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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글 스크랩 사기열전 (사마천)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57 15.02.22 10:18 댓글 1
게시글 본문내용

 

 

 

 

 

1. 저자 소개

 

- 사마천 (司馬遷, BC145년? ~ BC 86년?)

 

한나라 전성기인 한 무제 때 활동한 역사학자이자 문학자이다. 기원전 145년경 오늘날의 중국 섬서성 한성시의 고문촌 용문채에서 태어났다. 황제 측근에서 각종 기록을 담당하던 아버지 사마담의 영향으로 어렸을 때부터 그는 학문에 정진했다. 20세를 전후해서는 당대 최고의 학자인 공안국과 동중서를 만났는데, 이는 그의 학문적 여정에서 큰 이정표가 되었다. 특히 동중서를 통해서는 단순한 사실의 나열로서의 역사를 넘어 ‘역사란 무엇인가?’ 라는 본질적인 물음에 대한 성찰을 하게 되었다. 한 편 이 시기 그는 역사 유적지를 찾아 자유롭게 천하를 방랑했는데, 이는 훗날 ‘사기’ 를 집필하는 데 자영분이 되었다.


그 후 그는 황제의 경호원 격인 낭중이라는 직책에 임명되었지만 그의 나이 36세 때 사마담이 낙양에서 화병으로 죽으면서 남긴 유언을 계기로 새로운 삶의 목표를 갖게 되었다. 그것은 아버지가 다하지 못한 대역사를 완성하는 일이었다. 3년 후 사관직인 태사령에 오른 그는, 왕도정치의 이상을 담은 공자의 ‘춘추’ 를 계승하여 ‘사기’ 집필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기원전 99년, 장수 이릉은 보병 5천을 거느리고 북방의 흉노를 토벌하러 갔으나 중과부적으로 적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이어 그의 투항소식이 전해지자 한 무제의 노기는 하늘을 찔렀고 조정대신들도 앞 다투어 이릉을 비난했다. 이때 사마천은 홀로 “이릉이 투항한 것은 진심이 아니며, 목숨을 보전하여 훗날 한나라에 보답하기 위한 것” 이라며 이릉을 변호했다. 결국 한 무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선고했고 사마천은 궁형의 치욕을 감내함으로써 목숨을 부지했다.


이 사건은 사마천의 삶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출옥한 그는 더 이상 예전의 사마천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의 울분과 고통을 넘어 역사와 하늘에 대한 깊은 성찰로 나아갔다. 그는 비통과 슬픔 속에서도 발분하여 자신의 원대한 뜻을 펼쳤던 선인들의 삶을 떠올렸고, 거기에 자신의 비운을 투영했다. ‘사기’ 는 그렇게 세상에 대한 깊은 정을 가진 한 사내의 고통 속에서 잉태되었던 것이다.

 

 

 

 

2. 저술 배경

 

사기를 집필한 그의 집념과 생각들이 사기열전의 등장인물에 대한 평에 많이 반영되어 있고 유가보다는 순자. 한비자, 노자의 학설에 무게중심을 두고 있다. 사마천은 자신의 저술에서 스스로 ‘천’ 이라고 부름으로써 객관적인 태도를 견지했는데, 이는 대화체의 적극적인 사용과 함께 ‘사기’ 의 독창적 서술 양식을 드러내는 예라 할 수 있다. 태사공은 공자의 ‘춘추’ 와 마찬가지로 과거의 예로써 천자라도 잘못이 있으면 비판해야 하고 덕이 있으면 칭송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저술활동 중 ‘이릉의 화’ 를 당하게 되었고 이 후 사마천은 선인들의 삶을 빌어 자신의 모습을 투영하고 우회적으로 자신의 뜻을 전하였다.

 

 

 

3. 내용 요약 : 시대별 흐름과 인물들

 

일련의 사건과 인물과 기록 그 자체에 가치를 부여하는 대신 역사에 대해 끊임없이 의문을 던졌다. 이러한 태도는 ‘사기’ 전체에 걸쳐 시종일관 관통하고 있는데, 특히 ‘사기열전’ 의 처음을 장식한 [백이,숙제 열전]편에 잘 나타나 있다. ‘열전’ 은 한 개인의 사적을 서술한 것이지만, 그 형식이 다양하고 천하에 이름을 날린 사람들 외에 보잘것없는 저잣거리의 인물까지도 그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역사를 바라보는 사마천의 시각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그는 각 인물의 특성을 통해 역사에 새로운 시각을 부여하고자 했고, 왕조 중심의 역사 서술에서 소외되었던 세상의 다양한 모습을 뛰어난 필치로 기록했다.

 

 

(1) 상(商)나라 (BC1600년경 ~ BC1046년)

상(商)나라는 역사적으로 실재했다고 여겨지는 최초의 중국 왕조이다. 주(周)를 비롯한 다른 나라에서는 은(殷)이라는 이름으로 불렀으므로 은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스로의 나라 이름을 칭할 때는 은나라를 세운 부족 이름인 상(商)이라는 이름을 더 많이 사용했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상이라는 이름으로 통일해 부르고 있다. 전설상의 신인 황제(黃帝)의 후손 탕왕(湯王)이 세웠다고 전해진다. 탕왕은 하나라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걸왕을 무찌르고 상나라를 개국하였다. 마지막 왕은 무희 달기와 함께 국민을 잔혹하게 다룬 31대 주왕(紂王)이며, 주나라 시조인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하였다.
 

- 백이열전

19세기 말까지 전설상의 왕조로만 취급되었으나 20세기 초에 은허가 발굴되고 고고학적 증거들이 나타나 실재하는 왕조였음이 인정되었다.

백이와 숙제는 상나라 제후국의 왕자들로, 주나라 무왕이 상나라 주왕을 응징하려 하자 불충이라는 명분으로 반대했다. 무왕이 그러한 반대를 무릅쓰고 상나라를 치자 백이와 숙제는 명분이 통하지 않는 혼탁한 세상과는 결코 타협할 수 없다며 수양산으로 들어가 고사리로 연명하다가 굶어 죽었다. 사마천은 ‘백이 열전’을 ‘사기열전’ 의 가장 앞에 배치함으로써 의를 부르짓다가 죽어간 백이, 숙제의 삶에 자신의 불행한 삶을 투영했다. 이 편에 나오는 “하늘의 도란 도대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라는 말은 ‘사기’ 전체를 관통하는 사마천의 역사관으로 받아들여진다.

 

 

(2) 주(周)나라 (BC10C경 ~ BC256년)
상나라를 멸망시키고 일어난 나라로 서백창은 주나라의 문왕으로 강태공과 함께 천하를 다스릴 기반을 만들었다. 그의 아들 무왕이 서쪽의 제후들을 거느리고 상나라를 멸하고 도읍을 ‘호’ 로 삼은 후 일족과 공신들에게 땅을 나누어 제후로 봉했다. 주나라 초기에는 130~180여 개의 제후국이 있었지만 이들 중 몇몇 나라만이 크게 발전하여 후에 춘추오패나 전국 칠웅으로 성장했다.

 

<주나라의 주요 제후국>

 

- 오나라 : 주나라와 가장 가까운 제후국이면서도 오랑캐라 불리는 독특한 위치에 있었다. 춘추시대 말기 수몽과 부차 때에 이르러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월나라에게 패하면서 무너지고 말았다.
- 제나라 : 무왕을 도와 건국에 크게 이바지한 태공망 여상이 그 시조다. 춘추전국시대 내내 강대국으로서 지위를 유지했다.
- 연나라 : 주 무왕의 아우인 소공 석이 그 시조다. 전국시대에 이르러 전국칠웅 중의 하나로 성장했다.
- 진(秦)나라 : 본래 주 왕실의 제후국이 아니었다. 상나라 주왕을 섬겼으나 상나라가 멸망한 뒤에는 주나라에 귀속했다. 초기에는 유목생활을 하였으나 주나라를 지키는데 힘써 제후로 인정받았다.
- 월나라 : 현재 절강성에 위치한 남방국가로, 하나라 소강 황제의 서자가 그 선조다. 그 후 약 20대가 흘러 구천이 즉위하였고 오나라와 싸워 승리함으로써 춘추오패 중의 하나로 성장했으나 초나라에 의해 무너졌다.
- 초나라 : 주나라 성왕 때까지 야만족의 땅으로 여겨졌으나 강대국으로 성장하여 춘추오패와 전국칠웅의 지위에 올랐다. 훗날 항우가 초나라 부흥의 기치를 들고 일어나기도 했다.
- 진(晉)나라 : 주 성왕의 아우인 당숙우가 세운 나라로, 문공 때 춘추오패 중의 하나로 성장했다. 후에 삼진이라 일컬어지는 한,위,조 세 나라로 분할된다.
- 한나라 : 진나라가 삼진으로 분할될 때 제후국이 되었고 후에 전국칠웅으로 성장했다.
- 위나라 : 삼진 중의 하나로 땅은 작았으나 중원에 위치하여 후에 전국칠웅으로 성장했다.
- 조나라 : 삼진 가운데 가장 세력이 강성했다. 전국시대 진(秦)나라와 쌍벽을 이룰만큼 크게 세력을 떨쳤으나 장평대전에서 대패한 뒤 급격히 쇠퇴했다.

 

 

(3) 춘추시대 (BC722년 ~ BC481년)

공자가 지은 ‘춘추’(春秋)에서 이 이름이 유래했다.  춘추시대 제후 간 회맹의 맹주를 가리키는 춘추오패(春秋五覇)로는 제(濟) 환공, 진(晉) 문공, 초(楚) 장왕, 오(吳) 합려, 월(越) 구천이 있다.

(관중 안자 노자 장자 신자 한비 손자 오기 오자서 상군 소진)

 

- 관중, 안자 열전
관중은 춘추시대 제 환공시절 제나라를 중흥시킨 명재상으로, 관중이 천하여 이름을 떨칠 수 있었던 것은 그의 재주를 알아본 포숙아가 있었기 때문이다. 훗날 관중은 “나를 낳아 준 이는 부모지만 나를 알아준 이는 포숙아다”라고 고백함으로써 관포지교란 고사의 주인공이 되었다. 
공자와 동시대에 살았던 안자는 3대에 걸쳐 재상을 지냈으면서도 한 벌의 여우가죽옷으로 30년을 입었을 만큼 검박했다. 또한 나아가서는 충성을 다하고 물러나서는 힘써 허물을 보충했기에 공자도 그를 존경했다고 한다. 사마천은 안영이 오늘날 살아있다면 나는 그를 위해 채찍을 든 마부가 되어도 좋을 만큼 그를 흠모한다고 했다

 

 

(4) 전국시대 (BC403년~ BC221년)

기원전 403년 진(晉)나라의 대부 조(趙), 위(魏), 한(韓) 3가문이 주(周)나라 왕실로부터 정식 제후로 공인받으면서 시작된다. 얼마 후 제(齊)나라도 기존의 강씨(姜氏)를 대신하여 전씨(田氏)가 지배하였다. 이 시기에는 제후들이 주나라로부터 정신적 독립을 지향해 제각기 왕을 칭하였다.

 (장의 백기 왕전 맹상군 평원군 우경 위공자 춘신군 범수 채택 악의 전단 염파 인상여 여불위 자객)

 

- 전국칠웅 (진(秦) 조(趙) 위(魏) 한(韓) 제(齊) 연(燕) 초(楚))
춘추시대에는 나라의 제사를 끊으면 나라의 조상으로부터 저주받는다고 하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고, 나라를 점령해도 완전하게 멸해 버리는 일은 그만큼 많지 않고, 또 멸망해도 부흥하는 것이 흔한 일이었다. 전국시대에 들어가면 용서가 없어져, 한번 전쟁에 지는 일은 나라의 멸망에 직접 연결되었다. 그러한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점차 7개의 대국들이 강자로 부상되어 갔다. 그 7개의 나라를 전국 칠웅(戰國七雄)이라고 부른다.

 

- 상군열전
상군은 전국시대 법가사상의 거목이자 정치인인 상앙을 일컫는다. 그는 진나라 효공을 도와 준국여사에서 가장 성곡적인 변법을 단행함으로써 진나라를 전방위적으로 부강하게 했다. 상앙의 변법은 법과 제도뿐만 아니라 문화와 풍속과 의식수준까지 파고들어간 철저한 개혁으로서, 반기득권이고 전제적인 성격을 띠었다. 그러나 상앙을 지지했던 효공이 죽고 혜문왕이 즉위하자 그는 결국 정적들에게 몰려 참혹하게 죽었다. 사마천은 그의 참혹한 죽음이 그의 천성과 행실에 비춰 당연한 결과라고 말하고 있다.

 

- 인상여 열전
전국시대 후기 진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했던 제나라가 쇠퇴해지고 조나라가 그 자리를 대신했다. 인상여는 강대한 진나라에 맞서 천하의 보옥인 화씨벽을 온전히 지켜 ‘완벽’ 이란 고사를 남겼다. 죽음을 각오하면 반드시 용기가 생긴다. 죽는 것이 어려운 것이 아니라 죽음을 대하는 것이 어려운 것이다. 인상여가 화씨의 벽을 들고 기둥을 노려보면서 호통을 칠 때 그 형국은 기껏해야 죽음뿐이었다. 그러나 평범한 사람들은 두려워 감히 그러지 못한다. 인상여는 용기를 내어 그 이름을 적국에 떨쳤고, 고국으로 돌아와서는 염파에게 자신을 낮추는 아량을 보여주었다. 그는 지혜와 용기 두 가지를 겸비한 자라 할 수 있다.

 

- 자객열전
춘추전국시대 활약한 다섯 명의 자객들을 다루었다. 명분과 도리를 지키기 위해 혼탁한 세상에 맞서 제 한 몸을 던졌던 협객들의 용기와 의기를 높이 평가하면서 냉혹한 현실 속에서 바르게 사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었다. 사마천은 이들을 한갓 범법자로 치부하는 것은 불공평한 처사라 여겼다.

?

 

(5) 진 (秦, BC221년 ~ BC206년)
시황제에 의해 전국 시대를 통일한 제국이다. 흔히 춘추전국시대의 진나라 제31대 왕 영정이 황제에 오른 뒤만을 따로 부르는 이름이다.

(이사 경포 회음후[한신])

 

- 회음후 열전(한신 열전)
진, 한 교체기 항우, 유방과 더불어 천하를 삼등분하기에 이를 만큼 이름을 떨친 한신을 가리킨다. 우리가 잘 아는 배수진, 토사구팽, 다다익선, 필부지용 같은 고사나 ‘큰 뜻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남의 가랑이 밑이라도 빠져나간다’는 뜻의 과하지욕 같은 고사는 모두 그와 관련된 것으로, 그의 활약이 얼마나 컸는지 짐작하게 한다. “높이 나는 새가 모두 없어지면 좋은 활도 거두어 치운다”고 했던 그의 말대로 결국 그는 반역을 공모한 것이 발각되어 참살되고 만다.

?

 

(6) 한(漢, 기원전 206년 ~ 220년)
진 이후의 중국의 통일 왕조이다. 한 왕조는 고조 유방(劉邦)에 의해서 건국되었으며 약 400년을 지속하였으며, 중국의 역사상 가장 강대했던 시기 중의 하나이고, 오늘날에 중국인들을 부를 때 사용하는 한족 역시 이 한 왕조의 이름에서 유래되었다.

(역생 육가 혹리)

 

- 혹리열전
혹리란 엄격하고 분명한 법집행으로 정책을 시행하던 관리들로, 법가적 전통을 이어받아 실무경험이 풍부하고, 사사로운 정리에 좌우되지 않고 철저하게 법을 이행했다. 사마천은 “백성을 다스리는 근본은 도덕에 있다”라고 천명함으로써 포악한 정치에 반대하는 뜻을 분명히 했다.

 

(7) 기타

(유협 영행[아첨꾼] 골계[해학과 기지를 가진자] 일자[점쟁이] 화식[물질주의])

 

- 화식열전
사마천은 ‘사기열전’의 마지막을 ‘먹고 사는 존재로서의 인간’을 논하는 데 할애함으로써 정신과 물질 사이의 거리에서 오는 모순을 껴안으려 했다. 그는 “부를 추구하는 것은 인간의 본성으로서 배우지 않아도 누구나 바라는 바이며, 인간은 누구나 물질에 지배된다”고 말했다. 자신이 사형을 면할 50만 전이 없어 궁형의 치욕을 감내해야 했기에 그는 누구보다도 돈의 위력을 실감했을 것이다.

 

 

 

 

자료정리 : 오상교 (영리더스아카데미 4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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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 작성자 15.02.22 10:38

    첫댓글 준비된 사마천 사기 시리즈는 여기까지입니다. 더 원하시는 분은 시중에 완역본이 나와있으니 구입하셔서 읽으시면 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음은 병법 36계 시리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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