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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 사사 입산 엘론 압돈
삿 12:8-15
8 그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9 그가 아들 삼십 명과 딸 삼십 명을 두었더니 그가 딸들을 밖으로 시집 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삼십 명을 데려왔더라 그가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칠 년이라
10 입산이 죽으매 베들레헴에 장사되었더라
11 그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어 십 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렸더라
12 스불론 사람 엘론이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
13 그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더라
14 그에게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 칠십 마리를 탔더라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된 지 팔 년이라
15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죽으매 에브라임 땅 아말렉 사람의 산지 비라돈에 장사되었더라
삿 12:8-15 / [사사 입산 . 엘론 . 압돈] 입다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한 사람은 베들레헴 출신 입산이었다. 9) 그는 딸 30명과 아들 30명을 두었다. 딸들은 모두 다른 씨족 사람들에게 시집 보내고 또 며느리들도 모두 다른 씨족 사람들 가운데서 맞이하였다. 입산은 7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일하다가 10) 세상을 떠 베들레헴에 묻혔다. 11) 입산의 뒤를 이어서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한 사람은 스불론 지파 사람 엘론이었다. 그는 10년 동안 사사로 활동하다가 12) 세상을 떠 스불론 지역에 있는 아얄론에 묻혔다. 13) 엘론의 뒤를 이어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한 사람은 비라돈 출신 힐렐의 아들 압돈이었다. 14) 그는 아들 40명과 손자 30명을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나귀를 타고 다녔다. 압돈은 8년 동안 이스라엘의 사사로 활동하다가 15) 죽어 아말렉 산악지대에 있는 에브라임 땅에 있는 비라돈에 묻혔다.
사사 입다가 죽고 얼마간의 평화가 이스라엘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스라엘 소 사사들의 이름과 사역 기간을 간략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세 명의 사사들의 행적은 하나님께 쓰임 받은 사적에 대한 기록이기 보다는 개인적인 사생활에 대한 언급으로만 간단히 다뤄지고 있습니다.
사사 입산(8-10) 입다의 뒤를 이어 베들레헴의 입산이 사사가 되었습니다. 베들레헴이라는 지명은 유다 지파와 스불론 지파의 베들레헴이 있는데(수 19:5) 본문에서는 구체적으로 지역을 언급하지 않으므로 어떤 지파의 성읍을 가르키는지 분명치 않습니다. 학자들의 견해에 따라 유다 지파로 주장하기도 하며 스불론 지파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입산에 대한 기록은 아들과 딸을 무려 삼십 명 씩 두었는데 딸들은 밖으로 시집보냈고, 아들들을 위하여는 밖에서 여자 삽십명을 데려 왔다고 기록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밖은 외국의 개념이기 보다는 다른 지파와의 결혼을 의미한 것으로 다른 지파와 혈연적 관계를 맺으므로 에브라임과 길르앗이 서로 갈등했던 상황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의도로 보여집니다. 사사가 세워지는 지파는 상대적으로 강력한 지도력을 가지므로 다른 지파와의 갈등이 필연적으로 발생하게 되므로 이를 원만하게 풀어가고자 하는 방법이었다고 사료됩니다.
사사 엘론(11-12) 입산의 뒤를 이어 스불론 사람 엘론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0년 동안 이스라엘을 다스리다가 죽으매 스불론 땅 아얄론에 장사되었더라고 기록합니다. 그동안 사사로서의 사역의 기간은 가장 긴 십 년인데 반해 엘론에 대한 성경의 기록은 가장 짧게 기록되었습니다.
사사 압돈(13-15) 엘론의 뒤를 이어 비라돈 사람 힐렐의 아들 압돈이 이스라엘의 사사가 되었습니다. 힐렐은 지파에 대한 언급이 없이 단지 비라돈 사람으로 소개됩니다. 이는 혈연적 유대감보다는 지역적이고 정치적 연대감을 중요시 한 것으로 보입니다. 아들 사십 명과 손자 삼십 명이 있어 어린 나귀를 칠십 마리를 탔더라고 기록합니다. 이는 압돈의 자손이 번창했을 뿐만 아니라 이들 모두가 어린 나귀를 탈만큼 엄청난 부와 권력을 소유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적 용 : 사사들이 사명을 다한 후에 죽었듯이 죽기 전에 해야 할 사명은 무엇입니까?
미국인들은 무언가 매우 특별하게 말하고 싶어 할 때, “애플파이 같다”고 말합니다. 또 미국의 가장 큰 도시인 뉴욕을 부를 때 “가장 큰 사과”라고도 합니다. 이처럼 미국에서 사과는 매우 미국적이며, 매우 특별합니다. 사과를 이렇게 특별한 과일로 만든 배경에는 한 사람이 있습니다. 1774년에 태어난 존 채프먼이 바로 그 주인공입니다. 그는 미국의 개척시대에 많은 지역을 돌며 사과 씨를 뿌렸습니다. 그 이유는 현재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다음 세대의 미국인들이 배고픔 때문에 고통받지 않기 위한 배려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를 ‘조니 애플시드’라는 별명으로 불렸습니다. 그것은 아무 대가 없이 평생 사과를 보급한 헌신과 희생의 상징입니다. 내 것을 하나 내줌으로써 내 주변이, 더 나아가 우리가 사는 세상이 풍요로워질 수 있다는 사실, 잊지 말아야 할 것입니다.
< 설 교 >
여러 사사들
우리가 사사기를 읽을 때 대충 보면 비슷한 이야기가 계속 되는 것 같지만, 하나님의 은혜 또 하나님께서 하시는 역사들이 좀 더 구체적으로 가면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다양한 하나님의 뜻과 또 하나님께서 인간을 대하시는 면들이 나오는데, 오늘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살았던 세 명의 사사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입산, 엘론과 압돈이라는 사사기 있었는데, 몇 년씩 사사를 지내고 아이를 낳고 죽었더라…, 계속해서 그런 싸이클이 됩니다. 바로 이 대목을 통해서 성경에서 하나님이 우리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이 무엇일까요? 좀 더 많은 내용이 나왔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않고 간단하게 나옵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역시 인간은 어차피 왔다가 가고, 왔다가 가고…, 잠시잠깐 반짝이는 반딧불과 같은 존재이지만 그 사사를 세우시고, 또 세우시고, 그 다음을 예비하시는 분은 역시 하나님이라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세상의 모든 천지만물을 주관하고 계시고, 거기에 인간은 오히려 조연이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그래서 먼저 우리는 이러한 모든 삶의 구조 속에서 하나님이 주인 되심, 하나님이 왕 되심, 하나님이 진정한 우리의 인도자 되심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그 내용들에 대해서 여기서 좀 더 구체적으로 보면, 입산과 압돈에 대해서 자식 이야기가 나옵니다. 입산은 자녀가 전부 몇 명입니까? 아들 30, 딸 30입니다. 전부 60명이고, 압돈은 자녀가 몇 명입니까? 아들만 40이라고 되어 있습니다. 손주도 손자만 30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훨씬 그보다 숫자가 많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좀 더 넓은 문맥 속에서 보면 참 아이러니컬한 면이 있어요. 바로 그 앞 이야기에 입다가 나옵니다. 입다에게 있어 가장 큰 슬픔이 무엇입니까? 딸을 잃어버렸는데, 그게 외동딸이에요. 어떻게 하나님은 딸이 하나밖에 없는 그 집안의 딸은 죽는 것을 허락하시고 자식이 60명, 70명 이렇게 있는 집안에는 그런 일이 없을까, 그런 면에서 하나님께 “하나님, 이게 어떻게 된 일입니까?” 하고 묻지 않겠어요? 더군다나 입다가 그 딸 하나를 어차피 제물로 바칠 수밖에 없는데, 바로 그 앞에 또 하나의 사사가 나옵니다. 10장 앞에 보면 야엘이라는 사사가 나오는데, 그 야엘이라는 사사도 자녀가 30명이예요. 앞뒤로 수많은 사사들은 전부 수십 명씩 자녀를 두었는데 입다에게는 오직 외동딸 하나 있었는데, 그 외동딸을 하나님이 데려가셨다…, 어떤 마음이 들 것 같습니까? 하나님을 원망할 수도 있겠죠? 오늘날의 상황에서도 한번 생각해 봅시다. 어떤 집은 자식이 일곱이 있는데 하나 더 생겼어요. 어느 집은 그렇게 자녀를 갖기를 원하는데 자녀가 없는 집도 있습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실까요? 하나님께 그런 질문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어느 집은 아들이 꼭 있어야 하는데 딸, 딸, 딸…, 낳는 집도 있어요. 반대로 요즘은 딸이 없는 집은 참 불쌍한 집이 되었습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에 거기서 유학생들이 결혼하고 출산하게 되면 98% 장모님이 산바라지 하러 오십니다. 시어머니가 오신 적이 없어요. 물론 수고하고 힘도 들지만 딸이 없는 집은 미국 올 일도 없더라구요. 요즘에 점점 더 딸이 좋다고 느낍니다. 자라면서 엄마하고 친구도 되어주고, 또 아빠의 마음을 녹여주는 것은 무뚝뚝한 아들들이 아닙니다. 애교스런 딸들입니다. 그렇게 딸이 좋은데, 어느 집은 그렇게 딸을 원해도 아들, 아들, 아들…, 낳는 집이 있어요. 그럴 때 과연 하나님이 왜 그러실까, 공평하신 하나님이신데 누구에게는 딸만 주고 누구에게는 아들만 주고, 좀 섞어서 주시면 좋겠는데…, 또 필요한 집에는 안 주시고, 필요 없다는 집은 더 주시고…, 왜 그러실까? 이게 자식 문제뿐만 아니고 우리 인생길의 여러 가지 문제도 그러한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태어나실 당시 베들레헴에서 어린 아이들이 수없이 많이 죽었습니다. 헤롯왕이 죽였죠? 도대체 그 아이들은 왜 죽었을까요?
낳자마자 얼마 되지도 않아서요. 그 아이들에게 무슨 잘못이 있기에 …. 이 세상의 수많은 사람들이 악하게 사는데도 불구하고 마지막 죽는 날까지 편안하게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열심히 주님을 믿으면서 하나님을 의지하고 나아가는데 어느 날 일찍 하나님께서 데려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왜 그러실까요? 또 사도행전 12장에 보면 헤롯왕이 야고보를 죽입니다. 그런데 그 야고보를 죽이는 것을 백성들이 즐거워하고 기뻐하니까 그 일을 계속하려고 베드로를 잡아 또 죽이려 합니다. 그런데 베드로는 하나님의 천사가 나타나서 그를 풀어줍니다. 성경의 한 사건 속에서 하나님은 야고보는 죽게 내버려 두시고 베드로는 살려주십니다. 하나님은 왜 그러실까요? 여러분은 그 답을 아십니까? 저도 답은 모릅니다. 그런 비근한 예가 있는 것뿐만 아니고, 우리 인생길의 가는 곳에서 이해할 수 없는 면이 얼마든지 나타납니다. 그럴 때 여러분은 어떻게 합니까? 그럴 때 하나님께 한번 질문해 보십시오. “하나님,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거의 대부분은 하나님이 대답하지 않으십니다. 여러분이 질문할 때 하나님께서 대답하실 의무도 없으십니다. 왜냐면,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니까요. 유명한 부흥사로 D. L. 무디(Dwight Lyman Moody)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 분은 누구보다도 정말 열정적인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증거할 때 수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 그가 기도하는 것을 엿본 사람이 있었어요. 그리고 놀랬습니다. 어떻게 기도했냐면, 무디가 교회에서 혼자 앉아서 큰 소리를 내며 기도합니다. 반복해서 딱 두 문장으로 기도하는데,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시고, 이 작은 나는 이 낮은 이 땅에 있고, 하나님은 저 높은 곳에 계시고, 이 작은 나는 이 낮은 이 땅에 있고….” 이것만 반복해서 기도했습니다.
왜 그랬을까요? 창조주이신 하나님과 연약하고 피조물이고 어찌할 수 없는 이 땅에 사는 나와의 그 극명한 차이를 인정하고,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든 신앙은 거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인생길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출발합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것-비록 우리가 인생길에서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벌어지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불공평한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이 일은 이루어주셔야 하고, 하나님이라면 반드시 이 일은 막아주셔야 되는데 그러한 일들이 다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우리가 고백할 수밖에 없는 것은 “하나님은 하나님이시다.” 라는 것입니다.
영화중에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 라는 영화는 미국의 버팔로라는, 나이아가로 폭포 바로 옆에 있는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인데, 그 스토리가 참 재미있었습니. 그 버팔로라는 도시에 브루스라는 한량이 살았습니다. 능력도 없고, 삶에 의욕도 없고, 계획도 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오직 하나 자기 애인 그레이스라는 여인을 사랑하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해서든지 좀 잘 해보려고 하는데, 그레이스가 보기에 이 브루스라는 남자는 도대체 소망이 없는 남자에요. 그런 남자한테 잘못 시집가면 일생 고생하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으로는 좋아하지만 함께 하지 못하는 그 뭔가가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어찌하다가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능력을 주셨어요. 버팔로 시에 일정한 구역을 정해주고 “이 안에서는 네가 하나님 노릇을 해 봐라.” 그래서 그가 브루스 올마이티(Bruce Almighty) - 전능자 브루스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모든 능력이 있으니까 신기해서 막 써보는 거예요. 그런데 꼭 유리겔라 같은 그런 것만 써보는 겁니다. 수프를 홍해 바다처럼 반으로 갈라보기도 하고 온갖 기괴, 미묘한 일들을 하면서 기분 좋아해요. 그런데 그가 하나님 일을 하는데 한 가지 해야 할 일은 그 구역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드리는 기도에 응답하는 일이예요. 그래서 아직 응답이 안 된 기도 제목들을 보니까 수백만 가지입니다. 이것을 어떻게 할까 생각하다가 파일박스에 넣어보려 하니까 온 방안에 기도 파일박스가 꽉 차서 움직일 수 없게 되고, 포스트잇에 붙여보려 했더니 방안에 포스트잇이 가득 붙여지고 자기 몸에까지 다 붙어버리는 거예요. 어떻게 할 수가 없어요. 그러다가 컴퓨터 파일로 만들어놓고 하루 종일 기도응답을 했어요. 그리고 얼마 남았나 봤더니 더 많이 늘어났어요. 그래서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할 수없이 모든 기도에 몽땅 “Yes” 했어요. 기도가 다 응답됐는데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느냐면, 미국의 유명한 복권에 바로 그 지역 사람만 수천 명이 1등이 된 거예요. 온 사람들이 파티를 하고 좋아했습니다.
그런데 그가 그렇게 모든 일을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데, 한 가지 못하는 게 있어요. 하나님이 제한을 두었는데, 자기 마음대로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는 없어요. 사람의 마음은 자유의지에요. 하나님도 인간에게 자유의지를 허락하셨듯이 똑같이 한 거예요. 그러니까 이 사람의 오직 유일한 목적은 자기 애인인 그레이스를 차지하고 함께 사는 것인데, 이게 잘 안 되는 겁니다. 아무리 별짓을 다해도 잘 안돼요. 오히려 문제만 많이 일으킵니다. 하루는 복권에 당첨됐다고 축제했는데 그 다음날 발표된 것이 1등 당첨자가 너무 많아서 1인당 2만원도 안 되는 17불씩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졸지에 온 도시에 폭동이 일어나버렸어요. 온 도시가 다 뒤죽박죽이 되고 기도를 다 들어주니까 온갖 이상한 일들이 막 벌어지기 시작한 겁니다. 너무 정신이 없어서 하나님 앞에 다시 “도저히 안 되겠습니다. 나는 오직 그레이스와 같이 사는 게 소원인데 아무것도 안 됩니다. 하나님, 이거 다시 가져가십시오.” 하고 기도하는데 갑자기 큰 트럭이 덮쳐서 죽습니다. 그리고는 천국에서 하나님을 만났어요. 하나님이 묻습니다.
“그래, 네가 하나님 노릇 해보니까 어때?” “아이고, 나는 할 게 아닙니다.” 그러자 거기서 하나님이 하는 말이, 사람들은 자기가 정말로 무엇을 원하는지 자기 자신이 알지 못한다는 거예요. 엉뚱한 것만 구하고 산다는 겁니다. 그리고 “너는 원하는 게 뭐냐?” 브루스에게 질문하자, 그가 갑자기 거룩한 몸짓을 하더니 “온 세계가 평화롭게 되기를 원하고 모든 사람이 서로 사랑하기를 원합니다.” 하는 겁니다. “야, 그것은 미스월드나 미스유니버스가 하는 이야기고, 네가 원하는 것을 이야기해봐라.” 그러자 브루스가 잠깐 생각하더니, 자기는 지금 죽은 상태이니까 “내가 제일 원하는 것은 내가 사랑하는 그레이스가 정말 좋은 남자 만나서 행복하게 사는 것입니다.” 하고 이야기해요. 거기서 하나님이 “그래? 그 기도는 내가 들어주지.” 하고 가슴을 팡 칩니다. 그래서 깜짝 깜짝 놀랬는데 알고 보니까 죽은 자기를 소생수술 하느라 가슴을 팡팡 친 겁니다. 그리고 깨어났어요. 그런데 부르스가 병원에 누워있다는 소식을 듣고 애인이었던 그레이스가 찾아와서, 다시 그 사랑을 회복한다는 내용이에요. 그러면서 그 때 그 브루스라는 사람에게 하나님이 하는 말은 “네가 정말 기적을 일으키길 원하느냐? 진정한 기적은 접시에 있는 수프를 반으로 가르는 게 아니라 네가 낮아지고 섬기면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라고 합니다. 또 원래 이 사람이 방송국에서 아주 낮은 자리에 있던 방송국 직원이었습니다. 자기가 전능자로서 막 일을 할 때에는 다른 사람들을 다 제치고 자기가 앵커가 됐어요. 그런데 그것을 다 느끼고 나서는 가서 원래 앵커 자리에 올라야 할 사람에게 미안하다고 하면서 그 자리를 돌려주고, 자기는 원래 있던 자기 자리에 가서 헌혈 운동을 재미있게 하면서 그 속에서 나름대로의 기적을 만들어 갑니다. 거기서 또 하나 주는 메시지는 정말로 내가 원하는 게 뭐냐는 겁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무엇이고, 그리고 정말 우리가 하나님의 입장에서 이해한다면 우리 인간이 어떻게 보일까,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 왜 이러십니까, 왜 이러십니까?” 하지만,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 브루스라는 사람이 고백하는 것이 “앞으로 나는 내 앞일도 알고 싶지 않습니다. 전적으로 이제부터는 하나님께 맡깁니다. 단지 하나님께서 주신 대로 작은 기적 하나를 만들어 가기 위해서 매일 매일을 살아가겠습니다.” 그리고는 그 속에서 하나님이 참된 안식과 행복을 주시는 것을 경험합니다. 이것은 영화지만 저는 그 대목 대목이 참 성경적이라고 느꼈어요.
여러분, 하나님처럼 되기를 원합니까? 하나님처럼 능력 있기를 원합니까? 내가 말하는 대로 전부 다 되기를 원합니까? 제가 전에 한번 한 이야기가 있습니다. 여러분의 기도가 다 응답되면 여러분은 정말 불행해진다고요. 만약에 어떤 부부가 부부싸움을 했는데 둘 다 믿는 사람이어서 화가 나니까 하나님께 기도를 했어요. “하나님, 저 사람 다리가 똑 부러지게 해 주세요.” 그래서 금방 앉은뱅이가 됐어요. 심지어는 만약에 “저 웬수, 없어졌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순식간에 죽었어요. 그 다음에는 어떡할 거예요? 우리 마음속에서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 살아남을 사람이 없습니다. 이 세상이 존재하지도 못해요. 하나님이 기도 다 안 들어주시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나중에 후회할 우리의 욕망, 후회할 우리의 욕정, 후회할 우리의 바램…, 하나님은 안 들으신다는 거예요. 우리에게는 축복이에요. 거기 있는 말대로 정말 우리가 가장 원하는 것이 무엇이고 가장 원해야 할 것이, 우리에게 가장 유익한 것이 무엇인지 우리는 알지 못하고 구합니다. 그것을 인정합시다.
전도서에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길흉-좋은 일과 슬픈 일을 번갈아 주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내일 일을 알지 못하게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내일 일을 알려고 좇아다니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리고 각 사람의 마음에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을 주셨습니다. 영원을 사모하는 마음, 그게 다른 말로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그 전능자 하나님께, 비록 내 인생길에서 수없이 많은 이해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할지라도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은 이미 증명이 되었습니다. 어디에서 증명되었습니까? 예수님의 십자가에서 증명이 되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 그 독생자 예수님의 생명을 우리에게 주심으로써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증하셨습니다. 그것을 확인했으면 자질구레한 인생길에서 우리가 이해 못하는 것은 그냥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께 의지하고, 하나님의 뜻을 구하고…, 이렇게 살아갈 때에 진정 하나님의 은혜로운 인도하심이 여러분과 함께 할 줄을 믿습니다.
그 다음 두 번째로 이 본문에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사사들이 역시 인간으로서 연약하고 죄가 많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온 모든 인간은 연약하고 죄가 많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인간은 연약하고 죄가 많습니다. 여기 있는 모든 사람은, 저를 포함해서 누구든지 연약하고 죄가 많습니다. 물론 그 안에서 하나님은 리더도 세우시고 그렇게 하시지만, 연약하고 죄인인 것은 부인할 수가 없습니다. 오늘 여기에서도 바로 그런 면들이 계속해서 나옵니다. 사실 사사기 전체에 나오는 사사들, 다 연약한 면모가 있어요. 그런데 특별히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앞의 사사들보다 뒤의 사사들이 더 연약한 면을 봅니다. 여기 나오는 세 사사들이 이 세상에서 한 일이 무엇입니까? 몇 년 동안 사사를 지냈더라 하는 이야기만 나오지, 그들이 사사로 지내면서 어떠한 일을 했다는 말은 전혀 나오지 않습니다. 모르지만 어쩌면 그들이 사사로 살아가는 그 기간 동안에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더 많이 세상의 것으로 누리고, 즐기고, 권세를 휘두르고,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왜냐하면 자식 수만 봐도 이렇게 많은 수가 있으려면 부자가 아니면 안 되거든요. 아내를 많이 거느려야 합니다. 분명히 이 사람들은 그랬을 겁니다.
그런데 그러한 이 세상의 모든 권세와 위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마지막은 “죽었더라.” 그 길로 갑니다. 인간으로서의 사사, 인간으로서의 지도자는 연약합니다. 우선 완전하지 못하니까 여러 가지 결점도 있을 수 있고, 좀 만족할만한 지도자라 할지라도 오래가지 못해요. 결국은 죽습니다. 결국은 늙어지고요. 역시 인간 사사들은 그럴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한 일이 뭡니까? 자식의 경우를 잘 보십시오. 그들이 한 일이란, 자식을 낳는데 수십 명씩 자식을 낳은 일만 여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아마 이 자식도 그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때 가장 큰 자랑거리 중의 하나였을 것입니다. 예로부터 자식이 많은 것은 그 집안의 복이었어요. 옛날부터 세계 어디를 가나 풍요의 신이 있다고 그랬죠? 그런데 그 풍요의 신에 대해서 바라는 것이 꼭 내 곡식이 많아지고 내가 키우는 소나 양이나 다른 육축들이 새끼를 많이 낳고, 그런 것만 풍요가 아니에요. 많은 자식을 갖기 위해서 풍요의 신 앞에서 간구하고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이 사람들은 자식이 수십 명 되니까 축복 중의 축복 아닙니까?
자식이 많아야 부자가 됩니다. 자식이 많아야 세력도 얻습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그렇게 했으니까요. 얼마나 그들에게는 자랑거리였겠어요? 그런데 그 자랑거리가 하나님 앞에서 큰 죄악거리였다는 것을 여러분이 아셔야 합니다. 신명기에 보면 하나님께서 모든 왕들에게 아내를 많이 두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여기 자식들이 몇 명이에요? 60명입니다. 분명히 이 60명이 한 어머니에게서 낳은 자식들은 아닐 것입니다. 수십 명의 여자를 두어서 낳았을 것입니다. 성경에서는 그것을 눈에 띄게 금지하고 있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사들이 수없이 많은 자식들을 두었다는 것은 이미 그들이 하나님 앞에 범죄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자식 많은 게 뭐가 죄인가요?” 그게 죄가 아닙니다. 아내를 여럿 두는 것도 죄일뿐더러-가정생활에 문제가 생기니까요. 그 다음에 이 당시 통치자들이 아내를 여럿 두는 것은 대부분 외국과의 정략결혼인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지 아니하고 다른 외부의 세력을 의지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죄라는 말입니다. 여기 입산을 보십시오. 아들 30명을 위해 며느리들을 전부 타국에서 데려왔습니다. 또 딸들을 전부 타국으로 시집보냈습니다. 이게 전부 정략결혼이에요. 하나님을 믿지 않음이 바로 이들의 결혼을 통해서 보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들의 가장 세상에서 자랑거리인 이 긍지가 오히려 그들에게는 올무가 되고 그들에게는 자기 잘못과 허물과 죄를 나타내는 것밖에 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오늘날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날에도 수많은 사람들이 이 세상의 것으로 자랑스러워합니다. 내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내가 여러 가지 전문적인 지식과 기술이 있는 것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고, 내가 아름다운 몸매와 아름다운 얼굴을 가진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내가 수없이 많은 일들을 해나갈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을 또한 자랑스러워하고, 무언가 그것에 대해서 긍지를 가지는데, 두렵건대 여러분이 자랑스러워하는 그 많은 것들이 자칫 잘못하면 오히려 여러분의 교만과 여러분이 하나님을 떠남과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 죄 짓는 것에 도구가 되고 그 죄 짓는 것을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세상의 것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재능을 가지고 자랑스러워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신 그 소유를 가지고 여러분이 자랑스러워하면 안 됩니다. 오히려 그 가운데서 넘어지게 됩니다. 이들에게는 오히려 자식 많음이 하나님 앞에 죄가 되고 부족한 존재라는 사실을 보이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당시 살아가면서 그토록 바란 것은 무엇이었겠어요? 그들에게 유일한 바램은 자기들에게 정말 좋은 리더, 좋은 사사가 있어서 평안하게 사는 겁니다.
지금도 각 나라에서 바라는 것은 좋은 대통령 뽑혀서 좋은 정치하고, 또 우리 시 같으면 좋은 시장님, 구청장님 많이 세워져서 우리가 평안하게 복된 삶 사는 것이 또한 우리의 바램입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더 강했어요. 왜냐하면 거의 모든 권력이 그쪽에 집중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하나같이 그들의 사사가 어떻습니까? 그들 사사가 연약해요. 그들은 하나님이 하시는 그 만큼 못하는 거예요. 전부 다 인간 사사들은 부족하고 죄가 많은 면이 끊임없이 나옵니다. 그럴 때 그들의 마음에 뭐가 있겠어요? 간절히 “하나님, 좀 더 나은 사사를 주십시오. 하나님, 좀 더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줄 수 있는 그러한 지도자를 주십시오.” 이러한 갈망이 있다는 말입니다. 이 갈망이 결국은 메시야를 기다리는 마음이고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는 마음입니다. 드디어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셔서 가장 참되고 완전하고 진정한 사사가 되십니다.
가장 온전하신 왕이 되십니다. 그는 기묘자시요, 그는 평강의 왕이시요, 우리에게 참된 안식을 주시는 진정한 구원자이십니다. 모든 사사들은 죄를 지었지만 예수님은 죄가 없으십니다. 모든 사사들은 하나님께 불순종하였지만 예수님은 끝까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셨습니다. 인간 사사들, 인간의 왕들은 다 죽어서 연약함을 드러냈지만, 예수님은 죽었으나 다시 부활하셔서 영원히 아버지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아계시면서 우리를 위해서 중보기도 하고 계십니다. 그 예수님을 고대하고 바라는 그 갈망이 이 작은 구절에서도 우리에게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에서 누구도 믿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주시는 위임권세는 다 인정하고 그들을 따르고 순종하지만 궁극적으로 우리가 믿는 것은 여러분 가정의 가장도 아니요, 구역장이나 교구장이나 목사도 아니요, 이 나라의 대통령도 아니요, 오직 하나님 한 분이십니다. 오직 그 하나님 앞에 안식주심을 감사하고 오직 그 하나님 안에서만 살기를 다시 한번 다짐할 수 있는 주님의 참된 백성, 가장 복된 백성 되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