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림칠현(竹林七賢),
글: 정계진(丁啓陣)
중국의 유구한 문인음주역사상, 위진(魏晋) 시대의 "죽림칠현"과 당나라 장안의 "음중팔선"은 가장 유명한 두 개의 음주그룹이다. 다만, 고증을 해보면, 이 두개의 그룹은 실제로 진정한 의미에서의 그룹은 아니었다. 그들은 모두 당시 혹은 후인들이 그들의 사상이나 기호가 비슷하다는 점에 착안하여, 그들을 한꺼번에 묶어서 그룹으로 만든 것이어서, 추인된 조직이라고 할 수 있다.
"죽림칠현"의 명칭은 <<삼국지. 위지>>(진, 진수), <<죽림칠현론>>(동진, 대규), <<위씨춘추>>, <<수경주>>(북위. 여도원), <<세설신어. 임탄편>>(남조송, 유의경)등의 문헌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들 문헌에 기록된 7명의 인물은 모두 동일하고, 이론이 없다. 그들은 : 계강(稽康, 223-263), 원적(阮籍, 210-263), 산도(山濤, 205-283), 완함(阮咸, 생몰년미상), 향수(向秀, 약227-272), 유령(劉伶, 약221-300), 왕융(王戎, 234-305)이다. 다만, "죽림칠현"의 명칭내력에 대한 설명은 약간씩 다르다. <<삼국지>>, <<위씨춘추>>, <<수경주>>등에서는 그저 "서로 어울리고 죽림에서 놀아서 칠현이라고 불렀다"라고만 했을 뿐, 술마셨다는 내용은 언급되어 있지 않다 <<세설신어>>는 그들이 술을 마셨다는 점을 강조했다: "7명은 자주 죽림의 아래에 모여서, 술을 질펀하게 마셨다. 그래서 세상사람들은 죽림칠현이라고 불렀다"
"죽림칠현"은 화가들이 즐겨 그리던 회화의 주제였다. 그리하여, 역대로 "죽림칠현"에 관한 회화작품은 무궁무진하게 많이 나왔다. "죽림칠현"에 대한 회화는 일찌기 동진, 남조에서 아주 유행하였다. 1960년에서 1968년까지 강소성 남경, 단양등지에서 발굴된 몇 개의 동진남조시대의 고묘(古墓)에서는 5개의 "죽림칠현과 영계기(榮啓期)" 벽화가 발견되었다. 영계기는 한(漢)나라때의 고사(高士, 고고한 선비)였다. 그가 어떻게 위진시대의 죽림칠현과 나란히 벽화에 그려지게 된 것일까? 주요한 이유는 그의 사적과 작품에서 추구하는 인물상이 비슷했기 때문이다. <<남사. 제본기. 폐제동혼후>>의 기록에 따르면 남제의 궁중에서도 칠현을 주제로 한 벽화가 있었다; 당나라때 장언원의 <<역대명화기>>의 기록에 의하면, 동진의 고개지, 대규, 사도석, 유송의 고경수, 진탐미, 종병, 남제의 모혜원등이 모두 <<죽림도>>, <<칠현도>>를 그린 적이 있다고 한다; 당송에서 원명에 이르기까지, 위감, 상찬, 지중원, 이공린, 석각, 소조, 전선, 조맹부, 유관도, 구영등의 유명한 화가들이 모두 이 주제로 그림을 그린 바 있다: 현대와 당대의 유명화가들도 이 주제로 그림을 그린 바 있다. 회화에서의 "죽림칠현"은 대부분 가는 대나무의 그윽한 숲을 배경으로 7명의 명사가 홀로 앉아서 술을 마시기도 하고, 거문고를 타기도 하고, 혹은 2,3명이 함께 앉아 바둑을 두기도 한다. 곁에는 동복(童僕)이 서 있고, 술주전자가 있다. 명사들의 퇴폐적이고 호방한 분위기와 행동거지가 모두 술취한 모습들이다.
이렇게 많은 문헌의 기재와 회화작품이 전해지고 있으므로, 많은 사람들은 "죽림칠현"이 확실히 존재했고, 조직적인 명사들의 음주그룹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학자들이 고증한 바에 의하면, 이러한 조직이 존재한 적은 없다.
증거는 다음과 같다: "칠현"이라는 이름이 나타난 것은 진나라중기이후인데, 그들이 살아있을 때가 아니다; 산양(山陽)의 옛집에는 원래 죽림이 없다(하계명의 <<죽림칠현연구>>). 진인각 선생은 아래와 같이 쓰고 있다: 죽림칠현은 모두 청담(淸談)의 명사들이다. 그들에게 칠현이라고 이름붙인 것은 <<논어>>의 "현자피세, 작자칠인(賢者避世, 作者七人)"의 말에서 유래한다. 이것은 동한 이래의 명사들이 숫자로 표방하는 전통때문이다. 예를 들어, 삼군(三君), 팔주(八廚), 팔급(八及)등이 그것이다. 나중에 불교의 승려들이 불교의 교리를 연구하는 기풍이 일어났는데, 소위 죽림이라는 것은 불교경전의 Venuvena(竹林精舍)에서 따왔을 것이고, 진정한 의미의 대나무숲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후에 칠현이라는 게임이 시작된 것이다. <<수경주>>에서 죽림의 고적을 고증하였다는 것은 순전히 견강부회이다. 그리고, 남경, 단양일대에서 발굴된 동진의 고묘벽화에서는 인물이 8명이고, 배경에도 죽림이 없다. 사람과 사람사이에는 나무가 있을 뿐이다.
후세인들이 칠현그룹을 하나의 조직으로 보는 것은 어떤 학자에 의하면, 주요한 원인이 아마도 칠현이 현학(玄學)을 주창했고, 노장(老莊, 노자와 장자)을 계승했으며, 여기에 세상사람들이 물들고, 도교가 유행하여 그들이 신격화된 것이며, 도교적인 의미를 지닌 종교우상으로 승화했다고 본다. 원래 이는 숭배의 필요에서 나타난 그림이었다.
"죽림칠현"과 비슷하게, 당나라 개원,천보연간에 장안에는 "음중팔선" 혹은 "취팔선(醉八仙)"이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이것도 다른 사람이 끌어모은 것으로 진정한 음주그룹은 아니다. 끌어모은 사람은 다름아닌 저명한 시인 두보이다.
두보는 <<음중팔선가>>라는 시를 지었는데, 거기에는 장안에서 활동하는 8명의 술꾼들의 모습을 아주 생동감있게 묘사했다.
하지장(賀知章) 지장기마사승선(知章騎馬似乘船), 안화낙정수저면(眼花落井水低眠) 하지장은 말타는 것이 배타는 것같다. 눈앞이 어지러워 우물에 빠져도 물속에서 그냥 잔다. (하지장은 아마도 술에 취해서 말을 타고 가다가 우물에 빠져서도 그냥 잔 적이 있나보다. 우물속에 말타고 빠져 있으니, 타고 있는게 말인지, 배인지...)
여양왕 이진(汝陽王 李璡) 여양삼두시조천(汝陽三斗始朝天) 도봉국거구류연(道逢麴車口流涎) 한부이봉향주천(恨不移封向酒泉) 여양왕 이진은 세 말은 마셔야 조정으로 나가고 길가다가 누룩수레만 만나도 입가에 침을 흘린다. 여양왕에서 주천(酒泉)왕으로 옮겨 봉해지지 않은 것이 평생의 한이다. (술에 취해야만 조정에 나간다는 말은 술취하지 않은 상태로 조정에 나간 적이 없다는 뜻이리라. 서말이나 마시고 조정으로 가다가도 누룩냄새만 맡으면 잎에서 침이 질질 흐르는 모습을 상상해보라. 주천은 좋은 술이 나는 곳인데, 스스로 여양의 왕이 아니라 주천의 왕으로 봉해지지 못한 것이 천추의 한이라고 생각한다니..정말 술꾼이다)
좌상 이적지(左相 李適之) 좌상일흥비만전(左相日興費萬錢) 음여장경흡백천(飮如長鯨吸百川) 함배낙성칭피현(銜杯樂聖稱避賢) 좌상 이적지는 매일 노느라고 만전을 흥청망청 써버리고 고래가 강물을 삼키듯 술을 마신다. 청주는 입에 대지만 탁주는 피한다. (좌상은 재상이니 자연히 돈이 많다. 씀씀이도 보통이 아니다. 고급청주만 입에 댈 뿐, 막걸리는 거들떠 보지 않는다. 예전에 위무제 조조가 금주령을 내리자, 애주가들이 은어로 청주(淸酒)를 성인(聖人), 탁주(濁酒)를 현인(賢人)에 비유한데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최종지(崔宗之) 종지소쇄미소년(宗之瀟灑美少年) 거상백안망청천(擧觴白眼望靑天) 교여옥수임풍전(皎如玉樹臨風前) 최종지는 말쑥한 미소년인데 술잔을 들고 푸른 하늘을 치켜보는 모습은 마치 바람 앞의 옥으로 된 나무처럼 멋있다. (옥수임풍은 미남을 표현하는 전형적인 문구이다. 백안과 청안은 눈을 정면으로 보면 검은 자위가 나타나니 청안이고, 백안은 흘겨보면 흰자위가 많이 나타나니 백안이다. 백안시한다는 말도 여기서 나왔다. 여기서는 하늘을 쳐다보는 것이니 흘겨보는 것보다는 눈을 치켜뜨고 하늘을 올려다보는 바람에 흰자위가 많이 드러난 눈을 말하는 것일 것이다)
소진(蘇晋) 소진장재수불전(蘇晋長齋繡佛前) 취중왕왕애도선(醉中往往愛逃禪) 소진은 오랫동안 채식하며 부처 앞에서 정진하다가도 술에 취하면 왕왕 참선을 빼먹기도 한다. (술앞에는 불제자도 없다)
이백(李白) 이백일두시백편(李白一斗詩百篇) 장안시상주가면(長安市上酒家眠) 천자호래불상선(天子呼來不上船) 자칭신시주중선(自稱臣是酒中仙) 이백은 술한말을 마시면 시백편을 읊는다 장안 저자거리의 술집은 그가 잠자는 곳 천자가 오라고 불러도 배에 오르지 않고 스스로 신은 술마시는 신선이라고 한다네. (이 구절은 아마도 가장 유명한 구절일 것이다. 이백을 언급하면 항상 나오는 문구로 그를 잘 표현한 것으로 얘기되는 구절이다. 신선은 천자보다 등급이 높으니..천자가 불러도 가지 않을 수 있는 것.)
장욱(張旭) 장욱삼배초성전(張旭三杯草聖傳) 탈모노정왕공전(脫帽露頂王公前) 휘호낙지여운연(揮毫落地如雲煙) 장욱은 술 석잔은 마셔야 초서를 제대로 휘갈기는데 왕공귀족앞에서 모자도 벗어던지고 맨머리로 나서서 붓을 휘갈겨 종이위에 초서를 쓰는데 구름인지 연기인지... (장욱은 초서의 성인으로 불리는 인물이다)
초수(樵遂) 초수오두방탁연(樵遂五斗方卓然) 고담웅변경사연(高談雄辯驚四筵) 초수는 술 다섯 말은 마셔야 청산유수가 되는데. 고담준론에 사람들을 깜짝 놀라버릴 정도이다. (초수는 음중팔선중 유일하게 기록이 없는 인물이다. 그는 달변가였다고 한다)
너무나 잘 쓴 시이다. 그저 한 두마디로 한 인물을 이렇게 잘 개괄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8명의 술마시기를 즐기는 사람에 대하여 두보는 생동감 넘치게 묘사하여, 이 시를 좋아하는 사람이 적지 않다.
나중에, 한 역사가가 이 시의 내용을 진짜로 믿어서, "음중팔선"의 이야기를 기록하였다. 예를 들어, <<신당서. 이백전>>에는 이백, 하지장, 이적지, 여양왕 이진, 최종지, 소진, 장욱, 초수를 "주중팔선인"이라고 썼다. 그리고 적지 않은 화가들은 '음중팔선'도를 그려서 이들을 하나의 화폭에 묶었다. 마치 명사음주협회와 같았다.
사실, 이들 8명중에서 소진은 개원22년(734년)에 죽었고, 하지장, 이백은 천보3년(744년)에 장안을 떠났다. 하지장은 천보3년에 죽고, 이적지는 천보5년에 죽었다. 여양왕은 천보9년에 죽는다. 두보가 장안에 도착한 것은 천보5년(736년)이었다. 그가 장안에 오자마자 이 시를 썼다고 하더라도, 이들은 이미 흩어진 다음이었고, 동시대에 장안에서 활동하지 않았었다. 사실, 두보의 시는 그들이 술취한 후의 행태만 묘사했지, 그들이 함께 술을 마셨다고 쓴 것은 아니다. 더구나 이들이 술친구라고 말하지도 않았다.
취팔선이라는 명칭은 아마도 두보가 처음 만들어낸 것은 아닐 것이다. 범전정이 이백의 묘지명을 쓸 때, "주중팔선"이라는 말을 쓴 적이 있다. 그러나, 그에 속하는 사람은 약간 다르다. "장안에 있을 때, 당시 사람들은 공(이백)과 하감(賀監), 여양왕, 최종지, 배주남(裵周南)등 8명을 주중팔선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여기에는 배주남이 드러있다. 합리적으로 추정한다면, 장안의 취팔선에 대하여 당시에도 이미 여러 버전의 전설이 전해지고 있었고, 두보는 그중 하나의 전설에 기하여 시가를 썼다. 물론, 그 중에는 두보의 친구인 이백도 들어간다.
두보가 쓴 이 시는 그의 다른 시들과는 풍모가 전혀 다르다. 이는 아마도 그가 처음 장안에 도착했을 때 마음이 아주 가벼웠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일지도 모른다. 이 시의 문체에 대하여는 역대로 세 가지 견해가 있다. 첫째는 두보가 처음을 만들어낸 것이라는 것이고, 둘째는 백량체에서 유래한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한나라말기의 청의(淸議)중에서 "장부인물(臧否人物)"의 요언에 쓴 것에서 유래한다는 것이다.
문학예술작품은 심미가치가 첫번째이고, 역사적인 진실성은 두번째이다. 그러므로, "죽림칠현" "음중팔선"이 비록 실제로 존재했던 그룹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이들 인물들을 좋아하고, 관련문학작품을 감상하는데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