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잔언약의 문제점: 잘못된 성경관 진술과 그 폐해
(프란시스 쉐퍼)
이제 앞으로 우리는 어려운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다. 우리와 우리의 영적 자녀에게 말이다. 그런데 확고한 성경관을 기반으로 하지 않는 한 우리는 앞으로 닥칠 어려운 시대에 대해 준비를 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는 인본주의가 도덕과 가치와 법속에서 그 자연적인 결과를 나타내고 있는 시대이다. 복음주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그러운 시대는 지나갔으며 이제는 확고한 성경관만이 상대주의적 사고를 바탕으로 세워진 영향력 있는 문화의 압력을 버틸 수 있다. 그런데 오늘날 복음주의는 전세계와 미국에 걸쳐서 복음주의라는 이름과 관련된 한 그 숫자가 늘고 있긴 하지만 확고한 성경관을 위해 하나가 되어 싸우고 있지는 않다.
‘실존주의 방법론’이 복음주의라고 하는 것 속으로 스며들어 왔다. 실존주이 방법론은 철학, 미술, 음악, 소설, 시, 영화 같은 일반 문화를 지배하고 있다. 실존 철학은 요즘 유행하는 지배적인 형태의 자유주의 신학이기도 하다. 실존주의 방법론이란 무엇인가? 이성의 영역에서는 성경에 많은 오류가 있다는 것이 이것의 입장이다. 역사의 영역에서, 또 성경이 우주에 대해 다루는 부분에서는 – 다시 말해 성경이 과학의 관심 영역을 다루는 부분에서는 – 성경에 오류가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오류를 담고 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일종의 상층부적 종교적 체험을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 자유주의 신학의 지배적인 형태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지금은 이런 신학이 많은 곳에서 복음주의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고 있다....그들에 따르자면 성경에는 오류가 있지만 그럼에도 우리는 종교적 사실들을 꼭 붙잡고 있어야 한다고 한다. 실존주의 방법론이 복음주의에 파고들어 온 방법이 이것이다.
이제는 로잔언약이 성경에 대해 말하는 바를 함께 살펴보자.
“우리는 신구약 전체의 신적 영감성과 진실성과 권위와 성경이 하나님의 유일한 말씀으로서 그것이 단언하는 모든 사실에는 오류가 없으며 신앙과 행위의 유일하고 무오한 법칙임을 단언한다.” (국내에 소개된 로잔언약 국문판에는 "그것이 가르치는 모든 사실에는 오류가 없으며"로 소개하여 "without error in all that affirms"를 명백히 오역한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affirm'을 '가르치는'으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라기보다 의도적 왜곡이라고도 볼 수 있는 소지가 다분하다.)
“그것이 단언하는 모든 사실에는 오류가 없으며”라는 짧은 문구... 로잔언약의 그 인쇄된 글을 보았을 때 나는 그것이 오용될 것임을 당장에 알았다. 1975년 8월에 빌리 그레이엄 박사는 내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나는 ‘그것이 단언하는 모든 사실에는’에 대해 짧은 책을 하나 쓰려고 생각하고 있소. 유감스럽게도 이 문구는 많은 사람들에게 어떤 빠져나갈 구멍이 되고 있소.” 안타깝게도 “그것이 단언하는 모든 사실에는”이라는 문구는 실제로 많은 사람들에게 빠져나갈 구멍이 되었다. 성경은 가치체계와 성경에 나타난 특정한 종교적 사실들을 단언하고 있다고 말하는 실존주의 방법론을 통해서 그렇게 되었다. 그러나 실존주의 방법론을 바탕으로 해서 이들이 설령 로잔언약에 서명은 할지라도 마음 한 구석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성경은 역사와 우주의 영역에 대한 가르침에서는 오류가 있는 진술을 한다.”하고 말이다....
오늘날 무오성을 말하는 이들은 그것을 성경전체에 적용시키지 않고 의미체계, 가치체계, 종교적 사실에만 적용시킨다. 그들은 성경이 역사와 과학의 관심의 영역에 대해 말하는 부분은 모두 제외시킨다. 성경안에 있는 이러한 역사와 우주를 다루는 부분들을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창세기의 처음 열한 장뿐만 아니라 신약마저도 절대적인 것이 아닌 상대적인 것으로 본다. 하지만 이런 과정을 일단 밟기 시작하면 한걸음 더 나아가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것을 명심하자. 스스로를 여전히 복음주의라고 부르는 이들 가운데서 이럼 입장들은 한걸음 더 나아갔다... 이제는 성경이 말하는 개인 관계 영역에 있어서의 특정한 도덕적 절대 기준들도 그 시대의 문화를 반영하고 있는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예를 들면 이혼과 재혼, 가정과 교회의 질서에 대한 성경의 분명한 가르침도 그 시대의 문화적 반영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성경이 우리 사회와 문화를 판단하는 대신 그 문화에 머리를 숙이게끔 하고 있다.
일단 복음주의라는 이름 아래 실존주의 방법론의 길로 빠져들어 가기 시작하면 성경을 오류가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보지 못한다. 성경의 각 부분을 하나씩 잠식해 들어갈 것이다. 이렇게 성경은 1920~30년대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말한 바로 그것이 되어 버렸다. 그 시대를 살았던 그레샴 메이첸은 기독교의 바탕이 무너지고 있다고 지적한 바 있다. 이 바탕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살아계시는 무한하고 인격적인 하나님이 침묵하지 않으신다는 것과 성경은 종교적 주제에 관한 가르침뿐만 아니라 역사와 우주와 도덕적 절대 기준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 모두를 명제적 진리로 말씀하셨다는 것이다.
복음주의가 겉으로는 점점 세력을 넓히는 것 같지만 복음주의라는 이름을 달고 있는 이들 중에 상당수가 복음주의를 복음주의적인 것이 되게 하는 그것을 더 이상 고수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이런 현상이 계속된다면 우리와 우리의 자녀들은 앞으로 올 어려운 시대에 대해 무방비 상태가 될 것이다.
또 우리가 묵인해주면 우리는 문화에 대해 구속적 소금이 되지 못할 것이다. 도덕과 법은 순전히 문화적 성향과 통계적 평균치에 지나지 않는다고 모두들 믿고 있는 이런 문화에서 말이다. 이런 식의 생각은 우리 시대의 표지이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이런 표지를 달고 다닌다면 우리가 몸 담고 있는 깨어지고 부서진 이 세대에 어떻게 우리가 구속적인 소금이 될 수 있겠는가?
내가 성경을 주제로 로잔 연설에서 했던 마지막 말을 다시 한 번 하고자 한다. 애정어린 마음으로 하지만 단호한 자세로 이렇게 말해야만 한다: “온전한 성경관을 가진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을 구분하지 않는 한 복음주의는 철저하게 복음주의적일 수 없다”고 말이다.
(프란시스 A. 쉐퍼. 프란시스 쉐퍼 전집 II 기독교성경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2003. 201-208.)
출처 : 웨스트민스터 신학회 밴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