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거, 이거 정말 재미있군."
바비가 제리 스프링어 쇼(Jerry Springer Show : 미국의 외설이나 엽기적인 주제를 가지고 토론하는 저질 토크쇼)를 보다 흥분한 사람인양 모니터를 향해 외쳤다.
"왜 그래요 바비?"
스캇은 따분한 강아지처럼 기지개를 폈다.
"이것 좀 봐봐. 여기 이거."
바비가 손짓하는 모니터를 여전히 관심 없는 눈으로 스캇이 응시한다.
"뭐 가요?"
이해 할 수 없다는 스캇의 말에 바비가 발끈한다.
"바보. 가까이 와서 잘 좀 봐봐."
스캇은 못마땅한 시선을 바비에게 흘리며 모니터로 다가간다. 녹색 바탕의 모니터에 6개의 작은 창이 열려 있는 것이 보인다. 창 속에는 2중 나선 모양으로 비비 꼬여 있는 작은 알맹이 모양의 DNA 구조가 비쳐지고 있었다. 사물을 관찰하는 데는 별 도움이 안돼 보이는 인상을 잔득 구긴 스캇이 그 구조물들을 하나 하나 꼼꼼히 살펴본 후 입을 연다.
"글쎄요. 잘은 몰라도... 여기, 여기, 여기 다 같은 모양의 구조가 끼어 있는 거 아닌가요?"
구조물을 하나하나 찍어 보이며 신중하게 답하자 바비가 감탄한다.
"오 ∼ 제법인데. 맞아 아주 정확하게 봤어. 우선 이것들은 대표적인 열대 우림성 식물인 끈끈이 주걱, 뚝새풀, 천남성, 관중, 우산이끼 그리고 스파트필럼 꽃나무야. 풀과 이끼 그리고 꽃나무까지 여러 종류의 식물표본들에 DNA 구조를 살펴보다,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지. 방금 본 것처럼 모두 같은 부분의 구조물을 포함하고 있다는 거였어."
"그게 뭐가 재미있다는 거죠?"
"물론 식물의 DNA는 동물들의 것보다 훨씬 단순하지, 하지만 한결같아 보이는 눈(雪)의 결정체가, 다 제 각각이듯이 DNA 또한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는 거야."
"그런데 모두 같은 성분의 DNA를 가지고 있다."
바비는 고개를 크게 끄덕인다.
"그렇지, 이 사실은 캡틴의 말을 강하게 입증해 주고 있는 거야."
"어떻게 요?"
"저번에 보고 받은 데로 보통 악어와 그 괴물 악어가 같은 DNA를 가지고 있다는 것, 비단 DNA가 만져진 건 동물뿐만이 아니라는 거지. 어떻게 인지는 알 길이 없지만 식물들 역시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이야기가 되는 거야."
"예? 마이다슨가 뭔가 하는 걸로 식물들의 DNA까지 만질 수 있다는 겁니까?"
"이 여섯 가지 식물뿐이 아니냐. 다른 모든 식물들이 같은 DNA구조 하나씩을 가지고 있었다고, 다시 말해 모든 식물들이 다 같은 피를 가지고 태어난 형제들이라는 거지."
"흠. 그럼 동물들에, 식물들에. 눈에 보이는 생물들은 모두 만들어진 것이라는 건가?"
"그래 믿지 못할 말이지만 모든 생명체가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거야. 분명해."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죠?"
어깨가 오를락 거린다.
"낸들 아나. 혹시 그 노아라는 곳에서라면 알 수 있을 수도... 지금쯤 우리 일행이 도착했을 텐데."
"아마 도착해도 벌써 도착했을 걸요. 뭣들 하는지 전혀 보고도 없고. AV 쪽도 조용하군요."
"치. 이럴 줄 알았으면 따라갈걸. 지들만 재미나고 맛나게 즐기고 있잖아."
푸념 담긴 투덜거림에 맞장구를 친다.
"그렇게 요. 나도 갔으면 이렇게 심심하진 않았을 텐데. 지금 연락해 볼까요?"
"됐네. 언제까지 연락 않는지 한번 두고 보자고. 나도 성깔 있는 사람이야, 지금 어디서 어떻게 놀고 있는지는 몰라도 나중에 아주 후회하도록 만들어 줄 테니까. 그때까지 편이들 쉬고 있으라고 그래."
워털루 전을 앞에 둔 나폴레옹 인양 주먹을 불끈 쥔 바비가 마녀 같은 미소를 지으며 굳게 다짐했다.
감옥(Prison)
'쾅!!'
두 번째 폭발음이 들려옴과 동시에 저 멀리 철창사이로 검붉은 불기둥이 하늘 높이 피어올랐다. 노래 소리인지 통곡 소리인지 모를 레피탄들의 외침이 그들의 타악기 소리와 섞여 반복적인 리듬으로 어둡고 습한 반 지하 감방 속에 희미하게 전해져 왔다. 푸른 하늘 속으로 부식되어 가는 짙은 연기를 바라보는 일행의 시선에 초조와 불안이 들어차기 시작한다. 하지만 어깨가 관통 당하고 하얀 붕대와 라밍의 임시 방편인 나무 깁스를 둘러매고 있는 진의 표정에는 그러한 기색들이 들어 있지 않았다. 그녀는 감방 구석에 다리를 곧게 펴고 앉아 한 것 여유 있는 목소리로 상황을 중계한다.
"신전 옆 광장에서 파티중인 것 같군요. 방금 건 이카루스기의 연료탱크가 폭발한 겁니다. 두 번째 소리였던 걸로 미루어 보아 타고 왔던 2대의 이카루스기 모두 파괴된 것 같고, 로베르토 녀석이 지껄이는 데로 인간이 신이라면 신의 날개쯤 되는 비행정들을 불질렀으니 이제 곳 우리 차례 일 겁니다."
"단정의 근거는?"
"군인의..."
"느낌."
진은 론의 물음과 답에 가볍게 입 술 끝을 끌어올리며 턱을 끄덕인다.
"그 정도는 꼬마아이도 알 수 있는 일이요. 문제는 어떻게 우리 차례가 오기 전에 이 칙칙하고 곰팡내 나는 감옥에서 탈출하느냐 하는 거 아닙니까?"
두 사람의 행동이 못 마땅한 듯 다소 신경질 적인 목소리로 스와르가 말했다. 진이 무어라 그에게 답하려 할 때 오래된 녹 소리와 함께 감방 문이 열리며 란을 비롯한 2마리의 레피탄 그리고 로베르토가 들어왔다. 진의 눈가에 여유가 사라지고 살기가 넘친다.
"무얼 하러 왔지? 작별인사라도 하려는 건가?"
눈에서처럼 살기가 넘치는 진의 말투였다.
"바로 맞추셨습니다. 진 대령."
능글맞은 로베르토의 말에 진이 혀를 찬다.
"여러분도 폭발 소리를 들으셨겠지만 지금 광장에서는 여러분들을 위한 파티가 한창입니다. 레피탄들, 나의 아들과 딸들은 바로 저, 신을 배신한 당신들의 화형식에 아주 들떠 있지요. 이미 이카루스기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짐은 모두 불질러졌습니다. 곳 여러분도 같은 길을 가겠지만."
광대 같은 웃음이 그의 얼굴에 새겨진다.
"이곳에 온 목적이 뭐요."
론이 무섭게 노려보자 광대의 웃음이 사라졌다. 로베르토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리나를 바라본다.
"난 리나에게 용건이 있어서 왔소."
리나의 눈에 초록빛이 더해지며 그를 향한다.
"나의 여신이 되어 주시오."
"예?"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 로베르토에게서 떨어지자 리나가 놀라 몸을 움 추린다.
"당신 미쳤소?"
"뚱보는 가만히 있어!"
참다 못한 마이클이 앞으로 나섰지만 로베르토의 살벌한 음성에 기가 죽는다. 로베르토는 고개를 돌려 리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오른손으로 그녀의 목 언 자리를 쓰다듬는다.
"당장 그만 둬요!"
라밍의 히스테릭한 소리가 로베르토를 자극했지만 그는 시선도 주지 않는다.
"나를 선택한다면 당신도 신이 될 수 있소. 게다가 목숨도 구제 받게 되지. 어때, 나와 함께 여생을 편히 보내는 게."
론과 커크, 진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달려들여 했으나 레피탄들에서 뻗어 나온 본 블레이드가 앞을 막았다. 순간
'철썩'
로베르토의 돌아간 고개와 상기된 얼굴로 오른 손바닥을 내밀고 있는 리나의 모습이 들어왔다.
"착각하지 말아요, 난 죽음을 택할 망정 당신 같은 사람을 선택하진 않을 테니까."
냉기가 흐르는 리나의 음성 이였다. 로베르토의 고개가 서서히 돌아온다. 얼굴은 수치와 치욕으로 붉게 물들여졌다. 갑자기 그의 손이 리나의 뺨을 올려친다. 리나가 맥없이 쓰러졌다.
"이 나쁜 자식!!"
진이 욕설을 하자 로베르토가 바람처럼 몸을 돌려 그녀의 왼쪽 어깨를 잡고 아래로 찍어누른다.
'윽!!'
진이 신음 소리를 내며 일어나려던 자리로 되 쓰러진다. 그래도 로베르토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어깨를 압박한다.
"로베르토 멈춰."
론이 본 블레이드를 피해 남자의 등을 덮쳤다. 하지만 남자가 회전을 하며 몸을 젖히자 론은 바닥으로 떨어져 나간다.
"그만! 제길, 그래 다 죽어버려! 한 명도 남김 없이 다 죽으라고!"
로베르토는 씩씩거리며 옷과 머리 매무새를 가담은 후 신경질 적인 모습으로 문을 나서며 말했다.
"화형식은 1시간 후다. 그때까지 다함께 장래식 걱정이나 하고있으라고."
열릴 때 보다 더 슬픈 소리로 문이 닫혔다.
라밍이 진의 어깨로 달려든다.
"상처가 덫 났어요. 뼈가 으스러져서 좀 아플 거예요. 고정시킬 테니까 조금만 참으세요."
말을 마치며 자신의 오른쪽 소매를 입으로 찢어 진의 어깨에 단단히 감았다. 감는 것을 마치자 진이 이를 악물고 몸을 일으킨다. 이마와 얼굴에 땀이 배어든다. 라밍과 입술이 찢어진 리나가 그녀를 부축했다.
"캡틴. 더 기다릴 것도 없을 것 같습니다. 허락하시지 않는다면, 군사분야 담당인 저의 권한으로라도 연락을 취하겠습니다."
론의 표정에 걱정과 갈등이 교차된다.
"더 이상 방법이 없을 것 같군요. 출동을 승인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론의 명이 떨어지자 진이 주머니에서 소형 무전기를 꺼내 귀에 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론이 묻는다.
"잡혀 올 때 몸을 수색 당했는데 그건 도대체 어디서 나온 겁니까?"
"남자와 여자의 관계에서 남자의 가장 큰 문제점이 뭔지 아나요? 그건 항상 여자에 대해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싶어한다는 거죠."
진답지 않은 다소 교태 스런 톤으로 말하며 힘들게 윙크 짖는다, 그리고 무전기에 스위치를 누르며 말했다.
"히든카드 오프."(Hidden Card Off)
뒤집어진 카드(Hidden Card Off)
"적색 경보!! 적색 경보!! 즉각 작전에 돌입한다."
붉은 사이렌이 AV 탱크 안을 휘저으며 요란스럽게 울려되자. 3명의 군인은 분주히 하지만 신속하고 절도 있게 움직여 탱크 후미에 있는 M3000 자동화기 로봇에 탑재한다.
"컨트롤 글러브 착용."
"오케이."
보드의 말에 픽과 칼이 동시에 대답하며 온도와 움직임 센서가 내장되어있는 검은 합성 플라스틱 글러브에 손을 끼운다.
"글러브 락온(Lock On)"
"오케이. 바디."
다시 대답을 마친 두 사람은 컨트롤 글러브의 손바닥 부분에 나있는 반구 모양으로 패어있는 홈을 M3000 의 개미다리처럼 얄개 뻗어 나와있는 컨트롤러에 위치한 수은 빛깔의 둥근 구술 위에 포갠다. 자이로 마우스와 비슷한 형태의 컨트롤 글러브는 조종사의 눈을 통해 뇌로 전달된 상황을 이해 분석하여 다시 척추신경을 통해 어깨, 팔 그리고 손의 글러브와 구술에 장착된 초정밀 센서로 로봇의 몸에 전달되는데 단 0.14초, 인간의 반응 속도와 가장 유사하여 무엇에든 즉각 반응할 수 있는, 조종한다는 개념을 넘어선 착용하는 인체용 하이테크 컨트롤러 시스템 이였다.
"우리의 목표지점은 모두 두 군대이다. 나와 칼은 마을의 메인 광장으로 향해 레피탄의 파티에 참석하고 픽, 너는 진 대령과 일행이 잡혀 있는 마을 변두리 지역의 감옥으로 가서 그들을 구출한다. 오케이?"
"오. 알았어. 그런데 노아라는 곳에 갔다가 언제 돌아온 거야?"
픽의 낮고 어눌한 말투에 보드가 짜증을 낸다.
"언제 긴 언제야. 네가 자빠져 자고 있을 때 왔지. 체력 어쩌고저쩌고 하더니 잠만 잘 자더군. 아무튼 일행은 노아에 도착한 그날 밤에 바로 돌아 왔나봐. 로베르토 녀석이 결국 일을 친 거지. 처음부터 맘에 안 드는 놈이긴 했지만 배신을 하다니. 자식, 잡히면 가만히 안나두겠어."
"말이 많다 가자."
칼이 차갑게 재촉하자 보드가 다시 짜증 낸다.
"출발 전 점검은 나의 임무라고, 모두들 M3000의 항속법은 잊지 안았겠지? 누차 말하지만 M3000은 자력으로 날아다닐 수 있게 설비되어 있지 안다고 하지만 AV 에 설치된 *레일 슈터(Rail Shooter)로 높이 3.6km, 원거리 14.3km 까지 날려보낼 수 있지. 일단 M3000 기가 공중에 발사되면 기체면에 장착된 소형 분사추진 장치로 방향을 조정하여 목표물로 이동하게 된다. 각 목표물로 정확하게 착륙하지 않으면 작전시간이 지연되니까 조종에 신중을 기하도록." ( * : 전자포라고도 불리우는 레일 슈터는 콘덴서에 모아둔 대 전류를 포신의 내측에 설치되어 있는 레일에 순간적으로 흘려, 플레밍의 왼손법칙에 의해 로켓이나 기타 자체 추진 능력이 없는 사물을 쏘아 올릴 수 있는 발사장치)
"이봐. 우린 벌써 수 십 번이나 시뮬레이션 테스트를 거쳤다고 이제 입 좀 다물고 출발하면 안되나?!"
"잠깐."
칼의 재촉에 이번에는 픽이 막고 나선다.
"AV 탱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다시 이곳까지 올라 와야되는 거야?"
"멍청한 놈."
보드가 욕했고 칼이 재빨리 설명한다.
"탱크에는 이미 좌표와 타임 리밋을 지정해 두었다. 우리가 쏘아진 뒤 탱크는 오토 네비게이터 시스템으로(Auto Navigator System) 스스로 움직여 정확히 30분 뒤에 마을에 당도하게 될 거다. 자. 이제 출발하자."
"드디어 이 지긋지긋한 대기 명 생활도 끝이군, 좋아 그럼 발사!"
'쉭, 쉭, 쉭!!' 보드의 외침과 동시와 3대의 M3000은 세 가닥 하얀 줄을 꼬며 하늘 위로 날아올라 목표 지점을 향한 분사기를 가동 시켰다.
제노사이드(Genocide : 「그리스 고어」 대량학살)
광장에 모여있는 레피탄들이 M3000의 존재를 눈치 첸 건 레피탄 한 마리가 꺼져 가는 불길 위에 악한 신들의 마지막 잔재인 5.56 m 플라스마 소총을 던져 넣으려 할 때였다. 처음 그는 유성이나 별똥별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 크기가 점점 커지며 자신이 위치한 지점을 향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을 때 손을 들어 가리키며 동료에게 알렸다. 불 구경을 하며 신을 위한 제사를 준비중이던 레피탄들의 시선이 떨어지고 있는 유성들을 향한다. 유성의 윤곽이 뚜렷이 나타나며 비행물체로 변신한다. 이상한 낌새를 느낀 단상 위의 로베르토가 레피탄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움직인다.
"칼, 알고 있겠지만 우리의 임무는 적을 교란시키며 최대한 피해를 입히는 것이다. 우선 * MIRV로 광장을 쑥밭으로 만든다. 알겠나?"
( * 개별유도복수목표탄두 Multiple Independently Targetable Reentry Vehicle : 하나의 미사일에 복수의 탄두를 장착하여, 그것을 탄도비행중, 축차분리, 예정된 각각의 목표로 지향되는 유도방식탄두)
"보드, 넌 말이 너무 많아."
두 사람의 교신이 끝나자 M3000의 등에 부착된 미사일 발사관에서 가벼운 불꽃과 폭음을 뿜으며 각각 4발의 탄두를 토해 냈다.
미군의 탱크귀신으로 불리 우는 대전차용 헬기 '아파치'를 반으로 자른 몸에 괴도식 바퀴다리와 집게 손을 단 모습으로 항상 M3000의 형태를 묘사하던 로베르토의 눈이 무섭도록 커진다.
"M3000! 파이오니아 호에 있던 게 아니었어. 제길, 진이 날 속인 거야!"
그는 제 빨리 일어나 손을 흔들며 그의 자식들을 향해 외쳤다.
"위험해 모두 피해!!"
하지만 때는 너무 늦었다. M3000에서 발사된 8발의 탄두는 각각이 다시 5발의 탄두로 불리 되면서 기아 급수 적으로 증가했고 그 40발의 불덩어리들은 엄청난 속도로 넓은 광장 위에 소나기처럼 쏟아져 내렸다. 제단 뒤편으로 뛰어내리는 로베르토의 등뒤로 화염의 광란이 펼쳐진다.
'쾅 ∼ 앙!!'
광장은 공포와 혼란, 죽음과 고통, 불꽃과 파편, 먼지와 연기, 비명과 신음소리로 가득 찼다.
'쿠 ∼ 웅.'
보드와 칼의 M3000기가 지상에 착륙함과 동시에 먼지 회오리를 일으키며 기체 다리에 달린 체인바퀴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두 기체가 연기 속을 질주하며 살아남은 레피탄들을 찾아 나섰다. 레피탄들은 갑자기 하늘에서 나타난 거대한 집게 손의 검은 괴물을 어찌 할지 모른 체 지켜본다. 하지만 괴물에 의해 죽어 가는 동료들을 보게되자 레피탄들의 생각이 하나의 결론으로 겹쳐진다. 괴물은 적이다. 적은 없어져야 한다. 싸워라, 적이 사라질 때까지!
정신을 차린 레피탄들이 창과 본 블레이드를 꺼내고 괴물을 향해 달려든다. 그러나 중량 1.2t 에 3.1m 의 키, 양쪽에 2m가 넘는 집게 손과 발칸포, 각종 미사일로 중무장한 괴물은 그리 간단 제압되지 않았다.
"이 자식들 가까이 서 보니까 장난이 아닌데."
보드가 본 블레이드로 정면을 찍고 들어오는 레피탄을 집게 손으로 잡아 내던지며 말했다.
"침착해라. 어차피 적들은 우리의 장갑을 뚫을 수 없다. 그럼 이미 게임은 끝난 거야. 발칸포를 이용해서 단숨에 없에 버려."
칼을 말을 들은 보드가 글러브의 중지를 가볍게 오그리자 M3000의 양어깨에 장착된 발칸포가 회전하며 불을 뿜는다.
레피탄들은 갑작스런 괴물의 마법에 당황한다. 그 마법의 불꽃은 동료들의 몸을 뚫고 나가 형체도 알아 볼 수 없도록 참혹하게 말들어 버렸다. 순간 움츠렸던 레피탄들이 다시 괴물의 등을 향해 뛰어든다. 무려 4m 가까이 솟구친 레피탄 3마리가 괴물의 등에 매달린다. 흔들리는 등 뒤 에서 미친 듯이 괴물의 몸통에 본 블레이드를 휘둘러 됐다.
뒤가 소란스러운 것을 눈치 첸 보드는 속력을 올리며 마을의 벙걸로를 향해 내달린다. 그는 생각할 것도 없이 그 자그마한 건물을 뚫고 들어갔다. 레피탄들의 살림살이와 가구, 벽돌과 회 가루가 나부낀다. 이번엔 좀더 큰 벙걸로로 뛰어든다. 벙걸로를 두 쪽으로 나뉘며 반대방향으로 튀어나온 M3000은 갑작스럽게 후진하여 또 다른 벙걸로를 박살내었다. 등뒤의 소란은 어느새 사라졌다.
광장 안의 레피탄들이 처리되었음을 느낀 칼이 M3000의 선두를 고딕 풍이 흐르는 사원에 맞춘다. 일말의 갈등이 그의 마음속에 울렁이다 그의 군인 의식에 의해 사라진다.
'난 군인이다. 군인은 명령에 충실하는 것.'
글러브의 엄지가 접히자 M3000의 등에서 불이 일어나며 미사일이 춤을 추듯이 날아가 사원을 제 더미로 만들었다. 무너진 사원과 그 사이에 흰옷을 입은 성난 레피탄들이 나타난다. 칼이 다시 가볍게 중지를 움직이자 레피탄들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그 싸늘한 장면을 쳐다보며 가히 좋지 않은 기분이라 칼은 생각했다.
보드의 폭주는 계속되었다. 닥치는 대로 박살내고 파괴했다. 그래도 레피탄들은 포기를 모르고 도전해온다.
"이거나 먹어라!"
발칸포가 움직이고 레피탄들이 쓰러졌다. 보드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M3000의 힘이 자신의 것인 양 이 어처구니없이 약하고 미개한 파충류들을 간단히 말살시키며 인간의 월등함에 가슴이 저리도록 뿌듯함을 느낀다. 종족의 힘에 차이는 바로 이것이다. 이것이 지구를 지배했고 다시 할 능력을 가진 자들의 힘이다. 보아라! 도마뱀들아! 느껴라! 미개한 족속들아!
그의 앞에 다시 한 무리의 도마뱀이 나타났다. 중지를 가볍게 움직였지만 도마뱀들은 아직도 살아 대들고 있다.
'발칸포가 다 됐군'
이라 생각하며 가소로운 마음에 미사일을 사용한다. 이때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뒤편에 있던 파충류 하나가 같은 순간에 본 블레이드를 발사관에 찔러 넣었던 것이다. '쿵' 하는 둔탁한 음과 연기가 지나가며 등가가 뜨거워진다. 보드는 필사적으로 비상탈출 레버를 눌러 앞으로 튕겨 나갔다. 화상을 입은 보드가 땅에 등을 문지르며 요동친다. M3000기는 삽시간에 불로 뒤덮였다.
레피탄들의 눈이 휘둥그래진다. 괴물의 몸에서 또 다른 신이 튀어 나왔기 때문이다. 신기함도 잠시 레피탄들의 분노가 아픔에 허우적거리고 있는 연약한 신에 고정된다. 단순한 진리가 그들의 분노를 합당화 시킨다. 적은 반드시 죽여야 한다. 그 것이 신일 지라도.
화상의 아픔을 참으며 몸을 일으킨 보드는 앞의 상황에 퍼득 정신이 든다. 자신은 식탁에 올려진 고기 덩어리였다. 월등하게 우수한 종족의 자부심은 땅에 떨어졌다. 발목에서 권총을 뽑아 적을 겨눈다. 자신감은 자부심과 함께 없어져 자신의 생존 여부에 확신이 없다. 사라질 지도 모른다. 자신의 손에 없어 졌던 그들처럼. 레피탄 한 마리가 몸을 날린다. 끝이다. 마지막에 눈을 감지 않겠다는 강인한 의지가 담긴 행위 안에 날아오르던 적이 낙엽처럼 나부끼다 떨어져 내리는 것이 비춰진다.
'뭐지?'
그의 돌려진 고개 속으로 M3000의 모습이 들어왔다.
'살아 군아.'
그는 한동안 멍하니 자신의 구세주를 처다 보았다.
"임마, 멍청하게 뭐하고 있어. 곳 AV가 도착한다. 우린 철수한다고."
론의 귀에 따가운 칼의 목소리가 천사처럼 아름답게 들려왔다.
탈옥(Lock Out)
칼과 보드의 후미에서 마을 변두리로 방향을 전환한 픽의 M3000기는 일행들의 바이오 팔찌에서 내뿜는 착 신호를 목표 삼아 분사기의 강약을 조절했다. 하지만 지상에 착륙했을 때는 목표물과 200m 거리 밖인 마을 한 복판이었다.
"제길. 여기가 어디야."
픽은 블루 스크린에 내비치는 신호를 찾아 M3000의 머리를 회전시킨다. 구출임무를 위해 요란스럽지 안도록 버섯처럼 무리 지어 있는 벙걸로를 피해 구비 구비 앞으로 나아갔다. 생각보다 복잡한 지형으로 위치한 벙걸로들은 마치 미로인양 목표점과의 거리를 좁히지 못하고 같은 위치를 겉돌게 했다. 자욱한 먼지 속 괴물의 질주에 레피탄과 프로그맨들이 의아한 표정으로 바라본다. 벙걸로 사이사이를 피해 움직이던 픽이 M3000을 멈추어 세웠다. 잠시 생각하던 픽이 나름대로의 복잡한 상황을 단순하게 처리한다. '에라 모르겠다.' M3000은 신호음이 나는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흙먼지와 잡기가 날린다. 로봇은 거침없이 나아갔고 벙걸로들은 마치 달걀처럼 가볍게 깨어졌으며 푸른 신호와의 거리는 순식간에 좁혀졌다.
"방금 폭발 소리 들렸지요. 그건 M3000의 MIRV 가 터지는 소리입니다. 광장은 이미 쑥밭이 되었을 겁니다. 그리고 지금쯤이면 우리의 구조대도..."
철창과 가까운 곳에서 귀를 기울이며 말하던 진이 갑자기 일어난 여진 같은 흔들림에 입을 다문다. 흔들림과 더불어 요란한 소리가 점점 강하게 전해져 온다.
"뭐지, 이 소리는?"
론이 제 빨리 철창 밖으로 얼굴을 내밀었다 더 빠른 동작으로 진을 부여잡고 급히 뒤편으로 피했다. 그 순간.
'쾅!'
감옥의 벽이 무너져 내리며 그 자리를 낮 익은 로봇의 모습으로 채웠다. 회색 먼지와 그 사이를 꾀 뚫고 들어오고 있는 빛으로 한 순간 정적을 맏이 한다. 그러나 로봇의 해치가 열리고 거구의 흑인이 반갑게 손을 흔들며 순간의 정적을 즐거운 만남으로 승화시킨다.
"어이. 캡틴."
론이 답하려는데 진의 비꼬는 목소리가 먼저 빗발친다.
"왜이리 늦은 거야."
흑인의 굵은 입술이 U 자 형으로 바뀌며 어깨를 으쓱 인다.
"길이 좀 막히더라고."
버려진 신
로베르토는 연기로 뒤덮인 거리를 천천히 거닌다. 그의 하얀 옷과 망토는 검은 그을음과 더러운 먼지로 초라하게 발해졌고 가슴엔 허탈과 분노, 서글픔과 나약함, 후회와 번민이 터질 듯이 강렬하게 아우성쳤다.
'난 그들에게 과연 무엇 이였던가. 아버지요 신이라 자부하던 내가, 신의 탈을 쓴 껍질에 지나지 않았단 말인가. 신이란 이름으로 영원한 삶을 누리려 했던, 친구와 일행을 버려가면서 까지 얻고자 했던 나의 계획은 결국 이런 결론을 위한 것이었단 말인가.'
우울하고 불안하며 복잡하게 얽힌 그의 시선에 전쟁터처럼 불타고있는 마을의 적나라한 모습이 오래된 흑백영화처럼 상영된다. 울렁거리던 그의 배속으로부터 뜨거운 것이 솟구쳐 올라왔다. 그는 쓰러지듯 그것을 토해냈다. 몇 번인가 구토를 마친 로베르토가 몸을 일으켜 세우며 마을의 대로로 향한다. 무언가에 홀린 사람처럼 계속해서 중얼거리면서.
"막아야해. 어떻게든 레피탄을 도와야만해. 난 신이니까. 무엇이든지 해야만 한다고..."
레피탄들은 광란에 휩싸였다. 자신들의 신에 대한 불의 의식이 로베르토보다 더욱 강한 신을 노하게 만들었고 그 신의 부하들이 자신들을 심판하러 하늘에서 내려온 것이라 생각했다. 이제 어떤 신을 믿어야 하는가. 누가 선이며 누가 악이란 말인가. 레피탄들은 심한 딜레마에 빠져 목적을 상실한 체 공포와 화염 속에 미쳐 날뛰었다.
아수라장이 되어 버린 중심지를 빠져 나와 중심 가에 들어섰을 때 저 멀리 마을의 정문으로 들어오고 있는 AV 탱크와 문가에 모여있는 인간 무리들이 보였다. 로베르토는 비틀거리는 걸음을 재촉한다.
"멈춰야 해. 이 광란을, 멈춰야만 해."
그가 탱크를 눈앞에 두었을 그때였다. 갑자기 튀어나온 레피탄 하나가 거친 숨을 내쉬며 그와 눈을 마주 친다. 로베르토의 피가 오그라들었다. '스 릉' 본 블레이드가 미끄러져 나오며 자신의 신을 향해 내리 그은다. 로베르토의 눈앞에 피가 튀면서 뒤로 넘어졌다. 순간 숨이 막히며 답답하게 가슴이 압박되어 온다. 피는 분명 흐르고 있지만 아프지 않다 다만 무겁다. 거북함을 느낀 로베르토가 몸을 비틀어 움직인다. 그때서야 그는 자신 위에 엎드려 있는 레피탄의 존재를 감지했다. 그 레피탄의 등에 기다란 상처가 나있고 피가 흘러나오고 있다. 로베르토는 정신을 차리고 몸을 빼낸다. 그의 앞쪽엔 자신을 노리던 레피탄이 등에 커다란 구멍이 패인 체로 뒤집어져 있고 그 뒤로 소총을 들고 있는 보드와 한때 동료였던 파이오니아호의 일행들이 다가오고 있다. 로베르토가 자신을 감싸고 죽은 레피탄의 얼굴을 들어올린다. 란 이였다.
"으 아~~~ !!"
그는 란의 얼굴을 끌어 않고 자신의 목 바친 감정을 하늘을 향해 폭발시킨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론이 조용히 말했다.
"로베르토, 그는 이미 죽었소. 이제 모두 끝난 거요. 우리와 함께 돌아갑시다. 일단 세이비어들에게로 돌아가서 또 다른 방법을 찾아 다시 돌아옵시다."
론이 내민 손을 무시한 체 로베르토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사납게 말한다.
"실패한 것은 당신들이야. 난 거의 성공했었다고. 이곳엔 아직도 많은 레피탄들이 살고 있어. 끝났다고? 우 끼지마 난 신이야. 지금 레피탄들이 당황하여 날뛰고 있지만 방금 나를 위해 목숨을 바친 레피탄을 보지 못했나? 난 누가 뭐라 해도 신이야. 신이라고!"
주위에 서있던 일행들은 하나둘 차가운 침묵의 발걸음을 AV로 향한다. 말없이 돌아가는 그들의 등을 바라보며 로베르토가 악쓴다.
"모두 꺼져 버려. 이 살인마들아. 난 아무도 필요 없어 난 신이니까. 알아들어? 난 신이란 말아야!!"
외로이 울려 퍼지는 신의 메아리를 뒤로한 체 로봇과 일행을 태운 AV 탱크는 높고 거대한 문을 통해 풀과 나무 그리고 어둠의 심연 속으로 사라져 들었고 그렇게 신은 버려졌다.
칸
전방에 내보냈던 리드라 정찰조가 돌아와 3km 앞에 겜마마을이 당도했으며 검은 연기가 치솟고 있음을 알렸다.
'연기?'
배일로 가려진 어두운 암시가 초조함이 되어 가다온다. 즉시 행렬의 속도를 올릴 것을 지시한 드칸의 눈에도 전방의 하늘에 실낱같은 연기가 피어오른다. 다급해진 칸이 외쳤다.
"마을이 지척에 있다. 우리는 곳 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서둘러라!"
신과 왕(God and King)
숨을 거둔 란의 머리를 끌어안은 체 망연 자실 넋을 읽고 있던 로베르토가 미세한 진동을 깨달은 건 AV 탱크가 떠나고 밥 한끼 먹을 정도의 시간이 지체된 후였다. 곳 마을 후문 어귀에 자욱한 흙먼지가 피어오르며 진동 또한 거세 진다. 로베르토는 꼼짝 않고 그 변화를 주시한다. 이윽고 화살표 대형을 갖춘 5마리의 리드라 기병들이 맞은편 대로에 나타났다. 그들은 대형에 맞추어 신속하게 움직였고 리드라에 올라탄 레피탄 기수들은 로베르토 앞 5m 지점에서 고삐를 세워 정렬시킨다. 그들 뒤로 두 마리의 지금 까지 보아 왔던 것들과는 비교 할 수 없는 크기의 다이노 크록이 나란히 걸어 들어 왔고 그 거대한 악어들과 이어진 끈을 통해 움직여지고 있는 황금으로 치장된 화려한 전차의 모습이 보였다. 로베르토는 그 엄청난 크기의 다이노 크록과 그 뒤의 악어들 그리고 헤아릴 수 없을 만큼의 레피탄과 리드라, 프로그맨들에게서 눈을 돌려 황금전차의 소유자에게로 고정된다. 그 회색 레피탄에게선 보통 레피탄들과는 다른 강한 존재 감이 감돌고 있다. 로베르토의 직감은 마이다스의 매뉴얼, 그 어느 페이진 가에 쓰여있던 한 단어와 극적으로 연결된다.
'레피탄의 왕, 칸이다.'
병사 중에 한 명이 드칸에게 달려와 귀에다 데고 그 동안의 경위를 짧게 설명했다. 괴물의 출현과 초토화된 마을, 거대한 운송 기구에 타고 사라져 버린 다른 신들, 그리고 눈앞에 있는 신중의 신. 손을 들어 설명을 중단시킨 드칸이 고개를 움직여 마을을 돌아보았다. 화염과 재 그리고 죽음으로 얼룩진 마을, 차가운 분노가 그의 시선을 사로잡고 결국 신중의 신이라는 것에 맞추어 진다.
드칸은 전차에서 내려 버려진 신 앞에 섰다. 신 역시 서서히 일어나며 칸의 눈을 바라본다. 침묵, 그것이 왕과 신의 사이를 조심스레 비집고 지나간다. 이윽고 신이 입을 열었다.
"이봐. 반갑군 그래. 난 겜마와 같은 너희들의 신이다. 나를 맞으러 온 건가? 이렇게 많은 무리를 이끌고, 그렇군 발캉, 란에게서 들은 적이 있어. 그곳에서 온 거지? 나를 수도인 발캉으로 모셔가기 위해 그런 거지? 모든 레피탄을 대신해서 네가 나를 모시러 온 거지? 그런..."
흥분한 로베르토의 말허리를 드칸의 본 블레이드가 꽤 뚫듯 잘라 버린다. 너무도 빠른 나머지 로베르토는 자신의 말이 끈긴지 조차 알지 못했다. 신의 육체가 쓰러지고 머리가 발 밑에 나뒹군다. 신의 죽음을 확인한 칸은 죽은 신의 머리를 블레이드에 꽂아 하늘로 향했다.
"보아라! 나의 형제들이여. 이것이 우리를 혼돈과 악의 구렁텅이로 유혹하려 했던 악마의 마지막 모습이다. 그들은 신의 탈을 쓴 악마에 지나지 안는다. 그들의 참혹함을 보아라. 느껴라. 그리고 분노하라. 그들의 손에 죽어간 우리들의 핏줄에 동정하라.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복수의 칼날을 그들의 심장을 향해 들어올리자. 싸우자! 악마의 일당이 모두 사라질 때까지. 그들은 곳 깨달을 것이다. 우리를 건드렸던 그들의 앞길엔 오직 죽음뿐이라는 것을. 적은 반드시 죽인다. 그들이 악마 아니 신이라 하여도. 가자! 가서 이 대지를 악마와 신의 피로 물들이자! 드르르르라!!"
어마 어마한 레피탄들의 광포가 대지를 타고 멀리 멀리까지 퍼져 나갔고 목 없는 주검은 싸늘히 식어 갔다. 신은 죽었다.
뷰비츄랩
저물어 가는 황혼 속에 괴성의 울림이 탱크 안 까지 파고든다.
"뭐. 뭐지?"
마이클이 잔뜩 겁먹은 얼굴로 주위를 돌아보았다.
"이건 레피탄의 울음소리."
진의 짤막한 답변에 마이클이 더욱 당황한다.
"예?"
"한 두 마리가 아니야. 적어도 1000 마리 이상이 네는 소리 같은데."
"1000 마리?"
일동이 동시에 내질렀다.
"분명해요. 마을에서 5km 정도 멀어졌고 우리의 현 위치가 계곡이므로 소리가 울린다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숲을 통해 이 정도의 음을 전파하자면 1000마리 이상 아님 그이상의 숫자가 외쳐야만 해요."
진의 확신에 스와르를 제외한 모두가 지극히 놀란 얼굴로 경직되었고 론은 마을에서부터 고민과 생각이 뒤섞여 보이는 심각한 침묵 속에 잠겨있는 스와르에게 자문한다.
"스와르씨?"
침묵에 심취해있던 스와르의 정신이 퍼득 깨어난다.
"아, 죄송합니다. 앞으로 우리 팀의 향방에 대해 모색 중이였습니다. 세이비어들에게 돌아간 후 어떤 방법으로 레피탄과의 교류를 다시 진행시켜야 할지가 정말 걱정이군요.
중년의 고민에서 론은 야릇한 슬픔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중년은 강철같은 냉정함을 되찾았다.
"괴음은 저도 들었습니다. 진 대령의 말처럼 나무로 가득한 밀림을 통해 소리가 전달되려면 아무리 레피탄이라 해도 몇백의 숫자로는 힘든 일입니다. 개다가 우리가 두꺼운 장갑의 탱크 안에서 저 정도의 진동음을 들으려면 적어도 2000명 이상이 하늘을 향해 울부짖지 않으면 힘들다는 결론이죠."
"2000!"
다시 한번 일행이 경악한다.
"도대체 어디서 어떻게 나타났다는 겁니까?"
마이클이 허둥대며 대상 없는 질문을 내뱉었다.
"침착해요. 겜마성지만이 유일한 마을이 아니라는 건 다들 알고 있잖아요. 같은 종족이 위험에 처하면 구하거나 도움을 주는 게 당연한 일, 문제는 숫자입니다. 2000마리 이상이면 아무리 AV 탱크와 M3000이 있다해도 버티기가 버거울 겁니다. 만약 그들이 우리를 추격한다면..."
진이 말끝을 흐리자 분위기가 더욱 고조된다. 이때 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절망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이제 그들과의 관계는 돌이킬 수 없게 됐군요. 우리 때문에 인류는 레피탄과 숙적이 되어 버린 거예요. 우리 때문에."
"너무 자책하지 말아, 리나. 우리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잖아."
론이 어두운 눈으로 리나와 그녀를 위로하는 라밍을 바라보다 어렵게 입을 연다.
"우선 레피탄과의 문제는 세이비어들에게 돌아가서 생각해 보기로 합시다. 어떻게든 다시 교류할 수 있는 방법이 있을 겁니다."
"캡틴. 우리 그냥 세이비어들의 마더쉽에서 머물러 살면 안될까요? 분명 세이비어들은 관여치 않을 거예요. 잠들어 있는 사람들을 모두 깨우고 우주에서 새로운 출발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더 이상 레피탄이나 인간이 서로 다툴 일도 없어지잖아요. 그렇게 하면 안될까요?"
리나의 소녀 같은 하지만 아픔이 담긴 생각에 론이 강한 어조로 반발한다.
"리나. 그건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누가 뭐라 해도 인간이 살아갈 곳은 지구 하나 뿐입니다.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우리는 우리의 집인 지구로 돌아가야 합니다. 물론 초기에는 어려움이 많겠지만 결코 그렇게 쉽게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우리의 선택이 인류의 선택이 될 수 있는 만큼 신중히 레피탄과의 관계를 바꾸어가고 그들을 알고 이해하며 그들이 우리를 받아 드리는 그 날을 위한 해답을 찾는 것, 그 것이 우리의 사명, 어쩌면 세이비어들이 우리를 이곳에 보낸 진짜 이유인지도 모르는 겁니다."
론은 잠시 말을 멈추고 조용히 자신의 말을 경청하고 있는 멤버들의 얼굴을 둘러본 뒤 계속한다.
"아무쪼록 이번 일은 캡틴으로서 멤버들을 단속하지 못한 저의 불찰이 큽니다. 전적인 잘못은 제게 있으니 자책 같은 건 말아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인류의 미래보다는 우리의 생존 여부입니다. 어떻게든 살아 돌아가야 임무도 완수할 수 있을 것 아닙니까. 진 대령의 말씀처럼 레피탄들이 추격을 시작했다면 한시가 급해 집니다. 파이오니아 호로 복귀할 때까지는 그 점만을 유의해 주십시오. 그리고 그때까지는 군사분야 담당인 진 대령에게 캡틴의 직위를 위임하겠습니다. 진 대령의 말에 협조 부탁합니다. 진."
갑작스런 직위 상승에 순간 어리둥절해한 표정을 보인 진이 정신을 차리고 긴급한 어조로 말한다.
"좋습니다. 그럼 최대한 신속하고 안전하게 파이오니아로 복귀할 수 있도록 협조바랍니다. 보드! 탱크를 새워라."
탱크가 멈추었고 이번엔 일행들이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 모습을 보며 진이 재빨리 말했다.
"우선 레피탄들이 우리를 추격한다면 이 계곡을 따라 이동할 겁니다. 현 위치는 계곡의 중앙, 폭탄을 설치한다면 가장 효과적으로 적을 격멸 할 수 있는 지형입니다. 자 그럼. 보드는 부상을 당했으니 AV에 남고 칼과 픽은 지금 즉시 밖으로 나가 크래모아와 C4 폭탄을 계곡의 양 싸이드에 장착하되 C4는 약한 암벽을 골라 계곡을 무너트릴 수 있도록 하고 크래모아는 방향을 안쪽으로 하여 폭파시 그물 모양으로 중앙의 목표물을 덮칠 수 있도록 한다. 크래모아의 *무빙 딕택터(Moving Detector)는 8마리 이상으로 입력하고 커크와 마이클 그리고 론은 함께 나가 거들 수 있도록 합니다. 이상!" (* 움직임 감지장치 Moving Detector : 전방에 감지되는 열을 통해 사물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 수치가 입력된 숫자 이상이 될 때 폭탄이 자동 폭파되는 장치)
새로운 캡틴의 명이 떨어지자 팀원들은 서둘러 밖으로 뛰어 나갔고 진은 컴퓨터를 통해 탐사위성에서 마을 주변의 데이터를 전송 받기 시작한다. 남겨진 리나와 라밍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일행의 무사함을 기도했다. 해는 지고 어둠이 거세게 밀려오는 가운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만 갔다.
폭풍전야(暴風前夜)
밀물처럼 다가온 어둠은 작은 잔재 하나 남기지 않은 체 아침 햇살의 뜨거움에 녹아 고요히 사라졌다. 시간 개념이 느껴지지 않는 어두운 AV 안에도 아침이 스며들어와 간밤에 잠들었던 인간들을 하나둘 흔들어 깨우기 시작한다. 진이 커다란 하품을 만들며 기지개를 폈다. 여독과 부상당한 팔, 정원초과로 인해 잔득 움츠려진 뼈마디를 스트레칭 해주며 목에 힘을 준다.
"기상! 기상. 모두들 읽어나요. 6시30분입니다. 일어나요."
진은 눈을 비비며 잠에게서 도망쳐 나오고 있는 일행들을 확인하며 운전석의 칼에게로 다가갔다. 짧은 물음과 답이 이어진다.
"교대는 몇 시에 했지?
"픽에게서 06시에 교대했습니다."
"현 위치는?"
"계곡을 빠져 나온 후부터 나무들의 장애를 받았습니다. 마을로부터는 36km 지점. 돌아 나오느라 시간이 지체되긴 했지만, 곳 산을 벗어나게 됩니다."
"좋아, 하지만 아직 레피탄의 구역에서 완전히 벗어난 건 아니다. 강을 건너기 전까지는 절대 방심하지 말도록. 계속 수고."
"오케이 멤."
진이 일행으로 돌아왔을 때는 모두다 깨어나 잠자리를 정리하고 있었다. 마이클이 두꺼운 허리를 주무르며 입을 연다.
"간밤에 아무 일도 없이 지나가서 정말 다행입니다."
갑자기 이해 할 수 없다는 눈빛들이 자신에게 꽂히는걸 알고 마이클이 어쩔 줄 몰라한다. 그런 그를 커크가 거든다.
"아무 일도 없었다고요?"
"예?"
"어제 밤에 그 폭발소리를 듣지 못했다는 겁니까?"
"뭐라고요? 폭발소리?"
커크가 이마에 손을 언 진다.
"정말 듣지 못했다는 겁니까? 어지간히 둔한 사람. 어제 우리가 계곡에 설치했던 폭탄이 터지던 소리 말입니다."
마이클이 금시초문이란 얼굴로 서있자 론이 말한다.
"너무 피곤이 잠에 들어 그럴 수도 있었을 겁니다. 어젯밤 11시경에 폭발 소리가 들렸습니다. 아시다 시피 폭탄은 다수의 무리들에 움직임을 감지할 때 폭발이 일어납니다. 다시 말해 레피탄들의 추격이 기정 사실화되었다는 거지요."
마이클이 놀라려 하자 진이 바로 선수친다.
"자자. 이렇게 된 이상 서둘러 파이오니아 호로 향하는 수박에는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30분 정도 후면 강을 만나게 되고 아마도 강을 건넌 후에서야 한숨 돌릴 수 있을 겁니다."
진의 말을 통해 모두가 한아름의 안심의 향기를 머금으려 한 그때였다.
"진! 론! 빨리 와보세요."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진과 론이 조종석으로 향했고 칼은 심각한 표정으로 말없이 전방 모니터를 가리켰다. 모니터 안의 풍경은 두 사람을 놀라게 하고도 남는 그것들로 가득 메워져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