 보면, 첫째가 되려면 뭇사람의 마지막 끝이 되라고 가르치신 분이 예수님입니다. 많은 사람을 섬기는 자가 되라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렇다면 교회 공동체는 끝이 되기 위해 경쟁해야 하는 모임이고 서로 섬기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여야 마땅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의 이름을 위해 살고 예수님을 믿는 성도로서의 태도입니다. 그런데 부끄럽게도 그게 쉽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 사이에서도 경쟁이나 시기, 다툼이 심한 경우가 꽤 많습니다. 자존심을 조금 상하게 하거나 무시하면 얼굴도 보지 않고 등 돌리는 경우도 많이 있습니다. 평생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믿는 사람들 사이에서 한 사람이라도 실족하지 않도록 주의하여 섬기는 것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믿음이 연약한 성도들에게, 또 어린 양들에게 말 한마디, 행동 하나도 신중하고 조심해야 합니다. 그러면 어느 정도 주의해야 할까요?
43,45절을 보면, 예수님은 정신이 번쩍 들 정도로 강력하게 말씀하십니다. 손이 범죄하게 하면 찍어버리라고 합니다. 장애인으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온전한 두 손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발이 범죄하게 하면 찍어버리고 합니다. 저는 자로 영생에 들어가는 것이 두 발을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또 소중한 눈이라도 범죄하게 하면 뽑아버리라고 합니다. 한 눈으로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두 눈 다 가지고 지옥에 던져지는 것보다 낫기 때문입니다. 지옥은 구더기도 죽지 않고 불도 꺼지지 않는 곳입니다. 꿈틀거리며 우리를 괴롭히는 벌레가 있다면 얼른 잡아서 죽이면 되는데 지옥에서는 잡아 죽일 수 없습니다. 죽지 않는 벌레이기 때문입니다. 뜨거운 불이 소금치듯 뿌려진다면 불을 꺼버려야 평안히 살 수 있는데 그 불은 끌 수가 없습니다. 피할 수 없고 쉴 수 없는 고통이 지속되는 곳입니다. 그곳은 무조건 피해야 합니다. 이처럼 어린아이 하나를 영접하는 일, 시기심 생기는 사람을 배척하지 않고 영접하는 일, 믿음이 연약한 사람을 실족하지 않도록 하는 일이 천국과 지옥을 좌우한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문제입니다.
내 손보다 귀한 것이 없다는 생각이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내 발보다 소중한 것이 세상에 없을 것입니다. 내 눈도 마찬가지입니다. 손과 발보다도 눈이 훨씬 더 중요할 수 있습니다. 나는 귀신을 못 쫓아냈는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냈습니다. 눈꼴 사납고 꼴 보기도 싫을 것입니다. “너, 우리를 따르지 않으면서 왜 함부로 예수님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는 거야? 허가받은 적 있어?” 발을 움직여 그를 쫓아가고 손을 움직여 손가락질하며 혼을 낼 것입니다. 그러나 어찌보면, 그 사람은 너무도 귀한 믿음의 동역자입니다. 한편으로는 제자들에게 본이 되고 믿음의 도전과 자극을 주는 사람인데, 어떻게 보면 시기 질투가 생깁니다. 그때 시기 질투하는 그 눈은 뽑아버리는 게 좋습니다.
첫째가 되는 것만 좋아 보이던 눈입니다. 꼴찌가 되는 것을 슬퍼하는 눈입니다. 음란하고 죄 많은 그 시대의 눈입니다. 믿음이 없는 눈입니다. 오랫동안 내게 박혀있던 눈이니 소중한 것 같아 빼버리기 두렵지만 사실은 무엇이 생명으로 가는 길인지, 무엇이 지옥으로 던져질지 보지 못하는 눈입니다. 그렇다면 빼버리는 것이 낫습니다. 분별하는 눈이 소중하다고 움켜쥐고 있다면 예수님과는 평행선을 달리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고 예수님을 제대로 볼 수 없고 예수님께 답하기도 묻기도 싫어지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에게서 멀어지는 것보다 뽑아버리는 것이 복입니다. 왜냐면 예수님에게 가까워지는 것이 진정한 복이기 때문입니다. 뽑아버리면 더 이상 멀어지지는 않을 것 아니겠습니까? 나의 뿌리 깊은 이기적이고 배타적인 가치관이 나를 잘 살 수 있게 해준다고 생각하는데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아들일 수 있고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50절을 읽겠습니다. “소금은 좋은 것이로되 만일 소금이 그 맛을 잃으면 무엇으로 이를 짜게 하리요? 너희 속에 소금을 두고 서로 화목하라 하시니라.” 아까 “불로 소금 치듯 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소금이 나쁜 것이라는 인상을 줄 수 있는데 사실 소금은 나쁜 것이 아니라 좋은 것입니다. 음식에 소금이 들어가 소금 맛이 베어나야 음식 맛이 살기 때문입니다. 소금이 없는 음식은 맛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지옥은 불로 소금 치듯 하여 살이 타고 뜨거워 괴로운 곳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제자공동체는 그런 곳이 아닙니다. 소금이 녹아 음식 맛을 내어 사람들을 즐겁고 맛나고 행복하고 풍요롭게 하는 것처럼 제자공동체는 인생사는 맛이 살아나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제자공동체는 화목하고 서로 사랑하므로 인생 살만한 것이라고 느끼게 하는 곳, 즐겁고 맛깔나고 행복하고 풍요롭게 하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첫째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뭇사람의 끝에 서고 뭇사람을 섬기는 종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예수님처럼 구속역사 속에서, 또 하나님의 나라에서 영원한 첫째로 기억되는 영광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는 모두가 첫째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사랑으로 끝에 서며 섬기는 종이 되어 인생 살만한 곳이라고 느끼게 하며, 즐겁고 맛깔나고 행복하고 풍요롭게 하는 교회 공동체가 되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