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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피값은 니거야’ 악마의 미끼 덥석
일제 강점기인 1924년 4월 2일자 <매일신보>에는 ‘보험외교원(보험모집인)의 협잡’이라는 제목의 흥미로운 기사가 실렸다. 보험외교원 조 아무개 씨가 지인과 공모하여 벌인 보험사기극에 대한 기사였다. 기사에 따르면 1923년 8월 조 씨는 수원에 사는 이 아무개 씨의 부인이 병으로 위독한 것을 알고 다른 여자를 이 씨의 부인인 것처럼 속여 5000원짜리 양로보험에 가입케했다. 하지만 수개월이 지나도 이 씨의 부인이 사망하지 않자 조 씨 등은 1923년 10월경 멀쩡하게 살아있는 이 씨의 부인이 사망했다고 허위로 사망신고한 후 보험금 5000원을 편취, 징역형을 받았다.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범죄사건으로 기록돼 있는 이 사건은 보험이라는 단어 자체가 생소했던 그 시절 세간을 떠들썩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때까지만 해도 보험과 연관된 범죄들은 보험금을 받을 자격이 없는 사람이 보험금을 수령하거나 실제 손해보다 많은 보험금을 수령하기 위해 벌인 일종의 사기극 수준에 불과했다.
‘보험살인’과 같은 중대 범죄가 등장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다. 이번에 김원배 수사연구관이 전하는 ‘잊을 수 없는 사건’은 우리나라 최초의 보험살인 사건이다.
부산시 진구 ○○동에 살고 있는 박경숙 씨(가명·43)는 평범한 주부였다. 20대 초반 이른 나이에 첫 번째 남편과의 결혼생활에 실패한 그녀는 남의 집 식모살이와 공장 등을 전전하며 정신적으로나 물질적으로 적잖은 고생을 해야 했다. 하지만 경제적으로 넉넉하고 성실한 양재식 씨(가명·53)를 만나면서 그녀는 새출발을 했다. 자동차 부품업을 하는 양 씨는 박 여인에게도 잘해줘 누가 보더라도 박 여인의 고생은 끝난 듯 보였다. 고등학생 딸과 중학생 아들까지 둔 박 여인은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하지만 어느날 갑자기 평범한 주부였던 박 여인의 마음에 ‘악마’가 들어오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설명.
“1970년대는 급격한 산업화와 더불어 국내 보험산업이 본격적으로 성장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하지만 먹고 살기에 바빴던 우리 국민들은 당시만 해도 보험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고, 따라서 보험금을 노린 범행에 대한 사회적인 경각심도 없었다. 어렵게 살다가 경제적으로 여유가 생긴 박 여인은 물욕에 눈이 먼 나머지 ‘몹쓸 생각’을 하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보험살인이었다.”
박 여인이 범행 타깃으로 잡은 사람은 다름 아닌 친언니였다. 경남 남해군에 살고 있는 친언니 박경자 씨(가명·54)의 집을 수시로 오가며 동정을 살피던 박 여인은 어수룩한 언니를 상대로 위험한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1974년 11월의 어느날 박 여인은 언니 몰래 언니 명의로 15년 만기보험을 체결했다. 일반 사망시에는 200만 원, 재해 사망시에는 5배에 달하는 1000만 원이 지급되는 보험이었다. 박 여인이 그해 12월까지 언니 명의로 가입한 보험은 총 3개로, 재해 사망시 받을 수 있는 보험금은 당시로서는 상당한 금액이었던 1900만 원이었다. 그리고 보험을 체결한 지 두 달도 되지 않은 1975년 1월 말 박 여인은 언니네 집을 찾아갔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사건 당일은 형부의 조부 제삿날이었다. 제삿날에 뜬금없이 언니네 집을 찾아간 박경숙은 그 집에서 평소 석유곤로를 사용하는 것을 눈여겨 봐뒀다. 그날 새벽 제사 준비에 지친 식구들이 모두 깊은 잠에 빠지자 박 여인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슬그머니 집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잠시 후 미리 준비해둔 석유를 들고 나타났다. 박경숙은 언니와 형부, 조카가 곤히 잠들어 있는 방에 석유를 뿌리고 불을 지른 뒤 현장을 빠져나왔다.”
당시 화재로 인해 박경자 씨네 초가집은 전소됐다. 초가의 특성상 불이 워낙 심하게 타올라 집은 순식간에 시커먼 잿더미로 변해버렸다. 무엇보다 안타까운 것은 인명피해였다.
이날 화재로 박 여인의 언니와 조카는 그 자리에서 숨졌고 형부 김만수 씨(가명·67)가 전신에 중화상을 입고 간신히 구조됐지만 의사표시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보통 화재냐 방화냐는 현장에서 감별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집 전체가 홀랑 타버린 탓에 현장에 아무 증거가 없다는 것이었다. 더구나 늦은 새벽시간인 터라 목격자도 없었다. 언니네 집에 놀러왔던 박경숙이 돈을 노리고 일부러 불을 질렀을 것이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더욱이 박경자 씨네 집은 넉넉지도 못한 형편이었다.”
박 여인은 눈물을 훔치며 태연히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얼마 후 박 여인은 상속인의 위임을 받은 양 위임장을 꾸며 보험사로부터 거액의 보험금을 수령했다. 피보험자가 재해로 사망할 경우 1900만 원을 수령할 수 있는 보험이었지만 계약 후 6개월이 지나지 않아 박 여인이 손에 쥔 돈은 1740만여 원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현장에 있었던 일가족 중 두 명은 즉사하고 한 명은 거의 숨만 붙어있는 상태였다. 간신히 구조된 박경숙의 형부 김만수 씨도 평소 앓아온 중풍으로 거동이 어려운 데다가 화상 쇼크로 인해 제대로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중에 밝혀진 사실이지만 박경숙은 자신의 범행을 감추기 위해 ‘쇼’를 하기도 했다. 당시 수사기록에 따르면 박경숙은 형부의 입에 귀를 가까이 대고 울먹거리며 형부의 말을 알아듣는 척했다. ‘네? 뭐라고요? 담뱃불 때문이었다구요? 담뱃불이 이불에 옮겨붙는 걸 봤다구요?’라는 식이었다. 박경숙의 능청스러운 거짓 통역은 그대로 수사관들에게 전해졌고 결국 화재의 원인을 ‘담뱃불’로 결론을 내린다. 따라서 일가족 3명의 목숨을 앗아간 이 사건은 ‘화재’사건으로 종결처리되고 만다. 그리고 이틀 후 유일한 생존자였던 김만수 씨마저 사망하면서 박경숙의 범행은 완전범죄가 되고 만다.”
언니네 일가족이 처참하게 사망했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금액을 수령한 박 여인은 전에 없이 윤택한 삶을 즐기고 있었다. 하지만 위임장에 엄연히 수익자로 기재되어 있는 박 여인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범행이 의외로 너무 쉽게 성공하자 박 여인은 또 한 건의 무서운 범행을 계획하게 된다. 두 번째 범행대상은 시동생이었다.
첫 번째 범행 후 약 8개월이 지난 1975년 10월 박 여인은 시동생 양재만 씨(가명·35)를 꼬여 신체검사를 받게 한 후 양 씨를 보험계약자로, 그의 아들을 피보험자로 하는 보험을 체결했다. 박 여인이 양 씨 명의로 가입한 보험은 재해사망시 500만 원을 수령할 수 있는 내용이었다. 박 여인은 이듬해 1월까지 3개월에 걸쳐 무려 5개의 특약 보험을 체결했는데 양 씨가 재해로 사망할 경우 피보험자가 수령할 수 있는 액수는 무려 4900만 원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당시 4900만 원은 현재로 치면 수십억 원에 달하는 엄청난 금액이었다. 만반의 준비를 마친 박경숙은 76년 5월 중순 시내의 한 다방으로 시동생 양 씨를 불러냈다. 다방에서 박경숙은 커피를 주문하고 양 씨는 우유를 주문했다. 주문한 음료가 오고 시동생과 자연스레 이런저런 대화를 하던 박경숙은 뜬금없이 ‘카운터에 있는 신문 좀 갖다 달라’고 부탁했다. 양 씨는 아무 의심없이 박경숙의 부탁대로 카운터로 향했고 그 사이 그녀는 미리 준비해온 청산가리를 양 씨의 우유에 몰래 털어넣었다. 아무 의심없이 우유를 마시고 다방을 나선 양 씨는 잠시 후 노상에서 쓰러졌고 이내 사망하고 말았다.”
멀쩡하던 젊은 남자가 갑자기 죽었는데도 어찌된 일인지 한참 후 이뤄진 부검결과 양 씨에게서는 이렇다 할 사인이 밝혀지지 않았다. 양 씨는 심장마비로 인한 사망으로 처리되고 만다. 아무 의심을 받지 않고 양 씨를 죽이는 데 성공한 박 여인의 관심은 오직 보험금을 수령하는 것뿐이었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가장 시급한 일은 첫 번째 범행과 마찬가지로 위임장을 위조하는 것이었다. 박경숙은 양 씨의 부인을 교묘하게 속여 위임장을 위조하려 했지만 실패하고 만다. 일이 뜻대로 되지 않자 박경숙은 양 씨가 사망한 지 20여 일이 지났을 무렵 직접 보험사로 가서 보험금 지급을 요청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하지만 이것이 그녀의 발목을 잡는 계기가 되고 만다. 약 1년 전에도 거액의 보험금을 수령해간 적 있는 그녀가 또 다시 보험금을 타러 오자 보험사 측에서 의심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박경숙은 수익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보험금 지급을 거절당한다. 박경숙의 행동에 의심을 품은 해당보험사는 그녀를 요주의 인물로 지목하는 동시에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다. 하지만 박경숙은 펄펄 뛰었다. 그녀는 오히려 보험사 측을 명예훼손으로 고소, 80만 원을 받아내기도 했다.”
묻혀버릴 뻔했던 박 여인의 ‘완전범죄’가 조금씩 드러나게 된 것은 첫 번째 희생자였던 언니의 아들 김재형 씨(가명·25)로 인해서였다. 사건 당시 군복무 중이었던 김 씨는 졸지에 부모와 동생을 화마에 잃고 엄청난 충격과 슬픔속에서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야 했다. 하지만 제대 후 김 씨는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된다. 다음은 김 연구관의 얘기.
“제대 후 이것저것을 꼼꼼히 살펴보던 김 씨는 자신도 모르게 어머니 명의로 보험이 무려 3개나 가입돼 있다는 사실을 알고 깜짝 놀랐다. 넉넉하지 않은 살림에 어머니가 보험을 3개나 들 이유가 없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구나 보험 내용을 살펴보니 일반사망이 아니라 모두 재해사망시 총 2000만 원에 가까운 거액을 탈 수 있게 돼있는 게 아닌가.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보험에 가입한 지 두 달 만에 집에 불이 났다. 평소 조심성 많은 부모님이 담뱃불 하나 제대로 끄지 않았다는 것도 이상했고, 야심한 시각에 불이 났다는 것도 석연치 않았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의문은 재해사망 보험금을 모두 이모가 수령했다는 사실이었다.”
김 씨는 이모 박 여인이 의심스러웠다. 이모를 예의주시하던 김 씨는 얼마 후 충격적인 사실을 알게 된다. 멀쩡하던 박 여인의 시동생 양재만 씨가 돌연 의문사했다는 점이었다. 그리고 양 씨가 5000만 원에 달하는 거액의 보험에 가입돼 있었다는 점, 또 당시 양 씨 명의로 된 보험금을 박 씨가 대신 수령하려다가 실패했다는 점 등을 알게 된다.
‘뭔가 있다’고 생각한 김 씨는 수사기관에 진정을 넣었고 피해자 가족들의 재수사 요청으로 박 여인에 대한 본격적인 조사가 이뤄졌다. 수사팀은 박 여인에 대해 은밀히 내사를 진행했고 범행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들을 수집하기에 이른다. 결국 박 여인의 추악한 범행은 2년 8개월 만에 그 전모가 드러났다.
당시 수사기록에는 박 여인의 파렴치하고 뻔뻔스러운 행태가 고스란히 기록되어 있다. 특히 죽어가는 형부를 이용해 박 여인이 자신의 방화를 화재로 둔갑시킨 사실을 알고는 수사팀들도 말문을 잃었다는 후문이다.
언니 박경자 씨네 사건이 발생했을 당시 보험사에서는 애초부터 의심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보험사 측에서 화재의 원인에 대해 정밀조사를 실시하려하자 박 여인은 당시 보험사 지부장에게 100여만 원을 주고 ‘보험금을 빨리 타게 해달라’고 청탁해 무마시키기도 한 것으로 드러났다.
(옮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