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반성없는 일본 맞서 평생 ‘기억투쟁’에 나선 두 사람
<되살아는 목소리> 박수남 감독-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장 남다른 '인연'
이금주회장, <일기> <회의록>에 오키나와 전쟁 희생자 위령제 참석 심경 ‘생생’
“광주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돕기에 한평생 바치신 이금주 광주유족회장님이 기억나서 오늘 상영이 감개무량합니다. 1992년에 이금주 여사와 징용 피해자들을 오키나와에 모시고 함께 오키나와 전쟁 희생자들의 현장에서 위령제를 지냈습니다.”
일제의 침략전쟁에 희생된 조선인 피해자들의 피맺힌 목소리를 소환해 낸 다큐멘터리 <되살아나는 목소리>(연출: 박수남·박마의)가 극장가에 깊은 울림을 주고 있는 가운데, 영화를 제작한 박수남 감독(89)이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상대로 7건의 소송을 제기하는 등 평생을 일제 피해자들의 권리회복을 위해 싸워 온 이금주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회장(2021년 별세)과의 인연을 언급해 관심을 끌고 있다.
1935년 일본에서 재일 조선인 2세로 태어난 박수남 감독은 가해 사실을 부정하는 일본에 맞서 평생을 조선인 원폭 피해자, 강제동원 피해자와 일본군 ‘위안부’ 등 일제 식민지 시절 핍박받은 조선인 피해자들을 찾아 50여 년 넘게 영상 기록을 남겨왔다.
박수남 감독은 최근 광주에서 영화 공동체 상영 소식을 전해 듣고 “광주는 일제 강제동원 피해자를 돕기에 한평생 바치신 이금주 광주유족회장님이 기억나서 오늘 상영이 감개무량하다”며 “1992년에 이금주 여사와 징용 피해자들을 오키나와에 모시고 함께 오키나와 전쟁 희생자들의 현장에서 위령제를 지냈다”며 고 이금주 회장과의 남다른 인연을 회고했다.
32년 전 오키나와에서 박수남 감독과의 만남은 이금주 회장이 남긴 <일기>와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월례회 회의록>에도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금주 회장이 한 자 한 자 볼펜으로 꼭꼭 눌러 쓴 기록물에는 박 감독과의 만남, 오키나와 위령제에 참가해 느낀 통한의 심정들이 생생한 기록으로 남아있다.
일본 정부와 전범기업을 상대로 7차례 소송을 제기한 이금주 회장은 기록의 달인이었다. 1990년 8월부터 2011년 4월까지 약 21년 간의 <일기>, 1992년 1월 제1차 회의부터 2011년 11월 제227차 회의록까지 약 20년 간 작성한 ‘태평양전쟁희생자광주유족회’ <월례회 회의록>을 통해, 개인 일상은 물론 광주유족회의 주요 활동, 그 과정에서 부딪힌 여러 상황, 활동 중 만난 사람들에 대해 꼼꼼하게 기록으로 남겼다.
이금주 회장의 일기와 월례회 회의록에 의하면, 오키나와에 강제동원된 피해자 6명을 포함해 11명은 1992년 6월 18일~6월 25일까지 7박 8일 일정으로 오키나와를 방문했다. 이들은 다음 날부터 현지 주민들의 안내를 받아 섬 곳곳에 흩어져 있는 조선인 학살 현장을 찾았다. 또 원주민들로부터는 전쟁 막바지 일본군의 총알받이로 내몰려 쓰러져 간 조선인들의 처참한 죽음 상황을 전해 들었다.
6월 20일 <일기>에는 “아카섬(阿嘉島)로 가서 온종일 묘를 발굴했다. 여기는 원주민으로 어린 시절 자기 엄마가 미군의 스파이라고 일본인들에 끌려가서 총살당한 곳이고, 자기는 끌려가지 않기 위해 13살 때 일인데 여자처럼 단발머리를 하고 숨어 살았다면서 목에다 무슨 기구를 대고야 말하는 자였다. 이날도 역시 여러 곳을 찾아 헤매었다”고 그날 행적을 기록에 담았다.
6월 22일에는 한국인 희생자들을 위한 위령제를 지냈는데 헌화, 분향 뒤 마지막 순서로 영령들의 넋을 달래는 살풀이로 이날 위령제를 마쳤다. 또 6월 24일에는 오키나와에 끌려와 숨진 일본군 ‘위안부’ 배봉기 할머니의 유해가 안치된 절을 찾아 고인의 넋을 추모했다.
이금주 회장은 오키나와 방문 결과를 1992년 7월 10일 제7차 <월례회>에 보고했는데, 이 <월례회 회의록>에는 “사방팔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우리 한국인들과 더구나 여자 위안부들이 꼼짝못하고 (고통을) 겪었으리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답답하고 가슴이 뭉클했다”며 “4명 죽은 자리, 16명 죽은 자리, 6명 또 24명, 1명 등 죽은 자리들 찾아다니며 꽃다발을 꽂아놓고 분향하고 소주 부어놓고 촛불 꽂아놓고 기도를 했다”고 당시의 울분과 심정을 기록했다.
이 <월례회 회의록>에는 박수남 감독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이 회장은 “아리랑 영화를 제작하는 이 교포는 자기 재산이라고 집 한 채 남은 것을 마저 팔아가지고 나섰으며, 이 영화를 제작해서 세계만방에 일본 놈의 만행을 전파시키겠다는 좋은 의지와 용기를 가진 여장부다”며 “지금이 오기까지 오키나와에 5년간 투자와 고통을 들인 곳”이라고 기록했다.
이어 “정말 돈 때문에 진통도 많이 겪었고 못 들을 말도 많이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일본인들이 평화의 모임이라는 곳에서 또 다른 곳에서 많이 협조해 주며 격려의 편지와 심지어는 보약까지 수도 없이 선사가 들어온다고 한다” 박수남 감독과의 만남을 자세히 기록했다.
이금주 회장의 <일기>와 <월례회 회의록>은 32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당시 기록들이 얼마나 꼼꼼하게 작성된 것인지, 또 누군가의 역사적 기록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번 보여주고 있다.
박수남 감독과 이금주 회장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고 억울한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대변하기 위해 각각의 방법으로 ‘기억투쟁’에 나섰다.
32년 전 이금주 회장이 <월례회 회의록>에서 “이 영화를 제작해서 세계만방에 일본놈의 만행을 전파시키겠다”고 남긴 것처럼, 박수남 감독이 피해자의 생생한 영상 증언을 통해 반성 없는 일본 정부를 상대로 ‘투쟁’을 벌인 것이라면, 이금주 회장은 일본의 전쟁범죄를 고발하기 위해 일본에서 소송을 일으키는 것과 한편으로, 볼펜으로 한 자 한 자 눌러 쓴 <일기>와 <월례회 회의록>을 통해 또 다른 형태로 ‘기억투쟁’을 해 온 셈이다.
2024년 12월 1일
(사)일제강제동원시민모임
■참고자료
아래는 1992년 7월 10일 <제7차 월례회 회의록> 중 일부.
(중략)
② 귀국하자마자 오키나와(沖縄)에 위령제와 증언을 들어보며 아리랑 제2편을 제작하는 박수남(감독이자 대학 강사) 씨의 전화가 두 번이나 일본에서 오고 또 池 변호사가 그처럼 간곡히 권했고 배(해원) 회장이랑 너무나 권장할뿐더러, 나 자신이 이런 유족회의 일을 보면서 말 한마디 못한 채 폭탄에, 총에 일본 놈의 매와 학대 속에서, 또 고된 노동에 못 이겨 영양실조로까지 죽는 한 그분들의 한을 위로하는 위령제가 참뜻이 있다는 것을 생각해서 17일 여러분을 대표해서 참가했습니다. 오키나와 국제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보도진들과 변호사, 운동 요원들의 대환영을 해서 잘 받았습니다.
③ 섬을 몇 차례 다니면서 사방팔방이 바다로 둘러싸인 이곳에서 우리 한국인들과 더구나 여자 위안부들이 꼼짝 못하고 겪었으리라 생각하니 내 마음이 답답하고 가슴이 뭉클했습니다.
④ 오키나와 사람하고 우리 한국 대구에서 살아나온 분들의 증언을 들으면서 한국인들이 4명 죽은 자리, 16명 죽은 자리, 6명 또 24명, 1명 등 죽은 자리들 찾아다니며 꽃다발을 꽂아놓고 분향하고 소주 부어놓고 촛불 꽂아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⑤ 그곳 주민 안내자 말은, 일본인들에 의해 죽은 혼령들은 가족과 고향산천을 그리고 부모 형제 처자들과의 눈물의 이별로 그리워하다 쓰러진 이분들은 50년 만에 찾아와준 여러분을 얼마나 고맙게 생각할 것이냐라는 말에 모두 울었습니다.
⑥ 이외에도 평화공원에서의 합동위령제와 그곳 주민들이 우리 한국인 희생자들의 사체를 묻어놓고 그 자리에 비를 세우고 매년 위령제를 지내준다는 고마운 말도 들었고, 합동제 때마다 펼쳐놓은 태극기는 너무나 찬란했습니다.
⑦ 이 아리랑 영화를 제작하는 이 교포는 자기 재산이라고 집 한 채 남은 것을 마저 팔아가지고 나섰으며, 이 영화를 제작해서 세계만방에 일본놈의 만행을 전파시키겠다는 좋은 의지와 용기를 가진 여장부입니다.
⑧ 지금이 오기까지 오키나와에 5년간 투자와 고통을 들인 곳이랍니다.
⑨ 정말 돈 때문에 진통도 많이 겪었고 못 들을 말도 많이 들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일본인들이 평화의 모임이라는 곳에서 또 다른 곳에서 많이 협조해 주며 격려의 편지와 심지어는 보약까지 수도 없이 선사가 들어온답니다.
⑩ 저녁이면 교류시간에 변호사, 검사, 운동권 남녀노소, 뜻있는 가정주부, 교수, 교사들의 모임에서 나오는 말이 많았습니다.
⑪ 내 이름이 첫째 좋은 글자라고 호평을 받았고 위로의 말도 많이 받았습니다.
⑫ 각 세계 어느 나라든지 일본국의 피해 안 받은 나라가 없지만 유독이 한국이 제일 피해가 많았으니만큼 한국이 중심이 돼서 어떻게 하던지 신입법(新入法)을 위해 돌진하십시오. 우리도 힘닿는 데까지 하겠다는 검사의 말에 나는 눈이 뜨거워졌습니다. 어쩌면 송두회 씨나 야마모토 말하고 똑같은.
⑬ 또 여자 변호사도 힘껏 도와주겠다는 약속을 받았으며 이 못난 늙은이를 그처럼 대우해주는데 다시금 감개무량했습니다. 엊그제 편지도 왔습니다.
⑭ 귀가 길에는 선물까지 사가지고 공항에까지 나와 줘서 또다시 고마웠습니다.
⑮ 떠날 때는 위임장도 써야 되겠고 안타까운 심정이었으나 좋은 말로 많은 용기를 가질 수 있도록 격려의 말과 또한 47년간이나 내 버림받은 우리 동포의 죽음이 위로를 받겠다는 생각에 너무나 흡족했고, 영화 제작에 도움을 주었고, 또한 해방이 되었는데 남자들은 기뻐서 서로 다투어가면서 고국을 찾아가는데 왜 여자 위안부들은 자살이나 또는 안 가거나 딴 나라로 도망가며 자기를 감추려고 하는 그 뜻이 무엇이냐고 묻는 ‘마이크’를 받고, 우리 한국인들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여자들의 정조 문제를 생명보다 더 귀중하게 알고 있기 때문이라는 대답과 여권(女權) 문제에 대답해주고 온 점 등 너무나 좋았기에 이것도 하느님의 사명이라고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