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漢詩 한 수, 자유로운 영혼
不煉金丹不坐禪(불련금단불좌선),
장생불로의 단약(丹藥)도 짓지 않고, 좌선도 하지 않으리.
不爲商賈不耕田(불위상고불경전).
장사도 하지 않고, 밭갈이 또한 하지 않으리.
閑來寫就溪山賣(한래사폭단청매),
한가로울 때 산수화 그려 팔지니,
不使人間造孼錢(불사인간조얼전).
세상의 때 묻은 돈은 벌지 않으리.
―‘포부를 말하다(언지·言志)’ 당인(唐寅·1470∼1523.明)
도사도 승려도 되기 싫고 상인이나 농부가 될 뜻도 없다. 하고 싶지 않거나 할 수 없는 일에 뛰어들지 않겠다는 거다. 재물 욕심으로 사람 사이에 부대끼며 억지를 부리거나 부정도 서슴지 않는 건 헛짓거리일 뿐이다. 무명의 선비인 시인에게 남은 길은 하나, 과거시험이다. 유능한 인재에게 기회가 부여되는 거의 유일한 사회적 통로다. 하지만 당시 시인은 고약한 상황에 휘말렸다. 신동(神童) 소리를 들었던 그가 고향 쑤저우(蘇州)에서의 향시(鄕試)는 통과했지만 중앙의 회시(會試)에서는 탈락했다. 시험 주관자와 결탁하여 부정행위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옥살이까지 했고 관리의 꿈은 물거품이 되었다. 그에게 남은 건 독자 노선. 시서화(詩書畵)의 재능을 살려 프리랜서가 되기로 한다. 산수화를 그려 팔되, 죽어라 그림에만 매달리지는 않는다. 아등바등 ‘세상의 때 묻은 돈은 벌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않겠다(不)’는 부정을 무려 다섯 번이나 반복한다. 같은 글자의 중복을 피하는 게 한시의 정석인데 이를 과감히 뒤집음으로써 프리랜서로서의 결연한 자신감을 보여준다.
본명보다 당백호(唐伯虎)라는 자(字)로 더 잘 알려진 시인은 시서화로 한 시대를 풍미했고 ‘명사대가(明四大家)’의 반열에까지 올랐다. 스스로 ‘평생 그림 그리고 시 지으며, 꽃(花)과 버들(柳) 언저리에 내 종적을 남겼지’(‘감회’)라 고백했듯, 화류계를 떠돌며 풍류를 즐긴 자유로운 영혼이었지만 만년의 삶은 불우했다.
✵ 당인(唐寅, 1470-1523), 자는 백호(伯虎) 또는 자외(子畏). 호는 육여거사(六如居士), 도화암주(桃花庵主)등. 소주부 오현의 상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부친은 비록 장사꾼이지만, 아들이 글을 읽어 장래에 과거에 합격하여 관리가 되기를 바랐다. 명나라 홍치11년(1498년)에 당인은 응천부 향시에 참가하는데, 나이 29세때이고, 일거에 1등으로 통과한다. 주시험관인 양저(梁儲)는 그의 문재를 대단히 칭찬한다. 그리하여 북경으로 가서 회시(會試)를 칠 준비를 한다.
북경으로 가는 도중에 당인은 회시에 참가하는 또다른 자를 만나게 되는데 바로 서경(徐經)이다. 이 자는 부자집 아들로, 글읽는 것은 좋아하지 않고, 먹고, 마시고, 놀기를 좋아하는 자였다. 마침 당인도 문재는 뛰어나지만, 역시 먹고, 마시고, 노는 것을 좋아하는 성격이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하루 종일 함께 어울려 놀았다. 북경에 도착한 후, 서경과 당인은 일부 고위 관리들과 교분을 가진다. 생각도 못하게 과거가 끝난 후, 어떤 사람이 주시험관이 그와 서경에게 미리 시험문제를 누설시켰다고 고발한다. 그래서 효종황제는 대노하여 두 사람과 주시험관 정민정(程敏政)을 하옥시킨다.
당인은 원래 북경으로 와서 재주를 뽐낼 생각이었고, 관직을 얻을 생각 이었는데,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고 만다. 이로부터 당인은 관직으로 나가지 않고 글씨와 그림을 팔면서 세월을 보냈다. 그가 쓴 시 중에 한 편이다.
[참고문헌 및 자료출처 : 〈이준식의 漢詩 한 수(이준식, 성균관대 중어중문학과 교수, 동아일보 2023년 01월 06일.(금)〉, Daum, Naver 지식백과/ 이영일 ∙ 고앵자 생명과학 사진작가 ∙ 채널A 정책사회부 스마트리포터 yil2078@hanmail.net]
첫댓글 자신이 좋아하는 산수화나 사갈 사람 있으면 팔고사는 그야말로 자유로운 영혼이군요~ 시를 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