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10월 11일 연중 제27주간 수요일
<주님,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4
1 예수님께서 어떤 곳에서 기도하고 계셨다. 그분께서 기도를 마치시자 제자들 가운데 어떤 사람이,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 준 것처럼, 저희에게도 기도하는 것을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을 거룩히 드러내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저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4 저희에게 잘못한 모든 이를 저희도 용서하오니 저희의 죄를 용서하시고
저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그냥 좋기만 한 아버지
주님의 기도를 바칠 때마다 항상 마음에 걸리는 말이 있었습니다. ‘아버지’라는 말입니다. 어려서 한문을 공부할 때도 항상 아버지라는 말이 나를 어렵게 하였습니다.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말이 항상 글 속에 있는 말이었습니다. 또한 부위자강(父爲子綱)이라는 말도 또한 글 속의 말이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결혼하여 첫아이를 낳아 아버지가 되고서도 체득하지 못한 말이었습니다. 어른들은 그런 내게 항상 ‘아버지는 아주 서서히 되어 가는 것’이라고 말씀해주시곤 했습니다.
내게 아버지는 병약하고 항상 술에 취하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정이 많으시고 자상하시고 재주가 많으시고 머리가 아주 좋으신 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나와 떨어져 사셔서 나는 아버지가 언제나 낯이 설었습니다. 그리고 중병에 걸리시면 집에 오셔서 치료하시고 치료가 다 끝나면 훌쩍 떠나시던 아버지가 참으로 미웠습니다. 나는 아주 어려서부터 기도하기를 아버지께서 집에 오셔서 일 년만이라도 우리랑 같이 사시고, 세례를 받으시고 영혼을 구원 받으시기를 간절히 하느님께 졸랐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미천한 나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아버지께서는 돌아가시기 일 년 전에 집에 돌아 오셔서 아우구스티노 성인의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으시고, 당신의 젊은 시절의 모든 것을 참회하시고 어린 내게 아홉 형제자매를 부탁하시고 마흔여덟의 젊은 나이에 눈을 감으셨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아버지가 ‘좋은 아버지’가 아니었고, 훌륭하고 존경하는 아버지가 아니었습니다. 내게 가난과 형제자매를 남겨놓고 돌아가신 아버지를 돌아가신 지 10년이 넘도록 미워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10년이 지난 후 아버지의 산소를 교회묘지로 이장하면서 아버지의 유해를 품에 안고 울면서 아버지께 용서를 청했습니다. 그리고 정말로 아버지께 불효한 나를 바로 볼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의 미움을 용서해 주시기를 간절히 빌었습니다. 내가 아버지가 되고, 아이들이 내가 좋아서 ‘아빠’라고 불러주며 ‘그냥 아빠가 좋아서’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혼자서 눈시울을 붉히곤 하였습니다. 그냥 좋기만 한 아버지가 되고 싶었습니다. 그렇게 좋은 아버지를 나는 한 번도 다정하게 불러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서 돌아가신지 벌써 50년이 지났습니다. 이제는 그리운 아버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냥 불러보고 싶은 아버지가 되셨습니다.
이번 추석에도 일찍 산소에 가서 절하면서 나직하게 불러보며 또 울었습니다.
이제야 주님의 기도 첫 머리에 나오는 ‘아버지’를 가슴 깊이 새길 수 있습니다. ‘하느님 아버지’가 왜 그렇게 좋은지 이제야 머리가 아니라 가슴으로 느낄 수 있습니다. 지금은 자주 주님의 기도를 바치면서 ‘아버지’라고 부르면서 목이 메어옵니다. 그리고 큰 소리로 기도문을 외우지 못합니다. 그냥 입만 달싹 거릴 때가 많습니다. 하느님 아버지를 사랑으로 느낄 수 있기 때문에, 육친의 아버지와 같이 느껴지기 때문에 울컥해지는 마음이 들기 때문입니다. 또한 나는 정말 좋은 아버지였는지, 나는 좋은 아버지가 되기 위해서 얼마나 애를 썼는지, 나는 하느님 아버지를 부를 자격이 있는지 등등 많은 생각들이 나를 때리고 지나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그 좋은 아버지에게 아주 귀엽고 예쁜 아이가 매달려 응석을 부리듯 그렇게 아버지를 부르라고 일러 주십니다. 그리고 이 세상이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십니다. 지금 우리들의 세상은 우리가 보기에도 하느님 아버지의 나라가 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하느님 아버지의 뜻을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불효자가 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만큼은 절대로 불효자로 살지 말라고 누누이 강조하여 기도하며 또한 그렇게 살라고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아무리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사랑하는 하느님 아버지를 항상 부르며 살라고 그렇게 가르쳐 주시는 것입니다.
<네가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 요나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4,1-11
1 요나는 매우 언짢아서 화가 났다. 2 그래서 그는 주님께 기도하였다.
“아, 주님! 제가 고향에 있을 때에 이미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래서 저는 서둘러 타르시스로 달아났습니다. 저는 당신께서 자비하시고 너그러우신 하느님이시며,
분노에 더디시고 자애가 크시며, 벌하시다가도 쉬이 마음을 돌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3 이제 주님, 제발 저의 목숨을 거두어 주십시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4 주님께서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하고 말씀하셨다.
5 요나는 그 성읍에서 나와 성읍 동쪽에 가서 자리를 잡았다. 거기에 초막을 짓고 그 그늘 아래 앉아,
성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보려고 하였다.
6 주 하느님께서는 아주까리 하나를 마련하시어 요나 위로 자라오르게 하셨다.
그러자 아주까리가 요나 머리 위로 그늘을 드리워 그를 고통스러운 더위에서 구해 주었다.
요나는 그 아주까리 덕분에 기분이 아주 좋았다.
7 그런데 이튿날 동이 틀 무렵, 하느님께서 벌레 하나를 마련하시어 아주까리를 쏠게 하시니,
아주까리가 시들어 버렸다.
8 해가 떠오르자 하느님께서 뜨거운 동풍을 보내셨다. 거기에다 해가 요나의 머리 위로 내리쬐니,
요나는 기절할 지경이 되어 죽기를 자청하면서 말하였다. “이렇게 사느니 죽는 것이 낫겠습니다.”
9 그러자 하느님께서 요나에게 물으셨다. “아주까리 때문에 네가 화를 내는 것이 옳으냐?”
그가 “옳다 뿐입니까? 화가 나서 죽을 지경입니다.” 하고 대답하니,
1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네가 수고하지도 않고 키우지도 않았으며,
하룻밤 사이에 자랐다가 하룻밤 사이에 죽어 버린 이 아주까리를 그토록 동정하는구나!
11 그런데 하물며 오른쪽과 왼쪽을 가릴 줄도 모르는 사람이 십이만 명이나 있고,
또 수많은 짐승이 있는 이 커다란 성읍 니네베를 내가 어찌 동정하지 않을 수 있겠느냐?”
일10월 11일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
신분 : 교황
활동 연도 : 1881-1963년
같은 이름 : 얀, 요안네스, 요한네스, 이반, 장, 쟝, 조반니, 조안네스, 조한네스, 존, 죤, 지오반니, 한스, 후안
교황 성 요한 23세(Joannes XXIII)는 1881년 11월 25일 이탈리아 베르가모(Bergamo)에서 12km 떨어진 소토 일몬테(Sotto il Monte)에서 가난한 농부인 조반니(Giovanni Roncalli)의 13명의 자녀 중 셋째로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안젤로 주세페 론칼리(Angelo Giuseppe Roncalli)이다. 어려운 환경에서 태어나 성장한 요한은 자연스럽게 자신의 사제상을 가난한 이들에게 봉사하는 것으로 정하였다. 그는 베르가모 신학교에서 2년 간 교육을 받고, 로마(Roma)의 성 아폴리나레 대학(San Apollinare Institute)에 장학생으로 입학했다.
이곳에서 신학을 공부를 하던 중, 1902년 10월 영성 지도자인 구속주회의 피토키(Francesco Pitocchi) 신부를 만나면서 “하느님은 모든 것이며,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Dio tutto, io sono nulla)라는 기본적이면서 근본적인 명제를 받아들이게 되었다. 1904년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제 서품을 받은 후 다음해에 베르가모의 테데스키(G.R. Tedeschi) 주교의 비서로 임명되어 1914년 주교가 사망할 때까지 그의 곁에 머물렀다. 교구장 비서로 일하면서 그는 신학 연구에도 몰두하였다. 암브로시우스 도서관에서 연구 작업은 후에 교황 비오 11세(Pius XI)가 된 라티(A.D.A. Ratti) 추기경과의 만남을 갖게 하였다.
제1차 세계대전 끝난 후 1921년 교황 베네딕투스 15세(Benedictus XV)는 그를 포교성성(현 인류 복음화성)의 이탈리아 책임자로 임명하였다. 그는 이어 1925년 아레오폴리스(Areopolis)의 명목상의 대주교 및 1935년 불가리아의 대목으로 임명되었다. 불가리아 · 그리스의 교황 사절, 파리주재 교황청 대사(1944∼1953년)를 거쳐 1953년 1월 12일에는 사제 추기경으로 임명되었고, 1958년 10월 비오 12세(Pius XII)에 이어 77세의 고령으로 교황에 선출되었다.
교황으로서 요한 23세라는 이름을 선택한 그는 11월 4일 즉위식을 거행하면서 좋은 목자가 되기 위해 모든 것을 다 하겠다는 희망을 피력하였다. 우선 교황이 된 후 처음으로 개최한 추기경 회의에서 추기경 숫자를 70명으로 제한하는, 식스투스 5세(Sixtus V)부터 내려오던 규정을 폐지하였다. 1958년 12월 23명의 추기경을 새로 임명하였는데, 그 중에는 밀라노(Milano) 교구장으로 후에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가 되는 몬티니(Giovanni Battista Montini)도 포함되어 있었다. 1962년까지 그가 임명한 추기경은 모두 87명으로 늘어났다.
1959년 1월 25일 교황은 추기경들에게 로마 교구 시노드 개최, 공의회 개최, 교회법전 개정 등 세 가지 계획을 선언하였다. 로마 교구 시노드는 1960년 1월 24-31일까지 라테란 대성전에서 개최되었다. 1962년 제2차 바티칸 공의회 개최는 교황의 업적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이며, 이 공의회를 통해 모든 그리스도 교인의 일치라는 궁극적인 목적에서 교회의 종교생활을 쇄신하고 그 가르침과 조직을 현대에 맞도록 개혁한다는 취지를 펼쳤다.
그 밖의 괄목할 만한 개혁으로는 그리스 멜키테 총대주교 막시모스(Maximos) 4세의 호소를 받아들여 비잔틴 전례에서 모국어 사용을 허가하는 한편, 미사경본과 시간전례서(성무일도)에 대한 새로운 예식 규정을 인가하고(1960년), 미사 통상문의 성찬 기도에 성 요셉(Josephus)의 이름을 삽입하였으며(1962년), 교회법전 개정을 위한 교황청 위원회를 구성한(1963년) 일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1960년 그리스도교 일치 사무국 개설, 이듬해에는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 처음으로 로마 가톨릭의 대표가 참가하였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도 비가톨릭 인사들이 참관인으로 초대되는 등 일련의 쇄신이 이어졌다.
1963년 5월 22일 베드로 광장에 모인 신자들에게 마지막 인사와 함께 강복을 준 교황은 성령 강림 대축일이었던 6월 3일 선종하였다. 그의 유해는 베드로 대성전에 안장되었다. 5년도 채 안된 재임 기간 동안 요한 23세 교황은 인류를 향해 열려 있는 교회가 되도록 가톨릭 교회에 큰 변화를 가져왔다. ‘좋으신 교황’(papa buono)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리는 그는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 소송이 시작되어, 2000년 9월 3일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 베드로 광장에서 시복되었다. 그리고 2014년 4월 27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부활 제2주일)에 프란치스코(Franciscus) 교황에 의해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함께 시성되어 성인품에 올랐다. 그의 축일은 6월 3일에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의 개막일인 10월 11일로 변경하여 기념한다.
오늘 축일을 맞은 요한 (John)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