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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려타곤(懶驢 坤) 35-3
그러나 백초당으로 찾아간 왕질악이 보게 된 것은 백초당의 셋째 딸 방수련과 그녀를 범하려는 한 떼의 무뢰배가 싸우는 모습이었다. 백초당의 방씨 가족들이 모두 무공을 알고 있다는 것을 왕질악은 잘 알고 있었다. 그 중 가장 약한 방수련이었지만 한낮 시정잡배들이 무리를 지어 덤벼든다고 해서 어찌할 수 있는 여자가 아니라는 것 또한 그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지금 방수련을 공격하는 자들은 시정잡배라고 하기에는 약간 무리가 있었다. 그들은 어느 정도 무공을 간직하고 있는 흑도(黑道)의 인물들이었다.
"이놈들!"
무섭게 소리치면서 왕질악이 싸움판에 끼여들면서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던 싸움은 순식간에 끝이 나버렸다.
방수련은 자신의 피묻은 손과 죽어 있는 여섯 명의 시신과 그리고 자신의 옆에 서 있는 남자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자신을 도와준 사람이 집으로 자주 놀러와 소구의 사형이라는 양평과 비무(比武)를 벌이던 개방의 소방주 왕질악이라는 것을 알아보고 그녀는 겨우 안도할 수 있었다.
"혼자 남은 거니?"
왕질악의 질문에 방수련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기대에 찬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을 만난 것이 그녀를 너무나 기쁘게 하고 있었다.
"가족들과 어디서 만나기로 정해둔 곳은 있어?"
"광주의 불산---."
방수련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듣고 왕질악은 곤혹스러워졌다. 그녀가 말한 장소는 남쪽 끝에 있는 장소였다.
"그럼, 그곳으로 가야겠구나."
방수련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난감한 표정으로 왕질악을 바라보며 도움을 청했다.
"왕 오빠, 저 좀 도와줘요."
위험에 처한 여자를 모른 척 하는 것은 결코 의협(義俠)이 취할 행동은 아니었지만, 눈에 확 띠는 미녀인 방수련을 데리고 머나먼 남쪽 끝에 있는 불산까지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도와줄 생각을 한 왕질악이었다.
왕질악은 화려한 미모에 걸맞게 화려한 옷차림을 하고 있는 방수련의 모습을 살펴보았다.
"지금 그 차림은 너무 눈에 띠는군. 일단 남장을 하고---, 최대한 지저분한 모습으로 변장부터 해야겠다."
"네?"
"지금 그대로라면 둘이서 남쪽 끝에 있는 광주까지 가는 동안 조금전과 같은 일이 계속 벌어질 거야. 그러니 나와 같은 거지로 변장을 하라는 말이지. 청나라의 병사들이 모든 길목을 막기 전에 개봉을 탈출해야 하니---."
언제나 자신의 모습을 최대한 화려하게 치장하고 아름답게 보이는 일에 신경을 쓰던 방수련이었다. 왕질악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자신보고 거지로 변장하라니---.
방수련은 한 건물 안으로 들어가 하인들이 입던 바지를 찾아내어 치마에서 바지로 갈아입고 밖으로 나왔다. 건물 밖에서 그녀가 옷을 갈아입고 나오기를 기다리던 왕질악은 남장을 하고 밖으로 나온 방수련의 모습에 한숨부터 흘러나왔다.
"뭐 하는 거야?! 귀걸이 떼어내고 얼굴에도 숯검정을 좀 칠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당할지 모르는데 좀 더러워지는 게 그렇게 싫어?!"
신경질적으로 왕질악은 소리치더니 직접 방수련을 거지로 만들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반시진 뒤 방수련은 왕질악의 손에 완벽한 거지의 모습으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찢어지고 온갖 때가 잔뜩 묻은 냄새나는 옷을 입고 머리카락도 지저분하게 풀어헤치고 흩어진 상태였다.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고 방수련은 울상을 지었지만, 그 모습이 왕질악은 무척 마음에 드는 모양이었다.
"흠, 이제 좀 거지 같이 보이는 군."
"질악 오빠, 너무해. 나 같이 아름다운 여자를 이 꼴로 만들다니---."
강제로 상거지 꼴을 하게 된 방수련은 울상을 지으면서 그렇게 말하고, 왕질악은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더 이상 개봉 제일의 미녀로 소문난 방수련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한 명의 거지만이 보일 뿐이었다.
"이제 준비가 끝났으니 어서 떠나자. 가족들이 모두 걱정하고 있을 거야."
"네."
방수련은 얌전히 대답했다. 어찌 되었건 개방의 소방주인 왕질악이 그녀를 불산까지 데려다 준다고 했으니 무사히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거라고 그녀는 확신했다.
광동의 성도인 광주에서 동쪽으로 십리쯤 떨어진 지역에 위치한 불산이라 불리는 곳에도 백초당이란 현판이 걸려 있는 건물이 있었고, 그 안으로 걸음을 옮기고 있는 소구는 내심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었다. 무공을 모르는 두 아내와 한 명의 서생을 데리고 이곳에 무사히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무사히 도착했다는 기쁨은 잠시뿐이었다. 하나의 건물에 가족들이 모두 모여 있고 침상 위에 누워 있는 아버지 방종대가 죽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까.
"소구야, 너도 무사히 도착했구나."
힘없는 목소리로 말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소구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형 양평이 있었다면 이렇게 아버지가 상처를 입고 죽어 가는 일이 벌어질리 없다는 생각에 소구는 모습이 보이지 않는 사형에 대해서 물었다.
"사형은 어디 갔어요?"
"오는 도중에 소림사가 청나라의 병사들에게 공격당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사부를 구하러 간다면서 헤어지게 되었다."
대답을 해준 것은 소구의 어머니 장봉화였다.
"도대체 어떻게 된 거죠?"
가족들이 모여 있는 방안을 둘러보면서 소구는 질문했다.
"소문을 듣고 네 사형이라는 양평이 떠난 뒤에 청나라의 병사들이 들이닥쳤고, 그 다음에는 백초당의 재산을 노리는 무리가 우리를 공격하게 되었지."
묵묵히 아버지가 누워 있는 침상 옆에 서 있던 방종구가 간단히 대답했다.
"그 때, 눈 먼 화살에 내가 상처를 입었고 이 꼴이 된 것이지."
그 뒤를 이어 침상에 누워 있는 방종대가 입을 열었다. 소구는 죽어가면서도 담담하게 말하는 아버지 방종대의 얼굴을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그때, 수련이를 잃어버리게 되었는데, 오는 도중에 혹시 만나지 못했느냐?"
침상에 누워 있는 방종대는 개봉에서 가장 늦게 출발하게 된 막내아들을 향해 물어보았다. 소구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 막내의 모습을 보면서 방종대는 탄식을 터트렸다. 이런 전란의 시기에 홀로 떨어진 딸이 어떤 일을 당할지는 안 봐도 알 수 있는 일이었다. 방안에 모여 있는 모두의 얼굴 위로 어두운 그림자가 짙게 깔렸다.
침상에 누워 있는 방종대는 자식들을 하나 하나 살펴보기 시작했다. 이제 다시는 못 볼 얼굴들이었다.
"모두 이리 가까이 와 보거라."
침상의 곁으로 모두가 가까이 다가오자 방종대는 죽기 전에 모두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을 해야했다.
"늘 실수하고 실패하면서 모순되게 사는 것이 인간의 삶이다. 그렇다고 늘 절망만 한다면 슬퍼서 세상을 살 수가 있겠니? 그래도 가끔은 웃을 수 있는 일도 생기는 것을--. 살면서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도록 노력해야 조금이라도 더 웃는 일이 많아진다는 것을 모두들 잊지 말거라."
자식들과 며느리들 그리고 사위의 얼굴을 하나하나 눈에 새기려는 듯 자세히 살펴보면서 말하고 있는 방종대였지만, 말을 하고 있는 사이 점점 더 눈이 흐려지고 있었다.
침상 옆에 모여 있는 가족들은 숨소리 하나 내지 않고 아버지의 다음 말을 기다렸지만, 그들의 아버지는 깊이 잠든 상태였다. 아직 숨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한 아버지의 모습을 지켜보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수련이는 무사할까?'
잠들어 있는 아버지 방종대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장남인 방종구가 소구를 돌아보며 말을 걸었다.
"몰라, 누나의 운이 좋다면 무사히 이곳에 올 수도 있겠지만---. "
장대비가 쏟아지고 있는 밤길을 왕질악과 함께 걷고 있는 방수련은 숨이 목구멍까지 치밀어 올라왔고, 다리는 천근처럼 무거워지고 있었다. 춥고 배고프고 지친 상태의 방수련은 도저히 걸음을 옮길 상태가 아니었다. 태어나서 지금까지 그녀는 단 한번도 지금 같은 고생을 해 본 적이 없는 여자였다. 왕질악은 원망스러운 듯 폭우를 내리는 밤하늘을 올려보았다. 그렇지 않아도 힘든 길을 이 비가 더욱 힘들게 하고 있었다.
"수련아, 조금만 더 가면 비를 피해서 쉴 수 있는 동굴이 나와. 그러니까 힘을 내."
입술이 새파랗게 변한 상태에서 방수련은 간신히 고개만을 끄덕였지만 얼마 걷지 못하고 그대로 기절해서 땅으로 쓰러져 가고, 왕질악은 재빨리 그녀를 안아들었다.
사방이 허허벌판인 곳에서 쏟아지는 폭우를 피할 장소를 찾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왕질악은 이대로 있으면 둘 다 위험해지리라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경공을 전개해 비를 피할 장소를 찾아 헤맨 끝에 다 쓰러져 가는 빈집을 발견한 후에야 왕질악은 안도할 수 있었다. 적어도 비를 피할 수는 있게 된 것이다. 그러나 아직 그가 해야 할 일은 남아 있었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뜨겁게 변하고 연신 춥다는 소리를 내뱉는 방수련이었다. 왕질악이 할 수 있는 일은 밤새 그녀를 껴안고 따뜻하게 해주는 일뿐이었다.
'짹 짹'
하는 새들의 지저귐을 들으면서 눈을 뜨게 된 방수련은 바로 다음 순간 날카로운 고함을 터트렸다.
"꺄 아 악!"
벌거벗은 상태로 왕질악의 품에 안겨 있는 자신을 발견한 탓이었다. 그녀의 고함에 왕질악 역시 놀라 깨어났다.
방수련은 서럽게 울고, 왕질악은 난처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어쩔 수 없었어. 젖은 옷을 입고 있는 널 그대로 내버려두었다면, 넌 얼마 안 가서 죽게 될 상황이었어. 우리 사이에는 정말 아무 일도 없었어."
왕질악의 입에서 그런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지만, 방수련은 서럽게 울기만 할뿐이었다.
밤새 내린 비는 그치고 따가운 햇살이 내리쬐는 길을 걷고 있는 두 사람은 서로에게 아무 말도 못하고 있었다.
'숭산에서 아빠가 거지에게 시집 보낸다고 하더니--, 흑흑 이제 난 어쩌면 좋아? 정말 거지에게 시집가야 되잖아?!'
걸음을 옮기고 있는 방수련은 그렇게 속으로 계속 흐느끼고 있었고, 왕질악 역시 속으로 난감해하고 있었다.
'이런 제기랄, 거지 주제에 아내를 거느리고 살아도 되는 거야? 살리는 일만 생각했지, 그 뒤의 일은 생각도 안하고 있었으니--. 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협개(俠 ) 사부와 같은 삶을 살리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알몸으로 껴안고 하룻밤을 보냈는데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을 누가 믿어줄 것이며, 이 상태에서 내가 수련이를 책임지지 않는다고 하면 날 잡아 죽이려 들 인간이----.'
방수련과 관계된 인간들을 하나하나 떠올리면서 왕질악은 갑자기 온 몸에 소름이 돋아 올랐다. 백초당과 관계된 인간 들 중 만만한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의형인 칠호 백철군과 형수 방화련이 가만 안 있을 것이고, 전설로 전해지는 혼천문의 무공을 이어 받았다는 막내 소구도 가만있지 않을 게 분명했다. 왕질악의 무공이 약한 것은 아니었지만 무공으로는 절대로 상대할 수 없는 인간이 둘이나 있었고, 거기에 소구의 사형인 금룡 양평도 있었다. 그리고 가장 무서운 방종구가 있었다. 무공을 익히지 않았지만 방씨 형제들 중 가장 무서운 사람은 방종구였다.
'종구 형이 이 일을 알고 있다면 날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만들어 놓을 지도 몰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왕질악은 갑자기 몸을 부르르 떨더니 몸을 멈춰 세웠다. 갑자기 발걸음을 멈춘 왕질악의 모습에 방수련 역시 몸을 멈추고 의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그래요?"
누이가 다리가 퉁퉁 부어서 고생하고 있다는 것을 알면 그를 잡아먹으려 들 인간들을 떠올리게 된 왕질악이었다. 어떻게든 아군을 하나라도 늘려야만 했다.
"업혀."
등을 내밀면서 왕질악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방수련이 계속 생각하던 일이었다. 발바닥에 물집이 잡히고 종아리는 부어 올라 걷기가 어려운 상태였지만, 자존심 때문에 지금까지 꾹 참고 걸음을 옮기던 그녀였다.
그녀는 대답도 하지 않고 냉큼 왕질악의 등에 올라탔다.
"경공을 전개해서 가면 조금은 빨리 그곳에 도착할 수 있을 거야."
그녀를 업은 상태로 왕질악은 앞을 바라보면서 말했고, 방수련은 말이 많다는 듯 톡 쏘아붙였다.
"빨리 가요!"
머쓱해진 왕질악은 입을 꾹 다물고 남쪽으로 몸을 날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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