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만 있다고 중산층인가?
미국인은 한 해 7만5000천달러(약 8천3백만원)쯤을 벌어
가족이나 친구와 여가를 많이 보내는 사람이 가장 행복하다고 한다.
지난해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연구진이 45만명을 대상으로 한
갤럽 조사를 분석해 얻은 결론이다.
연구진은 돈을 펑펑 쓴다고 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은 아니라고 했다.
사람은 비싼 돈을 주고 산 물건에도 금방 싫증을 내기 때문이다.
어마어마한 돈을 들여 집을 사도 기쁨은 첫 한 달뿐이다.
다음 달부터는 그저 몸을 누이는 평범한 '집'으로 바뀐다.
미국 심리학자 에드 디너는
'한국인들의 낮은 행복감은 지나친 물질주의 때문'이라고 했다.
행복은 사람과의 인연을 두터이 하고, 뭔가 새로운 것을 배우는 데 도전을 하고,
삶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하루의 생활에도 만족할 줄 아는 데서 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국인은 돈을 행복의 절대적 전제 조건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는 얘기다.
그는 이대로 가다가는 한국이 더 부자 나라가 되더라도 마음이 차 오르는 기쁨과 여유를 누리지 못할 거라고 했다.
지난해 삼성경제연구소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의 중산층 비율을
비교 분석한 결과가 국가·사회적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21개국 중 최하위권인 18위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이런 결과가 발표되자 인터넷상에 `중산층 별곡(別曲)'이란 것이 떠돌아 화제가 됐었다.
`중산층 별곡(別曲)'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중산층 기준은
'부채가 없는 30평대 아파트를 소유하고, 월급은 500만 원 이상이 되고,
2000cc급 중형차 소유하고, 예금을 1억 원 이상 보유하고,
해외 여행을 년1회 이상 다녀야'한다는 것이다.
우리와 달리 프랑스의 중산층 기준에는 돈 문제가 빠져 있다.
'외국어 하나 정도를 구사할 수 있어야 하고, 직접 즐기는 스포츠와
다룰 줄 아는 악기가 있어야 하며, 남들과 다른 맛을 낼 수 있는
요리를 만들 수 있어야 하고, 사회적 공분에 의연히 참여하고,
약자를 도우며 봉사활동을 꾸준히 할 것'이다.
이는 조르주 퐁피두 대통령이 1969년 대선 때 공약집에 제시한 내용이다.
영국이나 미국의 경우는 프랑스보다 더 추상적이다.
영국은 '페어 플레이를 할 것, 자신의 주장과 신념을 가질 것,
독선적으로 행동하지 말 것, 약자를 두둔하고 강자에 대응할 것,
불의.불평.불법에 의연히 대처할 것'으로,
옥스포드대학에서 제시한 중산층 기준이라 한다.
미국의 공립학교에서 가르치는 중산층의 기준은 '자신의 주장에 떳떳하고,
사회적인 약자를 도와야 하며, 부정과 불법에 저항하고,
테이블 위에 정기적으로 받아보는 비평지가 놓여 있어야'한다고 한다.
한국은 물질적 '소유개념'을 기준으로 삼는 데 비해
프랑스나 영국·미국은 경제적인 요소는 아예 없고,
사회적 존재로서의 역할을 주문하는 내용이 대부분으로 '존재가치'에 치중하고 있다.
물론 이것은 출처가 불분명하고 단순 비교도 어려운 주제이지만 이런 기준이 사실이라면,
우리 중산층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한편으로는 사실 여부를 떠나 중산층 별곡을 보면서
우리나라의 경우 중산층의 삶의 질 즉 문화 활동 내지는 사회적 활동 등 보다는
물질적 소유에 치우친 잣대만을 내세운 것이 사실이 아닌가 하는 자괴감이 든다.
중산층을 보는 관점이 왜 이렇게 다른 것일까.
프랑스 사람들은 형이상학적이고 고상한데 우리는 유독 배금주의에 젖어서
그런 건 아닐 것이다.
다름아닌 복지 수준 때문이다. 직장을 잃거나 실패를 해도 인간적 삶을 유지할 수 있는
복지 선진국과 사회안전망도 갖춰지지 않은 복지 후진국의 중산층 개념이 같을 수 없다.
중산층 기준은 계층을 나누는 척도이면서 평균적 삶의 기대치이기도 하다.
퐁피두 대통령은 보편적 복지 위에 중산층의 기준을 세웠고,
한국의 직장인들은 아등바등하는 생존경쟁 위에 그나마 경제적으로
안정된 모습을 그린 것이다.
조선시대 중산층 기준은 ①두어 칸 집에, 두어 이랑 전답 소유 ②겨울 솜옷과 여름 베옷 두어 벌 소유
③서적 한 시렁, 거문고 한 벌, 햇볕 쬘 마루 하나, 차 달일 화로 하나,
늙은 몸 부축할 지팡이 하나, 봄 경치 찾아다닐 나귀 한 마리 보유
④의리와 도의를 지키며 나라의 어려운 일에 바른 말하고 사는 것이었다.
이 얼마나 멋진가. 조목조목 따져보면 프랑스나 영국의 중산층 기준과 별 다른 바 없다.
옛날 선비들은 이랬는데,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을 거치면서 시대의 굴레에 국민의식이 천박해 진 것이다.
종이를 함부로 버리면 혼이 나던 시절이 있었다. 화장지는 신문을 잘라 썼는데,
얇고 부드러운 금은방의 일력(日曆) 종이가 최고였다.
그래서 연말연시가 되면 달력을 더 얻으려는 사람들로 금은방은 때 아닌 성시를 맞았다.
두꺼운 달력은 교과서 겉장으로, 몽당연필은 볼펜 끝에 끼워 썼다.
양말과 속옷은 꿰맸고, 닳아 빠진 무릎과 팔꿈치엔 헝겊을 덧댔다.
책가방은 6년을 쓰고도 동생에게 대물림됐다. 둘째 셋째는 새 옷, 새 신발, 새 학용품을 써보는 게 소원일 정도였다.
그래서 모두들 가난에서 해방되어 부자가 되고 싶어하는 물질주의에 함몰됐다.
선진국에도 '쪼그라든 중산층(Squeezed Middle)'이라고 `옥스퍼드 사전'이 2011년 선정한 `올해의 단어'가 있다.
미국에서 시작된 금융위기가 전 세계 경기침체로 번진 여파가 실생활에서 확연히 드러났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나라가 높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에 시달리면서
중산층이 눈에 띄게 감소했다는 설명이 덧붙여졌다. 이에 따라 국민이 평균적인 삶을
살기 어려워졌다는 분석이다.
중산층은 국민교육을 바탕으로 건전한 시민의식 아래
권리와 의무를 지키는 계층으로 민주사회의 주춧돌이다. 또한 중산층은
부유층과 빈곤층으로 나눠져 있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위 아래 어느 한쪽으로
쏠리는 것을 막아주는 사회통합과 정치안정을 위한 안전판 역할을 해준다.
한국사회에서도 고질적인 계층, 지역, 이념, 세대, 성 사이의 갈등을 완화하는데 허리로서 완충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는 행복지수를 화폐적인 숫자로만 재려고 한다. 행복은 눈에 보이는 숫자가 아니다.
1인당 국민소득 2만불을 넘어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는 우리도 이제는
돈만 추구할 것이 아니라 '삶의 질'을 높여야 한다. 결과보다는 과정을 중시하고,
보수와 진보 측 신문을 하나씩 구독하고, 위트와 유머를 즐기며,
스포츠나 악기를 하나 이상 다룰 줄 안다면 이것이 진정한 중산층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제 우리도 민주주의 사회를 지탱하는 중산층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
돈만 있다고 중산층이라고 할 수는 없다.
부동산 투기로 졸부(猝富)가 된 천박한 부자들을 우리는 상류층으로 보지 않는다.
높은 사회적 신분에 상응하는 도덕적 의무인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이행해야 진정한 상류층인 것이다.
따라서 청빈하게 살던 조선 시대 선비처럼 가난하지만 품위를 지키며, 세금을 꼬박꼬박 내고, 병역의무도 성실히 하고, 공중 도덕을 지키는 등 사회적 윤리를 지키고, 약한 자를 도우며 봉사 활동을 꾸준히 한다면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중산층일 것이다.
※ 얼마의 재산이 있어야 중산층이라 생각하십니까?
지금 행복하십니까? 대한민국 국민의 행복지수는 왜 낮을까요?
아마도 욕심과 탐욕을 버리지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저는 생각합니다.
So Deep is the Night, Lesley Garrett
Chopin-Etudes op.10
첫댓글 과한 욕심 때문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