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종과 원경왕후 민씨의 관계는 급격히 냉각되기 시작했다. 원경왕후 민씨는 임금의 자리를 만들어준 자신과 친정의 공로를 조금도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종에게 심한 배신감을 느꼈고, 반면 태종은 임금의 자리를 만들어주었다는 공로를 내세우며 압박해오는 원경왕후 민씨 가문의 기세를 단칼에 꺾어버리고 만인지상의 왕권을 독점하기 위해 혈안이 되었다.
태종은 원경왕후가 절망에 빠지는 모습을 그려보았고, 많은 여성 편력을 통해 절대 권력자의 무소불위를 원경왕후에게 보여주어 기세를 꺾고 싶었다. 상대하는 여성 한 사람 한 사람의 뒤에는 항상 절망에 빠진 원경왕후의 모습이 겹쳐져 보였고, 태종은 이를 즐겼다. 이렇게 맺어진 태종의 여인은 9명의 후궁을 비롯하여 수도 없이 많은 여인들이 그를 거처 갔고, 그들 여인들은 태종에 의해 원경왕후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못이 되었다.
태종이 원경왕후를 겨냥해 보인 과시적 여성편력은 원경왕후를 분노에 휩싸이게 하여, 태종을 비난하는 행동은 더욱 극단적으로 치솟을 수 밖에 없었다. 태종은 외척의 세력을 분산시킨다는 명분을 내세워 끝도 없이 여성편력을 이어갔고, 태종과 원경왕후의 관계는 한없이 멀어져만 갔다. 그리고 그 여파는 엉뚱하게 처남 형제들에게 불똥이 튀었다.
결정적인 사건은 “왕자 비(裶)의 참고(慘苦)”에 관한 사건이었다. 민씨 집안에서 가비(家婢)로서 대대로 잡무를 맡아오던 여종의 어린 딸 “소(素)”가 심부름으로 잠시 입궐한 틈에 태종이 그녀를 발견하여 관계를 맺기 시작하였고, “소”는 곧 태기가 있어 아이를 낳았는데 그 아이가 바로 “왕자 비(裶)”였다. 원경왕후와 처가의 기를 꺾기 위해 벌린 의도된 행위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원경왕후는 치욕과 질투심에 불타 여종과 아이를 당장 죽여 없애 버릴
것을 친정 동생들에게 지시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모든 사실이 태종에게 발각되고 말았다. 이 사건으로 원경왕후의 첫째, 둘째 동생 민무구, 민무질이 처형되었고, 얼마 후에는 남아 있는 셋째, 넷째 동생인 민무휼, 민무회 마저 죽음을 당하여 원경왕후의 친정인 민씨 가문은 급기야 멸문지화(滅門之禍)를 당하고 만다.
원경왕후의 분노와 슬픔은 하늘을 찌를 지경으로 극에 달했으나 임금인 남편을 향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차라리 왕비의 자리에서 물러나 궁궐을 떠나겠다고 통곡하며 간청했으나 태종은 이 또한 받아들이지 않았다. 두 사람은 같은 궁궐 내에 살면서도 말 한마디 나누지 않으면서 철천지원수(徹天之怨讎)처럼 여생을 보내야 했다.
여장부로서 꿈을 이루어 왕비의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원경왕후의 말년은 말 그대로 형극의 가시밭길이었다. 자신의 염원대로 사랑하는 지아비를 임금의 자리에까지 올려놓았으면서도 바로 그 일이 자신의 말로(末路)를 참담하게 할 줄을 어찌 짐작이나 했겠는가?
왕권을 잡아야 하는 결정적 순간에 주저하며 몸을 사렸던 태종은, 오히려 적극적이고 치밀한 추진으로 자신을 왕위에 오를 수 있게 만든 원경왕후에게는 고마움보다는 자괴심(自愧心)이 앞설 수밖에 없었고, 이러한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기 위해 의도적으로 벌렸던 수많은 여인들과의 편력은 지극히 치졸하고 불행한 애증(愛憎)의 단면이었음을 쓸쓸한 여운으로 남길 뿐이었다. 이것은 조선 왕조시대에 궁궐에서 벌어졌던 대표적 애증 행각이었다.
<건춘문⇒1차 왕자의 난을 일으킨 이방원 일파는,
방석의 세자 책봉을 찬성한 정도전 세력 등을 대상으로 살생부를 작성,
왕명이라 속여 이들을 경복궁 동쪽 궁문인 건춘문을 통해 입궐토록 하였고
입궐하는 이들을 건춘문 안에서 철퇴를 가해 모두 살해하였다.>
첫댓글 역사학자 이상의 혜박한 식견과 문필가를 능가 하는 재미 있는 필치로 유익한 글 올리신 일조님 ! 우리 동창생 정말 맞는가요 ?
최근 뜨거운 우정을 새삼 느끼면서 잊었던 옛날을 되새기고 있습니다.
우리 나름의 좋은 세상이 펼쳐지기를 염원합니다.
이러한 내용은 우리 동기의 해박한 지식과 필체가 아니면 어디에서도 접할 수 없을것같네요.
일조!!!
고맙네요. . . . . 좋은 내용들. . .
좋은 아침, 역시 냉면 겨자맛 보태어 혜박을 해박으로 필치를 필체로 온전케 해주시는 빛과 소금어린 좋은세상님의 정성 또한 우리 동기의 더 높은 긍지이랍니다 .......땡큐요 .......
늦게나마 좋은 해후를 맞게되어 행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