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국 50년사에서 가장 쇼킹한 사건을 꼽자면 ‘의령 우 순경 총기 난사’가 빠지지 않을 것이다. 짧은 시간에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인 살인사건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세계 100대 살인사건으로까지 기록되었다. 예전에 나는 끔찍한 살인마 우 순경을 다시 만날 기회를 가졌다.
1982년 4월26일 오후 9시30분쯤 의령군 궁류면 지서에 근무하던 우 순경(당시 27세)이 지서와 예비군 무기고에서 카빈 소총 2정과 실탄 144발,수류탄 8발을 탈취하여 주민들에게 무차별 난사했다.
그의 범행은 믿기지 않으리만치 치밀했다. 먼저 우체국으로 가서 전화교환원부터 살해했다. 외부와 통신을 두절시키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전기불이 켜진 집을 골라 다니며 젖먹이, 노인 가리지 않고 미친 듯이 총기를 난사하고 수류탄을 던졌다. 1시간20분 뒤에야 사건을 접수한 의령경찰서에서는 뒤늦게 사살명령을 내리고 기동대를 출동시켰지만, 무려 8시간 동안 토곡리 등 4개 마을은 공포에 떨어야했다.
우 순경은 다음날 새벽 5시께 일가족 5명이 잠자는 궁류면 평촌 외곽에서 외딴 농가에 들어가 수류탄 2발을 터뜨려 자폭했다. 한 밤 동안 자그마치 56명의 사망자와 34명의 중경상자를 남긴 광란의 살육제는 그렇게 막을 내렸다.
이 사건은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어떻게 만취한 개인이 군경을 따돌리고 하룻밤 사이에 그 많은 인명을 살상할 수 있었을까. 주변 사람들의 증언에 의하면 동네사람들과 술 한 잔하며 지낼 정도로 착한 청년이었기 때문에 더욱 그랬다. 치안체계가 도마에 올랐음은 물론이고, 담당 경찰서장을 비롯해 급기야 내무장관까지 사임하기에 이르렀다.
20년이 지나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갈 2001년 어느 날, 경남 의령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한 청년이 찾아왔다. 10세 때 아버지를 여의었다며 돌아가신 아버지를 위한 구명시식을 올려드리고 싶다고 했다. 늘 아버지의 죽음을 마음속에 담아두고 살았다고 한다.
“아버지께서 어떻게 돌아가셨습니까?”
나의 질문에 그는 마치 생각하기도 싫다는 듯 눈을 지그시 감더니 “파리 한 마리 때문에 돌아가셨습니다”라고 하는 게 아닌가.
“어떻게 파리 때문에 돌아가실 수 있느냐”고 물으니 그는 “우 순경이 파리 한 마리 때문에 애인하고 싸우다 동네 사람들 56명을 총으로 난사했지 않습니까! 바로 그 때 그 총을 맞고 저희 아버님이….”
마을에서 한 잔 걸친 우 순경이 애인 집에서 잠을 자고 있는데, 파리 한 마리기 잠자는 우순경 주위를 맴돌자 애인이 파리를 쫒으려다 그만 우순경의 뺨을 내리치게 되면서 발단이 되었다는 것이다. 취기가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그 많은 사람을 우발적으로 죽일 수 있을까.
그 미스터리는 구명시식에서 밝혀졌다. 식이 시작되자 분노에 찬 일단의 빨치산 영가들이 나타난 것이다. 1953년에도 의령에서는 우 순경 사건 때 사망한 인원과 같은 수인 56명이 죽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은 이른바 남한 빨치산 총책 이현상 휘하의 이영회가 이끄는 최후의 빨치산 부대원들이었다. 이영회는 건장하고 각진 얼굴에 흉터가 있었다.
1953년 11월23일 33명의 이영회 부대는 트럭 두 대를 탈취하였다. 5시께 군경 복장으로 위장한 이영회 외 3명은 아군인줄 알고 경례를 붙이는 의령경찰서 경비병을 무장 해제시키고 자동소총을 난사하기 시작했다. 불의의 기습을 받은 경찰과 민간인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하여 순식간에 5명이 순직하고, 3명이 중상을 입고, 2명이 납치됐다.
합류한 공비들은 근처에 있는 군청과 우체국, 전매서, 금융조합, 의령면사무소에 난입했다. 여기저기서 총성과 수류탄 폭음이 진동하고 관청 골목은 불길에 휩싸여 비명소리가 메아리쳐 지옥을 방불케 하였다. 의령정미소와 양곡창고, 버스 차부 등 일부도 방화했고 이 불길이 번져 인근 민가도 약 40여채가 소실되었다. 의령면의 호적부도 이때 소실되었다. 불과 2시간 만에 일어난 총격, 방화, 약탈, 납치 참사였다.
당시 통신시설이 빈약하여 뛰어가서 인근 부대에 연락이 취해졌지만 이미 빨치산들은 의령을 벗어난 뒤였다. 빨치산들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차례로 용덕 지서, 정곡지서를 총격, 방화하고 20여명을 납치 하여 다음날 새벽 1시30분께 궁류면 평촌을 지나 벽계리 쪽으로 빠져나갔다. 이 과정에서 그들은 군경복장을 하고 아군으로 위장해 마을 사람들로부터 양식과 보급품을 지원받는 대담성을 보였다. 해당 지역과 인근 주민들은 다시 전쟁이 일어난 줄 알고 간밤을 공포에 떨어야했다.
25일 군경 토벌대에 의해 사살 8명, 생포 4명의 전과를 올렸다. 산청군으로 후퇴하던 빨치산들을 당시 선친 차일혁 총경의 부대인 서남사 전투경찰대에 의해 5시간의 교전 끝에 이영회가 사살되고 주력부대가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토벌대는 병력을 증강시켜 12월1일까지 빨치산 지원부대와 잔비들을 모두 토벌하여 이영회 부대를 비롯한 빨치산 56명은 그렇게 궤멸되어 최후를 마쳤다.
그들은 모두 악령이 되어 자신들이 몰살당한 경남 의령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다 29년 뒤 파리 한 마리 때문에 내연의 처와 시비가 붙은 우 순경에게 그대로 빙의되어 우 순경을 살인마로 둔갑시킨 뒤 몰살당한 부대원의 숫자만큼 동네 주민들을 죽인 것이다. 빨치산 영가들을 천도시켜 준 뒤에야 비로소 우 순경 사건으로 죽은 양민들을 천도시켜 줄 수 있었다.
사망자 수나 만행의 경로가 소름끼칠 정도로 우 순경 사건과 일치한다는 사실에서 이 두 사건이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시대상으로는 아무 상관없는 두 사건 같았지만 우주 법계에서는 그대로 인과가 되어 나타난다. 그렇지 않다면,어떻게 맨 정신이던 사람이 파리 한 마리 때문에 그 많은 사람을 죽일 수 있겠는가.
분노는 악령을 부른다. 분노가 사람을 지배하는 그 순간이 악령이 사람에게 빙의될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29년 전 죽은 ‘악령의 덫’에 걸려 56명의 양민을 학살하고,결국 자신까지 죽은 우 순경 사건을 회상하며 보복은 보복을 부르는 역사의 반복 법칙에 실로 몸서리를 칠 수 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