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옅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 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 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더 좋은 시는 고유한 맛도 있으면서 의미를 느낄 수 있는 시
예문)
알 수 없어요 한용운
바람도 없는 공중에 수직(垂直)의 파문(波紋)을 내이며 고요히 떨어지는 오동잎은 누구의 발자취입니까.
지리한 장마 끝에 서풍에 몰려가는 무서운 검은 구름의 터진 틈으로 언뜻언뜻 보이는 푸른 하늘은 누구의 얼굴입니까.
꽃도 없는 깊은 나무에 푸른 이끼를 거쳐서 옛 탑(塔) 위의 고요한 하늘을 스치는 알 수 없는 향기는 누구의 입김입니까.
근원은 알지 못할 곳에서 나서 돌부리를 울리고 가늘게 흐르는 작은 시내는 굽이굽이 누구의 노래입니까.
연꽃같은 발꿈치로 가이없는 바다를 밟고, 옥같은 손으로 끝없는 하늘을 만지면서 떨어지는 날을 곱게 단장하는 저녁놀은 누구의 시(詩)입니까.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그칠 줄을 모르고 타는 나의 가슴은 누구의 밤을 지키는 약한 등불입니까.
▲ 좋은 시의 정의들에 대한 공통점
가. 데이루이스 [1904-1972] 영국의 시인. 비평가
: 우수한 시인이란 영속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이 많아야 하고, 말의 구사에서 독창적이어야 하며, 사유의 깊이를 보여주어야 한다.
나. 엘리어트 [1888-1965] 미국의 시인. 대표작「황무지」
“한 작품이 문학이냐 아니냐 하는 문제는 문학적 기준에 의해서 판단될 수 있다. 그러나 문학작품의 그릇이 큰 것이냐 아니냐 하는 것은 문학적인 기준만으로는 판단될 수 없다.“
다. 미셀 푸코 [1926-1984] 프랑스의 철학자. 대표작 「광기의 역사」
“시인은 자기가 사는 당대 문화에서의 극한 상황을 표시하는 사람이다.”
▲ 시대를 읽지 못하면 좋은 시인이 될 수 없다.
- ‘속도’와 ‘느림’
예문1)
어미 쥐의 말씀 오봉옥
저 죄 많은 두 발 짐승은 시인이란다. 끼끼, 시를 쓴답시고 지금 동강을 간단다. 절집을 찾는단다.
저들이 느릿느릿 게걸음질치는 건 꽃길에 취해서가 아니란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이는 건 속죄의 옷자락이 무거워서란다.
저들에겐 고통을 키우는 유전자가 있단다. 너희는 아득한 구멍 속에서 캄캄한 희열을 느끼지만 저들은 환한 길을 가면서도 터널 같은 외로움을
느낀단다. 이 어미의 눈엔 저들의 내장까지도 보인단다. 저들이 가고 있는 길, 밑도 끝도 없이 꿈을 꾸며 가야할 길, 가서는 다시 돌아올 그 길이 다 보인단다.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길래 두 발 짐승으로 태어났을꼬. 몇 생이나 닦아야 우리 같은 존재가 될꼬.
예문2)
와온에서 나희덕
산이 가랑이 사이로 해를 밀어넣을 때, 어두워진 바다가 잦아들면서 지는 해를 품을 때, 종일 달구어진 검은 뻘흙이 해를 깊이 안아 허방처럼 빛나는 순간을 가질 때,
해는 하나이면서 셋, 셋이면서 하나
도솔가를 부르던 월명노인아, 여기에 해가 셋이나 떴으니 노래를 불러다오 뻘 속에 든 해를 조금만 더 머물게 해다오
저녁마다 일몰을 보고 살아온 와온 사람들은 노래를 부르지 않는다 떨기꽃을 꺾어 바치지 않아도 세 개의 해가 곧 사라진다는 것을 알기에 찬란한 해도 하루에 한 번은 짠물과 뻘흙에 담근다는 것을 알기에
쪼개져도 둥근 수레바퀴, 짜디짠 내 눈동자에도 들어와 있다 마침내 수레가 삐걱거리며 굴러가기 시작한다
와온 사람들아 저 해를 오늘은 내가 훔쳐간다
▲ 문학예술의 역사
가. 예술의 시초- 구석기 시대의 <동굴벽화>
나. 용비어천가
다. 낭만적 사랑의 송가
라. 고려시대의 문학과 조선시대 사대부의 문학
※ 결론
▷ 이데올로기에서 초월한, 그릇이 큰 문학은 역사 이래로 없었다.
▷ 문학 속에서 이데올로기가 명시적으로 드러나면 그 호소력이 떨어진다. 자칫 구호의 수준으로 떨어질 수 있다.
▷ 사상표현이 암시적이면 암시적일수록 그 문학적 설득력도 증폭된다.
예문)
빨간 외바퀴 손수레 윌리엄 카를로스 윌리엄스
천하대사가 걸려 있다
뽀오얀 병아리떼 곁
빗물로 윤기나는
빨간 외바퀴 손수레에.
▷ 문제는 삶의 실감이다.
예문)
환상통 김신용 한때, 지게는, 내 등에 접골된 뼈였다 목질의 단단한 이질감으로, 내 몸의 일부가 된 등뼈.
언젠가 그 지게를 부수어버렸을 때, 다시는 지지 않겠다고 돌로 내리쳤을 때 내 등은, 텅 빈 공터처럼 변해 있었다 그 공터에서는 쉬임없이 바람이 불어왔다
그런 상실감일까? 새가 떠난 자리, 가지가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은?
(중 략)
사는 일이, 저렇게 새가 앉았다 떠난 자리라면 얼마나 가벼울까?
▷ 시와 사상은 선택의 문제가 아닌 조화의 문제이다.
예문)
손님 백무산
내가 사는 산에 기댄 집, 눈 내린 아침 뒷마당엔 주먹만 한 발자국들 여기저기 어지럽게 찍혀 있다 발자국은 산에서 내려왔다, 간혹 한밤중 산을 찢는 노루의 비명을 삼킨 짐승일까
내가 잠든 방 봉창 아래에서 오래 서성이었다 밤새 내 숨소리 듣고 있었는가 내 꿈을 다 읽고 있었는가 어쩐지 그가 보고 싶어 나는 가슴이 뜨거워진다 몸을 숨겨 찾아온 벗들의 피묻은 발자국인 양 국경을 넘어온 화약을 안은 사람들인 양 곧 교전이라도 벌어질 듯이 눈 덮인 산은 무섭도록 고요하다
거세된 내 야성에 피를 끓이러 왔는가 세상의 저 비루먹은 대열에 끼지 못해 안달하다 더 이상 목숨의 경계에서 피 흘리지 않는 문드러진 발톱을 마저 으깨버리려고 왔는가 누가 날 데리러 저 머나먼 광야에서 왔는가 눈 덮인 산은 칼날처럼 고요하고 날이 선 두 눈에 시퍼런 불꽃을 뚝뚝 떨구며 그는 어디로 갔을까
▷ 깊이 있는 시를 쓰기 위해서는 공부하고, 고민해야 한다. 시대를 읽지 못하는 사람에게서 좋은 시가 나오긴 어렵다.
★ 이번 주 과제
한용운의 <님의 침묵>과 신경림의 <농무>를 찾아 음미해본 후 시와 정신의 관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