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자병법 오기 지음 스마트비즈니스 / 2007년 8월 / 198쪽 / 9,800원 ▣ 저자 오기 전국시대 초기 위나라 사람이다 부농의 아들로 태어나서 공자의 제자 증삼의 아들 증신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처음에는 노나라 장수로서 제나라와 싸워 대승했으나, 곧 망명하여 위나라 문후 왕에게 중용되었다. 진나라와의 접경 지역인 서하의 태수로서 많은 공을 세웠지만, 무후 왕 때 모함을 받아 다시 초나라로 망명했다. 위나라 시절에 저술한 오자병법으로 손자병법의 손무와 함께 최고의 전략가로 칭송받았다. 실전에서 76번을 싸워 무패의 기록을 남겼다. 법가 계열의 정치가로 세습귀족의 특권을 박탈하는 등 갖가지 개혁정치를 펴다가 파란만장한 생애를 마쳤다. ▣ 역자 이영직 서울대학교 문리대학을 졸업한 뒤 시사영어사 편집국을 거쳐 LG 화학 마케팅 팀장, 한국갤럽 기획조사실장을 지냈다. 현재 브랜디아 컨설팅 대표로 있으면서 경영컨설턴트, 시장조사전문가로 활동하고 있다. 지은 책으로는 『펄떡이는 길거리 경제학』, 『시장을 지배하는 101가지 법칙』, 『한국의 소호아이템 201가지』, 『소호족을 위한 실전 마케팅』, 『강자와 싸워 이기는 란체스터 경영전략』, 『단순한 원칙 하나가 당신의 미래를 바꾼다』 등이 있다. ▣ Short Summary 이 책은 앞의 서장을 제외하고는 문후(文侯)가 아닌 그의 아들 무후(武侯)와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오기는 선왕인 문후의 은혜에 보답코자 충심으로 무후를 모시며 훌륭한 제왕으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오기를 시기하는 간신들의 모략에 의해 나중에는 위(魏)나라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선왕인 문후가 이룬 성과가 훌륭했고 충직한 신하들이 아직 남아 있어 왕권을 유지하는 데는 큰 문제는 없었으나, 오기를 떠나게 함으로써 이웃한 진나라의 동진(東進)을 재촉하는 결과를 낳았다. 오기의 성공이 거듭되고 도왕(悼王)의 총애가 두터워질수록 왕족과 귀족들의 질투는 깊어갔다. 오기의 운도 기울었는지 그를 신임해주던 도왕이 갑자기 붕어하고 말았다. 태자는 마침 변방으로 출정 중이라 왕의 시신을 지킬 사람은 오기밖에 없었다. 그는 속히 태자에게 왕의 부음을 전하게 했다. 하지만 어느새 칼과 창을 든 귀족들이 들이닥쳤다. 오기는 왕의 시신이 있는 빈전(殯殿)으로 몸을 피했다. 귀족들은 오기를 포위하긴 했으나 누구도 선뜻 나서는 자가 없었다. 천하를 호령했던 무예와 병법의 대가를 상대하자니 겁이 났던 것이다. 결국 그들은 멀리서 화살을 쏘기 시작했다. 이에 오기는 도왕의 시신 위로 엎드렸다. 오기는 마치 고슴도치의 모습처럼 온몸에 화살이 박혀 죽었다. 60여 년의 생애 동안 전쟁에서 단 한 번도 패하지 않은 인물, 죽음의 순간에도 기지를 발휘해 초나라의 불순세력을 없앤 사람, 그가 바로 오기다. 『손자병법(孫子兵法)』과 함께 중국의 양대 병법서로 꼽히는 『오자병법(吳子兵法)』. 이순신 장군이 전투에 임하면서 한 유명한 말, “살기를 바라는 자는 죽고, 죽기를 각오한 자는 산다(必生卽死 必死則生)”도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76번을 싸워서 64번을 이기고 12번의 무승부를 기록한 전쟁의 천재, 오자가 지은 이 책은 『손자병법』에 비해 ‘전쟁의 기술’이 상세하고 직접적으로 서술되어 있다. ▣ 차례 여는글 - 오기의 생애와 오자병법 개요 서주와 동주 / 춘추시대와 전국시대 / 무경칠서 / 오기의 생애 오자병법 개요 / 손자병법과 오자병법 / 오자병법의 구성 서장 - 오기와 문후의 만남 진시황의 폭압정치 / 항우와 유방의 차이 / 무비가 없었던 조선조 문무를 겸비한 군주들 / 왕조의 멸망, 무능한 왕과 부정부패의 합작품 21세기 기업으로 본 무사안일, 부정부패, 공리공론 / 무리한 영토 확장은 기업에도 있다 제1편 도국圖國, 부국강병의 길 명분의 중요성 / 명분 없는 전쟁의 결과 / 임진왜란과 조선의 국론분열 민심을 아우르는 군주의 덕목 /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이기는 자, 황제가 되리라 속임수의 심리학 / 부국강병에 이르는 길 /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무섭다 제2편 요적料敵, 상대를 정확히 파악함 상대에 따라 계책을 달리하라 / 미끼를 던져라 / 기후조건을 무시하는 적은 마음 놓고 쳐라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말라 / 허와 실을 분석해 약점을 노려라 양위 발언으로 신하의 충성심을 시험하다 / 후환이 될 싹은 미리 잘라라 제3편 치병治兵, 강군의 육성 가벼움과 무거움의 차이 / 절반은 이기고 시작하는 방법 / 바람이 적을 향해 불 때 공격하라 제4편 논장論將, 지휘관의 자질을 논함 장수가 갖춰야 할 덕목 / 지휘관이 새겨야 할 다섯 가지 덕목 손자가 말하는 지도자의 다섯 가지 덕목 / 승패를 가늠하는 네 가지 요소 어리석은 지휘의 결과 제5편 응변應變, 상황에 적절히 대응함 임기응변 없이는 전략과 전술도 없다 / 강한 상대는 나눠서 공격하라 상대는 드러나게 하고 나는 보이지 않게 하라 / 궁지에 몰렸을 때는 변칙공격으로 상대를 진퇴양란에 빠뜨려라 / 달아날 때 잡아라 내부의 결속을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라 / 기다리는 자에게 내려지는 선물 제6편 여사勵士, 사기를 다스림 승리의 충분조건 무기와 사기는 1대 3의 비중으로 따뜻하게 포용하라 오자병법 오기 지음 스마트비즈니스 / 2007년 8월 / 198쪽 / 9,800원 오기의 생애와 오자병법 개요 위나라의 부유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오기는 타고난 집념의 싸움꾼이었다. 약관의 나이를 넘기면서부터는 병법에 심취해 병법서를 줄줄 외우고 다닐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아무리 뛰어난 재능을 가졌다 하더라도 당시로서는 벼슬을 하지 않고서는 재능을 발휘할 방법이 없던 때였다. 그때부터 오기는 권세가들을 찾아다니며 친분을 쌓기 시작하면서 아버지에게 물려받은 재산을 거의 탕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아버지가 화병으로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그는 사람들에게 심한 비난을 받으면서 깊은 좌절감에 빠졌다. 어느 날 마을 사람들이 모여 자신을 험담하는 것을 알고는 모멸감을 이기지 못해 칼을 뽑아 그 자리에 있던 자들을 모두 베어버렸다. 그러고서 노나라로 피신했다. 그의 나이 27세 때의 일이었다. 노나라에서 공자 10대 제자의 한 사람인 증삼의 아들 증신의 문하에 들어가 재능을 펼치며 유력 인사들과의 교분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 증신의 집을 자주 출입하던 제나라 대부 전거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증신의 적극적인 천거 덕분이었다. 오기는 노나라 변방의 군영에 막료로 들어갈 수 있었다. 여기서 그는 장병들과 함께 먹고 자며, 일하는 것도 병사들과 똑같이 했다. 처음에는 거리감을 두던 병사들도 오기의 진심을 알고는 차츰 호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러자 오기는 군사들을 이끌고 체계적인 훈련에 돌입했다. 군사들이 어느 정도 훈련이 되었다 싶었을 때 오기는 장수를 찾아가 자신이 훈련시킨 부대를 이끌고 제나라 군을 공격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실패하면 자신의 목숨을 걸겠다는 약속을 하고서 허락을 받았다. 밤중을 이용해 제나라 군의 한 진영을 공격한 그는 한 명의 사상자도 내지 않고서 수십 명의 포로와 병장기를 노획해 왔다. 시간이 흘러 어느 날 오기의 군대에 굴욕을 당했던 제나라가 다시 노나라를 공격해왔다. 오기는 노나라 대장군이 되어 싸움에 출전했다. 오기가 제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영웅으로 떠오르자, 오기를 시기하는 세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노나라 군주 목공에게 오기의 과거사를 들추면서 당장 그를 제거해야 한다고 부추겼다. 그 길로 오기는 말을 몰아 위나라의 수도인 안읍으로 갔다. 위나라의 문후가 현군이며 인재를 아낀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위나라 곳곳을 둘러본 오기는 위나라 원로대신 중 한 사람인 적황의 집을 찾아갔다. 적황을 통해 자신의 소식을 문후에게 전하기 위함이었다. 마침내 오기가 위나라의 문후를 배알하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오기가 문후를 처음 만나는 장면을 기록한 것이 바로 『오자병법』의 서장이다. 첫 만남에서 오기의 그릇을 알아본 문후는 그를 서하의 태수로 임명했다. 오기는 서하의 태수로 임명되자 곧 진나라의 성 5개를 빼앗았으며, 진나라는 그가 위나라에 머무는 25년 동안 여러 차례 반격을 가했지만 한 번도 그를 이기지 못했다. 오기가 서하에 온 지 14년째 되던 해 문후가 세상을 떠났다. 문후는 50년간 재위에 있으면서 나라 안팎을 굳건히 다진 전국 칠웅의 으뜸 군주였다. 오기는 침식을 폐하고 도성을 향해 사흘을 통곡했다고 전해진다. 문후는 오기가 일생 동안 진심으로 존경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문후의 뒤를 이어 태자 무후가 즉위한 때는 기원전 395년이었다. 그는 총명하고 대담한 성격으로 훌륭한 군주의 자질을 가졌으나, 창업자의 후계자들 대부분이 그렇듯 성격이 과격하고 덕이 모자라는 것이 흠이었다. 그러나 오기는 문후의 은혜를 갚으려고 무후를 보필해 대업을 이루고자 다짐했다. 손자병법과 오자병법 『손자병법』과 『오자병법』 사이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손자병법』이 다분히 추상적인 ‘도가’의 영향을 받은 데 비해, 『오자병법』은 좀 더 현실적인 ‘법가’와 ‘유가’에 사상적인 기반을 두고 있다. 『손자병법』이 원론적이며 관념적인 개념을 다루는 반면, 『오자병법』은 구체적인 상황을 다루고 있다. 손무가 전쟁의 도를 말했다면, 오기는 전쟁의 기술을 설명했다고 할 수 있다. 손무는 전쟁을 속임수로 보았으며 ‘싸우지 않고 이기는 것’을 가장 훌륭한 승리라고 했다. 이에 반해 오기는 전쟁을 현실로 보고 ‘싸움에서 반드시 이기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손무가 전쟁에서 군의 사기나 기세를 중시했다면, 오기는 전쟁 이전에 정치적인 인화나 백성들의 자발적인 참여 등 심리적인 요인을 중요한 요소로 꼽고 있다. 손무는 ‘신상필벌’의 원칙을 강조했으나, 오기는 공이 있는 자는 물론 없는 자에게도 기회를 주면 이들이 큰 공을 세운다고 했다. 오기와 문후의 만남 오기의 기본사상은 전쟁 이전에 훌륭한 정치를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에서 엿볼 수 있다. 안으로는 문과 덕으로 백성을 다스리고 밖으로는 무로써 방비해야 한다. 어느 한쪽으로 무게중심이 쏠려도 문제가 생기게 된다. 문덕은 부드러움이요, 무는 강함이다. 백성은 부드러움으로 감싸고 외부의 적에 대해서는 강함으로 대비해야 한다. 나라가 망하는 것도 대개 이 두 가지의 균형이 깨어지는 경우다. 칼로 천하를 얻은 자는 또 다른 무장 세력이 나타나는 것을 가장 두려워한다. 문무를 겸비한 군주들 문후는 갑옷을 만들고 창과 수레를 만드는 등 전쟁에 대비했으나, 군대를 훈련시키고 통솔할 대장군을 찾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시기에 오기를 만남으로써 문후는 명실상부하게 문무를 겸비한 군주가 되었고, 50년 동안 재위에 있으면서 위나라를 전국 칠웅의 으뜸으로 세울 수 있었다. 21세기 기업으로 본 무사안일, 부정부패, 공리공론 IBM은 기업사례 중에서 무사안일에 빠져 허우적거리다가 기적적으로 회생한 기업이다. 1911년 설립된 이래 승승장구하던 IBM은 비만증에 걸렸다. IBM이 움직일 수 없을 정도로 뒤뚱거리던 1993년경에는 40만 명의 종업원들이 무사안일에 빠져 있었다. 말하자면 문약했던 것이다. 문약한 국가나 기업의 특징은 공상주의자와 이상주의자가 많아 말이 많다는 점이다. 당시 IBM에서는 아인슈타인도 해내지 못한 초전도체를 만들겠다며 수많은 인력이 수십 억 달러의 예산을 쓰고 있었다. 공상주의였다. 중국의 송나라나 우리나라의 조선조에 유난히 공리공론이 많았던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무리한 영토 확장은 기업에도 있다 1990년대와 2000년대 초반, 잘나간다고 소문났던 벤처기업들이 한동안 뜸하다 싶어 내막을 들여다봤더니, 거의가 무리한 ‘확장의 덫’에 걸려 고전 중이거나 기업마저 넘겨준 경우가 적지 않았다. 초음파 진단기로 혜성같이 나타났던 메디슨은 지나치게 빨리 재벌들의 문어발 경영을 흉내 내다가 부도를 냈고, 그 후 혹독한 시련을 겪고 나서야 본업이었던 초음판 진단기 분야로 돌아왔다. 기업이 나아갈 방향은 두 가지다. 하나는 기존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는 길이고, 다른 하나는 좁은 영역을 뛰어넘어 업종을 다각화할 경우에는 일을 벌인다 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진출한 분야에서 최소한 3위의 위치를 확보한 다음에 다시 다른 분야로 넘어가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기업 전체가 흔들리게 된다. 일본이나 이탈리아에는 몇 백 년을 이어오는 노포들이 많이 있다. 100년 넘은 기업이 1만 5,000개나 된다고 한다. 일본과 이탈리아 기업들의 장수 비결은 무엇일까? 이 주제를 연구한 일본의 히라마츠 요치다 교수에 따르면, 당수기업들은 그들만의 ‘철학’이 있다. 단순히 돈이 된다고 해서 아무것이나 하는 게 아니라, 한 분야에서 최고를 꿈꾸는 장인정신이 있다는 뜻이다. 제1편 도국, 부국강병의 길 오자병법은 앞의 서장을 제외하고는 문후가 아닌 그의 아들 무후와의 대화로 이뤄져 있다. 무후는 아버지인 문후에 미치지 못하는 인물이었다. 창업자의 후계자들이 대개 그렇듯, 무후도 총명하기는 했지만 교만하고 독선적이었다. 또, 창업의 어려움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면 쉽게 좌절하는 것도 공통점이다. 나라가 어지러울 때 전쟁을 일으키면 화를 자초하게 된다. 전쟁에 있어 화합을 이루지 못하는 경우는 전쟁의 명분이 뚜렷하지 못하거나, 군사를 일으키려 하거나, 군주나 몇몇 간신들의 잘못된 주장을 받아들이는 경우다. 명분의 중요성 십자군 전쟁을 보자. 1095년부터 200년 가까이 이어졌던 십자군 전쟁은 ‘십자가’와 ‘초승달’의 싸움이었다. 당시 예루살렘 성지를 여행하던 기독교인들이 초승달, 즉 이슬람교도들에 의해 박해를 당하고 있다는 구실로 ‘성지회복’의 명분을 내세워 일으킨 전쟁이었다. 이처럼 거창한 명분이 있었기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갔지만 여전히 미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내막을 들여다보면 기독교인들에 대한 이슬람교도들의 박해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비잔틴 황제가 꾸며낸 것들이었다. 11세기 중엽 비잔틴 제국은 국력이 쇠약해진 반면, 이슬람권의 셀주크튀르크는 나날이 세력을 더해가고 있었다. 명분이 중요한 또 다른 분야는 정치다. 정치에서는 명분이 궁색해지면 정체성이 없어지고, 정체성이 없어지면 나아갈 길도 막아버리는 결과가 초래된다. 임진왜란과 조선의 국론분열 16세기 말 일본을 통일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에 사신을 보내어 외교관계를 요구했다. 그러나 외교문서가 오만하다는 이유로 사신의 파견을 거절하자. 다시 교섭을 청하면서 이번에도 응하지 않으면 조선을 침략하겠다고 위협했다. 돌이켜 보면 임진왜란은 전쟁에서 질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었다. 싸움에 대해 아무런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점과 국론마저 양분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더욱이 해전에서 승승장구하던 이순신 장군을 모략해 옷을 벗게 함으로써 스스로 무장을 해제한 꼴이 되고 말았다. 이순신의 경우처럼 싸움에서 공을 세웠을 때 그 공을 시기하는 무리들의 모함으로 전쟁을 그르치는 경우도 적지 않다. 군이 적진분열 되면 전투를 하지 말아야 한다. 적진분열이 되는 이유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전쟁의 명분이 분명하지 않기 때문이요, 또 하나는 승리를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단 한 번의 전쟁으로 이기는 자, 황제가 되리라 전쟁을 좋아해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든 대표적인 예가 프랑스의 루이 14세다. 전쟁에서 강화조약 체결까지를 합치면 32년 동안 전쟁에 몰두했던 사람으로, 재임기간 54년의 3분의 2를 전쟁으로 보낸 인물이었다. 영토를 확장하고 콜베르식의 중상주의를 강화하기 위해서였다. 그 여파로 국고는 비어버렸고 국민은 무거운 세금에 시달려야 했으며 질병까지 창궐했다. 이에 비해 단 한 번의 싸움으로 나라를 구한 사람도 적지 않다. 그 대표적인 예가 일반인들에게는 생소할 것으로 생각되는 터키의 ‘케말파샤’라는 인물이다. 그는 아마도 전 세계에서 가장 신격화된 사람일 것이며, 터키에서는 그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면 대역죄가 성립될 정도다. 속임수의 심리학 ‘강병’은 군사적인 힘만 믿고 뚜렷한 명분 없이 전쟁을 일으킨 군대를 가리킨다. 소위 말하는 침략전쟁이다. 지구상에서 일어나는 싸움의 대부분이 이런 유형에 속한다. 나의 힘이 강해지면 힘이 약한 이웃을 넘보게 된다는 것이다. 이런 군대는 비위를 맞춰주면서 시간을 끌어 흥분을 가라앉게 해야 한다. 일단 유화정책으로 흥분을 가라앉히고 나면 싸울 필요도 없게 되는 게 이런 군대다. 즉, 강군을 물리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외교인 것이다. 도의를 저버리고 이익을 추구하는 군대를 ‘폭병’이라고 부른다. 오기는 이런 적에게는 속임수를 쓰라고 가르친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전쟁을 일으키는 경우 이들은 명분이나 정의감과는 상관이 없다. 『손자병법』과 『오자병법』의 가장 큰 차이점은 바로 이 속임수에 있다. 손무는 가능하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을 택하라고 가르친다. 꼭 전쟁을 해야 한다면 속임수라도 쓰라고 했다. 그러나 오기는 대부분의 전쟁은 힘으로 이기라면서 그 방법을 제시했지만, 이들 폭병에게만은 속임수를 써도 좋다고 가르쳤다. 권모술수라 하면 조조가 빠질 수 없다. 조조가 군대를 이끌고 원정을 나갔을 때였다. 싸움이 길어지자 군량미가 부족하게 되었다. 달리 뾰족한 방법이 없었던 조조는 보급 담당 장수를 불러 대책을 논의했다. “됫박을 적게 해서 군량미 배급을 줄이면 그런대로 견딜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 그렇게 하도록 하자.” 다음날부터 군량미 배급이 대폭 줄어들자 병사들의 불평이 고조되었다. 그러자 조조는 보급 담당 장수를 불러들여 이렇게 말했다. “병사들의 노기를 진정시키기 위해서는 자네가 죽어야겠네!” 그리고는 그의 목을 베어 진중에 내걸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자가 작은 됫박을 사용해 군량미를 빼돌렸기에 그 죄로 목을 베었느니라.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니 진정하라!” 이것이 목적을 위해서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권모술수다. 부국강병에 이르는 길 부국강병을 위해서는 군신 간에 예절을 세우고, 상하의 질서를 세우는 한편, 국민의 관습을 존중하고 올바르게 가르치며,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고 정예군을 키워야 한다. 군신 간의 예절과 상하의 질서는 나라의 기강이다. 그런 다음에는 국민을 교화시켜야 한다. 소위 말하는 국민총화다. 국민이 한마음이 되어 있지 않으면 부국도 강병도 있을 수 없다. 무능한 지휘관은 적보다 무섭다 진지를 안정시키는 방법이 뭐냐고 무후가 묻자 오기는 “유능한 자를 위에 두고 무능한 자를 그 아래에 두라”고 대답한다. 1930년대 맥아더가 필리핀 주둔 사령관으로 있을 때 아이젠하워는 그의 참모였다. 그러나 그 이후 두 사람의 인생은 희비가 엇갈리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의 휘하를 떠나 마샬 사령부에 합류해 작전참모로서 뛰어난 재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51세에 대령, 52세에 준장, 같은 해 7월에 중장, 그 후 다시 7개월 만에 대장으로 승진했다. 일개 중령이 4년 만에 대장으로 승진한, 이는 미군 역사상 가장 빠른 초고속 승진 기록이다. 연합군 총사령관이 된 아이젠하워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 자신의 초고속 승진이 실력에 의한 것임을 입증했다. 마침내 그는 미국의 영웅이 되어 돌아왔다. 그 후 아이젠하워는 1952년 선거에서 34대 미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지만, 맥아더는 1948년과 1952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에서 탈락하고 만다. 능력 위주의 문화였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렇다면 두 사람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스타일의 차이였다. 맥아더는 자신의 능력만 믿은 나머지 남의 말을 듣지 않았고 자기주장만 강요하는 스타일이었다. 그리고 부하들의 업적까지 빼앗아 자신의 공으로 돌리기 일쑤였다. 한마디로 자신보다 잘난 부하를 그대로 두지 못하는 유형이었다. 그의 참모로 있던 아이젠하워가 한 번도 진급을 하지 못한 것이 그 예다. 아이젠하워는 맥아더와는 달리 남의 말을 잘 듣는 편이었다. 휘하 장군들의 능력을 키워주고 격려했으며 부하들의 전공을 챙겨주는 점에서 맥아더와는 반대되는 스타일이었다. 이것이 두 사람의 만년 운을 바꾼 원인이었다. 제2편 요적, 상대를 정확히 파악함 ‘요적’이란 적의 강약과 허실을 꿰뚫어 보는 것을 의미한다. 적을 정확히 아는 것이 제일 중요하다. 오기는 적의 군사적 사정뿐 아니라 적국의 지세, 국민성, 정체, 경제, 사회 전반에 걸친 장단점과 허실, 백성들의 심리상태까지도 예리하게 꿰뚫고 있었다. 유비무환→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할 게 없다. 유비무환과 비슷한 말로 『춘추좌씨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나온다. ‘평안히 지낼 때에는 항상 위태로움을 생각해야 하고 위태로움을 생각하게 되면 항상 준비가 있어야 하며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으면 근심과 재난이 없을 것입니다.’ 조선조 실학의 대가였던 정약용은 저서 『목민심서』에 이렇게 적고 있다. ‘군대와 무기는 100년 동안 전쟁에 사용하지 않더라도, 그에 대한 대비를 하루라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100년 동안 평화가 이어진다 해도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일은 단 하루도 대비를 게을리 해서는 안 된다는 다산의 주장이다. 강성했던 고구려와는 달리 고려나 조선은 지나치게 문약으로 흘러 무비가 없었기에 잦은 수난을 당해야 했다. 미끼를 던져라 공에 눈이 먼 장수는 무리를 하면서 서둘게 마련이다. 미끼 전략에 말려 패전을 한 장군은 원균이었다. 1579년 왜군 600여 척이 부산포로 진입하여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이순신이 없는 동안 공을 세우고 싶었던 삼도수군통제사 원균은 200여 척의 배를 이끌고 서둘러 한산도를 출발해 부산으로 향했다. 이때 경상우수사 배설이란 자가 칠천량은 수심이 얕아 함대의 기동에 지장을 준다며 다른 곳으로 이동할 것을 건의했지만 원균은 이를 무시했다. 조선 수군이 칠천량에 쉬고 있을 때 왜군 600여 척이 공격해왔다. 좁은 해협이었기에 얽히고설킨 접전이 벌어졌다. 여기서 조선 수군은 참담한 패배를 당했고, 남은 배를 수습해 칠천량 남방 형도로 대피했으나 그곳에는 왜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이에서 벗어나기 위해 원균은 고성 부근의 춘원포로 상륙했으나, 추격해온 왜군과 싸우다 전사하고 말았다. 상대방의 전열을 흩뜨리는 가장 좋은 방법의 하나가 미끼를 던지는 것이다. 그러면 잔챙이들은 미끼를 물기 위해 어제의 주군도 어제의 동료도 쉽게 배반하고 돌아서게 된다. 정이불구→뒷심이 부족한 적은 기습으로 기를 꺾어라. 초나라 군대를 일컫는 말이다. 얼핏 보면 질서가 잡힌 듯 보이지만 용맹하지 못해서 끝까지 싸우지 못한다. 국토는 넓고 백성들의 성정은 유약하며 군대는 뒷심이 부족하다. 이런 군대는 진지를 기습해 혼란을 일으키고 사기를 꺾으면 쉽게 제압할 수 있다. 정면 돌파로 지치게 만들면 버티지 못하고 무너지게 된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말라 오기는 적정을 살펴 이길 수 없는 싸움은 하지 말라고 가르쳤다. 상대국의 인구가 많고 경제력이 풍부하며 그 혜택이 백성들에게 고르게 돌아가고 군주가 백성들을 아끼며 병력이 많고 군비가 충실한 경우가 바로 ‘이길 수 없는 싸움’이라고 지적했다. 그런 적들과의 싸움은 승산이 희박하다는 것이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지 말라”는 말은 자칫 소극적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반대로 만반의 준비를 해서 이길 수밖에 없는 여건을 조성한 다음에 전쟁을 하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순신 장군이 그랬다. 철저한 준비로 이길 수 있는 여건을 만들고 난 다음 싸움에 임했기에 23전 전승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허와 실을 분석해 약점을 노려라 공격의 기본은 나의 강점으로 적의 약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공격은 반드시 나의 강점과 적의 약점을 비교해, 나의 강함으로 적의 약함을 공격하는 것이다. 아직 대오가 정돈되지 못한 적, 무질서한 적, 불리한 지형에 위치한 적, 원거리 행군으로 지쳐 있는 적 등은 공격해도 좋은 적들이다. 이런 적들은 정예부대로 돌파하고 본대를 나눠 계속해서 공격하되, 신속히 공격해야 한다. ‘허허실실’은 있는 것을 없는 것처럼, 없는 것을 있는 것처럼 가장해 상대를 현혹시키는 방법이다.『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종횡무진으로 구사했던 전략들이 대부분 허허실실의 계책이었다.『손자병법』에서도 허허실실의 전법을 중시하고 있다. ‘적이 방심하며 오고 있을 때 아군은 편히 쉬고 있다가 기습을 하고, 적이 쉬려고 하면 기습을 한다. 동쪽에서 북을 치면서 서쪽으로 공격하며, 적이 예상하는 지역은 공격하지 않고, 전혀 예상치 못한 지점을 공격한다.’ 위대한 전략에는 두 번 정도의 허허실실이 깔려 있는 게 보통이다. 기만전술은 허허실실과 유사하지만 자신의 진짜 의도를 숨기는 것이 목적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양위 발언으로 신하의 충성심을 시험하다 이번에는 기업의 기만전술을 보자. 그 원조는 미국의 석유 왕 록펠러였다. 1860년대의 록펠러는 석유 독점을 시도했다. 석유회사들을 사들이기 시작하면 반발이 생길 것이 틀림없었기에 석유회사 대신 석유를 수송하는 철도회사를 몰래 사들이기 시작했다. 운송로를 장악한 록펠러는 이번에는 석유회사를 사들이기 시작했다. 운송수단이 없는 석유회사는 허수아비나 다름없었기 때문에 작은 석유회사들은 록펠러의 요구에 굴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제3편 치병, 강군의 육성 절반은 이기고 시작하는 방법 싸움은 군대의 숫자로 하는 것이 아니다. 군법과 지휘체계가 엄격하고 상벌이 분명하면 이미 절반은 이긴 것이다. 이것을 갖춘 군대를 잘 다듬어진 군대라고 부른다. 양보다는 질이라는 뜻이다. 오기는 자신이 지휘했던 모든 전투에서 실제로 부하들과 똑같이 먹고 입고 잠을 자면서 고락을 함께 한 것으로 유명하다. 지휘관은 아버지와 같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게 오기의 지론이었다. 어느 날 오기는 순시 중에 종기로 고생하는 병사를 발견했다. 그는 그 종기를 직접 입으로 빨아내 고름을 뽑아주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접한 병사의 어머니는 통곡을 하면서 울었다고 한다. 연유를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다. “그 아이의 아버지도 오기 장군님의 부하였습니다. 작년에 남편이 등창을 않아 애를 먹자 그때도 장군님이 입으로 고름을 빼내주셨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장군님의 은혜에 보답하려고 앞장서서 싸우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이제 장군님께서 아들놈의 종기도 빨아주셨으니 이를 어찌합니까. 남편을 잃고 이제 자식까지 잃게 생겼으니, 저는 이제 누구를 의지하고 살아야 합니까!” 오기는 전투에서 지휘관의 머뭇거림이야말로 가장 큰 폐단이라고 적고 있다. 죽을 각오로 싸우는 군대에게는 대적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제4편 논장, 지휘관의 자질을 논함 지휘관이 새겨야 할 다섯 가지 덕목 질서정연하게 군을 통솔하고, 적에 대해 만반의 준비를 갖추며, 전투에서는 목숨을 버릴 각오로 임하며, 이겼다고 자만하지 않으며, 명령체계가 간단명료해야 한다. 이(理), 비(備), 계(戒), 약(約), 이것이 지휘관이 갖춰야 할 덕목이다. 이는 지휘체계, 명령계통을 말한다. 수많은 병사들은 다스려도 한 사람을 다스리는 것처럼 하라는 것이다. 지휘체계는 인체에 비유하자면 신경계통에 해당된다. 옛날의 전쟁에서도 지휘계통이 가장 중요했다. 그래서 오기는 이를 가장 먼저 언급한 것이다. 현대전이 되면서 지휘계통의 중요성은 더해진다. 오늘날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꼭 필요한 다섯 가지 요소를 ‘C4I’라고 한다. 여기에서도 지휘체계의 중요성이 강조된다. C4I에서 C4는 지휘, 통제, 통신, 컴퓨터를 말하고 I는 정보를 뜻한다. 손자가 말하는 지도자의 다섯 가지 덕목 손자는 지휘관의 덕목으로 지, 신, 인, 용, 엄의 다섯 가지를 들었다. 장수의 덕목으로 지혜를 우선으로 들고 있다. 다시 말하면 장수는 지혜로움과 신의가 있어야 하며, 어질면서도 용기가 있어야 하고, 아랫사람들이 우러러볼 정도로 위엄을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손자가 말하는 장수의 자질에 가장 가까운 인물은 이순신일 것이다. 문무를 겸비한 데다 싸움에서는 누구보다 용맹했으며 승산이 없는 싸움은 하지 않았다. 부하를 아끼는 마음에서였다. 그러면서도 상벌은 엄격했다. 군령을 어긴 자에게는 엄한 벌을 내렸다. 그가 어느 정도로 부하 관리에 꼼꼼했는가 하면, 부하들의 신상은 물론 그들의 특기와 전공까지 자세히 『난중일기』에 남길 정도였다. 승패를 가늠하는 네 가지 요소 오기가 꼽는 승패의 관건은 기세(氣勢), 지세(地勢), 용병술(用兵術), 전투력(戰鬪力), 이 네 가지다. 싸움에는 세(勢)라는 것이 있다. 이는 가둬놓았던 봇물이 쏟아질 때의 그런 힘을 말한다. 무릇 장수는 흐름을 잘 탈 줄 알아야 한다. 이 흐름만 다룰 줄 알면 병사들은 마치 비탈길을 굴러가는 통나무처럼 무서운 힘을 발휘할 수 있게 된다. 싸움에 임하는 장수가 확신에 차 있고 세를 이용할 줄 안다면 부하들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것이다. 고 정주영 회장이 생전에 자주 하던 말이 있다. 실무자들이 안 된다고 하면 버럭 화를 내면서 ‘채금자’ 를 불렀다. 정 회장은 책임자를 채금자로 발음했다. “어이, 채금자. 해보기나 했어? 해보고 나서 안 된다고 해!” 그는 또 이렇게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나는 어떤 일을 할 때 반드시 된다는 확신 90퍼센트와 되게 할 수 있다는 자신감 10퍼센트로 일했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해내는 법이다. 의심하는 사람은 의심하는 만큼밖에 이루지 못한다.” 이런 확신이 기적을 일으킬 수 있다. 용병술의 요체는 군대 전체가 하나의 살아 있는 유기체처럼 움직이게 하는 것이다. 상산에 사는 뱀 ‘솔연’처럼 움직이게 하라는 말이다. 중국 산둥성 남쪽에 있는 상산이라는 산에 솔연이라는 이름의 뱀이 살고 있었다. 머리가 두 개인 이 뱀은 머리를 치려 하면 꼬리가 덤비고, 꼬리를 치려 하면 머리가 덤비고, 몸통을 치려 하면 머리와 꼬리가 동시에 덤벼드는 뱀이다. 손무 『손자병법』 중 구지편에서 ‘사지에 몰려도 상산의 뱀과 같은 진을 펼치면 살아날 수 있다’고 적고 있다. 머리와 꼬리가 한몸처럼 행동한다면 적을 이길 수 있다. 반대로 적에 대해서는 전방과 후방의 유기적인 관계를 끊고, 전투부대와 보급부대를 분리하며, 상하를 서로 분리시키라는 것이다. 하지만 오기가 좀 더 구체적이다. 오기가 적시하는 각 항목은 모두가 적장의 약점을 노려 그곳을 공격하라는 의미다. 어리석은 지휘의 결과 속임수가 가장 난무하는 곳은 권력의 세계이다. 정치인들은 거짓말도 잘하고 속이기도 잘하지만 어리석을 정도로 잘 속는 사람들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 영국의 챔벌린 수상은 평화주의자였다.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어 갈 무렵 챔벌린은 히틀러와 평화조약을 체결했다. 그 문서에서 히틀러는 이렇게 적었다. ‘앞으로는 전쟁을 하지 않고 평화협상을 통해 모든 문제를 대화로 해결하겠다.’ 이를 지켜보던 처칠은 영국 의회에서 챔벌린이 들고 온 문서는 가짜이고 히틀러에게 항복한 것이라면 이렇게 말했다. “이제 전쟁은 불가피해졌다. 영국은 전쟁을 피할 수 없게 되었다.” 전쟁이 임박해지면 전쟁광들이 들고 나오는 문서가 다름 아닌 평화조약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영국 의회에서는 369대 150으로 챔벌린의 손을 들어 주었다. 하지만 그로부터 정확히 1년 뒤에 제2차 세계대전이 일어났고, 영국 여왕은 처칠을 불러 수상에 임명했다. 신임 총리에 취임하는 날 처칠은 이렇게 말했다. “나에게는 피와 수고와 눈물과 땀 외에는 내놓을 게 아무것도 없다.” 이 연설 하나로 영국인들은 다시 뭉쳐 전쟁을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히틀러의 말을 그대로 믿은 챔벌린이 바로 여기에 나오는 어리석은 지휘관의 전형인 것이다. 제5편 응변, 상황에 적절히 대응함 무후가 물었다. “적군은 병력이 아주 많은데도 훈련이 잘되어 있고, 지형마저 우위를 점해 전후좌우로 이상적인 조건을 갖췄으며, 진지는 견고하고 무기도 강력하오. 군대의 위용을 보면 후퇴할 때는 마치 산이 움직이는 것 같고, 공격 할 때는 마치 비바람이 몰아치는 듯하며, 게다가 식량도 충분하다오. 이러한 적과는 오래 대치하기가 어려울 테니 어떻게 해야 하겠소?” 오기가 대답했다. “좋은 질문이옵니다. 이러한 경우에는 단순히 외형적인 힘으로 대응하는 것이 아니라 고도의 전술을 써야 합니다. 먼저 천 대의 전차와 만 명의 기병을 준비하고, 여기에 상응하는 보병을 편성한 다음, 다섯 개의 부대로 나누어 각각 배치합니다. 아군이 다섯 방향으로 포진해 있으므로 적은 틀림없이 당황해 어떻게 대처할지 고심하게 될 것입니다. 적이 만약 수비태세를 강화하고자 한다면 재빨리 첩자를 침투시켜 그들의 의도를 염탐하는 한편, 사신을 보내 협상을 병행합니다. 적이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면 의지가 관철된 것이므로 진형을 풀고 철수하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적이 거부해 사신을 죽이고 문서를 불태우면 그 즉시 다섯 부대를 움직여 공격합니다. 싸움에서 이기더라도 추격하지 말고, 도중에 밀리는 것처럼 신속하게 물러납니다. 이와 같이 패한 척하면서 서서히 움직이다가 적이 쫓아오면 갑자기 공세로 전환해야 합니다. 한 부대는 적의 선두를 견제하고, 두 부대는 은밀히 기동해 적의 좌우 측을 급습합니다. 이처럼 다섯 부대가 번갈아 공격을 가하면 반드시 승기를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이것이 강한 적을 치는 방법입니다.” 강한 상대는 나눠서 공격하라 기업의 경영도 마찬가지다. 약자는 강자가 차지하고 있는 넓은 시장을 노릴 게 아니라 좁고 험한 시장을 개척하여 그곳에서 새로운 강자가 되어야 한다. 위니아만도의 ‘딤채’는 블루오션 개척의 대표적인 사례다. 위니아만도가 김치냉장고 시장을 개척하는 대신, 일반 냉장고나 에어컨 시장에 발을 뻗었더라면 LG, 삼성 등 기존의 강자에게 치명타를 맞아 물러나고 말았을 것이다. 이것이 강자의 전략과 약자의 전략이다. 싸움의 이치는 아주 간단하다. 넓은 전장에서 정면대결을 펼친다면 병력이 많은 쪽이 이기고, 병력도 같다면 무기의 성능이 우수한 쪽이 이긴다. 그것도 같다면 훈련이나 사기가 앞선 쪽이 이긴다. 이 세 가지를 비교해서 승산이 없다면 정면대결을 하지 않아야 한다. 상대는 드러나게 하고 나는 보이지 않게 하라 적을 분산시키는 방법은 아군의 의도를 모르게 하라는 것이다. ‘적의 모습을 드러나게 하고 아군의 모습은 보이지 않게 하면 적의 병력은 분산되게 되고 아군의 병력은 집중된다. 이와 같이 아군의 늘어난 병력으로 적의 줄어든 병력과 싸우면 열로 하나를 치는 것과 같다.’ 기업 경영에서 보면 적이 강하다는 것은 어느 한 분야에 집중해 있다는 말이다. 만약 시장의 강자가 한 분야에 집중하면서 다른 분야로 눈을 돌리지 않는다면 거의 이기지 못한다. 이는 시장의 여건이 바뀌어 새로운 패러다임이 등장할 때까지는 거의 난공불락이라는 의미다. 그러나 아무리 강자라도 여러 분야로 눈을 돌리게 되면 전력이 분산되고, 분산된 전선 하나에 아군의 주력을 투입되면 그리 어렵지 않게 이길 수 있게 된다. 기업 경영에서 강자의 지위가 흔들리는 경우는 단 두 가지로 요약된다. 하나는 승리에 도취해 무사안일에 빠지는 경우고, 다른 하나는 여러 분야로 동시에 눈을 돌릴 때다. 궁지에 몰렸을 때는 변칙 공격으로 공격에는 정법과 기법이 있다. 정법이란 정규군에 의한 정면공격이고 기법이란 측면공격 혹은 게릴라전이다. 『손자병법』에 ‘전쟁은 정법으로 싸우고 기법으로 승리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싸움에서는 변칙공격이 없을 수 없다. 적이 진군해 오는데 도로가 끊겼다면 변칙공격으로 적의 의표를 찌르면서 적에게 틈을 주지 말고 그곳을 빠져나와야 한다. 한국 축구를 세계 4강에 올려놓은 히딩크 감독은 원칙론자일까, 변칙론자일까? 그는 원칙론자였다. 강한 체력을 바탕으로 미드필더에서부터 압박을 가하는 전형적인 원칙 축구를 지향했다. 그리고 선수 선발에 있어서도 이에 적응하지 못하는 선수는 가차 없이 내쳤다. 이 원칙에 맞지 않은 윤정환과 최용수가 1차로 희생되었다. ‘게으른 천재’인 이동국도 그랬다. 2002년 6월 18일 대전 월드컵 경기장, 이탈리아와의 16강전이 열렸다. 후반 20분까지 스코어는 1 대 0, 서서히 해가 기우는 듯했다. 하지만 바로 그때 히딩크 감독의 변칙이 나온다. “이제 더 이상 성을 지키는 병사는 필요 없다. 전원 나가서 싸워라!” 그리고는 포메이션을 바꿨다. 지금까지의 4-4-2가 아니라 1-4-5의 포진이었다. 이는 방법으로 말하면 배수의 진이다. 더 이상 물러설 자리를 없애버린 것이다. 이천수와 차두리가 길을 열고, 저격수 황선홍, 안정환, 설기현을 적의 성문 앞으로 바짝 진입시켰다. 이런 갑작스러운 포메이션 변화에 이탈리아팀은 화들짝 놀랐다. 46년 전인 1966년, 북한과의 월드컵 경기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렇게 되자 적병들은 대체 누가 수비고 누가 공격수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바로 그 순간 저격수 설기현이 불화살을 날려 성문을 열었다. 스코어는 1대 1, 이어서 연장전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이영표가 공을 쏘아 올리자 안정환이 마지막 일격을 가해 적진을 초토화시켰다. 이것이 히딩크의 변칙공격이었다. 변칙은 상대가 전혀 예상하지 못한 상태에서 써야 하고, 상대가 당황할 때에만 효과가 있다. 그래서 변칙은 예외적이어야 하며 원칙과 변칙이 혼재되어서는 안 된다는 얘기다. 달아날 때 잡아라 도둑은 들어올 때는 빈손이어서 날렵하지만 나갈 때는 짐을 짊어져 둔해진다. 그래서 도둑은 나갈 때 잡으라는 얘기가 있다. 적의 군량미가 바닥이 났을 때 농작물과 양식과 마소를 약탈해 가는 경우가 있다. 이때의 적군의 수는 그리 많지 않으나 일종의 특수부대로 용맹스러우면서도 잔혹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약탈병은 대부분 굶주린 이리떼를 닮는다. 이들이 쳐들어온다면, 미리 알았더라도 초기에 정면대응을 하지 않는 것이 유리하다. 이들은 쳐들어올 때는 몸이 가볍지만 돌아갈 때는 짐이 많아서 몸도 무겁고 행동도 느리다. 또, 추격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대열이 흩어지게 마련이다. 이때를 노려서 공격하면 쉽게 적을 잡을 수 있다. 약탈병은 쳐들어올 때는 공격적이지만 나갈 때는 무거운 짐을 졌기에 오직 달아나는 것에만 신경이 곤두서 있다. 이때를 노려야 한다. 내부의 결속을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들어라 정치 지도자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다. 내부 결속을 위해 또는 적개심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외부의 적을 만드는 것이다. 여기에 가장 피해를 많이 본 것은 유대민족이었다. 1932년, 히틀러는 국가사회나치라는 이름으로 승전국들에 의해 강요된 전쟁배상금의 부당함과 독일 민족의 우수성을 부르짖으며 선거 유세에 나섰고 마침내 제1당이 되었다. 이듬해 총리에 취임한 그는 국회의사당에 불을 질렀다. 그리고는 이를 공산당의 소행으로 몰아 눈엣가시 같은 공산당과 사회민주당을 괴멸시켜 버렸다. 극단적인 민족주의로 치닫던 나치는 내부 불만을 외부로 돌리기 위해 유대인들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당시에 희생된 유대인들의 숫자가 무려 572만 명이었다. 일본의 관동 대지진 당시 한국인들이 희생을 당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저질러진 만행이었다. 1923년 9월 1일, 일본 관동지방에 진도 7의 대지진이 발생해 수만 명이 죽었다. 일본 전역은 경악했고 민심은 걷잡을 수 없이 술렁거렸다. 그렇게 되자 일본은 민심수습을 위해 조선인들을 적으로 만들 필요가 있었다. 경찰 특수대로 하여금 불을 지르고 우물에 독극물을 투입하고 폭탄을 던지게 한 다음 이를 조선인들의 소행으로 돌려 조선인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했다. 이때 희생된 조선인의 수가 일본 측 자료로는 2,534명, 우리 측 자료로는 6,661명으로 집계되고 있다. 제6편 여사, 사기를 다스림 무기와 사기는 1대 3의 비중으로 “세상에는 두 가지의 힘이 있다. 하나는 무력이요, 또 하나는 정신력이다. 무력이 칼집이라면 정신력은 칼날이다.” “군사력에서 유형의 전력과 무형의 전력이 각각 차지하는 비율은 1대 3이다.” 무형의 전력이란 사기와 정신력을 가리키는 것이다. “승리를 가져오는 것은 오직 사기다. 사기가 있으면 모든 것이 가능하지만 사기가 떨어지면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위대한 장군들은 거의가 부하의 사기를 높이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나폴레옹이 오스트리아를 공격할 때였다. 아다 강에 이르렀는데 다리라고는 폭 10미터에 길이 200미터짜리 하나밖에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오스트리아군은 이 다리에 모든 화구를 겨누고 있었다. 나폴레옹은 다리를 건너기로 결심했다. 모든 참모들이 반대했다. 나폴레옹은 일단의 병력을 우회시켜 적의 배후를 치게 하는 한편, 모든 포를 동원해 적의 화력을 제압했다. 그리고는 맨 앞에 서서 다리를 건넜다. 그러자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찔렀고 결국 그 전투는 나폴레옹의 승리로 끝났다. 따뜻하게 포용하라 인류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차지했던 칭기즈칸은 정복지의 다양한 현지 종교를 존중해주고 이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원시 샤머니즘을 비롯한 도교, 불교, 기독교, 이슬람교, 아르메니아 정교 등에 이르는, 당시 존재하던 거의 모든 종교를 포용함으로써 이민족들을 결집시킬 수 있었다. |
출처: 가슴에는 조국을 눈은 세계로 원문보기 글쓴이: 타이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