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양주 회암사& 檜巖寺止
[회암사(檜巖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5교구 본사인 봉선사(奉先寺)의 말사이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고려에 들어온 지공(指空)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창건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
그러나 지공이 창건하기 전에도 1174년(명종 4)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온 적이 있으며, 보우(普愚)가
1313년(충선왕 5)에 회암사에서 광지(廣智)에게 출가한 바 있어 이미 12세기에 존재했던 사찰임을 알 수 있으나,
정확한 창건연대와 창건주는 알 수 없다.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던 이 절의 승려 수는 3,000명에 이르렀으며, 조선 초기까지만 해도 전국에서
규모가 가장 컸던 절로, 조선의 태조가 왕위를 물려주고 수도생활을 했을 뿐 아니라 효령대군(孝寧大君)도
머물렀던 적이 있었다.
1424년(세종 6)의 기록을 보면 이 절에는 250명의 승려가 있었고, 경내가 1만여 평에 이르렀다고 한다.
1472년(성종 3) 정희왕후(貞熹王后)가 정현조(鄭顯祖)에게 명하여 중창하였으며, 명종 때 문정왕후(文定王后)가
불교 재흥정책을 펼 때 전국 제일의 수선도량(修禪道場)이 되었으나, 왕후가 죽고 유신(儒臣)들에 의해
나라의 정책이 다시 억불정책으로 선회하자 1565년(명종 20) 사월 초파일에 보우(普雨)가 잡혀 가고
절은 불태워짐으로써 폐허화되었다.
1821년(순조 21) 지공·나옹·무학의 부도와 탑비가 고의적으로 훼손되었으나 조정에서 1828년에
다시 중수하였으며, 옛터 옆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라는 사호를 계승하였다.
1922년에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짓고 불상을 봉안했으며 지공·나옹·무학의 진영을 모셨다.
[인도 승려 지공(指空, 1300~1363)의 범명(梵名)은 Dhy=anabhadra, 제납박타(提納薄陀)로 선현(禪賢)이라
번역하고, 호가 지공이다.
인도 마갈타국 만왕(滿王)의 제3왕자로 8세에 나란타사 율현(律賢)에게 출가하여 승려가 되었다.
19세에 남인도 능가국(楞伽國) 길상산의 보명(普明, samanta-prabhāsa)에게 사사(師事)하여 그의 법을
이어받아 서천(西天) 제108조(祖)가 되었다.
인도를 떠나 중국 원나라로 건너가 1324년(충숙왕 11)경에 연경(燕京)에 도착하여 불법을 전하였다.
고려에서는 1326년(충숙왕 13) 3월부터 1328년(충숙왕 15) 9월까지 머물렀다.
1326년 3월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도착하였고, 금강산에서 법기보살도량(法紀菩薩道場)을 개최하였다.
금강산을 유력한 뒤 개경 동쪽의 숭수사(崇壽寺)에 자리를 잡고 생활하며 많은 사람에게 계(戒)를 주었다.
1327년(충숙왕 14) 10월에는 경원(慶原)을 거쳐 화산(華山)을 다녀왔고, 이듬해 2월 통도사(通度寺)를
두루 돌아다녔으며, 7월에는 연복정(演福亭)에서 계율을 설법하였다.
다시 원나라로 돌아가 연경에서 법원사(法源寺)를 창건하고 머물렀는데, 이때 고려의 나옹(懶翁)
혜근(惠勤, 1320~1376)에게 선종(禪宗)을 전수하였다.
1362년(공민왕 11) 귀화방장(貴化方丈)에서 입적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 그의 사리(舍利) 일부가
고려에 전해 와 왕명으로 양주 회암사(檜巖寺)에 부도를 세웠다.
▲보물387호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설명문
▲천보산 하산길에서 만나는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1963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 3.06m, 너비 1.6m. 1377년(우왕 3) 고려 말 승려인 나옹(懶翁) 화상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되었다.
이 비는 화강암으로 만들었으며 비의 형식은 당비(唐碑)의 형식을 닮은 복고풍의 것으로 개석이 없다.
그런데 1997년 보호각이 불에 타면서 비신이 파손되어 보존 처리가 이루어졌고, 경기도박물관을
거쳐 현재 불교중앙박물관에서 비신을 보관하고 있다.
비가 있었던 원래의 자리에는 비 받침돌인 귀부가 남아 있으며, 원형을 본 따서 만든 비가 세워져 있다.
▲뒤 돌아 본 천보산 하산길, 더 내려오면 회암사 절 경내로 진입하게 되어있다.
▲삼성각
▲관음전
▲회암사 대웅전
▲초파일이 아직인데 벌써 연등이 달리고
▲범종루
▲범종
▲목조여래좌상
▲부도탑 가는 길
▲싱그런 소나무만 보면 마음이 편안해 진다.
▲유형문화재,지공선사 부도및 석등
지공화상 부도와 부도비 전경고려 공민왕 때 나옹선사가 원나라에서 가져온 지공화상의 사리를 봉안하기
위해 세운 부도와 부도비로 비문은 이색이 지었으며 단순하고 소박하다.
지공화상 부도비와 부도·석등은 고려 공민왕 21년(1372)에 세웠다.
그 2년 전인 1370년 원나라에서 제자 달예(達睿)가 지공화상의 사리를 봉안해 고려로 가져오자 제자
나옹선사는 서둘러 회암사에 봉안했다. 따라서 우리는 지공화상 부도와 석등에서 나옹선사의 체취와
안목까지도 가늠해 볼 수 있다.
석물은 맨 앞단에 부도비를 세우고, 한 단 위에 석등과 석상·부도가 한 줄로 나란히 자리잡고 있다.
부도는 8각 지대석 위에 상중하 기단을 두었으나 우람한 크기에 비해 문양이나 조식이 전혀 없어 단조롭고
수수하며, 역시 아무런 조각도 없는 중대석과 몸돌을 둥글게 다듬어 얹었다.
전체적인 비율에 비해 지붕돌이 크고, 길쭉한 상륜부 정상에는 보주가 조각돼 있다.
부도의 높이는 3.65m, 비신의 가로 세로가 각각 2m이다.
부도 앞에는 큼직한 공양돌이 높은 받침대 위에 놓여 있어 특이한데, 목조에서나 볼 수 있는 낮은
책상다리 같은 받침대의 변화를 눈여겨 볼만하다.
석등은 얼른 보아 왕릉에서 보는 장명등처럼 생겼다.
방형의 상중하 대석 위에 2짝으로 된 화사석을 마주 붙여 화창이 앞뒤 두 곳만 나 있고,
그 위로 4각 지붕돌을 얹었다.
중대석이 잘록한 허리처럼 날렵한데 비해 화사석을 받친 상대석이 큼직하고, 화사석 위의 지붕돌은
석등 전체를 덮을 만큼 크고 두툼한게 부도의 지붕돌과 거의 맞먹는다.
다만 부도의 지붕돌은 낙수면에 곡선을 주었으나, 석등 지붕돌은 선이 반듯한 사각형에 낙수면도 곧아
완곡한 느낌을 준다.
석등 정상에는 노반 위에 보주가 있다. 석등도 부도와 매한가지로 조각이나 장식이 없어 단순 소박하다.
석등 앞에 서 있는 부도비는 부도가 조성된지 2년이 지난 1374년에 세워졌다.
지대석 위로 4각의 높은 굄대를 놓고 237㎝ 키의 비신을 세운 다음, 목조건축 모양의 지붕돌을 얹었는데,
크고 우람하다. 전체 높이는 365㎝. 비문은 이색이 썼다. 지공화상 부도와 석등은 경기도 유형문화재이다.
▲부도와 석등
나옹선사 부도와 석등·부도비
지공화상 부도 위편 북쪽으로 20m쯤 떨어진 언덕에 나옹선사(1320~1376) 부도와 석등이 있다.
고려 말 명승으로 본명은 혜근(惠勤), 호는 강월헌(江月軒). 24세에 회암사에 와 4년간의 용맹정진 끝에
불법을 깨닫고 법을 폈으나,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드는 바람에 부도와 부도비는 현재 회암사터와
신륵사 두 곳에 있다.
회암사터 부도와 석등은 1376년에, 신륵사 부도와 부도비·석등은 1379년에 세운 것으로 기록은 전한다.
그 3년 앞서고 뒤진 차이와 조성한 이의 공력이 얼마나 많이 다를 수 있는지를 비교해보는 것도
퍽 의미가 있을 것 같다.
부도만 보더라도, 회암사터 것보다 3년 뒤에 조성한 신륵사 보제존자 나옹화상 부도는 조선시대의
새로운 모델로 등장한 석종형 부도이다. 석등과 부도비에도 물론 많은 차이가 있다.
▲무학대사 부도
▲무학대사 부도와 쌍사자석등 보물제388호와 389호
조선시대 부도 가운데 가장 우아하고 아름다운 걸작으로 꼽히는 부도이다.
부도 주변으로는 8각의 돌난간을 둘러쳐 부도를 보호하면서 더욱 장엄하게 보이게 한다.
부도 앞에는 앙증맞은 쌍사자석등이 서 있다.
높고 넓직한 8각 석단은 8매의 큰 돌로 짜맞추어 2단을 쌓았다.
그 석단 위에는 각 우주마다 방형의 기둥을 세우고 기둥 꼭대기를 보주형으로 조각했다.
각 돌기둥 사이에 장대석을 세우고 그 위에 동자주(童子柱)를 놓은 다음 난간기둥을 돌렸다.
결국 이 8각 석단 안에 세워진 부도는 8방의 기둥과 난간석에 둘러싸여 보호를 받으면서 한덩어리가
돼 더없이 장엄하다.
석단 안에서 부도의 기단부를 받고 있는 지대석은 1매의 돌로 깔아 드문 형식을 보인다.
그 위로 놓인 8각의 면마다 표현이 굵어 뭉실뭉실한 구름문을 조각했는데, 각 모서리의 구름문이 유난히 크다.
하대는 측면에서 하단부까지 좁혀들었고, 상단에 이르면서 연화문을 장식한 연화대석으로 꾸몄다.
배가 약간 부른 8각 중대석은 각 면마다 방형의 선을 돌려 그 안에 안상을 조각하고, 안상 안에는
각기 모양이 다른 꽃무늬를 양각했다.
상대석은 아랫면에 8각의 3단 받침을 마련하고, 앙련을 돌려 피게 했으며, 윗면에는 각 면마다
장방형의 선을 돌려 그 안에 당초문을 조각했는데, 정성들인 구도에 비해 조각솜씨가 그리 뛰어나진 못하다.
아래위가 잘록한 대신 배가 부른 둥근 비신은 굄대 없이 놓았고, 표면에는 거칠다 싶을 만큼 투박한
운룡문(雲龍紋)을 조각했다.
특히 용머리와 용비늘 등을 사실적으로 조각한데다, 그 사이를 구름문이 가득 채우고 있어 매우
웅혼하게 느껴진다.
8각 지붕돌엔 연목(椽木)이 뻗어 있다. 평이한 추녀는 반전으로 부드럽게 모양을 내 투박함을 덜어준다.
낙수면의 경사는 내려올수록 완만하고 끝부분에 용머리를 조각했다.
지붕돌 정상에 구멍을 뚫고 보주를 얹은 간소한 형태인데, 보주 아래로 2단의 둥근 대가 있어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전체적으로 매우 화려하고 장중하며 빼어난 부도로 평가되고 있다.
무학대사 부도 앞에서 촛불공양을 올리는 쌍사자석등은 상하 대와 화사석·지붕돌 등이 모두 방형이고,
중대석만 쌍사자형인 독특한 모습이어서 주목된다.
이는 신라시대 8각 석등이 고려시대로 내려와 방형으로 바뀌는 특별한 조형이고, 조선시대까지
줄곧 영향을 미치고 있다.
1407년 무학대사 부도와 함께 세워진 이 석등은 방형의 지대석 위에 1단의 높은 받침대를 놓고
그 위에 8개의 연꽃잎을 새긴 하대가 붙어 있으며, 연판 모서리엔 고사리 모양의 귀꽃을 장식했다.
하대 윗면에는 1단의 각형받침을 놓고, 그 위로 하나의 돌에 서로 엉거주춤 쪼그리고 마주앉은
두 마리의 사자가 앞다리와 앙다문 입 부위로 연화 앙련의 상대와 화사석을 떠받치게 다듬은
아름다운 석등이다.
석등을 떠받고 있어 힘에 겨운 듯 배가 아예 붙어버렸고, 꼬리는 바짝 등뒤로 치켜올라가 있으며,
복실복실한 머리털이 사실에 가깝다. 사자의 뒷모습이 볼수록 예쁘다.
쌍사자석등의 사자 뒷모습 두 마리의 사자가 가슴과 배를 맞댄 채 상대석을 받치고 있다.
복실복실한 머리털과 통통한 몸매가 볼수록 귀엽고 친근하다.
두 장의 판석으로 화사석을 마련, 화창은 자연 앞뒤 두 곳이다.
두 장의 화사석 앙면에는 둥근 기둥 모양의 우주를 다듬고 화창을 열었다. 방형의 지붕돌을 맨 위 보주까지
하나의 돌로 조성한 점도 특별하다.
합각은 뚜렷하고 낙수면은 중후하며, 전각을 잇는 추녀가 날렵하게 들어올려진 점 등 목조건축물의
지붕형식을 취했다. 높이가 2.5m로, 보물이다.
▲무학대사 비
인물:지공선사,나옹선사,무학대사
1.지공선사
인도 출신, 원나라 활약 승려 나옹 등 많은 고려 승려들이 유학하여 가르침을 받았다.
고려의 개경,금강산,회암사 등에 머물며 불법을 전파했다.
원나라 법원사로 돌아갔다
고려말 조선초 불교계에 중심적인 역할을 하며 당시
불교의 정통성을 유지하는데 기여했다.
2.나옹선사
(1320~1376)는 1340년 출가한 뒤 회암사에서
수도하였고 1346년 부터 원나라 지공에게 수학했다.
15년의 유학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회암사의 주지가
되어 이절을 중창했다.나옹은 전통적인 간화선을
바탕으로 임제종의 선풍을 도입해 고려말 침체된
불교계를 일신시키려고 노력했다.고려후기 공민왕은
나옹을 왕사로 극진하게 예우하였다.선사는 회암사에서
큰법회를 개최하고 지방으로 내려가다가 여주 신륵사
에서 입적하였다. 시호는 선각이다.
나옹선사의 유명한 시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하네
사랑도 벗어놓고 미움도 벗어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하네
3.무학대사
1344년 출가해 1353년 원나라에서 지공과 나옹으로
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조선건국후 왕사가 되어 회암사에
거처했다.
무학은 지공과 나옹의 제자이자 조선을 건국한
이성계 스승이다.
▲천보산 자락에 자리잡은 회암사
▲대웅전 뒤로 천보산 봉우리..정상은 그 뒷쪽에 있다
▲회암사를 나서며...
▲회암사 일주문을 지나 회암사지로 이동
회암사터 전경고려 때만 하더라도 승려 수가 3천여 명에 이르는 전국 최대 사찰의 하나였으며 조선 명종 때에는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에 의해 사세가 하늘을 찌를 듯 드높았으나 문정왕후의 죽음과 함께
보우가 사사되면서 절도 폐사되었다.
회암사는 천마산 기슭의 서남쪽에 남향으로 앉아 3면이 숲으로 둘러싸여 아늑하고 전방이 툭 트여
시원했을 터이나 지금은 거대한 공장이 들어서 앞을 가로막고 있다.
고려시대 불교를 크게 일으켰던 3대 사찰이었으며, 지공화상·나옹선사·무학대사로 이어지는 걸출한
선승들이 머물면서 명성을 드날리고 번창했던 회암사(檜岩寺). 고려 충숙왕 15년(1328) 인도에서 들어온
지공대사가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지만 그 훨씬 이전부터 절이 있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양주목 불우조」에는 “1174년 금나라 사신이 왔는데, 춘천길을 따라 인도하여
(회암사)로 맞아들였다”는 기록이 있고, 고려 때 태고 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13세의 나이로
회암사 광지선사(廣智禪師)께 출가했다는 내력이 그의 비문에 적혀 있다.
아마도 그뒤 지공대사가 공력을 다하여 재창건했던 것을 창건으로 여겼는지 모른다.
고려땅에 들어와 불법을 펴던 지공화상은 당시 인도 최고의 불교대학이 소속돼 있던 나란타사를
본떠 회암사를 지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지공이 여기 와서 말하기를 산수형세가 완연히 천축국(天竺國) 나란타절과 같다”
하고 절을 짓게 되었다고 전한다.
이로써 회암사는 창건 당시 대찰이 아니었을지라도 조만간 대찰의 면모를 갖출 계획이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공화상은 1363년 열반에 든다.
우왕 2년(1376) 지공화상 제자이며 고려 말의 뛰어난 고승 나옹화상이 중건불사를 하게 된다.
나옹은 바로 이 회암사에서 불도를 이루지 않았던가. 회암사는 드디어 수많은 승려대중이 머물고,
수천의 대중들이 운집할 수 있는 대찰이 된다.
그러나 4년여에 걸친 불사를 마치고 회향법회를 열려는 순간 나옹은 갑작스런 왕명을 받는다.
밀양 영원사로 떠나라는 것이었다.
나옹화상의 법력에 매료된 전국의 수많은 아녀자들이 일손을 멈추고 길이 막힐 지경으로 모여들어
생업에 지장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산문을 막고 회암사에 오르는 백성들을 돌려보냈으나 감당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나옹선사는 왕명이 떨어지자 예견했던 일로 여기고 담담히 회암사를 떠나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에 든다.
선사의 나이 57세였다. 나옹선사의 제자 각전(覺田) 스님이 회암사의 남은 불사를 마쳤을 땐 집이
무려 262칸에, 15척 되는 불상이 7구나 되었고, 10척의 관음상이 모셔졌다고 한다.
“집과 그 모양새가 굉장하고 미려하여 동방에서 첫째”였다고 목은 이색은 『회암사 주조기』에 전하고 있다.
대찰의 규모를 갖춘 회암사는 전국 사찰의 총 본산이었으며 3천 명의 승려가 머물렀다고 한다.
그뒤엔 나옹화상의 제자 무학대사가 중창한다.
둘째 아들 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태조와, 태종의 둘째 아들 효령대군이 수도한 절로도 유명한 회암사는
조선 성종 3년(1471)에 세조비 정희왕후의 명으로 정현조(鄭顯朝)가 중창하는 등 역대 왕실의 귀의를
받으면서 번창하게 된다.
조선 명종 때는 불심이 두터운 왕과 중종비 문정왕후의 신임을 얻은 허응당 보우대사(1509~1565)가
이곳에 머물며 기울어져가는 불교를 중흥코자 힘써 회암사는 나옹선사 이후 200여 년간 전국 제일의
수행도량이 된다.
보우대사가 회암사 중창불사를 끝내고 낙성식을 겸한 무차대회(無遮大會)를 연 것은 1565년(명종 20) 4월 5일.
그 이틀 뒤인 4월 7일 문정대비가 세상을 떠난다.
유생들은 거듭 보우를 처형하라는 상소를 올렸고, 사월초파일에 제주도로 유배당한 보우는 제주목사
변협(邊協)에게 죽임을 당한다. 회암사의 운명도 그때 불길에 휩싸여 폐사가 된 채 오늘에 이르렀다.
회암사터 부도 조선 초에 조성된 팔각원당형 부도이나 비율은 염두에 두지 않은 듯 위로 올라가면 키가
훌쩍 커버린 느낌이다.
현재까지도 부도의 주인이 정확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1472년에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처안대사의
부도라는 설이 유력하다.
여덟 쪽의 널돌로 마련된 지대석 위에 네 개의 돌로 다듬은 8각 하대석을 놓고 면마다 용과 천마(天馬)를
선명하게 새긴 것이 퍽 드문 일로 여겨진다.
그 위에 두 개의 8각 중대석과 상대석을 받고 있어 특이한 구성을 이루고 있는데, 중대석엔 당초문과
앙련, 큼직한 꽃무늬와 복련으로 장식하고, 상대석엔 팔부신중을 조각했다.
중대석과 상대석 사이의 갑석엔 복련과 화려한 꽃무늬·앙련으로 빈틈없이 돌리고, 3단의 받침대를
놓은 다음 둥근 몸돌을 얹어 조선시대 부도의 특징을 잘 보여주고 있다.
몸돌 위로는 경사가 급하고 길쭉한 지붕돌을 얹었는데 처마는 과감히 생략하였으며 왼쪽 지붕이
손상을 입었다.
키가 큰 상륜부에는 연꽃무늬의 복발, 두 개의 보륜, 팔각의 보개와 보주를 차례로 올려 모든
형식을 마무리했다.
▲절은 불타 폐사되고 주춧돌만 남아있는 회암사지
▲회암사지 안내판
기도 양주시에 있는 고려시대에 창건된 회암사의 사찰터.
사적.개설
회암사는 고려시대에 창건되어 고려 말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전국 최대 규모의 가람으로 조영되었다.
발굴 조사 결과 그러한 사실을 입증해 주는 유적과 최고급 유물들이 출토되어 당대 불교 사상과 문화를
대표하는 사찰이었음을 알게 한다.
역사적 변천
양주 회암사는 창건 시기를 알려 주는 기록은 없지만 그 동안 여러 차례의 발굴 조사를 통하여 늦어도
고려 중기 이전에는 창건된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인도 출신의 원나라 승려 지공선사(指空禪師)가 1326년 3월경 개경의 감로사(甘露寺)에
도착하여 1328년 9월 돌아갈 때까지 통도사(通度寺)와 화장사(華藏寺) 등 전국의 여러 사찰을 순례하다가
회암사의 지형이 인도의 아란타사(阿蘭陀寺)와 같아 가람을 이룩하면 불법이 크게 흥할 것이라고 말하자
그 뒤에 제자인 나옹(懶翁) 등이 크게 중창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이 이색(李穡)이 지은 「천보산 회암사 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와 김수온(金守溫)이
찬한 「회암사 중창기(檜巖寺重創記)」 등에 전하고 있다.
고려 말기 회암사를 크게 중창한 나옹은 선각왕사 혜근(禪覺王師 惠勤, 1320~1376)으로,
원나라에 가서 지공선사로부터 수학하여 법을 이어받은 대표적인 제자 중 한 명이었다.
나옹이 회암사의 전당(殿堂) 확장 공사를 끝냈을 때에는 262칸의 전각이 있었으며, 1376년 4월
낙성 법회 개최 때에는 전국의 많은 승려와 신도들이 대거 참가하였다고 한다.
당시 회암사가 크게 발전하자 유생들은 백성들이 회암사에 가는 것을 금지해야 한다고 국왕에게
주청할 정도였다.
이에 국왕은 나옹을 다른 사찰로 옮겨 주석하게 하였다.
그리고 고려 말기 왕실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원증국사 보우(圓證國師 普愚, 1301~1382)도
제자인 무학대사 자초(無學大師 自超, 1327~1405년)와 함께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였다.
조선시대에 들어와 회암사는 더더욱 부각되는데, 태조 이성계는 왕위를 물려주고 스승으로 삼았던
무학대사가 회암사에 머물 때 이곳에서 함께 생활하기도 하였다.
불심이 깊었던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전국의 여러 불사를 직접 관장하거나 후원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회암사 중창에 각별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성종실록』에 의하면, 1472년 세조의 비 정희왕후(貞熹王后)가 회암사를 크게 중창하게
하였다고 한다.
또한 문정왕후(文定王后)는 보우(普雨)로 하여금 회암사를 대대적으로 중창케 하여 전국 제일의
사찰로 중흥을 꾀하기도 하였다.
내용
회암사는 고려 말기부터 조선 중기까지 전국 최대 규모의 사찰로서 왕실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당대의 불교 사상과 문화를 주도하였다.
그래서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기록물에 회암사에서 거행된 왕실 관련 의식이나 행사 등이
전재되어 있으며, 왕실 후원으로 실시된 회암사의 중창과 중수에 대한 내용이 수록되어 있다.
그러나 문정왕후 이후 불교계의 쇠퇴 분위기 속에 회암사도 쇠락하면서 서서히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회암사지는 역사 속에서 잊혀졌다가 1997년 이후 수년 간에 걸친 발굴 조사 과정에서 웅장하였던
사찰의 규모와 위상을 보여 주는 많은 유적과 유물들이 발견되었다.
발굴 결과, 회암사는 기록처럼 고려 말기부터 대대적인 중창이 이루어져 조선시대 들어와
대찰(大刹)의 면모를 갖추었으며, 조선 중기까지 불교계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다가 조선 후기에
폐사된 후 다시는 중창되지 못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회암사지는 평지가 아닌 낮은 구릉이 있는 산간에 조영되었음에도 평지 가람에서 볼 수 있는
남회랑(南回廊)이 있었으며, 석축이나 건물들의 배치 형식이 궁궐과 닮은 것으로 밝혀졌다.
그리고 사찰에서는 보기 힘든 특정한 목적으로 건립된 건물들도 있었다. 또한 석재들을 다듬은 기법도
상당히 우수한 석공들이 관여하였음이 확인되었다.
이와 같이 회암사는 전체 규모와 가람의 조영 기법 등으로 보아 왕실에 소속된 당대 최고의 장인들이
동원되어 공사가 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유물들은 기와, 자기(瓷器), 도기(陶器), 소조품(塑造品), 금속품, 석제품 등으로
다양하고 품질도 최고급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리고 상당수 유물들에 명문이 새겨져 있어 후원자와 제작 시기를 알 수 있고 제작 배경과 함께
당대 유물들의 편년을 설정하는 데 기준이 되고 있다.
또한 궁궐이나 왕실 관련 사찰에서만 사용된 청기와를 비롯하여 궁궐 건축물의 지붕 추녀마루에 올리는
용두(龍頭)나 잡상(雜像)도 출토되었으며, 최고급 도자기와 금속 공예품 등이 다량으로 수습되어 당시 회암사의
위상이 상당하였음을 짐작케 한다.
한편, 회암사의 부침과 함께 사용되거나 폐기된 기와는 사찰의 연혁을 알려 주는 가장 중요한
근거 자료가 되기도 하는데, 다른 사지들보다 다종다양한 범자(梵字) 진언(眞言)이 새겨진 기와들이
출토되었다.
특히 막새류를 중심으로 많은 양이 출토되었는데, 제작 기법이 우수할 뿐 아니라 제작 시기를 알 수
있는 기와도 다수 출토되었다.
조선시대에는 범자 진언이 새겨진 기와가 지속적으로 제작 활용되었는데,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범자 기와는 그 전환점 역할을 한다는 점에서 학술적으로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범자 진언이 새겨진 기와 사용은 당시 밀교가 서서히 유행하면서 육자진언(六字眞言)을
비롯한 특정 진언에 대한 신앙이 본격화되는 계기가 되었다.
▲당간지주 회암사터에서 현 회암사로 오르는 길 모퉁이에 있다.
보통 절 앞에 당간지주 한 기가 서 있는 것이 상례인데 회암사터에는 비록 짝을 잃어버린 지주가
하나 있으나 2기의 당간지주가 서 있다.
절터 바로 뒤 북쪽으론 부도전이 있었을 법한 자리이다.
지금 이 자리엔 경기도 유형문화재인 회암사터 부도가 남아 있을 따름이지만, 아마도 본디는
지공대사 부도와 부도비, 선각왕사 부도와 부도비·석등, 무학대사 부도와 부도비·석등이
모두 이곳에 세워졌을 가능성이 짙다.
이들 부도와 부도비는 순조 21년(1821) 이응준(李膺峻)에 의해 훼손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억불숭유의 거센 파도에 함몰되어 절이 불태워진 지 오래된 채, 그 터 북쪽 한켠의 부도전에 서 있던
지공·나옹·무학 대사의 부도와 부도비 등 유물이 광주 사람 이응준에게 제거되는 수난을 겪었던 것이다.
▲규모가 엄청 큰 회암사지터
▲고려와 조선에 이어 왕실과 밀접한 관계유지로 부흥했던 회암사..
지금은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발굴로 인한 수 많은 유물이 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다.
▲회암사지 아래 넓은 잔디광장
▲왕의 행차를 재현한 조형물
▲회암사지를 뒤로하고 박물관으로 이동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이었고 조선 초기 최대 왕실 사찰이던 회암사 터에 세워진 양주시에서
건립한 양주시립 화암사지 박물관은 회암사지터에서 출토 된 유물들을 보관,연구하여 전시를 통해
다음 세대에 교육하고자 건립한 역사유물 박물관이다.
현재도 발굴이 진행중인 회암사는 대규모일 뿐만 아니라 궁궐과 닮은 건축 방식이 특징이다.
▲출토된 기와들
▲조선왕실의 행열 모습
▲출토된 조선왕실의 자기
▲중국 자기들
▲회암사지에서 출토된 여러 유물들을 관람하고 하루일정을 모두 마친다.
양주 칠봉산&천보산 산행 후 회암사와 회암사지를 둘러보고,
경기옛길 경흥길을 걸으며 천보산을 지나가는 길목에 있어 언제 한번 다녀와야지 하고
있던 참에 경기옛길 마무리하고 잠시 짬내어 다녀왔다.
더불어 천보산이 품고 있는 회암사와 회암사지도 둘러볼 수 있는 기회로 천보산 정상에서
조금만 내려서면 만나는 회암사..
먼저 선각왕사비를 만나고 사찰로 내려오니 어느새 연등이 달리고 마음편한 풍경에 그닥 크지않은
회암사이지만 천년고찰 못지않은 역사적 의미를 담고 있기에 경건한 마음가짐으로 지공선사,나옹선사
무학대사 부도비랑 탑등을 둘러보고 회암사지로 내려선다.
고려말부터 조선에 이어 왕실과 함께 해온 긴 역사속에 폐사가 된 드넓은 사지에 제2의 왕실로
흥망성쇠의 인물들이 보우선사와 문정왕후를 꼽을 수 있다.
그렇게 회암사 중흥에 힘을 쏟았던 두 사람,끝내는 폐사가 되는데에도 두 사람이었다.
그 찬란했던 문화유산 회암사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그 자취만 남아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왕실과 똑 같이 지어진 사찰,출토중에 발견된 많은 유물들이 그 당시를 짐작하게 한다.
박물관을 둘러보며 전시된 출토품들을 관람하며 사람의 욕심으로 인해 흥하기도 하고 망하기도
하는 인간사를 다시 한번 느끼며 큰 욕심은 내려 놓아야 더 큰 것을 얻을 수 있다는 진리를 배운다.
다행이 ‘양주 회암사지’가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 작년1월에 선정되었다 하니 우리의 역사적
가치가 문화유산에 등록되기를 기원해 보며 마무리하고, 산행으로 사지터를 찬찬히 다 둘러보지
못 함이 못내 아쉽지만 모르고 지내던 곳을 또 하나의 득템으로 감사한 하루였다.
2023년 3월 18일...
가곡
첫댓글 몇년전 겨울에 저도
산우님들과 지행역출발 천보산까지 등산하고
회암사지로 내려오면서 한참 발굴조사중인 절터을 보고
엄청큰 사찰 이었을것같은 느낌을 가지었던 회암사 절터,
절은 세월지나면서 많이 변하였지많 그안에서 숨쉬고있는
역사는 가곡님의 글 속에서 들려오는듯합니다,
가곡님 덕분에 의정부의명칭을 조금더 알게됨니다,
가곡님 감사합니다.
천보산 산행하시며 회암사지를 둘러 보셨군요.
조선 제일의 사찰이라고 이름이 날 정도로 큰 사찰이였는데
안타깝게도 불에 타 버렸다고 하네요.
출토된 유물들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더군요.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청기와도 처음 보았습니다.
그래로 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었더라면 절 전체가 보물일 텐데
안타깝다는 생각을 해보았지요.
완연한 봄입니다.
늘 건강하시고 즐겁고 화사한 봄 맞이 하세요.
감사 합니다.
몇일전 유튜브에서 회암사를 봤는데 가곡님이 사진으로 올려주셨네요~~경흥길 걷다 들러도 되는데 코스 따라가기 바빠 둘러보지 못한곳을 사진으로 나마 보게되어 감사할 따름 입니다.잘 보고 갑니다^^
댓글 감사 합니다.
늘 건강하시고 건행하세요.
가곡님
저희 동네 다녀가셨네요
반갑습니다
회암사지 대단하셨죠?
조식산책으로 회암사지 한바퀴
돌면 약 8천보
더 걷고 심으면 천보산 정상까지
1시간이면 뚝딱
칠봉산 해룡산도 왕방산도 근처
지근거리에 이렇게 쉬 오를수 있는
산이 있다는게 자랑스럽답니다
늘 건강하시고 조심조심
좋은길 이어가세요
회암사지가 댁에서 가까운 곳인가 봅니다.
천보산에서 해룡산 왕방산도 지척이지요.
좋은 동네에 사시니 참 좋으시겠습니다.
늘 건강 하시고 좋은일만 가득하시길 바랍니다.
감사 합니다.
천보산 아래 회암사지 터 역사의 현장을 세세하게 설명하신 후기 잘 읽고 갑니다.
잘 읽으셨다니 고맙고 감사 합니다.
늘 건승 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