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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비사(蒙古秘史)” 단군의 흔적을 지웠다
새 왕조가 창업될 때마다 상계보를 청보화(淸譜化)하는 일은 다반사로 일어났다.
왕권자나 빈천자가 권력 반열에 오르면 자신과 가문의 부족한 정통성 확보를 위해 유명 인물로 상계를
조작했다.
수구세력들은 목숨을 구걸하고 기생하며, 거짓 역사를 만들어 야합했다.
절대 권력자의 환부역조 (換父易祖)에 적극 동참한 것이다.
일부 왕조와 문중비사(門中秘史)는 이렇게 만들어 졌다.
어떤 일을 다시는 하지 않겠다고 맹세하거나 단언할 때 ‘내 성(姓) 갈겠다’라 한다.
조선은 유교의 영향으로 성(姓)을 바꾸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다고 믿었다.
이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다. 그럼에도 姓이 바뀐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연원을 살펴보자.
번한세가(番韓世家)에는 老子와 孔子가 나눈 이야기가 전한다.
“공자가 주나라에 가서 노자에게 예에 대해서 묻는 중에, 노자 아버지의 성은 韓이고 이름은 乾이며,
조상은 풍인(風人)이라 하였다.
후에 서토를 탈출하여 ‘아유타(阿踰陀)’에서 백성들을 교화시켰다
(孔丘 適周問禮 於老子李耳 耳父姓韓名乾 其先風人 後西出關由內蒙古 而轉至阿踰陀 以化其民)라 기록
했다.
당시 세상을 지배했던 孔子의 어록, 그럼에도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老子를 가문으로 끌어들여 조상
으로 삼았다.
이는 빈천(貧賤) 가문을 미화시키기 위한 상계(上系) 조작이었다.
BC 1122년 商나라 箕子는 황제헌원의 16세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헌원은 공손성(公孫姓)으로 후에 모성을 따라 희성(姬姓)으로 바꾸었다.
기자의 본명은 자서여(子胥餘), 商(殷)나라 왕족 성인 子姓이다.
商을 떠나면서 箕姓이 되었다.
BC 324년 기후(箕詡)가 번한조선을 찬탈, 130년 후 BC 194년 기준(箕準)은 韓氏로 둔갑(冒姓)한 뒤
조선에 정착 韓, 奇, 鮮于氏로 바뀌었다.
BC 1285년 기자조선(奇子朝鮮)이 이들 3姓을 사성(賜姓)한 1천여 년 계대를 기자조선(箕子朝鮮)으로
송두리체 뒤집어 놓았다.
후한서(後漢書)가 조작하고 조선이 500여 년을 사대모화(事大慕華)에 충실을 기하므로써 동북공정과
식민사학의 빌미를 제공했다.
또 다른 한 사례를 보자.
징기스칸 생전에 만들어졌다는 몽골비사이다.
‘대진국(大震國) 대야발(大野勃)의 19세손이 징기스칸’이라는 부분이다.
이는 조선 500년을 송두리 체 뒤흔든 箕子와 연계된 부분이 있어 고증이 필요한 부분이다.
몽골 제국은 1206년 징기스칸에 의해 건국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단기고사(檀奇古史)에는 BC 2137년 “황제의 동생 오사달을 몽고리한
으로 봉하다.
지금의 몽고족이 바로 그의 후손이다(封皇弟烏斯達爲蒙古里汗或曰今蒙古族)”라 기록했다.
이 기록으로 보면 칭기스칸은 3,343년의 역사를 잘라 냈다.
단군조선의 흔적(痕迹)을 지워버리고 몽골 건국의 시조로 재구성했음이다.
단군의 역년을 기록한 위 두 사서는 위서(僞書)요, 몽골비사 만이 진서(眞書)라 주장한 데 따른 것이다.
결과적으로 단군조선의 역년은 거짓이라는 뜻이다.
행촌 이암(李巖)은 2096년의 거짓 단군 년대를 썼으며, 대야발이 십수삼년 고행 끝에 편찬한 단기고사
또한 거짓 글이 된 셈이다.
825년 단기고사를 번역하고 중간서를 쓴 발해인 황조복(皇祚福), 신채호(申采浩)의 중간서 교열을 본
이시영(李始榮)은 허명이었는가?.
홍암 나철, 홍범도, 오동진, 김좌진 등 일제에 항거하며 사재를 털어 고사(古史) 발간에 심혈을 기우린
독립투사들은 거짓 역사에 동참했는가?.
우리가 애써 동족 계념으로 연민의 정을 나눈 몽골은 외적(外敵)이었는가?
원조비사(元朝秘史)라고도 불리는 몽골비사(원명: Monggolvn Ni'uca Tobca'an 몽고륜 뉴차 톱카안)는
칭기스칸의 22대 조상 부르테 치노와 코아이마랄로부터 칭기스칸의 셋째 아들인 오고타이를 기록한 것
이다.
칭기스칸의 조상들(1절~58절)은 신화와 문학적 허구와 역사적 사실이 녹아들어 있다는 평이며 부르테
치노 또한 신화적 존재로 부각되어 있다는 점이다.
또한 시조모 ‘알랑 고아’ 신화가 만들어 지고, 그의 아버지가 고주몽(高朱蒙)이라 했으니 영웅 탄생은
항상 건국 신화를 창조하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칭기스칸의 조상 계대를 살펴보자.
<부르테 치노=코아이 마랄-바타치칸-타마차-코리차르 메르겐-아오잠 보로올-살리 카차오
-예케 니툰-셈 소치-카르초- 보르지기다이 메르겐=몽골진 고아-토로골진 바얀=보로그친 고아
-도본 메르겐=알란고아-보든 차르-카비치 바아토르-메넨토돈-카치 쿨룩=모놀론-카이도-
바이 싱크로 독신-톰비나이 세친-카블 칸-바르탄 바아토르- 예수게이 바가토르=후엘룬
-칭기스칸(테무진)=부르테>
*참고서적: ‘몽골비사, 칭기스칸 잠든 유럽을 깨우다’
역사학자인 太虎英씨는 한 마디로 ‘어불성설, 있을 수 없는 일’이라 했다.
고려로 망명, 1천여 년 세가(世家)를 이루고 기록한 太氏 문중원로이며 이 문중의 상계대는 고려로
직결되어 있으며, 몽골과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음이 대동족보로 확인된다 했다.
대야발(大野勃)의 생몰년대는 미상이다.
다만 단기고사를 완성한 년도가 천통(天統) 31년으로 729년이다.
대야발의 생년을 700년으로 추정하면 징기스칸(1155년생)과는 445년의 시차가 생긴다.
1세 30년을 기준하면 15世로, 19世 까지 120년의 공간이 발생한다.
1231년(고종18) 대집성大集成), 1253년(고종40), 1260년(원종 즉위년) 대금취(大金就)가 몽골 정벌에
큰 공을 세워 대장군에 오르고 太씨로 불리게 된다.
이들은 시조 대중상(大仲象)의 18세손으로 934년(태조 17) 고려로 귀부한 11世인 왕세자 대광현(大光顯)의 8세손이다.
‘이로부터 직계손은 太씨(1526년 太氏世系譜)로 기록되었다’는 것이 태호영씨의 설명이다.
현재 太씨는 협계(陜溪), 영순(永順), 大씨는 밀양 등으로 분파되어 있다.
太씨는 9천여 명, 大씨는 500여 명으로 추산되고 있다.
왕계(王系)는 대조영(大祚榮) 계대가 6세에서 절손, 7세부터 대야발의 후손으로 이어졌다.
칭기스칸과 동계(同系)이면서 항몽했던 이 부분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 것인가?.
불과 50여 년 차이다.
목이 쉬도록 하소하는 ‘우리 역사 알리기’는 ‘신 사대주의 역사 알리기’로 변질된 게 아닌가?.
신 사대(事大)의 출발이 또 이렇게 시작되고 있음이다.
내 역사를 얼마나 더 짓밟고 짓이겨야 할 것인가?
편향된 시각이 모골을 송연하게 한다.
“파나류산(波奈留山) 아래에 한인씨(桓仁氏)의 나라가 있는데...
그 땅의 넓이는 남북이 5만 리요 동서가 2만여 리이다.
(三聖記 下篇, 古記云波奈留之山下有桓仁氏之國... 其地廣南北五萬里東西二萬餘里)”
차라리 이들 모두 ‘단군의 후예들이다’라 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올바른 역사 해석이 아닐까?
“한국은 어째서 있는 역사도 없다고 그러는가, 도대체 알 수 없는 나라이다.” 라고 신날하게 비판한
러시아 사학자 푸틴의 강의 요지를 살펴 볼 일이다.
성황당(城隍堂)과 서낭당(西娘堂)
성황당(城隍堂)과 서낭당(西娘堂) 어느 표현이 맞는가? 아니면 성황당도 맞고, 서낭당도 맞는가?
성황(城隍)의 첫 기록은 부도지 14장에서 시작된다.
“그 뒤에 천년 사이에 성황이 전역에 널리 퍼지더라. (爾來千年之間 城隍 遍滿於全域)”
성황과 서낭(西娘)의 차이를 역사적 관점에서 풀어 보면, 성황의 표기는 모화사상(慕華思想)에 기인된
것으로 서낭(西娘)의 오기로 보인다.
서낭의 낭(娘)은 아가씨의 뜻 외에 ‘어머니’의 뜻도 갖고 있다.
어머니 쪽을 중심으로 혈통이나 상속이 이루어지는 사회, 즉 모계 사회(母系社會)로 서녘에서 오신
어머니 즉 마고이시며 삼신할미로 계념을 정리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부도지 1장에서 “마고(麻姑)는 희노의 감정이 없으므로 선천(先天)을 남자로 하고 후천(後天)을 여자로
하여 배우자 없이 궁희(穹姬)와 소희(巢姬)를 낳고 궁희는 황궁(黃穹)과 청궁(靑穹)을 소희(巢姬)는
백소(白巢)와 흑소(黑巢)를 마고의 정을 받아서 배우자 없이 각기 두 천인과 천녀를 낳았다.” 하여 인류
최초 모계사회의 태동을 알리고 있다.
그 곳이 마고성(麻姑城)이며, 동이족이 웅거하던 대륙의 서녘지역이니 그 곳에서 오신 어머니인 삼신
할머니가 아닌가.
생명을 잉태(孕胎)하는 모체(母體)가 여자였으며, 여자를 생명의 뿌리로 보았던 것이다.
참고로 城과 隍의 글꼴 변천과정을 살펴보자.
금문의 城자는 성을 지키는 무기(戊)와 성의 망루를 뜻(금문1)했는데 망루를 그리기 번거러워(금문2)
흙(土)으로 대치된 글자이다. 금문은 상주시대(商周時代) 청동기에 주조(鑄造)되어 있거나 새겨진 글자로
종정문(鐘鼎文)이라고도 부른다.
隍자의 소전을 보면 성 밖을 둘러 싼 못(垓子), 즉 城池라고 설문은 풀이했다.
토성을 쌓기 위해
파인 구덩이에 물을 채워 적의 접근을 차단할 목적으로 만든 것이 해자이며 皇은 독음,
부(阜)로 뜻을 나타낸 것으로 진나라 때 만들어진 글자이다.
성황은 마을 뒷산에 쌓아 적군을 방비하던 축성(築城)의 뜻이며, 서낭은 마을 어귀에
지어져 마을의 안녕과 만민의 안녕을 기원하던 기도의 터이다.
城의 고대어는 ‘잣’이다.
'잣'은 순수 고유어지만 그 어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다만 잣의 ‘자’는 “물체가 있거나 그것을 둘 수 있는 공간”을 뜻하는 말이니, 공간적 의미를 나타내는
것으로 풀이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757년 신라 경덕왕 때 지명을 개칭하면서 이전 사용하던 ‘자, 지’와 '재'의 뜻이 들어간 행정지명을 중국
식으로 거의 모두 '성(城)'자로 바꾸었다.
'잣'의 원말은 '위'의 뜻으로 지형을 나타낼 때는 '산꼭대기'나 '등성마루'의 뜻으로 뒤에 표준말로 정착
되고, 잣 →자, 지 →재로 변하여 한재, 갈재, 새재 처럼 산이나, '고개'의 뜻으로 변하였다.
예를 들면, 1428년(세종 10) 우의정으로 물러난 유관(柳寬 1346-1433)이 삼성사(三聖祠)에 관한
상서(上書)한 내용에, ‘단군 조선 때는 아사달산(阿斯達山)이며, 신라 때에 궐산(闕山)이라고 고쳐 불렀다’
하여 그 유래를 밝혔다.
단군시대 도성이었던 ‘아사달’ 말미 山은 원말인 ‘잣’에서 ‘성’과 ‘산’으로 변화되었음을 볼 수 있다.
대관령 국사 서낭당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향토문화전자대전
‘잣’이 쓰인 옛 지명에 ‘잣안ㆍ잣미ㆍ잣골ㆍ잣실’ 등이 있음을 볼 수 있고, 성안(城內)을 뜻하는 ‘잣안’은
‘장안’으로 쓰고 있다. 흔히 ‘잣’을 ‘잣(栢)’과 연관 짓기도 하나, 실제로는 단순히 ‘산(山)’의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많음을 유념해야 하겠다.
태초에 소리〔音〕가 있었고, 소리 값이 뜻글인 한자로 변화, 정립했다.
한자는 분명 우리의 뜻글이기는 하나 결코 한자에만 너무 의미를 부여해서는 안 될 것이다.
어머니 마고의 역사를 전해주던 신성지역 서낭당, 크고 넓은 세상을 아우르던 여신〔姑〕과 자재율
속에서 살았던 하늘나라 마고성의 축약지인 기도터가 아닌가.
이능화(李能和·1869~1943)는 '조선무속고(朝鮮巫俗考)’에 “모엄이란 자가 자기의 일을 도와 달라고
성황에게 빌었으며, 당나라 장설과 장구령의 성황에 대한 제문이 있고, 송나라 이후에는 성황신사가
천하에 퍼졌다.
명나라 초기에는 경도의 군현에 단을 쌓고 제사를 드렸으며, 청나라도 이에 따랐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문종 때 신성진에 성황사를 두었으며 위엄 있게 숭배했다.”라 하고,
“문헌비고(文獻備考)에 이르기를, 본 조의 성황당은 바람 ․구름 ․우뢰 ․비를 함께 하고 성황신을 받들었다.
바람․ 구름 ․우뢰 ․비의 신을 오른쪽에 정좌시켜 남향으로 하고, 풍우단(風雨壇)에 신사를 행했다.
여제(厲祭)를 먼저 행한 다음 성황단에 제사를 드렸는데 이것을 여제일이라 했다.
또한 성황신은 곳곳에 있으며, 무격이 기축하는데 반드시 신이 있다 하였다.
모든 성황신은 국도를 비롯한 팔도를 편안하게 하는 신이므로 나라를 보호하는 신이라 부른다.”했다.
윗 글에서 이능화는 조선무속고라는 연구 논문을 통해 민속에 대해 관심을 불러 주었다.
참고한 문헌비고(文獻備考)는 1770년(영조46) 홍봉한 등이 왕명을 받아 100권으로 만들어 <동국문헌
비고>라 했다.
최초의 편찬 기록이다. 전통문화에 관한 백과사전으로 제도, 문물 연구에 귀중한 자료임에는 틀림없다.
그러나 모화사상기에 만들어진 자료의 언어 구성 문제인 성황의 뜻 말을 재검토해야 할 것으로 본다.
조선의 실록과 고전 또한 ‘성황’의 표기를 고수, 사대에 충실했다.
기원전 1891년 11세 도해 단군에 이르러 ‘오가에 명을 내려 열두 명산의 가장 뛰어난 곳을 골라 국선의
소도를 설치케 하였다.
많은 박달나무를 심고 가장 큰 나무를 골라 한웅의 상으로 모시고 여기에 제사를 지내며 웅상이라고
이름 했다’는 단군세기 기록을 성황당의 시원으로 둔갑시키는 일도 삼가해야할 것으로 본다.
성황은 춘추필법의 관습에 의해 써진 낱말일 뿐이다.
이로 미루어 성황당(城隍堂)은 서낭당(西娘堂)으로 불러야 할 것이다.
성황당에 대한 화하의 사초 첫 기록은 239년 오(吳)나라 손권(孫權)이 안휘성 (安徽省) 무호(蕪湖)에
사당(성황당)을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 후 전쟁과 재해, 전염병 등이 발생할 때마다 각지에서 토지신에 대한 제사를 드림으로써 신앙으로
발전했다.
성황은 남북조(南北朝) 시대를 거쳐 당(唐)대에 이르러 그 믿음이 더욱 보편화되었다.
후대 도교(道敎)에서도 성황을 그들의 체제에 끌어들여 ‘흉악한 것을 물리치고 국가의 안전을 보우하는
신이며 한 지방의 망령들을 관할한다.’고 주장했다.
송(宋)대에는 전역에 걸쳐 모든 부현(府縣)에 있는 성지에 사당을 세워 성황신을 모셔 제사를 지냈으며,
원(元)대에 이르러 성황신을 한 단계 높여 나라의 수호신으로 삼았다.
명(明)대에는 주원장(朱元璋)이 토지신(土地神)의 사당(祠堂)에서 태어났다고 하여 토지신에 대한 숭배
와 존경이 최고조에 달했다.
도(都)의 성황신을 필두로 부, 주, 현 순으로 공식적인 토지신의 서열을 정해주었다고 한다
하화족의 민간 신앙을 춘추필법(春秋筆法)에 끼워 맞춰 서낭(西娘)을 성황(城隍)으로 덮어씌웠는데도
사대(事大)에 충성을 다 했다.
구월산 삼성사를 부숴버리고 아부에 급급했던 사대부들의 행태와 고사서(古史書)를 수거, 분서하고
위작 고려사를 만들어 역사를 호도한 증빙이 밝혀지고 있음에랴.
당파에 의한 계층간 반목과 질시, 불신과 분노, 역사를 외면하고 사대에 맹종한 사대부들의 일신 안녕만을
추구한 복지부동이 남긴 유산이리라.
이제 선인(先人)의 기록에 후대의 왜곡과 곡필은 반드시 고쳐 나아가야 할 것이다.
이제 그만 마고의 역사를 우롱하는 처사는 그만 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