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계 만천과해 (瞞天過海)
하늘을 속여 바다를 건넌다... 뭔 뜬금없는 소리냐 할 수도 있겠다. 그러나 하늘이란 곧 천天, 천자, 군주다. 말 그대로 천자를 속여 바다를 건너도록 한다는 뜻인데 명나라 때 쓰여진 백과사전인 <영락대전>이 그 출전이다.
청의
이와 비슷한 이야기로 춘추시대 진문공의 일화가 있다. 진문공은 공자시절 ‘중이’라 불리웠었는데, 아버지인 진헌공의 정실로서 해제를 낳아 그를 왕으로 올리고자 하는 여희의 음모로 ‘이오’와 더불어 65살 다시 진나라로 돌아와 즉위하기까지 열국을 떠돌며 망명생활을 해야 했었다. 그 가운데 특히 제나라에서의 7년이 유독 사무쳤었는데, 아마도 그 시절이 오랜 망명기간 가운데 가장 행복한 시절이었던 때문이었다.
당시 제나라의 군주는 춘추오패의 첫머리로 꼽는 제환공이었다. (중이의 동생인 이오를 진의 목공과 함께 진의 왕으로 올린 것도 바로 이 환공이었다.) 제환공은 중이의 인품을 높이 사서 그에게 자신의 딸 ‘제강’과 수레 20승, 말 18필을 주어 후대했는데, 이미 형인 신생이 죽고, 다시 여희와 해제가 죽자 이오가 진혜공이 되어서는 적나라에 망명해 있던 그를 죽이려 하는 등, 참으로 바람 잘 날 없던 삶이라, 더구나 당시 중이의 나이는 50을 넘어 있었다. 지금이야 50이면 한창 나이이지만 당시로서는 이미 죽을 날을 잡아 놓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중이로서도 이대로 편안히 남은 생을 보내자는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당시 중이는 혼자 몸이 아니었다. 그를 쫓아 그에게 일신을 의탁한 아홉 명의 신하가 있었다. 그들로서는 중이가 한시라도 빨리 고국으로 돌아가 일을 도모하여 뜻을 이루어야 할 터인데 저렇게 당장의 편안함에 길들여져 큰 뜻을 잊은 채 허송세월만 하고 있으니 이래서는 안 될 일이었다. 더구나 당시 진나라의 상황은 중이의 동생인 이오 - 즉 진혜공의 학정과 무능으로 말미암아 크게 어지러운 상황이었던데다, 제환공이 죽고 제나라의 내정 또한 혼란하여 도움을 기대할 수 없게 되었으니 더욱 마음이 급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중이는 그런 신하들의 마음을 전혀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아니 아예 들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몇 번을 찾아가도 얼굴조차 보지 못하고 쫓겨날 뿐, 결국 몇 번을 그렇게 중이를 만나지도 못하고 쫓겨나게 되자 신하들은 아예 사냥을 빌미로 중이를 밖으로 불러내서 그를 납치하려는 계획까지 세우게 되었다. 그런데 여기에 뜻하지 않게 제환공의 딸이기도 한 중이의 부인 제강이 끼어들었다.
시녀들을 통해 ‘호언’ 등의 계획을 들은 제강은 은밀히 호언을 찾아가 진의 내정이 어렵고 혼란스러워 모든 대부와 백성들이 중이를 바라보고 있는데 이처럼 안락함에 빠져 움직이려 하지 않으니 그것은 장부의 도리가 아니라며 자신이 나서서 돕겠노라 말했다. 자신이 공자 중이에게 술을 먹여 취하게 만들 터이니, 그때 몰래 중이를 업어 마차에 실어 목적한 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참으로 제환공의 딸다운 배포라 할 터인데, 이전부터도 제강은 몇 번이고 중이로 하여금 진나라의 공자로서 자신을 자각하여 진으로 돌아가 큰 뜻을 펼칠 것을 권하고 했었다. 그럴 경우 제강 자신이 버려질 수 있음을 알면서도 한 여자로서보다는 진나라 공자 중이의 처로서, 제환공의 딸이자 제나라의 공주로서 처신을 선택한 것이었다. 참으로 독심여장부라고나 할까?
아무튼 호언 등과 그렇게 약속하고 돌아온 제강은 중이를 만나자 먼저 그 신하들이 중이를 모시고 다른 나라로 가려는 계획을 꾸미고 있음을 알고 있다며 중이더러 자신을 버릴 것이냐고 다그쳤다. 당연히 금시초문인 중이는 펄쩍 뛰었다. 그는 그때까지도 사랑스런 제강과 제나라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자 겨우 마음이 놓이는 표정을 지어 보인 제강은 마치 다짐이라도 하려는 듯 중이에게 함께 술을 마시며 밤을 지새자고 제안했다. 그야말로 중이가 떠날 것을 걱정하다가 겨우 마음을 놓이게 된 처자의 모습이었다. 어느 남자가 그런 모습에 넘어가지 않을 수 있을까?
그러나 그렇게 밤을 새워 술을 마시고 중이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이미 호언 등이 몰고 있는 마차 안이었다. 제나라의 국경도 예전에 넘어 있었고 다시 돌아가려 해도 이미 제나라를 떠나온 신하들은 다시 제나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고, 아마 돌아간다고 해도 예전과 같은 생활은 누리지 못할 것이었다. 잠시 술에 취해 잠든 사이 일은 이렇게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던 것이다. 그야말로 제강의 손으로 하늘을 가려 바다를 건너는 계책에 당한 것이니, 중이도 마침내 제나라에서의 생활에 대한 미련을 모두 접고 신하들이 이끄는 대로 자신의 운명이 가리키는 대로 따르게 되었다.
그렇게 중이는 제나라를 떠나 조나라로 갔다가 다시 송나라로, 송나라에서 또 초나라로 여러 나라를 전전하다 마침내 진혜공에 이은 진회공의 신의없음과 포악함에 질려버린 진목공의 후원을 받아 그로부터 군사를 빌려 진나라로 돌아가 동생의 아들이기도 한 회공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가 바로 춘추오패에서 빠지지 않는 세 자리 가운데 하나인 진문공이다. 주왕실의 반란을 진압하고 천토의 회맹으로써 춘추시대의 두번째 패자가 되니, 불과 십 여 년의 짧은 치세지만 이때 진나라는 명실상부한 중원의 패자로서 전성기를 누리게 되었다. 가히 대단한 능력이라 하겠는데, 거기에는 여자로서의 자신을 희생한 제강의 현숙하면서도 치밀한 노력이 있었다. 진문공 또한 패자였으니 태종과 같이 이것도 만천과해라 하겠다.
만천과해의 예로 또 하나 유명한 것이 삼국지에 나오는 ‘태사자’의 일화다. 태사자는 원래 산동 북해 사람인데 - 그래서 코에이의 삼국지 초기 시나리오로 시작하면 태사자가 공융의 땅인 북해에서 나온다. - 황건적의 잔당이 북해를 포위하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필마단기로 북해를 구원하기 위해 포위망을 뚫고 성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황건적의 잔당을 물리칠 힘이 있으면 포위되도록 그대로 두고 보았을 리 만무, 결국 공융의 부탁을 받고 가까운 평원의 상으로 있던 유비에게 구원을 청하려 성을 나서게 되었는데,
처음 태사자는 성문을 열고 나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모습을 황건적의 잔당들에 보여주기를 반복했다. 처음에야 당연히 경계심을 늦추지 않던 황건적들도 그러한 모습이 매일같이 반복되자 어느새 그것을 하나의 일상으로 받아들이게 되었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아예 경계심을 풀어놓은 채 태사자의 활 쏘는 모습만을 지켜보게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황건적이 더 이상 자신을 경계하지 않음을 확인한 태사자는 그대로 말을 달려 전혀 아무런 대비도 없던 황건적의 포위망을 돌파하게 된다. 전혀 상관없는 활쏘기로서 황건적의 경계심을 풀고, 한 순간 그 경계심이 풀어진 틈을 타 자신의 의도를 달성하고 있으니, 비록 하늘은 아니지만 적을 속여 자신의 의도를 달성했으니 이 또한 만천과해다.
만천과해의 요체는 경계를 허무는 것이다. 제아무리 대단한 계략이 있고 음모가 있어도 상대가 이미 경계하고 있으면 아무래도 제대로 먹히기 힘들다. 그래서 상대가 전혀 경계하지 않는 일상 속에 자신의 의도를 숨기는 것이다. 아니 때로는 상대로 하여금 그것을 일상으로 여기도록 길들임으로써 이쪽의 의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지방의 토호가 공물을 바치고 연회를 열어 초대하는 것이야 지극히 당연한 것이고, 아내인 제강이 주는 술이 무에 그리 이상할 게 있을까? 매일 보는 일상이 되면 태사자가 말을 타고 성문을 열고 나오더라도 그저 여상스럽게만 여겨질 뿐이다. 그러한 때 배를 태워 떠나든, 가마에 태워 국경을 넘든, 말을 타고 포위망을 뚫고 달아나든, 이미 모든 것은 이쪽의 의도대로 된다.
말하자면 닭에게 모이를 주던 손과 목소리가 어느 순간 닭의 목을 비트는 것과 같다고 할 수 있겠다. 닭이야 평소 모이를 주던 손이고, 모이를 주마 며 부르던 목소리이니 당연히 그 손을 보고 그 목소리를 듣는 순간 또다시 모이를 주겠거니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아무 경계심 없이 닭은 주인에게로 다가오고, 그러면 그 손은 전혀 경계하지 않는 그 목을 잡고 비틀어 숨을 끊어놓게 된다. 아마도 닭이 도망치려 한다면 꽤나 번거롭고 수고롭겠지만 그렇게 닭 주인은 닭이 전혀 경계하지 않는 틈을 타서 손쉽게 닭을 잡을 수 있는 것이다. 바로 그러한 익숙함 - 더 정확히는 너무나도 당연하고 자연스러운 어떠한 익숙함으로 말미암은 방심이 만천과해가 말하고자 하는 바인 것이다. 방심하는 상대를 치라. 방심하도록 만들어 그 빈 틈을 노리라. 그게 만천과해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도 몽고메리는 엘 알라메인에서의 반격 직전 전차를 일부러 모조품으로 바꾸어 독일군 정찰기에 노출시킨다거나, 혹은 송유관을 남쪽으로 매설하는 모습을 일부러 보인다거나 함으로써 영국군의 전력과 공격방향을 철저히 기만하고 있었는데, 여기에 병사들의 외출과 외박도 평소와 다름없이 실시함으로써 독일군은 영국군의 공세의도를 전혀 짐작조차 못하고 있었다. 그래서 최고지휘관인 롬멜이 신병치료차 이탈리아로 요양을 떠난 사이 완벽하게 허를 찔림으로써 독일군은 멀리 튀니지로 완전히 쫓겨가게 된다. 롬멜이 처음 북아프리카에 상륙하고 철저한 기만(欺瞞)으로써 영국군을 유린한 것처럼 이번에는 몽고메리의 영국군이 기만으로서 완벽하게 독일군을 몰아낸 것이었다.
동부전선에서도 소련군에 의해 만천과해의 기만이 쓰였는데, 소련군은 원래 포병을 대량으로 운용하는 전술을 선호하고 있어서, 공세 전에는 반드시라도 해도 좋을 만큼 포병의 일제사격이 있었다. 그러나 어느샌가 부터는 독일군은 아예 소련군의 포격을 공격개시 신호로 받아들이게 되었는데, 포격이 시작되면 엄폐호에 숨어 피해 있다가 포격이 멈추면 진지로 달려가 소련군의 공격을 대비하는 방식이었다. 그러나 그러한 사실은 이내 소련군에게도 알려지게 되었고, 소련군은 여기에 대해 아주 간단하고 효과적이면서도 잔인한 방식으로 대응한다. 바로 한 차례 일제사격 후, 진지로 달려가는 독일군의 머리 위로 다시 한 차례의 포격을 가하는 것이다.
물론 전쟁에서만 적용되는 얘기는 아니다. 가장 간단히 일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으로 야구에서의 투수(投手)와 주자(走者) 사이의 수 싸움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투수는 자신의 투구폼 속에 견제 동작을 숨긴다. 주자는 일상적인 리드 속에 도루나 혹은 런 앤 히트 같은 작전의도를 숨긴다. 포수(捕手) 역시 전혀 상관없다는 듯 일상적인 동작 속에 주자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한다. 어느 것이나 항상 보아오는 것들이다. 투수가 포수를 지그시 응시하며 사인을 주고받는 것이나, 그 사이 주자가 루(壘)를 떠나 리드를 하는 것이나, 그러나 그 가운데 치열한 수싸움이 오간다. 언제 뛸 것이냐? 언제 견제를 할 것이냐? 과연 작전이 걸릴 것이냐? 공 하나 빼 보느냐? 아니면 그대로 승부를 하느냐? 기만과 기만, 기만 속에 또다른 기만을 숨기고, 기만과 기만이 서로 충돌하고, 정말이지 그 숨가쁜 수싸움 가운데 어느 순간 보면 어느새 주자는 뛰고 있고 포수는 주자를 잡기 위해 공을 던지고 있다. 그 짜릿함. 그래서 또 내가 야구 가운데 도루를 좋아한다.
어디 스포츠 뿐일까? 사기도박도 원리는 같다. 먼저 처음에는 돈을 잃어준다. 잃어주면서 돈을 딴다고 하는 사실을 당연하게 만든다. 그러면 사람은 돈을 따지 못하는 상황을 견디지 못하게 된다. 도박이란 돈을 당연히 따는 것이고 돈을 따지 못하는 것이 비정상이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 돈을 잃으면서도 돈을 잃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결국 정신을 차리게 될 때 쯤엔 이미 모든 것이 끝나 있는 경우가 많다. 실제 그런 경우를 본 적이 있다. 딱 사흘. 이틀 동안 돈 땄다 그리 좋아하더니만 하루만에 수십 년 피땀 흘려 벌어 모은 가게 세 개를 그냥 날려먹더라. 그러고도 정신을 못 차리고 도박판 쫓아다니던데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지 모르겠다. 정말 그래서 사기도박은 무섭다.
예전 레인보우 식스라는 FPS게임이 처음 우리나라에 수입되었을 때, 당시 한국측 유통사는 그 게임을 가장 큰 시장이랄 수 있는 게임방에 공급하기 위해 아르바이트생을 고용해 게임방마다 돌아다니며 "레인보우 식스 없어요?"라고 묻도록 하는 전략을 썼었다. 마치 손님인 것처럼 게임방마다 돌아다니면서 그 게임을 찾도록 함으로써 게임방 주인들로 하여금 손님이 그 게임을 많이 찾는구나 여기게 한 것이다. 결국 당시 FPS의 불모지라던 한국에서도 레인보우 식스만큼은 거의 모든 게임방에서 흔히 즐기는 게임이 되었으니 이 역시 만천과해의 응용이라 할 것이다. 물론 한 번 당했기에 이후 게임방에서 같은 소리를 한다고 해도 먹히지 않는다. 이미 그것이 마케팅 전략이라고 하는 것을 경험으로 알게 되었기에 경계심을 가지고 보게 된 까닭이다. 경계심을 가지게 되면 만천과해는 더 이상 통하지 않는다.
그러고 보면 PPL이라고 하는 것도 만천과해를 응용한 마케팅 기법이라 하겠다. 사람들은 아무래도 광고라고 하면 어느 정도 거리를 두고 경계심을 갖고 보기에 아무래도 그 효과가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영화 속에서 영화의 스토리 안에서 영화의 캐릭터들이 쓰는 상품이란 어느새 영화의 한 부분으로 경계심 없이 보고 받아들이게 된다. 영화에 몰입하면 몰입할수록 광고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보는 것이 오히려 더 광고효과를 높이기도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많은 기업들이 PPL광고를 따내기 위해 막대한 자본을 영화 등 미디어 산업에 쏟아붓고 있기도 하다. 돈이 되니까. 돈이 안 되는 데 돈을 쓰는 자본은 없다.
결국은 살아가는 자체가 속임수라, 그 속임수를 쓰는데 있어서 가장 좋은 것은 경계하지 않는 상대를 속여먹는 것이다. 경계심을 허무는 데 있어 가장 좋은 것은 익숙함을 이용하는 것이다. 당연함, 자연스러움, 일상적인, 어찌 보면 너무나도 뻔한 그런 것들이 어느샌가 치명적인 흉기가 되어 누군가를 노리게 되는 바로 그것이다. 그야말로 죽는 그 순간까지도 죽는 줄도 모르고 빠져드는 늪과 같은 것이니 어쩌면 가장 무서운 것이 바로 이 병법삼십육계의 첫번째 만천과해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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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네잎 클로버 원문보기 글쓴이: 네잎 클로버
첫댓글 병법 36계의 시작입니다.
아..넵..감사드립니다.